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311)화 (311/456)

311. 아주 NICE(3)

“네? 뭘 하라고요?”

“아니, 하라는 게 아니라 해볼 생각이 있는지 묻는 거야.”

“어, 음. 대본부터 봐도 돼요?”

한참을 감독님에게 들볶이고, DCL 멤버들의 눈빛 공격에 시달리고 왔더니 소현 팀장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팀장님이 따로 부른다기에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어 걱정이 한가득했는데.

왜인지 모르게 배신당한 느낌에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공을 더듬었다.

“큼, 그래. 내가 너무 마음이 앞섰네. 대본 보면서 들어.”

“넵.”

형광펜으로 예쁘게 칠해둔 대본의 배역은 어린 암살자였다.

“진우가 감독 등쌀에 못 이겨서 들고 왔어. 근데 진우는 네가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컴백도 앞두고 있고, 회사는 작은 콘서트까지 노리는 시점이라 팀장님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듬뿍 묻어났다.

그렇게까지 약하지 않은데 어쩌다 보니 팀 제일 약골로 낙인찍힌 상황.

몇 번이나 아니라고 해명해봤지만, 누구도 믿지 않아 포기하기로 했다.

솔직히 사람들의 걱정이 싫지 않기도 했고.

가족이 주는 애정과는 결이 다른, 그런 애정이 어린 관심은 생각보다 더 달았다.

전생에는 몰랐는데 어쩌면 나 관종일지도….

어쨌든 진우 형이 출연하는 영화라니, 함께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간략한 설명을 들으며 대본을 살폈는데.

“…저 또 죽어요?”

“그러니까! 왜 자꾸 이런 역을 들이미는 거야!”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팀장님은 소파를 내리치며 분노를 토해냈다.

“이 잘생긴 얼굴을 왜! 그렇게들 밖에 못 써먹냐고!”

데뷔 1년도 안 된 신인이니 불러만 주신다면 어디든 뛰어갈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었다.

나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고 더 먼 미래를 보는 팀장님은 마냥 아쉬워하셨지만.

솔직히 나로서는 기대보다 훨씬 인지도가 높아진 지금이 얼떨떨했다.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구르는 팀장님을 달래던 나는 난처한 얼굴로 웃을 수밖에 없었고.

게다가 방송 출연이 적은 것 아니냐고 걱정하던 멤버들도 떠올랐다.

나는 꽤 많이 출연했다고 생각했는데, 멤버들은 그저 아쉬운 모양이었다.

내가 소년 가장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움직이는 게 좋겠지?

기대받는 신인이라는 말은 바람 한번 불면 없어질 자리기도 했으니까.

출연했던 방송 몇 개가 나쁘지 않은 시청률을 얻었고, 드라마도 잘돼서 광고도 찍었다.

하지만 다시 연기할 일이 있을까 했더니 이런 복병이 있을 줄은.

“나오는 씬도 몇 개 되고, 출연진도 나쁘지 않은 편이야. 감독도 작가도 괜찮고.”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된 팀장님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장점이 될만한 것들을 읊어주셨다.

“다만, 장르가 좀 걸리네.”

헐리우드 영화들처럼 사람과 돈을 갈아 넣은 화끈한 액션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액션물이나 누아르 쪽은 많이 죽은 상황.

그래도 꾸준히 먹히는 장르이긴 했다.

마니아층도 있는 편이고.

팀장님은 여전히 파릇파릇한 청춘물에 미련을 못 버리고 아쉬워하셨다.

그런 팀장님을 달래며 대본을 확인한 나는 익숙한 영화 제목에 슬며시 미소 지으며 답했다.

“해보고 싶어요. 많이 경험해보는 것도 좋은 거잖아요? 진우 형이랑 같이해보고 싶기도 하고요.”

미약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던 팀장님은 그쪽과 접촉해보겠다고 말하며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셨다.

“몸 관리 잘해. 이번 앨범은 회사에서도 여러모로 기대하고 있으니까.”

“네. 잘 먹고 잘 자고 열심히 연습할게요.”

팀장님께 해드릴 수 있는 건 신뢰를 가득 담은 미소뿐.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팀장님은 그만 가보라며 손짓했다.

무수한 서류철과 종이들이 빼곡하게 자리를 차지한 사무실이 눈에 들어왔다.

언래블 띄워보겠다고 늘 늦게까지 퇴근도 못 하는 팀장님과 실장님.

그 와중에 사건 사고도 잦았다.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 모두 가슴에 안고 사무실을 나서던 그때.

등 뒤로 다시 한번 팀장님의 걱정 가득한 중얼거림이 들렸다.

그렇게까지 걱정 안 하셔도 되는데.

늘 걱정이 많은 팀장님을 보고 있노라면 포잉이 덩달아 떠올랐다.

바쁘고 까칠하지만 귀여우니 모든 게 용서되는 우리 포잉.

아직 무언가 하고 다니는지 종종 밤중에도 자리를 비웠지만, 말해주지 않았기에 모른 척하고 있었다.

아, 포잉 보고 싶다.

* * *

그쪽에서는 이미 이야기가 된 상태였는지 팀장님과 대화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 보자는 이야기를 전달받았다.

그 말을 전해주며 우진 형은 그대로 나를 휙 들어서는 달랑달랑 들고 갔고.

허우적대는 나를 비웃는 찬이에게 소리 없이 험한 말을 남겨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찬이는 이런 건 용케 잘 알아채니까.

장난스럽게 들고 흔들던 우진 형은 살이 또 빠진 거냐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기도 했다.

회사에서 정해준 목표 체중은 달성했지만, 한번 앓고 나니 살이 더 빠져버렸다.

괜찮다고, 그 덕에 나만 더 먹을 수 있다고 농담을 주고받다 보니 도착은 금방이었다.

대본을 읽고 진우 형과 이야기하면서 알았다.

이 캐릭터가 원래는 이야기상에만 존재하던 캐릭터라는 걸.

배우들이 극 중 언급하기만 하고 실제로는 등장하지 않는 그런 역.

그 역을 놓고 작가님과 감독님이 의견충돌로 참 많이 다퉜다고도 했다.

그런 역이 어쩌다 나한테까지 온 걸까.

촬영장에서 쓰러지고 난 후 진우 형은 틈만 나면 내게 연락했고, 덕분에 다른 배우분들과도 인사를 나눴었다.

감독님과 작가님께도 그러다 영상통화로 인사를 했고.

스크린에서만 보던 사람들을 실제로 보고 좋아하던 그때의 내가 참….

팀장님과 대화를 나눈 그 날 저녁, 진우 형에게 바로 연락했었다.

아무래도 형이 직접 왔었다고 하니 나도 직접 이야기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형은 내 말을 듣자마자 이번 섭외 건에 얽힌 이런저런 이야기와 온갖 팁들을 전해주었다.

자신과 일정이 겹치지 않는 날도 있을 테니 최대한 많이 알아두는 게 좋을 거라며, 흡사 초등학교 입학하는 자녀를 둔 학부모처럼 굴었다.

형, 내가 따지면 형보다 나이가….

그러면서 감독님과는 아역 배우 때부터 알아 왔고, 사람은 참 좋은데 질척거리는 타입이라며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좀 이상해 보여도 나쁜 사람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그런 형의 모습이 평소 우리 애들이나 새벽 형들과 어울릴 때의 모습과는 달라서 신기하기도 했다.

두근거리는 마음과 긴장한 몸을 진정시키려 형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던 나는 감독님을 마주하고 얼마 후, 형이 어떤 걱정을 했던 건지 알 수 있었다.

대화는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몇 마디 하지도 않고 지나가 버렸고, 감독님은 인사가 끝나자마자 대뜸 걸어보라고 하셨다.

덕분에 영문도 모른 채 몇 번이나 걷는 자세를 바꿔가며 걸어야 했고.

그걸 뚫어져라 바라보던 감독님은 갑자기 매우 흡족한 얼굴로 웃었는데, 그 얼굴이 마치 치킨을 앞둔 우리 애들 같아서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모르게 무서워서 시선을 피하고 싶어졌달까….

그런 내 반응을 본 작가님은 감독님의 옆에서 옆구리를 마구 찔러대셨다.

뭐랄까.

도망가기 전에 얼른 목줄 채우라고 하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그렇게 두 분이 무어라 쑥덕거리더니 언제부터 촬영할 수 있냐며 눈을 빛냈다.

덫에 걸린 소동물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우진 형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낸 나.

역시나 듬직한 우리 우진 형은 자신만 믿으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소현 팀장님께 미리 언질을 받았던 건지 자세한 일정을 조율하자며 감독님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형과 감독님이 말릴 틈도 없이 빠르게 사무실에서 나가버리고, 졸지에 작가님과 둘이 남은 나.

누가 나 좀 여기서 구해줬으면 좋겠다…!

대표님과 단둘이 있게 되면 이런 기분일까?

어색함에 눈만 깜빡이던 그때, 불쑥 작가님의 칭찬이 날아들었다.

“‘별도시’에서 지환 군 연기가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아, 감사합니다!”

칭찬에 한없이 약한 나는 반사적으로 한껏 화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많이 놀랐죠? 원래 김 감독이 뭐 하나 꽂히면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라 처음 겪으면 다들 당황해요.”

“저야 좋은 작품에 불러주신 것만 해도 영광이죠.”

방싯방싯 웃는 얼굴로 쏟아지기 시작한 작가님의 질문에 최대한 성실히 답변했다.

낯설고 불편한 공간에 침묵이 내려앉는 것보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게 훨씬 나았으니까.

한없이 약자인 나는 생존을 위해 스킬을 사용했다.

그래.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지, 스킬은!

“내가 한 작가랑 인연이 조금 있는데, 그이도 꽤 고집 세고 잘 티 안 내는 사람이거든. 그런데 지환 군 칭찬을 많이 하더라고요.”

싱글거리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작가님의 시선이 말과 달리 날카로웠다.

- 걔가 얼빠긴 해도 일에 사감을 넣진 않는데. 정말 괜찮겠지?

- 너무 마르지 않았나. 근육이 조금 더 있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그와 동시에 떠오른 작가님의 생각들.

캐릭터에 대해 고민하면서 본인이 들었던 이야기와 비교해 보는 것 같았다.

“한미영 작가님께서 잘 지도해주신 덕분입니다. 제가 첫 작품이라 모르는 게 너무 많았거든요.”

굳이 어떻게 꾸며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떠오르는 속마음을 토대로 사실을 채워 넣는 쪽을 택했다.

어차피 나는 그리 말재주가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준이 형처럼 논리정연하고 다정하게 배려하며 말하는 것도 못 했고, 세빈이처럼 타고난 애교와 귀여움으로 마음을 녹이지도 못했다.

그래서 언제나 어설프게 입에 발린 말을 하느니 예의는 차리되, 진솔하게 말하는 쪽을 택하는 것.

질문에 착실히 답하면서도 끊임없이 머리를 굴려야 했다.

일단 하기로 한 이상 제대로 해야 했고, 예쁨 받는 쪽이 여러모로 도움 될 테니까.

임지웅 캐릭터를 잡는데 많은 분의 조언을 받았던 점들, 촬영 당시와 김미연 선생님께 레슨받았던 이야기 등.

많이 대화가 오가면서 분위기는 처음보다 훨씬 부드러워졌다.

특히 김미연 선생님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작가님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같이하자고 조르는데 튕기기는 어찌나 튕기는지.”

“하, 하하….”

“전에는 그래도 같이 술도 마셔주고 했는데 이제는 나이 먹어서 힘들다고 어울려주지도 않는다니까?”

이래서 세상에 인맥빨이 최고라는 걸까?

한 작가님과 미연 선생님, 거기다 진우 형이라는 연결고리 덕분에 작가님은 금방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셨다.

대부분 한 작가님과 미연 선생님에 대한 투덜거림이긴 했지만.

“아, 나 그거 물어보고 싶었어요.”

“어떤 거요?”

가벼운 수다를 떨 듯 신나게 이야기하던 작가님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뛰어내릴 때 무슨 생각 했어요?”

“네?”

“풀샷으로 잡지는 않았지만, 스치듯이 지환 군 얼굴이 나왔었잖아. 보통 아래 안전장치가 있다는 걸 알아도 막상 뛰려면 겁나는 게 사람이거든? 그런데 지환 군 얼굴이 너무 평온한 거야. 마치 잠든 사람처럼. 그래서 그게 늘 궁금했거든.”

여태까지 가벼운 이야기만 했던 게 연막이었다는 듯, 툭 건넨 질문이 제법 매서웠다.

- 정말로 겁이 없는 거니, 아니면….

걱정인지 호기심인지 모를 것들로 가득한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 우리 것도 밝은 편은 아닌데 괜히 악영향 주는 거면 서로 손해야.

- 심각한 상태면 회사에 이야기해 주고 돌려보내는 게 낫지 않나.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궁금했던 걸까?

드라마를 본 누구도 내게 직접 묻지 않았던 내용.

하지만 본 사람들은 다들 궁금해한다는 것은 알고 있는 그 장면을 밥 먹었냐는 듯 가볍게 던졌다.

하지만 내 눈에는 불쑥 떠오른 말풍선이 적나라하게 속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신경한 듯, 툭 던진 그 질문이 걱정을 담고 있다는 것을.

한 작가님이랑 이야기라도 나눈 걸까?

뒤죽박죽 마구 떠오르던 생각을 조금씩 정리하면서 말을 골랐다.

어떻게 말을 하면 좋을까.

잠깐의 고민 동안 철제 의자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서늘할 만큼 차갑기만 했던 팔걸이가 내 체온으로 물들었고, 해야 할 답도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었다.

“많이 생각했었어요. 지웅이가 어떤 마음일지.”

“그 순간에?”

“네. 마지막 장에 최후의 마침표를 찍는 그 순간이 지웅이에게는 어떤 의미일지 정말 많이 고민했어요.”

방금까지는 조금 가벼운 듯 굴었던 작가님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아무것도 없잖아요, 지웅이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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