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보고 싶다는 그 말도(5)
우리는 이전 앨범과의 연속성 때문에 머리 색과 스타일을 데뷔 앨범과 동일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의상의 선택에도 어느 정도 제한이 있었던 상황이었고, 처음 우리가 쇼에 입을 의상을 받았을 때 우리끼리는 걱정하기도 했었다.
다른 의상은 그렇다 쳐도 수트에 어울릴까 하는 우려가 있었던 것.
그래서 가장 머리가 얌전한 하준 형과 영빈 형이 수트를 입는 것으로 정했었는데, 안타깝게도 한 벌은 두 형이 입기에는 길이가 살짝 짧았다.
키가 비슷한 경환 형에게도 짧아서 돌고 돌다 결국 내 몫으로 주어졌다.
부스스한 그레이 색상의 머리라 어울릴까 고민했었는데, 서포트 팀의 누님들이 잘 어울리니 걱정하지 말라고 해줘서 조금 마음을 놓고 있었다.
짙은 와인색의 수트는 조금 과감해 보였고, 흰색 바탕에 검은 테두리로 마무리된 행거치프와 검은 셔츠는 수트가 붕 뜨지 않도록 잘 눌러주는 것 같았다.
“수트가 주는 너무 정적이고 단조로운 느낌을 벗어나고 싶었어요. 생각보다 더 잘 어울려서 만족스러운데요?”
“정말요? 엄청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
직접 의상을 디자인했다는 학생분의 말에 그제야 안심이 됐다.
앞의 버튼도 잠그지 말고 느긋하게 워킹해 줬으면 좋겠다는 말에 꼭 그렇게 하겠다고 진지한 얼굴로 대답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른 한 벌은 영빈 형은 몸에 딱 들어맞는 흰색 블레이저에 검은색 슬랙스였다.
상의 끝단과 소매에는 검정 페인트를 흩뿌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독특해 보였다.
이전 생에도 정장을 자주 접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꽤 신기한 경험이었다.
하준 형은 베이지색의 품이 넉넉한 카디건을, 경환 형은 가죽 재킷을 입었다. 그동안 열심히 운동하고 다이어트한 덕분인지 다들 꽤 그럴듯했다.
“이렇게 입으니까 진짜 모델 된 것 같고 막 떨린다.”
화려한 프린팅의 맨투맨 티를 입은 찬이는 이런 의상들을 직접 만들어낸 학생들이 너무 멋있는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루즈핏 니트를 입은 세빈이도 신기한 듯 옷을 조심스럽게 만지다 경환 형이 입은 가죽 재킷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오늘따라 경환 형이 좀 멋있어 보이는 것 같아요.”
“오늘따라?”
“입 열어서 감점.”
“와, 짜다, 짜.”
“의상이랑 멘트랑 전혀 안 어울려서 또 감점이요.”
“세빈이는 유독 형한테만 가혹한 거 같다.”
“설마요. 찬이 형이면 모를까.”
“가만있는 나는 또 왜 끌고 나오냐.”
신랄한 막내의 평가에 경환 형은 가슴을 부여잡고 상처받은 척했지만, 조금도 통하지 않아서 찬이의 비웃음을 샀다. 그리고 그런 찬이를 세빈이가 비웃는 먹고 먹히는 관계.
그런 동생 라인의 주접에 이제는 포기한 건지, 준이 형과 영빈 형은 그저 허허롭게 웃고 있었다.
우진 형도 잘 차려입은 우리를 보는 게 새삼스러운지 옷매무새를 만져준다고 만지작거리며 칭찬하다 결국 가희 누나에게 혼나고 시무룩해졌다.
“헝클어지니까 옷은 만지지 마요!”
“너무해요, 가희 씨….”
“쫌…!”
DCL이나 새벽 형들이 입을 의상도 궁금했지만, 지금 사람 많은 곳에 나갔다가 옷을 망가트릴까 얌전히 기다리던 우리는 리허설이 시작한다는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자!”
“제발, 얘들아. 얌전히!”
“에헤이, 당연하죠. 저희는 원래 세상 얌전해요.”
경환 형이 결연하게 외쳤고, 준이 형은 멤버들이 흥분해서 실수라도 할까 봐 분위기를 조금 누르려고 했다.
하지만 누가 들어도 신빙성 없는 목소리로 찬이가 발랄하게 대답하자, 결국 포기한 듯 다치지만 말자고 중얼거렸다.
우리 준이 형이 저렇게 걱정 근심이 많은데 나라도 조심해야겠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가득한 무대 뒤편에는 사전에 고지받은 순서대로 의상을 갈아입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밝은 얼굴로 인사를 주고받았고, 쿵쿵거릴 만큼 커다란 소리로 준비되던 음향도 잠잠해졌다.
“나갈 순서는 스태프들이 알려줄 거예요. 그 순서 맞춰서 입장하면 가운데에서 양쪽 모델이 포즈, 그 후 각자 라인을 따라 워킹하고 무대 끝에서 다시 한번 더 포즈 후 퇴장. 모두 숙지하셨죠?”
“네!”
“잘 외웠습니다. 걱정 마세요.”
“준비됐습니다.”
“좋아요, 그럼 리허설 시작합니다.”
날카로운 눈초리를 가진 분이 다시 한번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일러주고 바쁜 걸음으로 사라졌다.
이 쇼를 위해 모셔온 유명한 패션쇼 전문 연출자이자 감독님이라고 우진 형이 말했던 게 기억났다.
무대를 사랑하는 만큼 굉장히 엄한 분이라고 했던 것도.
살짝 멤버들을 바라보니 세빈이랑 경환 형이 조금 긴장했는지 눈동자만 도로록 굴리는 게 보였다.
“표정 어떡하지? 되게 이상한 표정이면 이거 평생 박제 아냐?”
“어차피 우리 의상이 막 사랑스러운 옷이라고 보긴 어려우니까 차라리 무표정을 하자, 어때?”
“좀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해달라고 아까 스태프분이 말하고 갔는데….”
우리는 거의 끄트머리 순서를 배정받은 터라 모여서 우리끼리 근심 걱정을 나누고 있었다.
그때, 건너편에 새벽 형들과 DCL 분들을 확인하자 약간 마음이 놓였다.
앞쪽에 있는 다른 분들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가장 익숙한 새벽 형들이 보이니까 나도 모르게 조금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하필이면 포잉이 없어서….
평소라면 포잉과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시큰둥한 표정의 포잉을 보며 웃기라도 했을 텐데, 지금은 옆에 없었다.
‘포잉….’
‘왜 부르냐, 계약자야.’
‘포잉?!’
포잉이 숙소에서 자고 있을 걸 알면서도 왠지 부르고 싶어져 중얼거렸는데, 뜻하지 않게 포잉의 답이 들려왔다.
‘불러놓고 왜 말이 없음? 모지리 같이 혼자 허둥지둥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냐, 나 완전 잘 어울린다고 칭찬받았거든?’
‘거긴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밖에서 무대 보고 있으니까 나오면 봐주겠음.’
‘거기서 딱 기다리고 있어!’
갑자기 이유 모를 자신감이 들어차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바로 포잉 테라피라는 생각이 들면서 심신의 안정이 찾아왔다.
시선 처리가 어려울 때 늘 포잉을 바라보곤 했던 게 이제는 스스로에게 너무 익숙해진 것 같았다.
‘하여튼 너는 나 없으면 어떡하려고.’
‘안 없을 거잖아?’
‘말이나 못 하면.’
어째서인지 포잉과 대화할 때면 답지 않게 어리광을 부리게 되었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그리고 포잉의 등장과 함께 쇼의 시작을 알리는 노래가 시작됐다.
앞에 서 있던 분들이 하나둘 스테이지로 올라가는 걸 바라보던 찬이는 불안해하던 내 분위기가 변한 걸 느꼈는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왜?”
“갑자기 달라진 것 같아서? 무슨 좋은 일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뭐야, 공유해 줘!”
“맞아, 공유해 줘요!”
“아니, 세빈아 넌 뭔 줄 알고 공유해달래.”
“그냥 뭐든?”
찬이가 옆구리를 콕콕콕 찌르자 세빈이는 뭔지도 모르고 따라 하고 있었다.
이래서 조기 교육이 중요한 건데 아무래도 세빈이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망한 건가 싶었다.
“긴장은 좀 풀렸어?”
“네. 이제 좀 괜찮은 것 같아요.”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변한 영빈 형이 물어왔다.
형이 지금 내 걱정을 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음악을 뚫고 무대 뒤쪽까지 들려오는 감독님의 피드백 소리에 멤버들은 자신들이 혼나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건지 다들 얼굴색이 영 말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멤버들도 조금 다독여야 할 것 같아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입을 열었다.
“우리만 이 무대를 서는 건 아니지만… 쇼케이스나 콘서트 같은 무대라고 생각을 했어요. 우리를 보고 싶어서 솜뭉치들이 한가득 모였다고 상상하니까 한결 긴장이 가라앉더라고요.”
“하긴, 솜뭉치들한테 뻣뻣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으니까.”
“여기 입장표를 산 솜뭉치들이 있을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 우리 팬 사인회 때도 솜뭉치들이 카메라 들고 와서 막 찍었잖아.”
애들을 다독여야 한다고 생각했더니 말이 술술 잘도 흘러나왔다.
내가 한 말이 그럴싸하다고 느꼈는지 준이 형도 영빈 형도 고개를 끄덕였고, 세빈이는 마냥 낯선 공간이라고 느꼈던 무대를 새삼스럽다는 듯 바라봤다.
“기자들 카메라여도 그냥 솜뭉치들 카메라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 흑역사 영상 기억하죠?”
“윽… 그거 진짜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데 안 지워지더라.”
“우리가 무대에서 실수하거나 나무토막 같은 모습을 보이면 그게 다 솜뭉치들 사진에 남아서 흑역사가 되는 거예요.”
내 목소리에 집중하던 멤버들 얼굴이 일순간에 핼쑥해졌다.
같은 쪽 팔다리가 동시에 나가는 나무토막 같고 창백한 자신이 찍힌 사진을 상상하는 것 같았다.
“…그것만은 안된다. 진짜로.”
“솜뭉치들이 우리 흑역사를 또 액자로 뽑아오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막아야 하지 않겠어요?”
액자를 언급하자 준이 형 몸이 움찔했다.
슬프지만 형네 방과 우리 방 한구석에 홍삼 짤과 살려주세요 짤이 액자에 고이 담겨 있었다.
솜뭉치가 직접 뽑아다 준 사진이라 차마 버리지 못하는 바람에 한쪽에 얌전히 둘 수밖에 없었다.
우진 형이 직접 액자를 챙겨서 방에 고이 넣어주는데 어쩜 그렇게 그 모습이 얄밉던지!
“오늘 반드시 성공적으로 무대를 돌고 나온다. 얘들아, 알겠지?”
“그동안 워킹 교육도 받았으니까 아쉬움 남기지 말고 잘하고 옵시다.”
멤버들 마음에 의욕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짧은 시간 궁리해서 한 말이었지만, 우리 애들한테는 그럴싸했던 모양이었다.
순서가 다가올수록 긴장해서 몸이 굳는 게 보였던 멤버들이 순식간에 활활 불타올랐다.
머리를 맞대고 우리끼리 소곤거리다 다들 기합이 단단히 들어간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자, 우리를 지켜보던 가영 형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DCL의 리우 형과 휴이는 희한한 걸 본 것마냥 이상한 표정이 되었지만, 일단은 그쪽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말을 꺼낸 건 나지만 솔직히 나도 흑역사 짤은 더 이상 선물 받고 싶지 않았다.
이왕이면 멋진 모습을 보이면 좋잖아?
의지를 활활 불태운 덕분인지 우리는 별다른 지적 없이 리허설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특히나 영빈 형과 세빈이는 포즈 할 때 표정이 괜찮았다고 감독님에게 칭찬을 받기도 했다.
우리 애들이 칭찬을 받다니!
주체할 수 없는 기쁨에 세빈이를 껴안고 둥기둥기 이쁘다 이쁘다를 하고 있자, 키스 형이 다가왔다.
“얘는 또 왜 이렇게 팔불출 같은 표정으로 이러고 있냐.”
“우리 세빈이가 칭찬을 받았어요! 영빈 형도요!”
“아, 진짜 형! 창피해요!”
“오, 우리 병아리가 무대 체질인가 봐?”
키스 형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에 조금의 놀림이 담겨 있었지만, 이미 우리에게 실컷 우쭈쭈 받은 터라 세빈이는 더 빨개질 얼굴이 남아있지 않았다.
“저기요, 조금 소란스러운데요.”
그러던 그때, 조금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목소리의 주인공과 시선이 마주쳤다.
시선 가득 짜증이 서려 있어 재빨리 고개 숙여 사과했다.
“무대가 처음인 것 같은데 그렇게 가볍게 굴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목소리는 우리에게만 들릴 만큼 작았지만 또렷하게 귀에 박혔고, 들떠있던 멤버들의 얼굴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가요계 쪽 선배는 아니었고, 얼굴이 조금 익숙한 걸로 보아 배우인 것 같았다.
일을 크게 만들면 우리만 곤란해질 것 같아 재빨리 고개 숙여 사과했더니 멤버들도 우르르 따라 했다.
“내가 못되게 군것 같으니까 고개 숙이지 말고요. 됐으니까 조심해 주세요.”
주변의 시선이 꽂히는 게 거슬렸는지 그 말을 내뱉고 뒤를 돌아서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키스 형이 입을 열었다.
“이재영 씨, 되게 예민하시네요.”
키스 형…! 안돼! 싸우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