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 기억을 걷는 밤(1)
세희의 유일한 취미는 드라마를 보는 것이다.
한국 드라마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일본 드라마 가리지 않고 유명한 작품은 다 찾아봤다.
그런 세희가 요새 본방 사수를 외치며 챙겨보는 드라마는 ‘별이 잠든 도시’.
한미영 작가에 이구영 감독, 게다가 주인공 상혁 역의 이진성 배우라니.
하늘 어딘가에 계신 그분이 그녀의 취향을 몽땅 때려 부어 만들어 주신 건가 싶을 만큼 취향을 저격당한 작품이라 세희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드라마 신님! 고마워요!’
세희는 이 캐릭터들의 관계성과 앞으로의 전개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특히나 ‘임지웅’ 역에 홀딱 빠져버린 터라 지웅 역의 배우가 누구인지 찾아봤다가 아이돌이라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심지어 처음 연기에 도전하는 거라는 인터뷰를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은연중 아이돌의 연기에 선입견을 품고 있던 세희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동안 색안경 끼고 봤던 자신의 태도에 반성하며 앞으로는 무턱대고 거르지 않으리라 다짐하기도 했다.
드라마의 초반은 여느 일상 드라마처럼 주인공 상혁이 회사를 다니며 동창을 만나 웃고 떠드는 평범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러나 그 사이, 사이 상혁은 악몽에 시달리며 오래전 자신도 모르게 잊힌 기억을 찾게 되고.
악몽의 실체가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다 이상할 만큼 깨끗하게 지워졌던 옛 친구를 떠올리게 된 날.
그날 방영분을 흥미진진한 얼굴로 몰두해서 보던 세희는 입을 틀어막고 비명을 삼켰다.
밀랍 인형처럼 창백한 소년이 서러움을 그러모은 듯한 얼굴로 서 있었다.
소름 돋을 만큼 차가운 얼굴엔 생기가 없었다.
무심한 얼굴과 한기가 뚝뚝 떨어지는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세희는 소년, 지웅이 굉장히 서글퍼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원망과 슬픔, 그리고 무언가 말 못 할 사연이 백 개쯤 담긴 눈빛이었다.
상혁을 마냥 원망하는 거였다면 저렇게 말 안 했을 것 같은데.
상혁을 말리려는 듯 다시는 자신을 찾지 말라며 멀어지는 뒷모습이 너무 작고 가냘파서 애처로웠다.
마치 상혁을 애써 밀어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어지는 내용도 흥미진진했다.
상혁은 본능적으로 지웅이 자신의 기억에 대한 키를 갖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
마주한 동창들은 하나같이 지웅에 대해서는 약속이나 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상혁이 버릇처럼 작은 노트에 본인의 기억을 적어나가며, 고민 속에 끄적인 메모들이 점차 가득해진다.
이후 상혁이 지웅의 뒤를 쫓으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확장되기 시작한다.
작은 냇물이 모여 강이 되고, 그 강이 모여 바다를 만들 듯, 드라마 내내 나오는 모든 이야기가 하나하나 다 복선이었다.
드디어 오늘, 하얗게 지워졌던 지웅의 이야기가 제대로 드러난다.
세희는 오늘 방영분을 편하게 즐기고자 여러 가지를 세팅해두고 지루한 광고를 견디고 있었다.
“진짜 광고 작작 했으면….”
드디어 익숙한 OST가 흘러나오고 서늘한 느낌의 폰트가 화면을 흘러갔다.
* * *
흐릿했던 화면에 사진 수십 장이 흩어지듯 뿌려있다.
그중 하나로 초점을 맞추자, 짙은 남색의 교복에 어깨가 살짝 굽은 지웅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사진을 따라 전환된 화면에서 지웅은 평소처럼 무덤덤한 얼굴로 교실에 들어섰다.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지웅이 들어서자마자 생명력 넘치던 교실에 찾아온 차가운 정적.
힐끗거리는 시선이 따가울 만큼 피부를 두드리지만, 지웅에게는 화를 내거나 따져 물을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악의에 서러워야 할 심장은 이미 모두 불타 재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이런 일상이 지웅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것들이라 되려 담담할 수 있었다.
- 쟤네 엄마가….
- 소름 끼쳐. 쟤도 막 그런 거 아냐?
- 어우, 더러워.
- 아빠가 집 나갔… 바람났다고….
지긋지긋할 정도로 똑같은 이야기가 몇 년 동안 쉬지 않고 찔러댄다.
말로 난 상처에도 피가 흐를 수 있었다면, 과다출혈로 진즉 세상을 떠날 수 있었을 텐데.
느리게 깜박거리는 속눈썹의 움직임만 소년이 아직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듯했다.
화면이 다시 흐려지고 처음 사진이 흩어졌던 장면으로 돌아왔다.
이어서 초점이 잡힌 사진은 환하게 웃고 있는 지웅과 그런 지웅에게 생수를 뿌리며 장난치는 상혁의 모습.
그 후에 보인 사진은 울고 있는 상혁의 어깨를 꾹 잡은 지웅의 모습이었다.
빠르게 사진이 넘어가듯 하더니 산산이 조각난 술병 사이에서 망연자실한 얼굴을 한 지웅이 클로즈업됐다 흐려진다.
상혁의 친구들이 모여서 무어라 쑥덕거리는 모습도, 진지한 얼굴로 친구들과 대화하는 상혁은 모습도 모두 흘러갔다.
암전되듯 까맣게 변한 화면이 흔들린다.
- …야!”
- 선생님 불러와!”
- 꺄악!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 듯 힘겹게 깜박이는 눈꺼풀.
“어?”
상혁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사방이 소란스럽고 귀에서 삐- 하는 이명이 들리며 속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울렁거렸다.
상혁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비틀거리며 양호실의 창문으로 다가갔다.
창문에 다가가서는 안 된다는 느낌과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서 상황을 확인해야 한다는 예감이 첨예하게 싸운다.
결국 떨리는 손으로 양호실 창문을 가리던 커튼을 치워버린 상혁은 자신도 모르게 옥상을 바라봤다.
“임지웅…?”
6층 건물의 옥상에 친구가 위태롭게 서 있었다.
꽤 먼 거리였지만, 한눈에 지웅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지웅아!”
상혁의 외침을 들은 건지 시선이 정확히 상혁을 향했다.
“왜…?”
어느 순간부터 몸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지금 당장 저곳으로 가서 친구를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한 걸음도 발을 뗄 수가 없었다.
근래에 갑자기 서먹하고 소홀해져 속상했는데.
지독하게 차갑게 굴어 무슨 일이 있나 싶었는데.
“시발, 왜 안 움직여, 제발, 제발!”
바닥에 딱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양손으로 붙들고 움직이려 발버둥 쳐보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당장 달려가야 하는데.
“아냐, 안돼, 지웅아, 안돼….”
상혁은 지웅이 자신을 보고 웃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 지독한 현기증이 찾아오며 견딜 수 없을 만큼 속이 메스꺼워졌고 상혁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다시 화면이 깜박거리기 시작하더니 한쪽 다리를 쩔뚝거리는 지웅이 계단을 오르는 모습이 나타났다.
늘 몸보다 큰 교복을 입었던 지웅의 등이 유난히 더 작아 보였다.
지웅은 주변을 둘러보다 열쇠를 꺼내 잠겨있던 옥상 문을 열었다.
유난히 하늘은 파랗고 공기는 차가웠다.
이제 정말 그만두자.
수려한 얼굴에는 분노도 원망도 체념도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지만,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고 유일한 친구와 조금 더 삶을 누리는 미래를 꿈꾸기도 했었다.
“내 주제에.”
헛웃음과 익숙한 자조가 눈물처럼 뚝뚝 떨어졌다.
눈물이라도 흘렀으면 덜 답답했을 텐데.
지웅의 가슴 속에는 잠들지 않는 불꽃이 있다.
피도, 눈물도 전부 말라버렸다.
눈물이 마른 후부턴 온몸이 버석하게 말라버렸다.
문득 자신의 가슴 속에서 꺼지지 않는, 이 불을 지른 부모가 떠올랐다.
알콜 중독, 도박 중독, 그 와중에 만날 때마다 다른 여자랑 있는 아비도, 사이비에 빠져 자신의 목을 조르던 어미도 지긋지긋했다.
지웅의 가장 행복한 기억과 불행한 기억 모두가 이 학교 안에 있었다.
상혁은 다리를 저는 자신을 비웃지도, 때리거나 욕하지도 않았다.
동네에 소문이 파다한 자신의 부모를 자신에게 투영해 보지도 않았고.
정말 자신에게도 친구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 덕분에 부모에게 벗어나 독립을 꿈꾸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 착각이었다.
감금당하다시피 살아와 햇빛을 보지 못한 피부는 하얗다 못해 창백했다.
소매가 닳은 낡은 교복을 다시 매만지고 예약 문자를 몇 개 걸어두었다.
시린 겨울바람에 손끝이 얼어서 뻣뻣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담담한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었고, 난간으로 향하는 걸음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지난 새벽, 대부분의 짐을 정리해서 버렸다.
숙제도 다 제출했고, 자신의 가방은 옥상에 오기 전 쓰레기장에 버리고 왔다.
할 일이 남았나 곰곰이 생각하던 지웅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생각에 희미하게 웃었다.
“됐다.”
난간을 붙들고 서자 운동장에 있던 애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평소 같은 숨 막히는 침묵보다 차라리 이런 소음이 나은 것 같았다.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끝에는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다.
“하.”
웃음이 흘러나왔다.
저에게 보인 모습이 모두 가식이었다는 생각에 몸 안의 피가 모두 쏟아지는 것 같은 배신감을 느꼈던 적도 있었다.
이제는 아무렴 어떤가.
그래도 덕분에 좋은 추억 몇 개는 건졌으니까.
“고맙다.”
지웅은 난간을 잡았던 손을 놓으며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이윽고 들려온 ‘퍽’ 하는 소리와 비명, 고함, 사이렌 소리.
무심하게도 하늘은 여전히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 * *
“이거 괜찮은 거야?”
“작가님과 감독님, 지환이, 선생님들과 여러 번 논의를 했는데 지환이가 저 장면으로 나오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고집을 부려서….”
“애는 괜찮아?”
“네. 촬영 때는 괜찮았어요. 그리고 이번 화는 보지 말라고 했어요. 연기하는 거랑 찍힌 장면을 보는 건 다르니까요.”
박정균 대표는 지환이의 첫 연기 도전을 흥미로워하며 드라마를 꼬박꼬박 챙겨보았다.
배우를 매니지먼트 했던 게 한두 번은 아니지만, 이번은 경우가 달라서 그런가 괜히 설레기도 했다.
다만, 오늘 방영분을 본 박 대표의 얼굴엔 다 숨기지 못한 걱정이 짙게 남아있었다.
“그 녀석은 대범한 건지, 무신경한 건지….”
“둘 다인 것 같아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쉰 정윤 실장이 당시를 떠올렸다.
처음 건네받았던 대본에는 직접 뛰어내리는 장면은 없었다.
그저 그 상황을 암시하는 옥상 씬만 있었다.
회사에서도 그 부분을 확인했기에 괜찮다고 생각했던 거고.
하지만, 어느 부분에서 꽂힌 건지 한미영 작가는 이구영 감독을 끌고 정윤에게 딜을 요청했다.
절대 위험하지 않을 거라며 장면을 수정했으면 한다고.
현장에 있던 우진과 이야기를 했지만, 본인이 영역이 아니라며 당사자인 지환과 정윤 실장을 통해 이야기를 나눌 것을 권했다.
정윤은 아직 미성년인 멤버에게 알맞지 않은 장면이라며 반대를 외쳤지만, 지환이 하고 싶다고 했다.
잘된 드라마일수록 비극적인 끝을 맞이한 캐릭터는 확실히 인지도 면에서 메리트가 있다.
그럼에도 정윤은 꺼림직했다.
첫 배역부터 이런 역을 맡는 건 지환에게 악영향을 남길 수 있다고 판단했으니까.
결국 지환의 연기를 가르친 미연, 상담을 맡은 찬영과의 논의까지 거친 후 허락하기로 했다.
“저 캐릭터에 흠뻑 빠져있더라고요.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임지웅 역에 대해서는 연기 잡음은 없을 거예요.”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이긴 하는데 아무래도 걱정이 되네.”
둘이 우려 섞인 얼굴을 하며 생각에 빠지던 그때, 본방송을 금지당한 숙소의 멤버들은 세상 태평한 얼굴로 러그를 뭉개고 있었다.
걱정했던 사람들이 봤으면 등짝 스매싱을 날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평화로웠다.
“못 보게 하니까 더 궁금하다.”
“그래도 안 된다.”
“쳇. 쫌생이.”
드라마 자체도 재밌게 즐기고 있었던 힘찬이 단호하게 잘라내는 하준에게 툴툴거렸다.
물론 그 후 곧바로 응징당한 덕분에 숙소에는 괴상한 비명이 울려 퍼졌지만, 이미 익숙한 멤버들의 얼굴은 평온했다.
“환이 너는 안 궁금해?”
“궁금하긴 한데 괜찮아요. 하지 말라는 데는 보통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요.”
느긋한 지환의 표정에 은근슬쩍 옆구리를 찔러보던 경환은 못 말린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경환의 옆에서 그와 비슷한 표정을 한 포잉이 지환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볼 수 있는 이는 지환뿐이었다.
포잉이 왜 경환의 옆에서 저러고 있는 알아서 지환은 피식 웃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은 궁금해서 안달이 나는데 정작 당사자가 이러니 궁금해하기도 애매했다.
“그런데 왜 오늘 꺼 보지 말라고 하신 거예요?”
“심의에 간당간당한 장면이 있거든.”
“네?”
막내의 동그란 머리통이 갸웃거리는 사이 지환은 그저 부드럽게 웃었다.
“아, 경환 형. 왜 곡 안 넘겨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지환이 경환을 부르자 멤버들의 시선이 경환에게 꽂혔다.
익숙지 않은 상황에 잠시 당황한 듯 버벅거리던 경환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