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 IDEA(1)
찬영은 언제나처럼 자신과 조금 떨어진 위치로 의자를 끌고 와서 앉은 지환을 반겼다.
내담자에게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주기 위해 부드럽게 웃는 건 이제 인이 박인 삶의 일부였다.
그동안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지환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자신의 삶을 타인의 삶을 이야기 하듯 담담하게 이야기했고, 호불호에 있어서는 확고한 편이었다.
그나마 데뷔할 즈음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을 이야기할 때는 생기가 돌았다.
하지만, 그 이전의 과거를 언급할 때면 한 송이 조화 같아졌다.
한 줌의 생기도 느껴지지 않아 지환의 얼굴이 낯설어 보일 만큼.
인위적이고 불확실한 색을 지닌 기억을 사진으로 찍어둔 것처럼 장면, 장면으로 떠올렸다.
가끔은 기억이 분명하지 않은지 한참을 고민하거나 혼란스러운 기색을 비치기도 했다.
기억 왜곡은 대부분의 사람이 보이는 증상이니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일러주었지만,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지환은 과거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너무 어린 나이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던 게 원인일까.
유독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꺼렸다.
“오늘은 그날 일을 다시 한번 반추해보는 시간을 가질게요.”
“네.”
최근 일에 관해선 언제나 대답이 명확했고, 표정에도 여러 감정이 분명하게 떠올랐다.
어느 순간부터 그린 듯한 모습으로 선을 긋던 경계 또한 옅어졌다.
찬영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당시의 일들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스스로 속에 감춰둔 감정을 인지하는 연습을 반복했다.
두려움을 인지하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자신이 어떤 것에 두려움을 가졌는지 알아야 그 상황 자체를 피하거나, 극단적인 상황이 오기 전 벗어날 수 있었다.
플래시백 현상이 일어나는 상황과 환경을 본인이 알고 있다면 피할 수도 있다.
상처가 다 낫지 않은 사람에게 억지로 힘내라고 해봤자 나아지는 것은 없다. 오히려 그것조차 상처로 남는다.
그러느니 차라리 피할 수 있다면 피하게끔 두려움의 근원을 인지시키는 게 훨씬 당사자들에게 도움이 됐다.
물론 되도록 그 상태까지 가지 않도록 이들의 내면에 자리 잡은 긴장을 풀어주는 게 찬영이 해야 할 일이었다.
지환과의 상담이 마무리되고 사무실로 돌아온 찬영은, 언래블과의 상담 일지를 작성하며 그간의 기억을 하나씩 되새겨보았다.
여러 영상을 지속적으로 확인한 결과, 멤버들은 여전히 숙소 외의 환경에서는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낯선 장소에 대한 본능적인 경계가 아닌, 그저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것들에 대한 경계였다.
찬영은 방송용이 아닌 촬영 당시의 원본 영상들을 훑었기에 당사자들도 모르는 무의식적인 행동을 볼 수 있었다.
하준이나 영빈은 어느 장소에 도착하든 항상 출입구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언제나 그 장소를 전부 확인하고 자신과 출입문 사이의 거리를 눈대중으로 재어보는 모습이 여러 번 카메라에 잡혔다.
경환은 멤버들이 자신의 곁에서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지 않게 했다.
지환이 멤버들의 한 발짝 뒤에 자리를 잡는다면, 경환은 멤버들 가운데 있었다.
경환은 그 당시 지환의 상황을 직접 목격한 당사자였다.
그래서 가장 불안증세가 심하리라 생각했는데, 상담과 영상 모두 확인하여도 두드러지는 불안증세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회사에서 전해준 멤버들의 근황에 따르면 경환이 최근 격투기 쪽 운동을 배우고 싶어 한다고 했었다.
그 때문에 회사에서 허락 여부를 찬영에게 물어오기도 했고.
힘찬은 쉴 새 없이 멤버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이전처럼 불안해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여전히 누군가 옆에 있어야 안정되는 듯했다.
극단적인 감정의 표출은 굉장히 많이 줄어들었다.
언래블의 모든 내담자 중 가장 경과가 좋은 경우였다.
세빈은 힘찬과는 조금 다른 케이스였다.
불안 증세가 도드라지게 나타나진 않았지만, 늘 시선은 멤버들에게 두었다.
보통 사람은 길을 걸을 때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본다.
물론 현대인들은 핸드폰을 보는 경우가 더 많지만.
하지만 세빈은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보는 게 아니라 멤버들의 등을 바라봤다.
이러다 언젠가 세빈이 홀로서기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찬영은 그것이 우려되었다.
지환은 여전히 멤버들에게서 한걸음 떨어진 자리에 있었지만, 처음과 조금 달라졌다.
언제나 지켜보는 입장을 고수하던 초반과 달리 어느 순간부터 영상 속 지환은 자신이 직접 움직여 위치를 바꾸고 있었다.
긍정적인 신호였다.
다만, 소리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모습이 여러 장면에서 포착되었다.
혼자서 생각에 빠진 듯한 모습도 종종 보였는데, 그때마다 단순히 표정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의식이 다른 곳으로 날아간 듯한 모습이었다.
화면 속 지환은 반쯤 눈을 내리깔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얼굴에서 온기가 사라지고 생기마저 희미해지면,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힘찬이 종종 다가가 툭 하고 건드렸다.
그럼 얼어붙었던 겉껍질이 녹아내리듯 순식간에 따뜻한 열감이 눈동자부터 온 얼굴로 퍼져갔다.
심통난 듯한 힘찬에게 혀를 내밀며 장난을 치는 얼굴은 다시 또래 소년 같아졌고.
무의식중에 하는 행동 같았지만, 지환은 생각에 빠질 때마다 눈을 감고 외부와 자신을 차단하고 있었다.
무언가 알려진 것과 다른, 타인에게 말할 수 없는 종류의 어떤 고민을 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도 언래블은 처음에 비하면 많은 점에서 나아지고 있었다.
개개인의 불안감을 어느 정도 극복해 낸 모습을 보였고, 그저 보통 사람들보다 경계심이 조금 더 많은 정도로 보였다.
악플 문제에 직면했을 때도 비교적 반응이 덤덤했다.
다만 이때도, 다들 자신보다 주변 인물들을 더 걱정했다.
찬영은 언래블 특유의 깊은 유대감이 늘 좋은 쪽으로만 발현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고민에 빠졌다.
* * *
우리는 앨범 발매 직후 생각보다 훨씬 더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처음 이슈가 발생했을 때처럼 온갖 프로그램에서 출연을 요청하진 않았지만, 대신 더 인지도가 있는 프로그램에서 섭외가 들어왔다.
무엇보다 ‘Pluto’ 챌린지가 악플의 고충을 토로하는 걸 넘어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외치는 데 사용되고 있다는 게 가장 놀라웠다.
나는 여기에 있다고, 당신이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한다 해도 나는 여기에 살아있다고 외치는 목소리와 우리 노래가 함께 어우러지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무언가 해결을 바라는 게 아니라고 했다.
그저 꾹꾹 눌러 담았던 자신의 분노를 말한 것만으로도 늘 답답했던 속이 나아졌다고 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찾아본 어떤 영상에서 ‘Pluto’라는 해시태그를 단 스트리머가 말했다.
- 해결을 바라는 게 아니에요. 그냥 제 시청자분들도 참고 견디지 않았으면 해서 저도 참여하게 됐어요. 옛날에는 저만 참고 넘어가면 그걸로 끝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러다 말 거라고요.
미간을 찌푸리던 스트리머가 옆에 있던 커다란 머그잔으로 물을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 그냥 참고 넘어갔더니 어느 순간부터 비슷한 일을 당해도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제 탓을 하고 있더라고요.
짧은 헛웃음과 함께 흘러나온 이야기에 나와 멤버들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 여러분, 제가 발음이 가끔 뭉개졌잖아요. 어떤 분이 댓글로 그러더라고요.
머그잔을 쥐고 있던 양손이 잘게 떨린 것 같았다.
- 방송하는 사람이 말을 그렇게 못하는 데 혓바닥이 왜 필요하냐고, 자기가 잘라주겠다는 거예요. 제가 차마 여러분들한테는 제가 봤던 글 그대로 말할 수가 없어서, 이것도 순화해서 말하는 거예요.
그 영상을 보는 동안, 컵을 쥔 스트리머의 손에 몇 번이나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자신이 겪은 몇 가지 상황을 더 이야기한 뒤, 스트리머는 손을 한번 내려다보며 처음보다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게임 스트리머인 자기가 한참 동안 손이 떨려서 제대로 게임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고. 그러니 이제는 독하게 마음먹고 대응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른 챌린지 참여자들처럼 우리 노래, ‘Pluto’를 짧게 불렀다.
처음에는 잘 못 한다고 한참이나 머뭇거리던 그가 시청자들이 쏟아내는 메시지에 얼굴을 붉히며 노래했다.
그걸 보고, 우리는 저 사람과 우리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힘들었고, 팬의 응원이 있었고, 결국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많은 사람이 우리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무척이나 설레는 일이었다.
그때 문득, 이걸 차라리 더 본격적인 이야기로 만들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의 꼬리를 끄집어내 멤버들에게 먼저 말해보았다.
“저분들과 함께 노래 부르는 건 어때요?”
“응? 스트리머들이랑?”
“스트리머일 수도 있고, 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좀 더 많은 사람이랑 같이 부르는 거예요. 이걸로 좋은 일도 하면서, 으음….”
머릿속에 몽글몽글 떠오르는 생각을 두서없이 꺼내며 끙끙거리고 있었더니 준이 형이 핸드폰을 들었다.
갑자기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더니 곧바로 형의 핸드폰이 울었다.
“네, 하준입니다. 아, 네 맞아요. 네. 바로 회의실로 갈게요.”
“응?”
준이 형은 팀장님과 통화한 것 같았다.
갑자기?
무언가 평소의 하준 형이랑 다른 느낌이 들어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팀장님이에요?”
“응. 얘들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생겼어.”
“네? 갑자기요?”
“이 시간에요?”
놀란 동생들의 눈빛에도 준이 형은 당황하지 않았다.
“지금 회사로 가자는 게 아니고, 내일 바로 회의실로 오라고 하신 거야. 지금은 지환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이디어를 모을 거고.”
“아, 놀랐잖아요. 갑자기 한밤중에 회사 가야 하는 줄.”
“그러니까. 근데 뭐, 어떤 걸 적어?”
준이 형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경환 형과 찬이를 끌어다 자리에 앉히며 픽 웃었다.
놀라 토끼 눈이 된 우리 모습이 꽤 웃겼던 모양이었다.
정작 말을 꺼냈던 나는 머릿속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헤매고 있었는데, 준이 형은 무언가 떠오른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영상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다 갑자기 형 혼자 무언가 쓱쓱 진행한 상황이라 멤버들의 시선이 형에게 모여들었다.
“전에 팀장님이 한번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챌린지 시작은 우리가 아니었지만, 그걸 우리가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는 있을 거라고.”
“음, 이번 건 그간 보아왔던 챌린지들이랑은 확실히 좀 다르죠.”
다행히 좋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자칫 잘못 흘러가면 처음의 의미가 퇴색될 수도 있었다.
“환이 말을 들으니까 막 나대는 느낌 없이도 좋은 의미를 잘 담아서 뭔가 만들 수 있을 것 같더라고.”
“전 제대로 생각을 정리하지도 못한 것 같은데요…?”
아니, 그보다 준이 형 말이 평소보다 거칠어진 것 같은데?
평소보다 미묘하게 톤이 다른 듯한 준이 형 목소리와 단어 선정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영빈 형을 바라봤다.
“준아, 일단 너 졸린 것 같으니까 자라.”
“응? 나 괜찮은데.”
내 시선을 바로 캐치한 영빈 형이 이야기를 이어가려는 준이 형의 손목을 잡으며 말을 끊었다.
의아한 얼굴의 준이 형을 유심히 살핀 영빈 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얘들아, 일단 푹 자고 내일 맑은 정신으로 이야기하자.”
“야, 나 괜찮다니까?”
“아냐, 너 안 괜찮아.”
두 맏형이 유치한 말싸움을 이어가는 동안, 멤버들은 눈치껏 하나둘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엉거주춤 올라온 내가 조금 걱정스러운 눈으로 문을 바라보자 경환 형이 손을 휘휘 저었다.
“괜찮아. 하준 형 재워야 할 타이밍이라 그래.”
“응?”
“저 형도 사람이라 한계치만큼 못 자면 이상해지거든. 영빈 형이 알아서 할 거야. 너도 신경 쓰지 말고 자.”
“아… 묘하게 말투가 다르다 했더니 그래서 그랬구나.”
“응,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자. 이야기는 내일 하자. 잘 자라.”
“넵. 형도 잘 자요.”
무언가 오늘따라 저녁 시간이 뒤죽박죽된 기분이었지만, 멤버들의 새로운 모습을 하나 더 알게 되었다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