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 아름다운 밤(3)
“아니, 왜 못 본 척해가지고 사람을 놀리고 그래, 진짜….”
“누님이 뭐래?”
“잘했대….”
한바탕 누나의 놀림거리가 되었던 나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러그 위에 드러누웠다.
여전히 누나를 대하는 건 어려웠지만, 오늘은 좀 자신이 있었다.
꽤 큰 시상식에서 상을 탔으니까!
약간이라도 놀라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역시 누나라는 종족은 전부 악마인가보다.
무덤덤한 목소리로 답하길래 뭐지, 바빴나, 못 봤나 하는 마음에 절로 어깨가 쪼그라들었었다.
그래놓고 물으니까 봤다면서 능청스럽게 잘했다고 하는데, 옆에 있었으면 쿠션이라도 집어던졌을 것을.
한없이 쪼그라든 내 모습이 재밌었는지 부모님과 통화를 끝낸 찬이가 옆에 쪼그려 앉았다.
“우리 화니, 누님이 칭찬 안 해줘서 삐져써요?”
“저리 가, 이 모지리야.”
“너 그거 아직도 안 바꿨어?! 핸드폰 내놔!”
“우리 형 그만 놀려요, 이 찐빵아!”
“나도 니네 형이거든!”
그새를 못 참고 유치한 싸움을 시작한 막내들 모습에 어슬렁거리며 다가온 경환 형이 피식 웃었다.
“쟤네는 체력이 남아도나 봐.”
“우리랑 쟤네를 같은 선상에 두고 생각하면 안 된다니까.”
투닥거리며 온 거실을 헤매고 다니는 두 말썽꾸러기 모습에 준이 형도 영빈 형도 혀를 내둘렀다.
신나는 회식이 끝나고 숙소에 돌아온 우리는 내일이 되면 또 무식하게 바쁜 하루를 보내야 할 테지만, 지금 당장은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
차가운 촉감의 트로피가 우리 체온으로 뜨끈뜨끈해질 때까지 품에 안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가장 큰 무대를 끝냈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이후 남은 시상식은 별다른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우리 몫의 상은 없는 듯했다.
게다가 무대도 다른 신인들처럼 3분 정도였고.
이후 있을 방송국의 연말 연예 대상에서는 합동 축하 공연에 서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라도 불러주는 게 어딘가 싶기도 했고.
“올해도 이제 다 갔네.”
“형,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나이 든 것 같잖아요….”
“우리 형 얼굴에도 주름이….”
“진짜?!”
어딘가 아련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영빈 형은 찬이와 경환 형의 한마디에 충격받은 얼굴이 됐다.
아직 파릇파릇한 한창나이인데도 늘 동생들에게 놀림당하는 우리 영빈 형.
그 옆에 있던 동갑내기 우리 리더님이 영빈 형을 짠하다는 듯 한 번 봐주고 느긋하게 벽에 기댔다.
결국 버려진 영빈 형은 그만 좀 놀리라고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찬이와 경환 형의 등짝을 때리고 있었다.
“진짜 한결같네요, 우리 멤버들은.”
“변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우리가 뭐 5년이 됐냐, 10년이 됐냐.”
세빈이가 찔러준 쿠션 위에 몸을 기대고 있자니 온몸이 노곤노곤하게 풀렸다.
“우리 막내가 이제 고등학생이 되네.”
“저도 이제 다 컸다고요.”
“어이구, 그랬어요?”
평소라면 놀리지 말라고 퉁퉁 부었을 세빈이도 오늘은 기분이 좋은지 형들 놀림을 다 받아주었다.
구름 위에 있는 기분이 이런 걸까?
끝도 없이 몽실몽실한 게 가득 들어차 온몸을 간질이는 것 같았다.
포잉의 앞발을 만지작거릴 때처럼 말랑말랑하기도 했고, 세빈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줄 때처럼 사락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좋아했던 모든 촉감이 기분이 되어 모여있는 듯한 행복감.
나도, 우리 애들도 누구 하나 더 바랄 게 없다는 듯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늘 더 먼 곳을 바라보던 준이 형이나 영빈 형까지 오늘만큼은 뿌듯함이 가득 들어찬 얼굴이어서 더 행복했다.
지금처럼, 딱 이만큼 행복한 일들이 쭉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처럼 눈앞의 바쁜 현실이 아닌 조금 더 먼 미래를 상상하며 행복하게 잠들 수 있었다.
* * *
“솜뭉치들 안녕하세요!”
“며칠 만에 또 보네요, 잘 지냈어요?”
모자를 푹 눌러쓴 세빈이, 경환 형, 그리고 내가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얘들아! 보고 싶었어!
- 어디가? 밖이야?
- 셋이 있는 거야? 다른 애들은?
대부분의 촬영을 실내에서 진행했던 웬일로 밖에서 방송을 켜자 채팅창에 무수한 메시지가 올라왔다.
또 우리가 딱 세 명만 모여있으니 다들 이게 어떤 상황인지 궁금한 것 같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언래블 환입니다. 여러분 잘 지냈죠?”
“너무 딱딱하게 인사하면 솜뭉치들이 거리감 느껴요!”
“아니, 딱딱한 게 아니라 정중하게 인사한 거야, 세빈아.”
“너 너무 딱딱하게 말한다고 상처받았대, 솜뭉치들이.”
“아니, 여러분 시작부터 이렇게 몰지 말고요. 우리 오늘은 할 일이 있잖아요.”
푹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살짝 들어 올려 곤란한 듯 웃으며 달래자 우리 팬들은 착하게도 금방 얌전해졌다.
“와, 하준 형한테 못된 것만 배워가지고, 얼굴을 무기로 쓰네.”
뒤에서 경환 형이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못 들은 것으로 했다.
“저희 셋만 있는 데다 밖이라, 저희가 뭐 하는지 궁금할 거예요. 그렇죠?”
“제가 말할래요! 제가 말해도 돼요?”
“그럴까? 우리 귀여운 막둥이가 해보자.”
귀엽다는 말에 순간 눈매가 샐쭉해졌지만, 방송 중이라 참는다는 듯 입술을 삐죽이다 금방 활짝 웃는다.
우리 세빈이도 표정이 점점 더 다양해져서 다행이었다.
“오늘은 하준 형의 깜짝 생일 파티를 할 거예요! 크리스마스 파티를 겸해서요.”
“우리 리더는 생일 파티인 건 모르고 크리스마스 파티로 알고 있어요. 저희는 파티 준비할 재료를 사러 나왔고요.”
세빈이가 신나서 설명하자 옆에서 경환 형이 말을 덧붙였다.
둘 다 평소 보다 신나 보여서 잠시간 흐뭇하게 그 모습을 구경하다가 슬그머니 주변을 살피며 멤버들을 이끌었다.
주변에 우진 형이랑 서포트 팀분들, 촬영 스태프들이 함께하고 있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하준 형은 힘찬 형이랑 트리 장식할 거 사러 갔어요. 영ㅂ, 아니 히스 형은 케이크 찾으러 갔고요.”
“저희는 파티 음식 재료를 사러 나왔어요. 원래 오픈 주방에서 파티하려고 했는데 예약을 못 해서….”
“아니, 그런 얘기까지는 안 해도 돼요.”
늘 우리끼리는 본명으로 부르다 보니 방송용 카메라가 돌 때는 종종 본명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아직 적응하려면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 싶기도 하고.
중간중간 멤버들에게 질문을 하나씩 던지며 앞에서 길을 안내했다.
그런 우리 모습이 귀여웠는지 채팅창에는 유치원 선생님이랑 아가들 같다는 말이 올라왔다. 경환 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렇게 큰 유치원생이 있으면 선생님들이 너무 힘들지 않을까요?”
“크기의 문제인 거야? 형이 유치원생인 게 문제가 아니라?”
“뭐, 유치원 다시 가도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
경환 형의 엉뚱한 대답에 지켜보던 스태프들도 우리도 한바탕 웃었지만, 세빈이는 거기에 한술 더 떴다.
“환이 형이 선생님이면 애기들이 말 잘 들을 것 같아요!”
“일단 내 의견은 상관없는 거지?”
그렇게 마트를 향하는 내내 우리는 즐겁게 수다를 떨었다.
마트에 도착한 경환 형이 카트를 붙들자 그 폼이 익숙해 보인다는 메시지가 채팅창에 올라왔다.
“아, 멤버들이랑 오면 형이 카트 담당이에요. 저는 장 보는 담당이고, 맏형들은 우리 막내들 말리는 담당이고요.”
카메라를 향해 조곤조곤 설명하는 동안 마트만 오면 기분이 좋아지는 우리 막내가 활짝 웃었다.
“형, 고기 저깄다!”
“그래그래, 천천히 가. 뛰지 말고.”
흐트러진 모자를 정리해주고 가서 구경하라고 머리를 토닥여주었다.
“매일은 아니지만, 저희도 밥을 해 먹는 편이라 종종 이렇게 장 보러 나와요. 아, 찬이는 잘 안 데려와요. 이유는… 노코멘트 할게요. 찬이가 나중에 보고 삐질 수도 있거든요.”
그 후로는 카메라를 향해 멘트하기보다 멤버들을 붙드느라 더 많은 말을 해야 했다.
이거저거 사고 싶어 하는 세빈이를 달래고, 자꾸 나 몰래 무언가를 카트에 넣는 경환 형을 혼내고.
바쁘긴 했지만 평소 같은 모습의 장보기가 끝나자 얼추 시간이 됐다.
“자, 장보기 팀인 저희는 이쯤에서 안녕할게요. 아마 조금 후면 히스 형이 여러분들을 찾아올 거예요. 우리 나중에 또 봐요.”
“또 봐요, 솜뭉치들!”
“밥이랑 영양제 잘 챙겨 먹고요.”
손을 흔들어 인사를 나눈 우리는 방송을 종료하고 오늘 일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며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200일 기념 축제의 마지막은 릴레이 방송 및 축하 파티였다.
먼저 함께할 축하 파티 준비를 하는 동안 틈틈이 방송을 켜서 진행 상황을 알린다.
그리고 오후 11시쯤 세팅된 장소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다 12시가 되면 200일을 축하하며 끝내는.
여기에 준이 형의 생일 파티를 함께 할 예정이지만, 그건 비밀이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우리 얼굴에는 못된 장난을 기대하는 악동 같은 웃음이 그려졌다.
늘 담담하게 우리를 대하는 하준 형의 놀란 모습을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기대하고 있는 듯했다.
* * *
잔뜩 신나서 숙소에 돌아간 우리를 반긴 건 왜인지 모르게 어색한 분위기를 풍기는 찬이었다.
그새 들킨 건가 싶어 눈치를 살폈지만, 준이 형은 조금 어두운 얼굴로 한숨을 쉴 뿐 다른 말은 없었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형, 무슨 일 있었어요?”
짐짓 모른 척 장 봐온 걸 정리하라고 찬이를 밀어주고 슬쩍 준이 형 옆에 앉았다.
“아무것도 아냐. 장은 잘 봐왔어?”
늘 다정하게 휘었던 눈매가 축 늘어져 있어서 덜컥 걱정되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워낙 본인들 힘든 일을 말하지 않던 맏형들이기에 그늘진 얼굴이 유독 크게 다가왔다.
“어, 음. 네. 형, 피곤하면 조금 쉴래요? 영빈 형 오기 전까지 우리가 정리하고 있을게요.”
“그래, 그럼 형 조금만 누웠다가 올게.”
어딘가 지친 얼굴로 어깨를 늘어트린 준이 형이 방에 들어가자, 그때까지 숨을 참고 있던 세빈이가 찬이를 붙들었다.
“뭔데, 뭐야? 싸웠어요?”
“아니, 아 그게 아니라….”
찬이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다 더듬더듬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을 이었다.
트리에 장식할 물건을 고르는 동안은 괜찮았는데 사람이 워낙 많았다고 했다.
사람들에게 많이 치여서 그런가, 한눈파느라 자꾸 뒤처진 찬이에게 하준 형이 약간 짜증을 냈다고.
그러나 워낙 주변이 시끄러웠던 터라 찬이가 그걸 제대로 듣지 못했고, 같은 상황이 또 반복되자 결국 준이 형이 정색한 표정을 지었다고 했다.
준이 형이 가끔 멤버들에게 단호하게 말할 때는 있었지만, 그건 보통 분명하게 무언가 잘못했을 때였다.
늘 사람을 조심하고 멤버들을 놓치지 말라며 잔소리를 듣던 찬이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상황임에도 준이 형이 새삼스레 정색해 찬이가 꽤 놀란 듯 보였다.
그때부터 무언가 말 걸기 어려운 기분이 들어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왔다고.
“형이 혹시 몰카 하는 거 아냐?”
“아닌 것 같은데…. 아까 우리 따라오는 카메라 없었어.”
“아니면 하준 형이 요새 잘 못 자서 많이 피곤한 게 아닐까?”
“형도 사람인데 피곤할 만하긴 하지.”
“밖에 오랜만에 나가서 내가 너무 들떴나 봐….”
“괜찮아, 네가 잘못한 거 아냐. 형이 피곤해서 자기도 모르게 날카롭게 말한 걸 거야.”
우리는 시무룩해진 찬이를 둥기둥기 달래주며 형이 들어간 방문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어디 아픈 건 아닌지, 우리 몰래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한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