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81)화 (281/456)

281. 기억을 걷는 밤(2)

“그냥.”

“그냥?”

“잘 모르겠어.”

늘 담담했던 형의 얼굴에 희미한 그을음 같은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

지쳐 보이는 것 같기도 했고, 질린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조금 더 만져보고 결정하려고.”

기운 없이 늘어지는 경환 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멤버들은 눈만 꿈벅거렸다.

유난히 자신 없어 보이는 모습에 걱정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던 경환 형이 러그 위에 누워버리자, 기다렸다는 듯 찬이가 형 위에 철푸덕 드러누웠다.

평소보다 더 기운이 쪽 빠져버린 경환 형의 중얼거림에도 찬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야, 무거워.”

“알아. 요새 근육 많이 늘었다고 다온 쌤이 칭찬했거든.”

낄낄거리는 웃음과 함께 경환 형을 꾹꾹 누르는 찬이.

헛웃음을 짓던 경환 형은 그제야 평소와 비슷한 얼굴이 되었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차근차근하자.”

“네, 형.”

묵묵히 우리를 바라보던 영빈 형이 단어를 고르듯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영빈 형을 닮아 다정하고 조용한 말.

다행히 그 말들이 경환 형의 얼룩 같은 감정을 옅게 만든 듯했다.

그 후로는 평소 같은 노닥거림의 시간이었다.

이어질 스케줄에 관한 이야기들, 어떤 프로그램에 출연해보고 싶은지, 어떤 컨셉을 해보고 싶은지 등.

새 앨범을 앞둔 우리 대화는 주로 그런 내용이었다. 한참을 떠들다 하준 형의 해산 외침에 겨우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네가 알아봐 달라고 했던 거.’

‘응.’

한동안 내 부탁으로 바빴던 포잉은 조금 지쳐 보였다.

포동포동한 고양 님이 좋다고 포잉에게 속삭여봤지만, 마음이 편해야 살도 붙는다는 포잉의 반박에 얌전히 입을 다물었었다.

마음이 편하지 못한 게 내 탓인 것 같아 그저 열심히 포잉을 쓰다듬어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네가 쎄하다고 했던 애. 걔네 곧 새 앨범 준비한다고 하더라.’

‘그래서 다들 곡을 안 푸는 거구나.’

포잉이 직접 회사를 돌아다니며 들었던 정보와 포잉 만의 방법으로 모은 정보를 취합해 들려준 이야기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걔네 말고도 누가 또 앨범 준비한다고 했는데. 아무튼 그래서 이리저리 저울질해 보는 중인 것 같다고 함.’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포잉의 모습에 슬쩍 웃었다.

포잉이 우리를 가장 중요하게 여겨주는 것 같아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불퉁한 포잉의 털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조금이나마 상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네임드 작곡가들이 어느 쪽에 곡을 팔지 저울질하는 건 종종 있는 일이니까.

‘Pluto’ 때 같은 행운이 여러 번 찾아오는 게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작곡에 더 열심히 매달렸던 것도 있었고.

그럼에도 마음에 차는 곡이 나오지 않아 끊임없이 초조해했고 결국 에단 쌤에게 한 소리 듣기도 했었다.

에단 쌤의 조언과 경환 형의 배려로 마음의 짐은 많이 덜었지만, 자꾸 욕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물며 전혀 관심이 없던 연기도 한번 경험해보고 호평받으니 욕심이 났다.

그에 비하면 노래는 전생에서도 관심이 있던 분야였다.

비록 전생의 나는 음치였기에 부르는 건 즐기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이 그렇듯 노래는 늘 들어왔다.

그러다 이제는 직접 곡을 쓸 수 있는 환경이 됐고, 심지어 곡을 직접 써서 불러보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사랑받기도 했다.

더 욕심이 안 나면 이상하겠지.

‘뭐, 여러 가지를 고민하는 것 같았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셈.’

‘응, 잘 되겠지. 우리 포잉이 함께 하잖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잠이나 자라, 계약자 놈아.’

‘푸흐, 포잉도 잘자.’

품에서 꿈지럭거리던 포잉은 인사를 대신하는 것처럼 내 팔뚝을 툭툭 쳐줬다.

그래, 잘 될 거라고 그렇게 믿어야지.

* * *

경환은 최근 자신이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준 형과 지환이 만든 곡이 많은 사랑을 받자, 자랑스러운 꼭 그만큼 부러움이 차올랐다.

처음 랩을 만들었을 때는 직접 말로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떠들고 싶었다.

가슴에 차곡차곡 쌓였던 오래된 화와 분노가 원동력이었다.

그에 비해 지금은 많은 사람이 들어주는 사랑받는 곡을 만들고 싶었다.

가끔은 본인 안에 아직도 진득하게 자리 잡은 분노를 끄집어내기도 했지만, 그건 개인적인 작업이었다.

수록곡으로 경환의 곡이 실린 적은 있지만, 그래도 타이틀곡 욕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최근 곡 작업에 더 정성을 쏟는 것도 있었고.

하지만 좀처럼 마음에 드는 곡이 뽑히질 않았다.

전부터 일관되게 지적받던, 자주 들으면 피곤한 노래라는 피드백이 자꾸 맴돌았다.

얼마 전 지환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자신의 작업 환경을 보여줬지만, 그건 경환 나름의 큰 결심이었다.

작업할 때 자신이 얼마나 후줄근한 인간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초췌하고 못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환이 작곡을 너무 어렵게 생각해서 스트레스받지 않길 바랐다.

경환은 동생들에게 멋있는 형이고 싶었다.

하준 형이나 영빈 형처럼 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형이니까.

이제 자신도 성인이 됐으니 맏형들의 짐을 좀 덜어주고 싶기도 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경환은 지환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거실로 나왔다.

“어? 안 잤어요?”

“넌 왜 안 자.”

“그냥요.”

잠이라면 경환에게 뒤지지 않는 세빈이 거실의 러그 위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불이라도 켜고 있지.”

“형들 자잖아요.”

창문으로 흘러들어오는 미약한 빛과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무언가 쓰고 있었던 듯 앞에는 노트와 펜이 있었다.

우물쭈물하던 세빈의 옆에 앉은 경환은 노트를 힐끗 바라봤고, 시선을 눈치챈 세빈이 슬그머니 노트를 감추려 들었다.

“형은 왜 안 자요.”

“나도 그냥. 잠이 안 오네…. 일기라도 쓰고 있었어?”

애꿎은 러그만 꾹꾹 누르던 세빈이 할 말이 많은 눈으로 경환을 바라봤다.

“형, 있잖아요.”

“어.”

“그….”

한참을 주저하다 ‘으으’하는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쥐어뜯던 세빈이 감추려던 노트를 경환 쪽으로 슬쩍 밀었다.

“저번에 다 같이 플루토 가사를 썼었잖아요.”

“그랬지.”

“그 후로 종종 생각나는 걸 적었는데 이런 것도 가사가 될 수 있어요?”

겁먹은 것처럼 조심스러운 세빈의 말에 경환의 눈이 커졌다.

경환의 머릿속에 세빈은 노래도 잘하지만 춤을 정말 잘 추는 동생이었다.

마냥 애기같고 뽀얗기만 한 막내.

그런 세빈이 직접 가사를 써보고 싶어 하는 것 같자, 왠지 손이 뜨끈뜨끈해지는 것 같았다.

“형이 봐도 괜찮아?”

“넵….”

자신 없어 하면서도 세빈은 피하지 않고 노트를 펼쳐 경환에게 보여주었다.

천천히 세빈이 적어놓은 글을 읽어내리던 경환의 눈이 점점 진지해졌다.

줄곧 답답하고 잔뜩 엉킨 실타래 같았던 머릿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 굳이 풀기보다 그냥 잘라버려도 되잖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경환의 모습에 세빈이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지만,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세빈아, 이거 한번 들어볼래?”

“네?”

“잠깐만, 이어폰 가져올게.”

잠시 동안 혼자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기도 하고 중얼거리기도 하던 경환은 후다닥 방에 들어가 이어폰을 들고나왔다.

얼떨결에 이어폰을 건네받은 세빈은 경환이 틀어주는 곡을 듣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톡톡 바닥을 두드리기도 하고 고개를 까딱거리기도 했다.

“세빈아, 형이랑 작업해 볼래?”

“제가요?”

“어. 형이랑 너랑.”

“저보단 환이 형이 더….”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는 세빈이 어깨에 손을 턱 얹은 경환이 말을 잘랐다.

“아냐, 누가 더 잘하고 못하고 때문이 아니라, 너랑 곡 작업하면 괜찮은 게 나올 것 같아서 형이 너한테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부탁이라는 말에 주저하던 세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경환은 세빈의 목소리에 담긴 희미한 열망과 기대를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잘난 인간이 아니라 그건 잘 모르겠다. 근데, 너랑 하면 형이 재밌는 걸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다른 피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서로의 형제가 된 둘은 몹시 닮은 얼굴을 하고 웃었다.

다른 형제들은 모두 잠든 새벽이었다.

* * *

“그래서, 둘이 그 새벽에 잠도 안 자고 뭐 했어?”

“우리 둘만의 비밀이에요.”

“물 마시려고 나갔다가 기절할 뻔했다….”

유독 창백한 얼굴을 한 영빈이 힘없이 중얼거리자 머쓱한 얼굴을 한 경환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둘이 무슨 바람이 분 건지 경환 형과 세빈이가 새벽에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쑥덕거리고 있었다고.

자다 깨서 목이 말랐던 영빈 형이 비몽사몽 한 상태로 거실에 나갔다가 그 광경을 보고 기절할 듯이 놀랐다고 했다.

가뜩이나 겁이 많은 우리 영빈 형은 귀신인 줄 알았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의뭉스러운 얼굴로 웃고 마는 경환 형과 세빈이 모습에 찬이가 닦달해봤지만, ‘나중에’라며 입을 다물어 버려서 입술이 댓발은 튀어나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고민 많아 보였던 경환 형이 기운을 찾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한껏 예쁘게 차려입은 멤버들을 한번 쓱 훑어본 나는 너무 들뜨지 않기 위해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새로운 상을 받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1월 말 진행된 어워드에 초대되어 ‘혹시…’하는 마음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신인상을 하나 받은 것만 해도 생각보다 큰 성과를 이뤘다고 생각했는데, 사람 마음이란 게 이렇게 간사했다.

그렇게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선 행사장은 HMA 때처럼 북적거렸다.

기합을 단단히 넣은 우리는 선배님들께 인사하러 다녔고, 그사이 마주한 DCL과는 눈빛으로 인사를 나눴다.

‘인사 끝나면 놀러 갈게.’

‘오키.’

이런 느낌의 눈빛이 오간 것 같달까.

물론 내가 아닌 막내 라인들이 주고받은 눈빛이었다.

“어? 언래블, 하이!”

“안녕하세요, 언래블입니다!”

“어? 진짜네?”

열심히 인사를 하고 다니다 대기실 복도의 코너에서 마주한 멜트의 루.

그 뒤로 우르르 나머지 멤버들이 나타났다.

얼마 전 함께 밥을 먹었다지만 아직 낯을 가리는 우리와 달리 멜트 멤버들의 목소리에는 친근함이 묻어났다.

“상 받을 거 같던데, 미리 축하해요.”

“그게 저희 마음대로 되나요. 팬 투표는 거의 비슷비슷하던데요.”

“올해의 병아리니까 받겠지.”

여상스럽게 웃으며 답하는 하준 형의 뒷모습이 듬직했다.

언제 말을 놓은 건지 루와 페리 선배는 막내 라인과 금방 시시덕거리며 툭툭 건드리며 장난을 걸었다.

그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다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더니 에드가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선배님, 왜요?”

“그냥.”

루, 페리 선배님들처럼 말을 놓기로 이야기를 한 건 아니었지만, 에드는 자연스럽게 하대했다.

또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마땅찮은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진짜 애도 아니고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병아리라는 별명이 언래블이랑 잘 어울리긴 해.”

누가 들어도 호의보다는 빈정거림에 가까운 어투.

바쁘게 사람들이 오가는 소란스러운 복도였지만,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이 내 귀에는 선명하게 꽂혔다.

한창 대화를 나누던 멤버들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에드 바로 앞에 있던 멜트의 디아, 사피 선배와 하준 형에게는 들린 듯했다.

예의 바른 미소을 머금고 있던 하준 형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야, 너 또 왜 그래.”

“내가 뭘. 아, 짜증 나. 나 갈래.”

“어? 야, 야!”

미묘한 흐름을 느낀 건지 사피가 에드를 툭 쳤지만, 에드는 짜증 섞인 반응을 보이더니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황망한 듯 그 모습을 바라보던 멜트 멤버들 얼굴에는 짧은 순간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쟤가 요새 좀 예민해. 감량 때문에 힘든가 봐.”

“아니에요. 다이어트 힘들죠…. 저희도 죽겠어요.”

“그런 것 치고는 볼이 아주 탱탱하다?”

너스레를 떠는 찬이 덕분에 분위기는 다시 활기차졌고, 몇 마디 더 나눈 뒤 또 보자며 각자 대기실로 흩어졌다.

아무래도 내 예상과 달리 에드는 계속 찝찝하게 굴 모양인 듯했다.

‘저걸 어떻게 조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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