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보고 싶다는 그 말도(4)
도착해서 의상을 확인하던 나민수, 이영진 두 형님에게 인사를 건네고 그다음으로 마주한 사람은 진우 형이었다.
무인도에서 너무 잘 먹어서 살이 올랐다며 의상이 맞을지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하길래, 우리도 이미 의상이 조금 안 맞더라며 얼른 입어보라고 등을 떠밀어줬다.
최대한 빠르게 인사를 건네는 사이 모르는 얼굴들도 하나둘 보였다.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고 얼굴을 외웠지만, 주로 마주칠만한 사람들을 우선으로 하다 보니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얘들아, 잘 지냈니?”
“어? 지현 누님, 효정 누님 안녕하세요!”
“잘 지냈지. 너희도 여기 출연한다고 들었는데 바빠서 얼굴 한 번을 못 봤네.”
드라마 ‘지금, 우리’의 두 주연 여배우들이었다.
소탈하게 웃으며 하준 형의 어깨를 두드리는 효정 누님은 졸업식 녹음과 촬영을 함께 했던 이후 가끔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다.
지현 누님은 음악 방송에서 특별 무대 후 다겸 형까지 해서 다 같이 종종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고.
워낙 사교성이 좋은 사람들이라 멤버들과 내가 어색해하지 않도록 친근하게 대해준 덕에 지금까지 연을 잘 이어가고 있었다.
나중에는 그 채팅방에 효정 누님까지 초대했는데, 채팅방에서 우리가 주로 나누는 대화는 음식 이야기였다.
다이어트에 시달리는 건 모두가 마찬가지였던 터라 늘 먹고 싶은 음식 이야기를 나누느라 잠깐 확인 안 하면 몇십 개씩 미확인 메시지가 표시되곤 했다.
“나 여기 선다고 다이어트 하느라 배고파 죽겠어….”
“나도. 어제부터 물도 조금 마시고 있다니까.”
“언제쯤 다이어트 없이 마음껏 먹고 살 수 있을까요….”
누님들과 찬이는 그사이 또 먹는 얘기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예나 선배님 안녕하세요! 언래블입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는 거죠?”
“네!”
미궁 탈출 시즌 1에서 대활약을 펼쳤던 미리내의 보컬 예나 선배님도 만날 수 있었다.
스케줄이 바쁜 터라 미팅 때는 보지 못했지만, 참여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꼭 한번 뵙고 싶었었다.
미궁 탈출 때 보여준 과감한 결단력과, 진짜 벽들 사이 숨겨진 스티로폼 벽을 부수던 장면이 너무 인상 깊었던 탓이었다.
미궁 탈출에 출연했던 이야기를 짧게 꺼냈더니 금방 환하게 웃으며 안되면 부숴버리면 된다는 과격한 발언을 했다. 경환 형은 역시 전설은 다르다며 감탄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차, 나 말 이렇게 하는 거 매니저한테 걸리면 안 되니까 비밀이에요?”
“저희 입 무거워요. 걱정 마세요!”
입에 지퍼 잠그는 시늉을 하는 찬이를 귀엽다는 듯 바라봐 준 선배님은 애타게 부르는 매니저 모습에 작게 욕을 중얼거리고 뛰어가셨다.
작고 아담한 체형으로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는 모습과는 다르게 과격한 발언. 처음엔 당황했던 세빈이도 뛰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멋있는 선배님이라며 눈을 빛냈다.
“안돼, 세빈아. 바른 말 고운 말 쓰기로 형이랑 약속했잖아.”
“전 언제나 바른 말 고운 말만 쓰고 있어요.”
“그렇지. 그러니까 가영 형한테도 물들지 말고….”
“환이, 지금 내 흉본 거야?”
“으악!”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떠난 선배님을 뒤로하고 세빈이를 붙잡아 정신 교육을 시키는데 뒤에서 불쑥 가영 형이 튀어나왔다.
이 형님은 도대체 어디서 이렇게 자꾸 나타나는 거야?
“형, 진짜 우리 막내 소중하니까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마요!”
“와, 내가 언제 이상한 거 가르쳤냐!”
“저번에 녹음할 때요!”
“세빈아, 들켰어?”
“하하하하… 넵.”
간혹 가영 형이 세빈이를 데리고 무언가 열심히 이야기하길래 세빈이를 붙잡고 캐물었더니, 만만하게 보이지 않는 법을 배운다는 이야길 듣고 고개를 갸웃했었다.
하지만 그 상세한 내용이 범상치 않아 절대로 사람들한테 그렇게 대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해놓은 터였다.
우리 애한테 자꾸 이상한 물 들이면 당장 세비 형에게 일러줄 테다.
“의상 입어봤어요?”
“하, 그렇게 작고 귀여웠던 환이가 이제 형 앞에서 말을 돌리고….”
“작고 귀여웠던 적 없거든요?”
“저희는 의상이 좀 안 맞아서 스태프분들한테 말했는데, 형은 괜찮아요?”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대부분 인사를 끝낸 터라 형들이랑 이야기를 나누며 긴장이라도 조금 풀어보자 싶었는데, 한쪽에서 우당탕 소리가 났다.
“어? 뭐야, 무슨 일 있나?”
소란스러운 현장에서도 귀에 꽂힐 만큼 큰 소리였던 터라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소리가 난 천막 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아서라, 괜히 시선 주고 관심 주다 잘못 걸리면 너희만 피 보니까 관심 끊어.”
“네?”
멤버들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힐끔거리자 가영 형은 평소보다 조금 냉정한 목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
“온갖 사람이 다 모이는 자리에는 언제나 사건 사고가 생기기 마련이야. 신입 애기들이 괜히 구경하다 불똥 튀어서 놀라지 말라는 말이야.”
“네!”
씩씩하게 대답하는 찬이가 마음에 들었는지 가영 형은 찬이 머리를 만지려다 세팅해둔 머리라는 걸 알고는 어깨를 두드려줬다.
눈동자를 굴리던 경환 형을 준이 형이 단속하는 사이 우리는 한쪽 구석으로 자리를 옮겨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리허설과 본무대는 아직 시간이 꽤 남은 터였다.
“리허설 때 보자.”
최근 작업하는 곡과 무인도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던 중, 득달같이 벨 소리가 울리자 가영 형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핸드폰을 다시 뒷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팔랑거리는 나비처럼 가볍게 손을 흔든 가영 형은 이제 돌아다니지 말라며 배정된 천막으로 우리를 떠밀었고, 우리는 얌전히 안으로 돌아왔다.
평소 가영 형의 모습과는 꽤 다른 모습이었지만, 우리보다 훨씬 많은 사람을 겪어본 형의 조언이기에 얌전히 따랐다.
“어휴, 사람이 많으니 난리네, 난리야.”
“형, 왔어요?”
인사할 때까지 함께 있었던 우진 형은 예나 선배님과 인사 후 잠시 볼일을 보고 올 테니 얌전히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비웠었다.
“응. 너희 의상 다시 입어봐. 아예 다른 거랑 바꿔주신 것도 있고, 살짝 손본 것도 있더라.”
“밖에 무슨 일 있어요?”
“아, 의상에 문제가 좀 있었나 봐. 그거 때문에 어떤 분이 화가 좀 나서 다툰 것 같더라.”
의상을 다시 입은 우리가 우진 형에게 넌지시 묻자, 우진 형은 한숨을 내쉬며 답해주었다.
꽤 큰 행사가 되어버린 탓에 다들 조금 예민해진 것 같다는 말을 덧붙이며 우리에게는 리허설 전까지 여기에 있으라는 말을 남겼다.
우리는 결국 천막 바닥에 동그랗게 앉아 아까 이리저리 인사하며 구경했던 바깥 풍경을 이야기했다.
음악 방송 때나 예능 프로그램 촬영 때랑은 또 다른 낯선 분위기였다.
굉장히 많은 인원의 스태프들이 사방으로 뛰어다녔고, 그들의 대부분이 학생들과 자원봉사자들이라는 것도 우리에겐 신기했다.
“밖은 야생의 정글 같으니까 우리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자.”
“맞아. 우리처럼 힘없는 소동물은 순식간에 뼈도 못 남기고 사라질 거야.”
“그럼 새벽 형들이나 다른 형님, 누님들이 육식 동물이야?”
“어, 말이 그렇게 되나?”
“그거 전해드려도 돼요?”
“세비나, 왜 그러니. 뭐가 마음에 안 드니.”
우리끼리 속닥거리며 세빈이가 딜을 시도했고, 찬이가 방어했다.
매일같이 투닥거리는데도 정작 둘은 한 번도 싸우지 않은 걸 보면… 어쩌면 둘이 가장 잘 맞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이 오랜만에 저렇게 웃는다.”
“네?”
“그 씨암탉 할머니.”
“아니, 좀 하나로 통일해요…. 아빠와 할머니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구요.”
무의식적으로 포잉이 있을 법한 구석을 바라보다 허전함을 느끼곤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포잉이 피곤해 보여 숙소에서 쉬라고 했는데, 늘 옆에 있던 작은 털 뭉치 같은 포잉이 없으니 이건 이것 나름대로 기분이 이상했다.
그때, 석환 형이 다가와 DCL 분들이 인사차 왔다고 알려왔다.
“하이하이!”
“요! 차니 하이!”
“제대로 인사 안 하냐!”
“우린 차니랑 이렇게 인사하는데!”
“여기 힘찬이만 있냐?”
오늘도 기운 넘치는 빨간 머리 레노, 파란 머리 자인의 목소리와 그 둘을 다그치는 리우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좀 늦었네?”
마음을 달리 먹은 탓인지 아니면 준이 형과 영빈 형의 친구여서인지 모르겠지만, DCL은 다른 그룹들과 달리 몇 번 만나지 못했는데도 조금 편했다.
어쩌면 준이 형, 영빈 형의 얼굴이 전구라도 켠 것처럼 환해져서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 애들이 좋으면 그걸로 됐지 뭐.
“다른 선배님들한테 인사는 다 했어?”
“어. 너희가 마지막이야.”
영빈 형은 슬쩍 리우 형의 옆에 앉아 말을 걸었고, 멤버들은 조금씩 뒤로 물러나 DCL 멤버들이 앉을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애당초 인원이 많다 보니 다른 사람들보다 큰 공간을 배정받았지만, 6명의 멤버들에 DCL 멤버들까지 앉으니 빈틈없이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아, 좁아. 야, 니네 가.”
“야, 지금 왔는데 쫓아내냐?”
“안돼! 하준 형, 우리 쫓아내지 마요!”
“맞아! 쫌만 놀다 가게 해줘요!”
준이 형은 괜스레 투덜거리며 리우 형의 옆구리를 툭툭 건드렸고, 그 모습에 휴이와 자인이 내 양쪽 팔을 잡고 흔들며 외쳤다.
“아니, 가만있는 내 팔은 왜?”
“환이가 실세라고 했으니까?”
“그 잘못된 정보는 어디서 나온 걸까…. 설마 힘찬이가 그런 거니?”
도대체 나에 대해 어디서 어떻게 이야기가 돌아다니는 건지 몰라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지만, 실상 그런 말을 할만한 사람은 어차피 세 명밖에 없었다.
“이번엔 나 아니다!”
“형은 아무 말도 안 했다.”
찬이와 경환 형이 극구 부정하길래 슬며시 우리 막내를 바라보니 어색하게 웃는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솔직히 지환이가 우리 팀에서 제일 발언권 센 건 맞지.”
“왜 또 말이 그렇게 흘러갑니까….”
준이 형과 영빈 형까지 슬며시 동조의 뜻을 비치자 나를 바라보는 휴이의 눈이 번쩍거린다.
“오해가 심하시네요. 전 그냥 밥 주는 사람과 멤버 그사이 아닙니까.”
“밥 주는 사람이 최고지.”
휴이가 내뱉은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그건 맞는데, 난 좀 빼주면 안 되겠니?
* * *
잠에서 깨어난 포잉은 찌뿌둥한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몸을 풀었다.
전날 상급 요정들과 장로들에게 중간보고를 하느라 계약자가 잠든 사이 일을 치르고 왔더니 피곤해서 따라 나갈 수가 없었다.
다행히 뒤틀림은 안정되었고, 큰 변수만 없다면 앞으로의 일은 이제 온전히 계약자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는 말에 겨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슬슬 계약자를 찾아가 볼까 싶어 앞발로 열심히 얼굴을 단장하고 온몸의 털을 핥아 정갈히 정리한 후 텅 비어있는 숙소를 한 바퀴 돌며 확인했다.
혹시라도 질이 좋지 않은 무언가가 포잉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는지 매일매일 확인하고 있었다.
계약자도, 같은 팀 인간들도 모두 나간 후, 고요한 숙소는 잠들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인간들이 자기들끼리 엉켜서 굴러다니던 거실 바닥은 폭신한 러그가 깔려있는데도 싸늘한 느낌이 들었다.
소란스럽고 정신없는 인간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들이 숙소에 있어야 이 공간이 살아있는 것 같았다.
그들이 거실에 한 덩어리처럼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 때면 숙소 전체가 털실 뭉치같이 복슬복슬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모두 잠들어 고요가 이 공간에 내려앉을 때는 늦가을 낙엽이 쌓이는 것처럼 고요하고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도 숙소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포잉은 계약자의 위치를 천천히 더듬어갔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또 어디서 무슨 짓을 해놓을지 예측할 수 없는 사고뭉치였기에 귀찮지만 꼭 신경을 써야 했다.
“내 팔자야….”
포잉이 문을 나서며 푸념하듯 중얼거렸지만, 포잉의 꼬리는 주인의 목소리와는 달리 기분 좋은 것처럼 느릿하게 살랑이고 있었다.
여전히 솔직하지 못한 요정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