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24)화 (224/456)

224. 이름에게(5)

‘시간은 유수와 같다.’

이름 모를 어떤 옛 고인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내가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시간은 고고히 흘러가고 결국 컴백날이 다가왔다.

11월 11일을 컴백일로 정했던 건, 우리 딴에는 로맨틱한 이유에서였다.

좋아하는 이에게, 혹은 감사를 표하고 싶은 이에게, 그도 아니라면 그저 지인이나 회사 사람들에게 가래떡이든 빼빼로든 나눠주는 날이니까.

우리 노래를 들어주는 모든 이들에게 우리 음악이 선물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물론 부끄러워서 이걸 대놓고 내 입으로 말할 순 없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리더가 있는 거 아니겠어?

“네, 저희가 사랑하는 모든 분께 이 앨범이, 노래들이 소소한 선물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뜻을 모아 정한 날짜입니다.”

그래, 이렇게 리더의 책무가 무겁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정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게 하준 형의 의지는 아니었다.

컴백 전, 우리는 날짜 선정의 이유를 질문 받을 경우 누가 답할지를 놓고 가위바위보라는 신성한 결투로 담화자를 선별했다.

그 결투에서 리더인 준이 형이 결정된 건, 역시 리더가 총대를 매는 게 옳다는 하늘의 뜻이 아니었을까?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언래블이 이렇게 다시 찾아왔습니다! 컴백 일에 담긴 마음이 굉장히 로맨틱하네요. 역시 신인다운 귀여움과 패기가 있는 언래블이었습니다.”

그 후로 이어진 질문들도 일부는 답을 하고, 일부는 적당히 웃어넘기며 흘려보냈다.

예를 들어 스틸 컷에 등장했던, 군데군데 흩어져 있던 문장들과 그림의 의미 같은 것들은 곤란하다는 듯 웃으며 넘겼다.

그 외에 음악에 관련된 이야기라면 사전에 분배했던 대로 답변을 마쳤고.

영상이나 사진의 연출에 대해서는 확정적인 답변을 주지 말라고, 회사에서 우리에게 미리 이야기했었다.

우리는 힌트를 보여줄 뿐이니 어디까지나 그 해석은 청자의 몫으로 남겨두라는 뜻이었다.

“늘 멋진 무대를 보여준 만큼 오늘 무대도 기대되는데요,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이 기다리고 있겠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감사합니다, 언래블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진행을 맡은 선배님들의 몸짓과 멘트를 웃음과 손뼉으로 호응한 우리는 인터뷰가 끝난 후 다시 한번 꾸벅 인사를 했다.

“무대 기대할게요, 잘해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언젠가 음악 방송에서 마주쳤던 핑크밤이라는 걸그룹 선배님이었다.

굉장히 활기차고 씩씩한 분들이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하겸 형이 칭찬 많이 했어요. 저도 엄청 만나고 싶었는데 이제야 보네요.”

“하겸 형님이 워낙 신인한테 관대하시잖아요.”

준이 형한테 서글서글하게 말을 거는 저 사람은 멜트라는 인기 남자 아이돌 그룹의 멤버였다.

골든아워와 친분이 있었던 건지 하겸 형에게 이야기를 들었다며 준이 형에게 악수를 청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다만, 내 눈에는 무언가… 저 사람이 마냥 우리에게 호의만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겉으로 보기엔 서글서글했는데 왠지 모르게 솜털이 살짝 서는 그런 느낌?

스킬을 사용해볼까 했는데 방송용 예명만 알고 본명을 몰랐다.

다음에 마주칠 때 시도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착하고 순한 후배의 얼굴을 했다.

이날의 무대는 ‘Pluto’와 에단 쌤의 신곡, 이렇게 두 곡을 편곡한 무대였다.

함께 빛나고 싶다고 호소하는 플루토의 가사와 에단 쌤이 만든 곡은 꽤 합이 괜찮았다.

에단 쌤의 곡, ‘서성이다가’.

용기가 없어 한없이 서성이던 내가 단둘이 나란히 걷던 거리에서 홀린 듯이 네게 고백한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먼저 광활하고 외로운 우주를 형상화한 영상을 배경으로 ‘Pluto’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그 앞에서 아주 작은 별이 되어 노래했다.

우리가 ‘다시 나를 사랑해줘’ 하고 노래하면, 솜뭉치들이 ‘사랑해’ 하고 외쳐주었다.

말해달라고 청하면 ‘언래블’하고 이름을 불러주었다.

함께 부른 ‘Pluto’는 언래블의 노래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노래였다.

‘서성이다가’는 공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낯설 텐데도 응원법을 빼먹지 않고 꼬박꼬박 응수해주는 팬들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그 와중에 영빈 형이 넘쳐흐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애드립을 넣었는데도 환호성으로 응수해주는 센스는 정말 미친 것 같았다.

우리 팬들은 전부 가수 지망생인가?

‘서성이다가’는 너무 높은 음을 맞추는 것도, 녹음 내내 감정을 잡는 것도 무척이나 힘들었던 곡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감정 과잉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더 힘들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무대를 무사히 끝내고 대기실로 돌아온 나는 영빈 형에게 투덜거렸다.

“아, 형! 너무 지르면 못 따라간다니까요!”

“미안, 솜뭉치들 보니까 너무 신나서.”

우리 메보는 내가 그만큼 고음에 능숙하지 않다는 걸 자꾸 잊는 것 같았다.

나는 영빈 형과 다른 멤버들 사이에서 중간을 잡아줘야 하는 입장이다 보니 가끔 혼자 흥이 올라 지르는 메보 형님 때문에 곤란했다.

음 이탈 생길까 봐 같이 지르진 못하겠고, 그렇다고 혼자 붕 뜨게 둘 수 없어서 코러스를 깔아줘야 했다.

내 목…!

“우리 막내 노래가 많이 늘었어, 그치?”

“말 돌리지 말고요!”

“아냐, 진짜 많이 늘었잖아. 안 그래?”

“그렇긴 한데, 어휴.”

잔소리를 좀 하려고 했더니 은근슬쩍 세빈이 뒤로 도망가는 저 형을 어쩌면 좋을까.

한숨을 푹 내쉬며 넘어가 주자 영빈 형이 씩 웃는 게 눈에 들어왔다.

저 형은 분명 알고 저러는게 틀림없었다.

내 언젠가 복수하고 말리라.

이렇게 또 부질없는 복수 다짐이 쌓여갔다.

“그래도 오늘 무대도 좋았어요.”

“평소랑 좀 다른 분위기여서 걱정했는데 다들 좋아해 줘서 다행이야.”

고개를 돌려보니 막내 둘이 삐약거리고 있었다.

형들에게 오늘 무대를 이야기하며 경환 형을 괴롭히고 있다는 뜻.

덩치로 따지면 찬이나 경환 형이나 큰 차이 안 나다 보니, 찬이가 형에게 매달리면 그렇게 형이 불쌍해 보였다.

자기 몸만 한 곰이나 늑대에게 덮쳐지는 것 같달까.

목숨의 위협을 받는 현장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그에 비해 세빈이는 아직 작고 귀여워서 다행이었다.

“자자, 오늘도 고생했다. 얘들아.”

컴백 무대가 끝나고, 찾아와준 팬들을 위한 작은 미니 팬미팅까지 끝낸 우리는 붕붕 뜨는 기분으로 회사에 도착했다.

“숙소로 복귀해도 된다고 했잖아. 왜 왔어?”

“아, 연습이 더 필요할 것 같아서요.”

“막 만족스럽게 안 돼서 안 되겠어요.”

차에서 내린 우리를 맞아준 건 팀장님이었다.

숙소 가서 쉬라니까 왜 왔냐면서도, 우리 어깨를 일일이 두드려 주며 오늘 무대를 칭찬해주셨다.

무대 경험이 조금씩 쌓이면서 이전보다 무대를 어려워하는 모습이 많이 줄었다는 둥, 오늘 다들 목소리가 깨끗하게 잘 나왔다는 둥.

멤버들의 자존감을 팍팍 올려줄 멘트를 잔뜩 늘어놓은 팀장님이 연습이 더 필요하다는 우리 말에 무리하지는 말라는 답을 주셨다.

몸 상하면 죽도 밥도 안되니 조심해야 한다고.

이번 곡엔 안무라고 할 만한 큰 동작이 없었지만, 각 파트에 맞춰 몇 번씩 위치이동을 해야 했다.

멤버들과 우르르 연습실에 들어선 우리는 적나라하게 우리를 비추는 거울을 보며 다시 한번 발을 맞췄다.

“아, 왜 이게 아까는 그렇게 안 됐지?”

“당황해서 그랬겠지.”

“그래도 눈에 확 들어오는 실수는 아니었잖아. 다음에 더 잘하자.”

“끄응….”

웬일로 노래가 아닌 안무에서 찬이의 실수가 있었다.

시무룩한 찬이를 달래고는 거울로 서로의 간격을 몇 번 더 맞춰본 뒤에야 다들 오늘 무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간 대중을 잡고 연습했던 무대 사이즈와 오늘 올랐던 무대가 크기가 달라 다들 잠시 당황했었다.

무대가 좌우로 조금 더 길어지고 폭도 조금 좁아져서 리허설 때 급하게 간격을 조절하느라 애를 먹었었다.

“그때그때 우리가 맞춰야 하긴 하는데, 일단 이번 센터가 영빈이잖아. 우리가 지금 연습하는 사이즈를 기준으로 폭이 좁으면….”

준이 형과 세빈이가 앞으로 몇 번 더 있을 무대를 대비해 행동 방법을 다시 점검했다.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허둥거리지 않고 서로 눈치껏 간격을 조절하기 위해서였다.

격렬한 안무가 있는 곡은 아니다 보니 많이 어려운 건 없었다.

매번 다양한 무대 사이즈를 생각하고 연습을 하고 있었지만, 각오와 현실은 늘 달랐다. 아무리 대비를 하더라도 무대 오르면 그 순간엔 머리가 하얘지니까.

몇 번 더 연습이 반복되었고, 그사이 맺힌 땀을 대충 문질러 닦아낸 우리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오늘 솜뭉치들 엄청 많았지?”

“여태까지 중에 제일 많았던 것 같아요.”

“내가 그래서 더 놀랐다니까?”

우리는 근질근질한 입을 참지 못하고 기어코 아까의 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번 앨범은 따로 쇼케이스 없이 음악 방송 무대로 컴백을 알렸다.

물론 앨범과 음원은 예정된 날짜에 공개했지만.

직전 활동과의 텀이 너무 짧았고, 수록곡 역시 ‘서성이다가’를 제외하면 이미 한 번씩은 공개되었던 곡이었다.

다시 손봤다고 하지만 곡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기세가 올랐을 때 우리의 영향력을 공고히 해야 한다고 채근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내년에나 새 앨범이 나왔을 텐데, 최대한 열심히 땅 다지기를 해야 한다는 의견에 우리도 동의했다.

하지만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너무 피로하지 않을까?

질리지는 않았을까?

감성팔이라고 질색하진 않을까?

짧은 시간 최대한 많은 것을 고려했고, 최대한 담백하게 이야기를 전하고자 했다.

이전의 이야기와 다가오는 연말을 모두 감싸 안아 올해의 마지막까지 함께할 내용으로.

많은 사람이 머리를 싸매고 궁리하고 고민해서 구성한 앨범이었다.

그래서 컴백 무대에 과연 우리 기대만큼 많은 팬이 와줄지 불안했고, 걱정했다.

음방 전날 숙소에서 다 같이 덜덜 떨면서 머리를 감싸 쥘 만큼.

여전히 우리는 쫄보들이었고, 아직 팬들을 대하는 게 어려웠다.

누군가를 너무도 좋아하기 때문에 도리어 그 사람을 대하는 게 어려울 수도 있다는 걸 배우게 되었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팬들은 그런 우리의 불안은 콧방귀로 날려버릴 만큼 강력했고, 그걸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이 우리 팬들의 눈동자뿐이라는 게 기묘하게도 마음을 덜컹거리게 했다.

마음껏 들고 흔들 수 있는 공식 응원봉이 아직 없다는 게 너무 아쉬웠다.

내 손에 공식 응원봉이 있었다면, 미친 듯이 흔들어줬을 텐데.

“진짜 우리는 운이 좋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 많은 일이 있었는데도 우리 편이 이렇게 많다.”

“이게 다 착하게 살아서 그래요. 앞으로는 조금만 착하게 삽시다.”

“그건 또 무슨 멍멍이 소리야.”

“우리가 너무 착하게 살아서 솜뭉치들까지 너무 착하잖아.”

“사실 우리는 별로 안착한 데 솜뭉치들이 착해서 그 덕을 우리가 보는 걸지도 몰라요.”

붕붕 들뜬 기분을 주체할 수 없던지 다들 헛소리를 지껄였다.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오늘 마주한 광경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아무 말이나 마구 뱉어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할 수 없는, 우리끼리 있기에 할 수 있는 필터링 되지 않은 많은 감정이 우르르 쏟아져 쌓이고 있었다.

여태까지 중 가장 높은 예판 수량을 듣고 얼마나 놀랐던가.

이대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정말 1위도 꿈이 아니라는 말에 겸손한 척 손사래를 치며 남몰래 떨리던 심장은 또 어땠고.

“아, 나머지 얘기는 숙소 가서 하자.”

“그럴까? 가자, 얘들아.”

“형 무슨 조직 보스 같이 말하고 있어요.”

“아 진짜 오늘 기분 좋다!”

영어 단어에 불과했던 ‘Unravel’은 팬들이 있기에 우리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다.

‘팬’이라는, 지나치게 포괄적이었던 단어는 우리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솜뭉치’로 변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유일한 뜻이 되었다.

오늘 다시 한번 솜뭉치들 앞에서 되새긴 이 마음.

멤버들도 나도, 차마 숙소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꺼내기 힘들어 눈빛으로만 나누었다.

준이 형부터 세빈이까지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모두가 히죽거리고 있었다.

아, 솜뭉치들이 이 모습을 못 봐서 정말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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