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313)화 (313/456)

313. 아주 NICE(5)

“그럴 때가 있잖아요? 지치거나 힘든데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고 싶지 않을 때.”

평소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아닌 뿌듯함이 넘실거리는 얼굴이었다.

“정말 가끔 그럴 때면 히스 형은 어떻게 눈치챈 건지 옆에 와서 조용히 같이 있어 줘요.”

힘찬은 같은 팀의 멤버가 이렇게 좋은 사람이라고 자랑하고 싶었던 건지, 말 한마디 한마디가 평소랑 달랐다.

평소라면 이미 품에 안은 쿠션을 뭉개고도 남았을 텐데, 생각을 정리하면서 말하느라 집중했는지 쿠션이 멀쩡할 정도였다.

“그냥 제 마음이 다시 차분해질 때까지 옆에서 지켜주다가 또 별다른 말 없이 가버려요. 신기하지 않아요?”

세상과 연결을 끊고 싶지만, 끊을 수 없을 때.

그럴 때 사람이 없는 무인도에서 휴식을 즐기는 것처럼 영빈은 제게 다가와 무인도가 되어 주는 사람이라고, 힘찬은 말하고 싶었다.

이 영상을 보게 될 모든 팬도 영빈이 얼마나 근사하고 위로가 되어 주는 사람인지 알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그 마음을 가득 담아 힘찬은 제법 긴 시간 동안 자신에게 영빈이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했다.

그 장면을 촬영하던 스태프는 개구쟁이 같던 힘찬의 색다른 얼굴에 흥미로웠다.

더불어 투박하지만, 진심을 담아 말하는 지금 얼굴도 꽤 괜찮은 피사체라는 생각을 했다.

힘찬은 새 앨범에 대한 기대, 신인상 수상 때의 눈물 등 몇 가지 질문에 성실히 답했다.

다음 사람은 세빈.

세빈은 의자까지 걸어가는 동안 조심스럽게 내부를 살폈다.

커다란 눈 안에 내부를 모두 담고 나서야 위험 요소가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그제야 스태프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며 자신은 어떤 이야기를 하면 되냐고 물었다.

몇 번 얼굴을 보아도 인사 외에는 먼저 말을 걸지 않던 세빈이었다.

낯가림이 심해 사람에게 시선을 주는 것도 잘 하지 않던 세빈은 이전과 제법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음, 환이 형이요?”

건네진 질문지에 적힌 이름을 조심스럽게 되뇌어보던 세빈.

세빈이 되물으며 눈을 깜박거리자 유난히 긴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종이에 적힌 이름 세 글자를 바라보는 눈동자 안에는 따뜻한 온기가 흘러넘쳤다.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세빈이 지환을 무척 따른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준이 형이 저희 팀의 가림막이고 히스 형이 기둥이라면, 환이 형은 그 앞에 둘린 천 같아요.”

생각지 못한 표현에 스태프가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자, 그제야 부끄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으, 직접 입 밖으로 말하려니 정말 이상하네요. 왜 천막도 위에만 막아주는 거랑 사방을 막아주는 게 다르잖아요. 근데 사방을 다 막아주는 천막을 경험하기 전에는 그게 얼마나 좋은지 모르거든요.”

행사 경험은 많지 않지만, 방송국 촬영 때문에 언래블도 제법 많이 돌아다녔다.

그때마다 온갖 것들과 사방의 눈으로부터 자신들을 가려주는 천막의 세빈에겐 무척 소중했다.

“벽이 없으면 건물이라고 할 수 없듯이, 언래블도 환이 형이 없으면 언래블이 아니게 될 것 같아요.”

세빈도 그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맏형들뿐만 아니라 지환까지도 외부의 시선과 악의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자기 생각을 최대한 잘 표현하고 싶었던 세빈의 조심스러운 말과 표현들.

“이번 앨범이 정말 많이 기대되거든요. 그동안 텀이 있기도 했고… .”

세빈은 앨범이 얼마나 잘빠졌는지를 말하기보다, 어떤 이야기를 담았는지 열심히 말하려 했다.

겁 많은 아기 사슴 같던 멤버가 이제는 제법 아이돌 태가 났다.

“아, 우리 막내네요.”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던 경환은 뽑아 든 종이를 펼치고 이름을 확인했다.

팀 막내인 세빈의 이름이 보이자 약간은 쳐져 보였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흠, 우리 막둥이는 사실 발전이 되게 빠른 편이거든요? 그런데 본인만 몰라요. 그러면서 늘 팀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걱정하는데, 이제 걱정 좀 덜했으면 좋겠어요.”

말을 꺼내기까지 앞선 멤버들이 고민하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했던 것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얼마나 세빈에 관해 오랫동안 고민했으면 저렇게 즉시 답변이 나올 수 있을까?

평소 말이 많지 않던 모습과 많이 다른 지금의 모습에 지켜보던 스태프는 자기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지금 경환의 모습은 언래블의 래퍼 C.I 라기보다는 그냥 형 같았다.

그래서 더 보기 좋았다.

그 뒤로도 세빈에 대해서 꽤 많은 말을 하던 경환은 정작 앨범과 본인의 마음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 한명 한명이 다 다른지.

그 후로 영빈은 하준을, 하준은 경환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지환.

“어라, 전 선택지가 없는 거네요?”

무언가 고민이 있는 건지 희미하게 그늘졌던 얼굴이 인터뷰 장소에 들어오면서 순식간에 피어났다.

언제 그랬냐는 듯 버릇처럼 부드럽게 웃고 있는 소년의 얼굴이 새삼스럽게 앳되게 느껴졌다.

지환은 평소 스태프들 사이에서 평이 좋았다.

예의 바르고 착하고 서글서글한.

웃지 않는 모습이 차가워 보일 뿐, 지환이 차가운 것은 아니었다.

아직 어린 친구가 벌써 너무 인생에 굴곡이 많은 게 아니냐며 스태프들끼리 안쓰러워하기도 했고.

“찬이라니. 칭찬해주려면 아주 많이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촬영 중인 스태프들에게 농담하며 분위기를 풀었다.

지환은 다른 아이들과는 조금 달랐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이목을 모으는 법을 알았다.

냉랭했던 첫인상은 금방 잊힐 만큼 사람들에게 쉽게 호감을 샀다.

“찬이는 친구죠. 그게 저에게는 가장 큰 것 같아요. 사실 저 친구가 별로 없거든요.”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하며 너스레를 떨던 지환은 애정이 듬뿍 묻어나는 얼굴로 힘찬을 이야기했다.

“솔직히 연습생 생활할 때는 잘 지내기보다는 많이 싸웠죠. 찬이는 워낙 텐션이 높아서 버거웠거든요.”

스스럼없이 다퉜었다는 말을 꺼냈다.

“찬이는 절 굉장히 편하게 해줘요. 아, 다른 멤버들이 불편하다는 건 아니에요. 그냥 동갑 친구가 줄 수 있는 편안함? 그건 저에겐 찬이가 유일해요.”

유일하게 모든 걸 내려놓고 공지환으로 돌아갈 수 있는 친구.

지환에게 힘찬은 그런 의미였던 듯했다.

인터뷰는 순조롭게 마지막을 향해 달려갔다.

“처음 신인상을 받은 그 날 밤이었을 거에요. 구름 위에 있다는 게 이런 건가 싶을 만큼 좋았어요. 그런데 자려고 눈을 감는데 덜컥 무서운 거예요. 이게 마지막 상이면 안 되는데. 신인상 받은 애들이 이거밖에 안 되면 안 되는데.”

잠들기 직전, 한껏 무방비해진 그 시점에 많은 고민이 있었다고 했다.

잘하고 싶은 욕심과 못하면 끝이라는 불안감.

한없이 어리고 약하게만 보였던 소년이 분명한 눈을 하고 속을 꺼내 보였다.

이 정도로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잊지 않은 채로.

보다 더 단단해진 듯한 모습에 지켜보던 스태프는 속으로 한탄을 삼켰다.

그가 최근 겪었던 일들이 떠오른 것.

그런 일들에 굴하지 않는다는 듯 지환은 평소보다 더 아름답게 웃었다.

스태프는 자신도 모르게 앨범이 나오면 한 장쯤은 사주자는 생각을 했다.

* * *

“으아아아!”

“그만해, 이 긴팔원숭이 같은 놈아!”

“왜 그렇게 구체적인데….”

“놔둬. 나 같아도 뛰쳐나가고 싶겠다.”

촬영 잘 마치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내던 우리는 다음 언래블 스토리의 내용을 들었다.

이전 DCL과의 팀전은 스킬빨로 양념팀이 이겼다.

그때의 벌칙이 무엇인지 오늘 공개된 것.

그리고 공개된 벌칙을 본 나는 앞으로도 내 촉을 전적으로 신뢰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불길했던 내 예상대로 벌칙은 등산이었다.

세상에, 등산이라니….

평소에도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는 자신의 생존 센스를 칭찬했다.

“왜 우리만!”

“걔네는 게스트였는데 그럼 같이 가겠냐?”

찬이의 억울한 듯한 외침.

게스트였던 DCL은 이번 벌칙에 참여하지 않았다.

우진 형이 슬쩍 들려준 바로는 나중에 인사 영상은 따로 짧게 딸 거라고 하던데.

추측하건대 우애 좋은 형제가 아니라 흥부 놀부급의 멘트가 나오지 않을까 했다.

입장을 바꿔서 DCL이 등산가고 우리가 응원하는 처지였어도 그랬을 테니까.

간장 팀의 경환 형이나 힘찬이는 평소에도 운동을 즐기는 편이라 괜찮은데, 우리 준이 형이 걱정이었다.

준이 형은 체력 단련을 꼬박꼬박하고는 있지만, 좋아서라기보다 살기 위해서 같은 느낌이었다.

나 못지않게 몸 움직이는 걸 안 좋아하는데.

하지만 등산이라는 말에 절규하던 찬이를 보면 운동 좋아하는 것과 등산은 또 별개의 문제인 듯했다.

“형, 힘내요….”

최애의 불행에 안타까움을 듬뿍 담아 위로의 말을 건넸고, 준이 형은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눈빛이었다.

“가장 최근에 산 탄 게 언제?”

“아마 너랑 같을걸.”

“아, 음. 명복을 빌어주마.”

“야….”

영빈 형이 슬쩍 준이 형 옆으로 다가왔다.

위로해주는 건가 했더니 역시나 둘은 절친이 맞는 듯했다.

하준 형의 우울한 얼굴을 보고 영빈 형은 모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

형들은 이전에 제논 엔터에서 야유회 간다고 해놓고 연습생들을 모아서 등산했었던 이야기를 해줬었다.

놀러 간다고 말한 덕에 여자 연습생 중에는 구두를 신고 온 사람도 있었다고.

개판도 그런 개판이 없었다고 했었다.

새벽부터 모이게 해서 그렇게 힘들게 등산시켜놓고 점심으로는 김밥 한 줄이 끝이었다는 슬픈 이야기였다.

이사진 중 일부와 대표가 가자고 한 거라 연습생 신분에 빠질 수 없었다며 준이 형이 촉촉한 눈을 했었다.

그 와중에 제일 열 받는 건 정작 그 망둥이 새끼는 아프다고 안 왔던 것.

아프긴 개뿔,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애들이랑 놀러 간 사진을 떡하니 개인 SNS에 올리는 패기를 보였다고 했다.

뭐, 이제는 영영 볼일 없는 사람이지만.

“얘들아, 준비 다 됐지?”

“넵!”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긴장을 풀고 있던 멤버들이 우진 형의 부름에 다시 바짝 긴장했다.

방금까지 ‘등산… 산….’ 하고 음울하게 중얼거리던 경환 형까지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공백기와 앨범 준비 기간을 거쳐, 드디어 컴백 당일이 되었다.

“후후후, 등산이고 뭐고 오늘 무대만 제발 실수 없이 끝내자.”

“환이 형, 최힘찬 이상해! 혼자 막 중얼거려!”

곱게 의상을 차려입고 손을 달달 떨고 있는 모습이 퍽 꼴불견이었다.

평소라면 자기 머리를 마구 헝클며 괴로워했을 테지만, 곧 기자들을 상대로 인터뷰를 해야 했다.

이제는 제법 정신머리를 챙길 줄 알게 된 찬이는 용케 머리를 건들지 않았다.

다만, 머리와 의상만 손대지 않을 뿐 정신 나간 건 여전해서 세빈이가 질색하며 나를 찾았다.

“세빈아, 찬이가 아무리 정신연령이 너보다 어리다지만 육체 나이는 형이니까 형이라고 불러야지.”

“네엥….”

우리 막둥이가 사춘기라도 온 건지 최근 약간의 반항을 보였다.

찬이 이름을 부른다거나 감정 표현이 조금 더 직접적이 되거나.

그렇다고 형들과 맞먹으려 들진 않았다.

찬이만 조금 예외긴 하지만, 아주 가끔이라 잘 다독이고 있었다.

예민해진 우리 막둥이를 둥기둥기 해주는 사이 가희 누나와 희주 누나는 멤버들의 의상을 다시 점검했다.

“크, 오늘도 잘생겼네. 예쁘다, 요 녀석들.”

“누나, 나는?”

“넌 입만 안 열면 완전 괜찮지.”

멤버들을 칭찬하는 누나들에게 찬이가 눈을 반짝이며 얼굴을 들이밀었지만, 음. 하지 않는 게 나을 뻔했다.

가희 누나와 찬이의 대화에 다 같이 한바탕 웃고 나니 다행히 멤버들도 긴장이 좀 풀린 듯했다.

“늘 하던 것처럼 잘하고 와.”

이제는 우진 형만큼 가까운 누나들은 멤버들의 등을 팡팡 두드려주며 응원했다.

“가자, 병아리들아.”

“대장 병아리!”

“예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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