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 IDEA(2)
“아, 내가 잠을 좀 못 자면 술 취한 거랑 비슷해져.”
“요새 잘 못 자요?”
“아니, 그냥 좀 할 게 많아서.”
다음날, 준이 형에게 토막토막 말을 건네며 주저하다 결국 어제 일을 물었다.
너무 못 자는 건지,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얘기하다 보니 무슨 취조 같았는지 형의 입꼬리가 잘게 떨렸다.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난 진지해요!”
“그래그래, 알아. 근데 환이 네가 이렇게 우리한테 전전긍긍하는 모습 보일 때마다 귀여워서 그래.”
형은 리더니까, 혹시나 우리 모르게 또 어떤 짐을 짊어진 것은 아닌지 밤새 걱정했건만. 내 우려에도 형은 태평하게 웃었다.
처음으로 준이 형의 태평한 저 웃음이 조금 싫어졌다.
“진짜, 뭐 걱정 있으면 숨기지 말고 말해요! 다 같이 얘기하기로 형이 얘기했잖아요.”
“진짜 아니야. 그냥 곡 작업이랑 이것저것 욕심내다 보니까 잠을 좀 못 잔 것뿐이야.”
“어휴, 진짜. 형이 찬이도 아니고 속을 썩이고 그래요.”
“야, 그건 좀 심했다….”
퉁명스럽게 중얼거리는 나를 달래려는 듯 준이 형이 가만히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웃음을 참아가며 다독이더니, 찬이와 비교하는 말에선 또 눈썹이 꿈틀했다.
이건 좀 심했나?
긴 시간 회의에 몰두해 모두가 지쳐있었지만, 연습을 빼먹을 수는 없었다.
단체 연습 후 준이 형이 말했던 곡을 같이 들어보기로 했었다. 형을 따라 쫄래쫄래 걸어가며 던진 대화는 작업실에 도착해서야 멈췄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뭐가요?”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보조 의자의 쿠션을 조물락거리다 시선을 돌리자, 밤나무 향이 묻어날 것 같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이드 라인을 제대로 잡아주자는 것도 그렇고 스트리머 방송에 출연하자는 것도 그렇고.”
“뭐어….”
‘미래에서 봤어요’라고 말할 수 없었던 나는 가장 평범한 답변을 꺼냈다.
평소에 가끔 영상을 보기도 했고, 방송에 스트리머들이 출연하기도 했으니 반대도 가능하지 않냐고.
위캠 영상을 다양하게 보지는 않았던 터라 연예인들이 본격적으로 위캠에 진출한 시기는 몰랐다.
하지만 이미 출연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싶었고, 그래서 오늘 회의 때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명왕성은 우리가 엄청나게 고민하면서 만든 노래잖아요.”
“그렇지.”
말을 이으며 슬쩍 올려다본 하준 형의 머리는 이전 앨범에서처럼 옅은 갈색이었다. 간혹 색이 더 빠진 건지 금색처럼 반짝이는 머리카락도 있었다.
다 같이 작업실에서 밤을 새웠던 날, 마음을 넣은 가사를 써보자고 각자 노트를 붙잡고 끙끙댔던 숙소에서의 일.
그 소중한 기억을 떠올리는지 기분 좋게 까딱거리는 하준 형을 따라 머리카락이 가볍게 물결쳤다.
“그만큼 노래의 본질은 우리가 제일 잘 알 거라고 생각해요. 고맙게도 많은 사람이 거기에 공감해준 거고.”
“응.”
조심스럽게 꺼내놓는 내 생각들을 하준 형은 계속해보라는 듯 추임새를 넣으며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게 더 많은 사람이랑 우리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겠다 싶었어요. 올바르게 알리고 싶기도 했고요.”
잠시 말을 멈추고 품에 안은 쿠션을 포잉의 핑크 젤리 대신 조물딱거리다가, 나는 포잉이 품고 있는 우주를 잠깐 바라봤다.
저 안에도 우리의 명왕성이 있을 것만 같아서.
포잉은 언제나처럼 내 일상을 지켜보며 지켜주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져 포잉을 향해 웃었지만, 우리 새침한 요정님은 코웃음만 쳤다.
살랑거리는 꼬리나 감추고 아닌 척하던가, 으이구.
“그래서 기부와 연관 짓고 싶어 했구나.”
“네.”
문득 처음 정산을 받았을 때를 떠올렸다.
나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일까?
그저 누군가에게도 내가 기회가 되어주고 싶었다.
상대방의 인생을 책임져 줄 수는 없었지만, 보탬이라도 되고 싶었고.
갑자기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핸드폰을 붙들고 기부처를 몇 군데 찾아봤었다.
그걸 본 세빈이가 자기도 하고 싶다고 달려들었고, 덩달아 중구난방으로 나오는 목소리를 준이 형이 정리했다.
기부를 개인으로 할건지 팀으로 할건지, 이름을 밝힐 건지 말 건지 등.
찬이나 세빈이는 우리가 ‘언래블’로 묶이는 것에 유난히 집착했다.
그래서 무언가 할 때는 꼭 다 같이하고 싶어 했고, 우리는 항상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다만, 기부할 땐 언래블이라는 이름 대신 본명을 쓰기로 했다.
회사에도 말하지 않은 우리끼리만의 약속이었다.
그리고 굉장히 이기적인 마음도 밑바닥에 깔려있었다.
꾸준한 기부로 언래블 이미지에 좋은 영향을 주고 싶다고.
“좀 속물적인 생각이긴 한데, 저희 기부 관련 기사들 덕분에 이미지도 좋잖아요. 그럼 행동을 꾸준히 이어가면 팀 이미지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았어요.”
“그게 왜 속물이야? 그리고 속물이면 어때. 그 속물조차 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은데. 우리 환이가 아직 애기는 애기네.”
“네? 말이 또 왜 그렇게 돼요!”
멤버들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때면, 되도록 숨기는 것 없이 말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게 가능했던 건, 어떤 이야기를 하든 준이 형이 둥글게 받아주리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마치 지금처럼.
준이 형은 순수한 마음으로 기부하는 게 아님에도 날 비난하지 않았고, 잔소리를 늘어놓지도 않았다.
사실 그간 다른 목적이 있는 기부에 거부감 혹은 죄책감 같은 걸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어쩌면, 준이 형이 내가 잘못된 게 아니라고 말해주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이야기 하다보니 시간이 꽤 흘렀다.
분명 곡을 들으러 작업실에 왔건만, 새 프로젝트 이야기가 점점 더 길어져 멈출 수가 없었다.
지난밤에는 정리되지 않고 사방으로 튀기만 했던 생각들, 회의 때 다 말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나둘 풀어갔다.
“기특하네, 내 동생. 앞으로도 이렇게만 커라.”
“제가 좀 기특하죠?”
“그 뻔뻔한 모습도 아주 좋아.”
“네? 제가 뻔뻔한 거면 세상에 안 뻔뻔한 사람이 없을걸요!”
언제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냐는 듯 서로 발로 툭툭 건드리며 장난을 치다 나는 그제야 마음이 후련해졌다.
“자, 그럼 이제 작업을 시작해볼까?”
“네!”
끈적하게 마음 깊은 곳에서 질척거리던 죄책감을 덜어낸 나는 기쁜 마음으로 준이 형에게 혹사당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인자하게 웃는 준이 형의 미소가 조금, 아주 조금 무서웠다.
* * *
“병아리들, 안녕?”
“그 입 다물지 못해?”
촬영 현장에서 마주한 DCL의 리우 형이 우릴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런 리우 형을 향해 준이 형이 상큼하게 웃으며 이를 악물고 말했고.
우리랑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이 서로에게 활짝 웃으면서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는 줄 알겠지….
리더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리우 형 뒤에 쪼르르 서 있던 DCL의 다른 멤버들은 금방이라도 이쪽으로 달려올 것 같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야호! 안녕안녕안녕!”
“잘 지냄? 머리 색 멋지네!”
아니, 정정. 눈이 마주치자마자 신이 나서 달려왔다.
불안한 예감으로 내가 몸을 살짝 뒤로 빼던 딱 그 타이밍에 DCL 멤버들이 목줄 풀린 강아지들처럼 달려와서는 우리 멤버들에게 매달렸다.
“야, 이것 좀, 놔봐!”
“환이 형! 살려줘!”
“에헤이,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워서 그러지!”
“그렇게 오랜만 아니잖아!”
휴이, 레노, 자인이 경환 형과 찬이, 세빈이한테 달려들어 매달려서 과한 반가움을 표출했다.
경환 형이랑 휴이는 또 언제 서로 반말할 만큼 친해진 거야?
한 발짝 뒤로 빼고 있었던 덕분에 DCL의 덮침에서 무사했던 나는 준이 형에게 배운 웃음을 머금고 멤버들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강하게 커야지, 얘들아. 하하
“아, 왜 우리한테만! 환이는 왜!”
“우리도 사람 볼 줄 알거든?”
“잘못 건드리면 개털릴 것 같잖아. 저 형은 쫌 무서움.”
“우리 애 안 문다.”
다들 키가 훤칠한 탓에 세빈이가 힘들어해서 세빈이만 쓱 잡아 뺐더니, 찬이에게 휴이랑 레노가 한 번에 매달렸다.
억울하다는 듯 버둥대는 찬이 외침에 태연하게 둘이 대꾸하자, 경환 형의 대답이 더 가관이었다.
“내가 강아지예요? 물긴 뭘 물어요. 전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해치지 않아요.”
“그럼. 우리 환이는 먼저 안 물지.”
“우리 형이 왜 형네 환이에요?”
“환이랑 나는 친구니까?”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는 휴이와 세빈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속세에 관심을 잠시 끊었다.
한쪽에선 준이 형과 리우 형이 으르렁거리고 있었고, 영빈 형은 가운데서 나랑 비슷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런 게 바로 개판이라는 거구나.
그래, 오늘 촬영이 뭐였더라?
잠시 현실도피를 하고 나니 상황은 자연스럽게 정리되고 있었다.
우리끼리 구석에서 왁자지껄 해후를 나누고 있었지만, 이곳은 엄연히 촬영을 위한 대기 장소였다.
아직 쩌리인 우리가 너무 오래 시끄럽게 하기엔 영 좋지 않은 장소였다.
“아, 나 좀 떨려.”
“왜?”
좌 휴이 우 세빈.
이 조합은 조금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그냥 두었다.
우리 세빈이야 착해서 놓으라면 놓겠지만, 휴이는 꼭 하지 말라는 건 찾아야 하는 청개구릿과였다.
새삼스럽게 떨린다는 휴이에게 눈길을 주자, 세빈이가 불퉁한 표정이 되어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줬다.
이번에 바뀐 헤어 스타일이 세빈이랑 잘 어울려 귀여움이 배가 된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만지기가 좋았다.
“나 이승 탈출 팬이란 말이야. 내가 유일하게 1화부터 다 챙겨본 프로야.”
“아아….”
‘까딱하면 이승 탈출’이라는 무서운 분위기를 풍기는 이 프로그램은 긴 시간 동안 사랑받아온 예능이었다.
옛날 같으면 우리 같은 신인은 불러 달라고 비는 것도 어려웠을 만큼 인기 절정의 프로그램이랄까.
한땐 이승 탈출을 못 보면 사람들 대화에 끼는 것도 어려울 정도였다.
뭐 지금은 케이블 채널이 많아지고 다양한 예능이 생겨 명성이 예전 같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보는 프로그램이라는 건 변하지 않았지만.
이승 탈출은 고정 출연진이 제작진의 미션을 깨면 상을 받고, 실패하면 벌칙을 받는 포맷이었다.
문득, 이 프로그램의 제작진들이 우리 언래블 스토리를 찍어주시는 분들의 선배라고 했었던 게 기억이 났다.
그 선배에 그 후배라고, 이 프로그램도 제작진이 고정 출연자와 게스트를 개고생시키기로 유명했다.
“갑자기 나 소름 돋았어.”
“왜요?”
“우리 힐링 캠프 끌려갈 때랑 비슷한 기분이 들었거든.”
“….”
갑자기 힐링 캠프 때가 생각나면서 팔에 소름이 돋아 주변을 휙휙 둘러보자, 세빈이는 덩달아 심각한 얼굴이 됐다.
“우리 또 섬에 버려지는 거 아니죠? 이제 날도 추운데….”
“설마. 그러진 않을 거야. 실내에서 하는 미션이었으면 좋겠다.”
시무룩해진 세빈이를 다독이며 이미 어둑해져 가는 방송국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대체 무슨 미션을 주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꽤 늦은 시간에 예능국으로 모이라는 안내를 받았다.
“인사 가자, 다들 오셨대.”
“아, 그래요?”
“같이 돌자. 그게 선배님들도 덜 번거로울 거야.”
우진 형과 DCL 쪽 매니저님이 다가왔다.
각 팀의 매니저 형이 등장하자 투닥거림이 끝났는지 맏형들이 우리에게 다가와 멤버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준이 형의 얼굴이 평소보다 조금 더 밝은 걸 보니, 리우 형을 잘 이긴 모양이었다.
그래, 우리 사이에서는 져도 다른 데 가서 지는 건 안 되지.
“우리 여기서 시작하는 거예요?”
“아마 그럴 것 같은데. 자세한 건 다 모이면 말해주겠다고 하시네.”
“으, 왠지 무서운데….”
실제 촬영 전까진 그 주 미션이 철저하게 숨겨지는 터라 우리는 오늘 어떤 미션을 깨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점점 어두워지는 창밖 풍경이 유난히 무섭게 다가왔지만, 우리가 도망칠 곳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