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 IDEA(7)
그건 어쩌면 인간 승리를 향한 도전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인류가 달 표면에 한 걸음을 내딛던 그 순간처럼,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모험심과 향상심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니까.
하지만, 모험이 행복한 이유는 그 모험이 끝났을 때 돌아올 안락한 공간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등 뒤로 느껴지는 푹신한 감촉과 뜨거운 물로 몸을 씻고 난 후의 노곤함.
익숙한 공간이 주는 편안함이 온갖 잡다한 생각들을 날려버리며 무거운 몸과 정신을 다독여주는 것 같았다.
“형, 환이 형이 이상해요. 자꾸 이상하게 웃어요.”
“놔둬. 힘들었잖아….”
“쟤가 아직 기절 안 한걸 기특하게 여기자.”
“지환이는 원래 이상해.”
“아니거든요?”
러그 위에 퍼져서 혼자 피식거리고 있었더니 주변에서 멤버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았다.
내가 미친것처럼 보여도 어차피 지금 우리 중에 정상적인 생각이 가능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불길했던 예상대로 촬영은 동이 터 오르는 시간이 돼서야 끝이 났다.
독종 스킬을 한계 직전까지만 간당간당하게 쓴 덕분에 저번처럼 앓아눕지는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일까?
다행히 죽기 살기 특성까지 발휘되면서 평소보다 겁 없이 미션에 덤벼들 수 있었지만, 솔직히 지금 당장 너무 힘들었다.
숙소에 와서 씻고 나니 열이 조금 올라서 약도 한 알 삼켜야 했다.
차라리 기절하듯 잠들었으면 좋겠는데, 너무 피곤하면 잠도 안 온다더니 지금 내가 딱 그 상황이었다.
다른 것보다 모든 멤버가 빠짐없이 구역을 통과해야 한다는 조건이 너무 가혹했다.
미션지에 집중하느라 황금 카드를 제대로 찾지 못했던 걸 얼마나 땅을 치고 후회했던지.
벽을 타고 오르는 것도 힘들었지만,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도 있어서 높은 곳을 지나는 미션에서 많이 애먹었다.
원래 고소공포증이 있었던 나는 스킬 덕분에 눈 딱 감고 덤벼들 수 있었지만, 다른 멤버들은 그렇지 않았다.
한참 동안 온몸에 힘을 쭉 빼고 퍼져있다 눈을 뜨니 제각각 퍼져있는 멤버들이 보였다.
평소라면 거실 벽에 기대 있을 맏형들조차 바닥에 누워 숨만 쉬고 있었으니 말 다 했지.
평범하게 방송을 다녀왔다면 그날 있었던 일을 떠드느라 소란스러웠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다들 눈 밑이 퀭해서 좀비가 따로 없었다.
우리는 그저 천천히 숨을 내쉬며 바닥과 한 몸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잠깐 다들 숨을 고르며 정신이 가물가물해져 가던 그때, 문득 오늘 있었던 사고가 떠올랐다.
“찬아, 괜찮아?”
“응? 뭐?”
“아까 떨어진 거.”
“아아, 괜찮아. 엉덩이가 좀 욱신거리는 것만 빼면?”
“일단 좀 자고 일어나서 병원 가보자.”
“그래, 안 그래도 우진 형이 걱정 많이 하더라.”
메인 미션 중반쯤, 사고가 있었다.
물론 밑에 푹신하고 두꺼운 매트리스가 깔려있고, 기본적인 안전장치들도 있었다.
하지만 찬이가 떨어질 때 방향이 잘못 틀어진 건지 하체 부분이 바닥에 닿았고 꽤 큰 소리가 났었다.
그 소리에 놀란 멤버들이 죄다 자기가 있던 곳을 생각 못 하고 급히 움직이다 넘어지고 난리가 났었다.
그중에서도 세빈이는 소리에 많이 놀랐는지 뒤에 있다 뛰쳐나가면서 넘어져 무릎이 까졌다.
평소에 많이 투닥거리는 만큼 미운 정이 흠뻑 들었던 모양이었다.
우진 형도, 메인 PD도 허겁지겁 달려오고 촬영이 잠시 중단된 사이 병원에 가자는 우진 형의 주장에 찬이가 고개를 저었다.
움직임에 이상은 없고 충격 때문에 좀 욱신거리긴 하지만 심각한 수준이 아니니 계속하고 싶다고 고집을 부린 것.
그 후 급히 방송국 사람들과 우진 형, 준이 형, 찬이가 모여서 짧게 회의를 진행했다.
촬영의 속행과 일시 중단을 놓고 이야기가 오갔고 결국 현장 요원의 소견을 듣고 당사자의 판단을 존중하기로 했다.
현장에 대기하고 있던 응급 요원이 몇 가지를 확인했고, 뼈에 이상은 없을 것이라고 소견을 밝히자, 찬이는 곧바로 현장으로 돌아왔다.
미세 골절이 있을 수 있으니 추후 병원에 방문하는 걸 권한다는 말은 듣지도 않고.
등 뒤에서 들려오는 우진 형의 깊은 한숨과 촬영 현장에 있던 모든 멤버들의 우려를 찬이는 밝은 웃음으로 무마했다.
그 뒤로 속행된 게임에서도 전혀 문제없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었다.
예능 찍다가 다치는 일이 부지기수라는 말은 들었었다.
매년 그놈의 아이돌 체육 대회는 물론이고 몸 쓰는 예능에 나갔다가 사고 나거나 다쳤다는 기사를 늘 손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어쩌면 촬영에 흔히 따라붙는 가벼운 부상일 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직접 상황을 겪고 나니 피부로 느껴지는 게 너무 달랐다.
사고 당시 얼굴을 찌푸린 몇몇 스태프들의 모습에 우리 때문에 촬영이 지연되어 화가 난 건 아닌지 나도 모르게 눈치부터 보게 됐다.
그 스태프들의 이름을 다 알았다면 모두의 속마음을 보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이름을 외웠던 메인 PD와 같이 미션을 진행하던 고정 형님들은 늦어지는 시간보다 찬이의 부상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한편으로는 우리 애가 다쳤는데 현장 분위기와 이후를 걱정하는 내 모습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전생에 언래블이 크게 다쳤다는 기사는 본 적 없었기에 내가 너무 방심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반성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어디서든 조심하고 멤버들을 더 잘 챙겨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며 바닥에서 꿈지럭거리는 찬이 모습을 살폈다.
지금 내 목소리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지만, 자고 일어나면 몸살이라도 나는 게 아닐까 걱정이었다.
“그래도 우리 되게 잘한 것 같지 않아요?”
“우리 세빈이가 열심히 하긴 했지.”
“얘가 고소공포증 없는 게 제일 신기해.”
꽤 높은 위치의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하는 곳에서 두 팀 모두 상당한 시간을 잡아먹었다.
안전줄을 걸고 건너는 길이었지만 그래도 높이 자체가 두려운 상황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달달 떨면서 바닥에 붙어 기다시피 건너는 영빈 형의 모습이 여러 의미로 충격이었지만,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전생엔 언래블이 여러 예능에서 활약했던 만큼 번지점프에 도전한 적도 있었다.
그때도 영빈 형이 제일 힘들어했고 세빈이가 가장 신나서 뛰어내렸지.
하지만 준이 형이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줄은 몰랐다.
번지 점프할 때는 영빈 형을 달래며 먼저 뛰어내리는 모습을 보여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때도 큰 용기를 냈던 모양이었다.
하준 형은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내내 양쪽에 난간으로 설치된 밧줄을 꽉 쥐고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렸다.
나중에 슬쩍 물어보니 애국가를 불렀다고 했다.
무서운 걸 볼 때나 많이 긴장했을 때 애국가를 속으로 부르면 마음이 좀 가라앉는다고 그랬다. 그런 형 모습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늘 우리 앞에서는 괜찮다고 웃기만 해서 은연중에 나도 모르게 준이 형은 뭐든지 잘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 미안해졌다.
“그래도 이겼으니까 됐어….”
“그래, 한우는 우리 찬이가 벌어왔다.”
준이 형과 영빈 형이 팔을 뻗어 찬이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줬다.
헤벌쭉한 얼굴로 쿠션을 조물딱거리던 찬이는 콧대가 하늘을 찌를 것처럼 높아졌고, 우리는 평소랑 달리 열심히 찬이를 우쭈쭈해줬다.
오늘 가장 고생한 건 누가 뭐라든 힘찬이니까.
“오구오구, 우리 형아 기뻤어요?”
“야! 그거 하지 말라니까?”
“괜찮아요, 마음껏 기뻐해도 돼요. 오늘은 봐줌.”
“아오, 쪼끄만 게 진짜!”
막내는 아직도 체력이 남은 건지 찬이 옆구리를 발로 쿡쿡 건드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오죽하면 포잉도 이 둘을 보고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둘 다 지치긴 한 건지 평소처럼 굴러다니지 않는다는 것.
평소라면 경환 형까지 합세해서 셋이 거실 바닥을 굴러다니면서 난장판이 됐겠지만, 오늘은 얌전히 누워있었다.
“방송될 때는 어떻게 나올지 진짜 기대되긴 해. 우리 엄청 열심히 굴러다녔잖아.”
“난 그, 뭐야, 돌아가는 거 뛰어넘는 미션 있잖아요. 그게 제일 싫었어….”
“네가 거기서 미끄러져서 그런 건 아니고?”
“아니거든?”
준이 형이 막내 라인을 다독이자 찬이가 기다렸다는 듯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반대쪽까지 일정 간격을 두고 놓인, 커다란 바디필로우 같았던 스티로폼.
그걸 밟고 뛰어 건너편까지 가는 구간에서 우리는 조금 방심했었다.
스티로폼이 천으로 감싸여 푹신해 보였던 데다가 간격도 너무 멀지 않아서 나나 세빈이도 쉽게 밟고 뛸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오죽하면 우리 팀의 오수 선배님도 ‘이건 좀 쉽겠다’라고 하셨었다.
하지만 직접 밟아보니 생각보다 너무 푹신해서 균형이 잘 잡히지 않았고, 그 구간에서 찬이가 떨어지는 사고가 생겼다.
“푹신한 것도 문제였는데 미끄러웠지….”
“전 거기보다 장애물 넘기 같은? 거기가 제일 힘들었어요….”
게임 후반부쯤, 체력이 거의 바닥난 우리는 장애물 넘기 구간을 마주했고 여긴 괜찮지 않을까 했었다.
아주 멀리 있었던 황금 티켓과 한우 세트라는 글자가 이제는 정말 코앞까지 다가왔던 순간.
하지만 그것조차 제작진의 노림수였다는 건 직접 뛰어들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아니, 장애물 넘기에 함정을 섞는 건 진짜 반칙 아니에요?”
“나 서노 형님이 욕하는 거 들었어….”
“부온 선배님은 PD님 이름 부르면서 저주하던데? 대머리 되라고….”
“하, 하하….”
우리 팀이 먼저 도착한 만큼, 조금 더 뒤에 도착한 맏형들의 한우 팀보다 앞서 있었다.
하지만 한 구역씩 격파하면서 점점 거리는 좁혀졌고 후반에는 거의 비슷한 속도로 미션을 진행했다.
맏형들이 그렇게까지 기를 쓰고 달리는 걸 처음 본 우리는 조금 놀라긴 했지만,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결국 우리 팀이 이겼고 세빈이는 황금 티켓을 품에 안고 눈물을 찔끔 흘리기도 했었다.
이게 다 뭐라고….
“근데 솔직히 팀이 이렇게 갈렸으면 어차피 어느 팀이 이기든 한우는 나눠 먹는 거 아니에요?”
“팀이 이렇게 나뉠지 몰랐잖아.”
“형님들은 우리처럼 같이 사는 게 아니니까. ”
팀이 잘 나뉜 덕분에 우리도 DCL도 한우 세트를 하나씩 품에 안고 귀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황금 티켓은 다음 미션 때 쓸 수 있는 거라 우리 몫은 아니었다.
경환 형은 형 배 위에 다리를 올린 찬이를 바라보며 이걸 때려 말어 하고 고민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오늘 제일 고생했던 찬이를 봐주기로 한 건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 돈으로 사 먹는 게 아니라 이렇게 상으로 받은 거라 더 뿌듯한 거 아니겠어?”
“휴이는 다른 사람 안 주고 혼자 다 먹을 거라던데요?”
“걔네는 진짜….”
“그래, 다 알았으니까 이제 좀 자자, 얘들아.”
분명 차 안에서는 기절할 듯 잠들었던 멤버들이 숙소에 도착하니 입만 살아서 조잘거리고 있었다.
“우리 몇 시간 못 자고 또 나가야 해. 이제 자자.”
촬영이 생각보다 늦어졌지만, 그렇다고 이미 잡은 스케줄을 미룰 수는 없었다.
이렇게 시간에 쫓기며 스케줄을 하는 날이 왔다는 것도 신기했던 우리는, 그렇게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 그대로 거실에서 잠들어 버렸다.
* * *
짧게 자야 했을 애들을 준이 형과 겨우 깨워서 경환 형 어머님이 보내주신 호박즙을 하나씩 입에 물리고 있을 때, 우진 형이 도착했다.
“아이고, 완전 퉁퉁 부었네.”
“그렇게 심해요?”
“어. 찬이 얼굴 평소 두 배 같은데.”
“아, 형!”
퉁퉁 부어서 입술을 삐죽거리는 찬이를 보고 있자니 오리 같았다.
“너희는 회사 가서 바로 연습실 가면 되고, 찬이는 나랑 병원 갔다 올 거야.”
“괜찮은데….”
그렇게 비척거리며 우진 형 뒤를 따라 차에 탄 뒤 한참을 졸다 보니 어느새 회사에 도착했다.
그나마 학교 안 가서 다행이었지, 그도 아니었으면 날을 꼴딱 새고 학교에 갈 뻔했다.
그 후 연습과 운동을 평소보다 짧은 루틴으로 돈 후,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은 스트리머와의 합동 방송을 위해 사전 미팅을 하는 날이었다.
“얘들아, 이동하자.”
“넵!”
“팀장님도 같이 가요?”
“그럼. 이번 조인을 내가 성사시켰는데 빠지면 섭하지.”
회사가 진지하게 듣고 진행해준 것도 고마웠는데, 이번에 함께 방송을 진행하게 된 스트리머가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지금도 탄탄한 팬층을 가지고 있는 만큼 미래에도 잘나갔던 사람이고, 나중에도 나쁜 이슈가 없었던 사람이었다.
신기하게 그런 사람을 잘 찾아낸 팀장님이 대단해 보였다.
이런 게 사람을 보는 눈인 걸까?
“왜, 새삼 팀장님이 대단해 보여?”
“빨리 가요, 우리.”
“와, 이제는 막 팀장님이 말하는데 무시하고!”
내 감동은 대부분 5초를 못 가는 게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