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보고 싶다는 그 말도(3)
마주치는 회사 분들에게 꾸벅거리며 인사를 하며 부지런히 내려간 1층에는 기다란 다리를 뽐내는 우리 준이 형이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형!”
“얘기는 잘했어?”
“아씨, 너 홀랑 다 말했어?”
“아니? 걍 너랑 얘기 좀 하느라 늦는다고 했는데.”
“찬이 무슨 일 있구나.”
자기 무덤을 직접 정성껏 파는데 기깔난 재주가 있는 우리 찬이 어쩌냐.
애꿎은 나에게 원망 어린 시선을 보내던 배은망덕한 놈은 준이 형이 어깨동무를 해오자 굳었다.
그러게 늘 입을 조심해야 한다니까.
내게 구원의 눈빛을 보내는 찬이를 해맑게 웃으며 무시해 줬다.
미안, 어쨌든 난 하준 형 편이다.
“그래, 룸메인 형한테는 못 할 말이 있을 수도 있지. 리더여도 못 미더운 형이면 말 못 할 수도 있고.”
“아니, 그게 아니라!”
“괜찮아, 형은 다 이해한다. 형이 듬직하지 못할 수도 있지 뭐.”
“아 쫌! 또 일부러 그런다!”
서글서글한 눈매는 평소와 같았지만, 탐색하듯 찬이를 꼼꼼히 훑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팔에 죽죽 그어진 붉은 자국들에 시선이 스치자 연한 갈색의 눈동자가 어둑하게 짙어졌다.
하준 형의 눈동자에는 자책감인지 우려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눈 안에 가득했지만, 찬이는 놀리듯 자신을 쿡쿡 찔러오는 말에 파드득거리며 반항하느라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게 누가 둘이서만 친하게 지내래.”
“언제는 둘이 좀 사이좋게 지내라면서요.”
“그건 그렇지. 이제 둘이 좀 친해졌어?”
“준이 형, 졸려요? 오늘따라 말이 왜 지 맘대로야.”
“몰라. 일단 돌아가자, 집에.”
집이라는 말이 이토록 커다란 울림이 있는 단어였을까.
낯선 공간을 숨 쉴 수 있는 편안한 공간으로 만들어 준 건 하준 형의 노력이었다.
“걸어서 갈까?”
“걸어갈 수 있어요?”
버스를 타려나 했는데 회사를 나서던 준이 형이 우리를 돌아보며 물었다.
“걸어가면 40분 정도 걸린다는데.”
“괜찮을 거 같은데. 밤이라 바람도 시원하고.”
“그래. 슬슬 걸어가면서 이야기나 하자.”
늦은 시간이라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아 마스크를 하지 않은 우리는 밤공기가 주는 묘한 여유로움에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문득 아쉬워졌다.
겨울이었으면 지금 쉬는 숨이 모두 색을 가지고 허공으로 흩어질 텐데.
찬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여서인지 모르겠지만 유난히 몰랑몰랑한 기분이 들어 멤버들 사이에서 발을 맞춰 걸었다.
“이렇게 셋이서만 걷는 건 처음인가?”
“그쵸. 보통 다 같이 움직이거나 하는데 이 조합으론 처음인 것 같은데.”
“어, 그러게? 환이랑 둘이서는 돌아다녀 봤는데.”
“그치. 이사 전 숙소 소개 때도 둘이 GIVE 앱 시작했고, 가끔 산책할 때도 같이 하니까.”
준이 형이랑 둘이 얘기했던 날도 많았고, 찬이랑은 가끔 같이 산책을 하곤 했다.
하지만 정작 셋이 함께 외출했던 날은 없어서 괜히 기분이 좋았다.
각자의 숨소리와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의 소음, 드문드문 스치듯 바쁘게 사라지는 사람들의 걸음 소리가 배경음처럼 느껴졌다.
한동안 서로에게 별다른 말 없이 차분한 분위기를 즐기며 걸음을 옮기다, 문득 찬이가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아씨….”
“이리 와.”
입술을 꾹 깨문 찬이의 두 눈에서는 서러운 눈물이 툭 하고 떨어지고 있었다.
길 한복판에서 울다 혹시라도 사진 찍히면 얼마나 쪽팔리겠어.
준이 형이 찬이 손을 잡고 길 한쪽으로 이끌었고, 혹시나 싶어 나는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길 위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쪽팔리게 왜 눈물 나고 난리야.”
“문지르지 마, 인마. 붓는다.”
자기가 울고 있다는 것조차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눈가를 벅벅 문지르려는 무식한 손길을 준이 형이 막았다.
가뜩이나 잘 붓는 애가 섬세함이라고는 먹고 죽으려고 해도 없어서 참 손이 많이 갔다.
그대로 놔두면 또 입술이고 손이고 계속 물어뜯을 기세라 형이랑 내가 한쪽씩 손을 잡고 혹시 모를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찬이를 가려줬다.
“걍 울어. 머리가 힘들다고 하소연하는데 주인이 미련해가지고 몰랐던 건데 그걸 왜 참아.”
“시끄러.”
“저건 꼭 할 말 없으면 시끄럽대.”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지 마. 쪽팔려.”
준이 형은 묵묵히 움찔거리는 찬이 손을 꾹 쥐고 있었고, 나는 가슴앓이 하느라 서러웠을 찬이에게 시답잖은 농을 던졌다.
생긴 거랑 달리 벌레 한 마리만 날아들어도 죽는다고 소리 지르고 도망치는 연약하디 연약한 친구니까 창피하지 않게.
자기가 왜 우는지도 모르면서 뭐가 그리 서러웠는지, 힘찬이는 한참을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울었다.
겨우 진정이 된 건지 눈물이 멈춘 얼굴은 누가 봐도 흠뻑 울고 난 얼굴이라 한숨이 절로 나왔다.
“너 숙소 가면 바로 씻으러 들어가. 이 얼굴이면 말 안 해도 알겠다.”
“그 정도야?”
“어. 붕어 같아.”
“영빈이한테 경환이랑 세빈이 일찍 재우라고 했어. 도착하면 애들 아마 잘 거야.”
사려 깊은 우리 리더는 혹시라도 찬이가 불편해할까 봐 이미 숙소에 있는 멤버들에게까지 이야기를 해둔 것 같았다.
“나랑 룸메라 다행이지?”
“어… 다행이네.”
누나가 챙겨줬던 손수건을 꺼내 못난 얼굴을 꾹꾹 눌러 닦아줬다.
“뭐야, 환이 손수건도 가지고 다녀?”
“누나가요.”
“아… 누님이.”
의외라는 듯 중얼거리던 하준 형이 누나라는 말에 금방 납득하고 웃었다.
손수건.
두 누나가 모두 나에게 손수건을 쥐여주었다.
그중에 쓰인 건 지금의 누이가 준 손수건뿐이지만…. 이제는 익숙하게 지을 수 있는 헤픈 웃음만 나왔다.
그리움에 잠겨 죽을 것 같았던 감정도 이제는 한 꺼풀 꺾여 남은 것은 아려오는 가슴의 통증뿐이었다.
보고 싶다는 말에 다 담을 수 없는 무거운 감정은 하루하루 조금씩 하얀 재가 돼서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엄마, 아빠, 그리고 누나에게 하루하루 이별을 고하는 중이었다.
다시 걷기 시작한 우리는 간간이 찬이가 중얼거리는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응’하고 대답을 하기도 하면서 밤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울면서 가슴에 고인 것들을 조금은 흘려보낸 건지 찬이의 목소리는 엉망이었지만, 두서없이 흘러나오는 말들은 묵직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멀었지만, 그동안 가슴 속에 쌓여있던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다 끝나기도 전에 도착해버렸다.
“급할 거 없잖아. 어차피 우리는 앞으로도 쭉 같이 있을 텐데.”
“응….”
평소에 나누던 대화처럼 무덤덤한 목소리가 좋았던 건지 찬이도 순순히 웃으며 답했다.
준이 형이 말했던 것처럼 다들 자러 들어갔는지 거실에는 영빈 형 혼자 있었다.
“왔어?”
“응. 애들은 자?”
“잔다고 했는데 뭐, 모르지. 너희도 얼른 자라.”
“응. 고마워, 빈아.”
“별걸 다.”
혹시라도 자는 애들이 깰까 낮은 목소리로 두런두런 대화하는 두 맏형의 모습이 자연스러워서 웃었다.
우리가 잠든 사이에도 형들은 이렇게 둘이 멤버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겠구나 싶었다.
정말 다행이다.
저 둘이 언래블의 맏형들이라.
녹신해진 몸을 끌고 들어간 방에는 경환 형이 침대에 기대 책을 읽고 있었다.
“형, 안 잤어?”
“어. 너 오는 거 보고 자려고 했지. 많이 늦진 않았네.”
무뚝뚝한 얼굴에 걱정이 스며있었기에 침대에 누우며 입을 열었다.
“찬이가 좀 힘들어해서 같이 이야기 좀 했어요.”
“응.”
“걔가 아닌척하면서도 좀 섬세한 구석이 있잖아요?”
“섬세하게 생겨서 둔한 너도 있고.”
조금 잠겨있는 낮은 목소리가 조용조용 내 말에 대답해 줬고, 나는 베개를 끌어안는 척 포잉을 품에 안으며 이 걱정 많은 형님을 달래주었다.
고롱고롱 기분 좋은 울음을 내는 포잉의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으며 수많은 말들을 담고 그렇게 잠이 들었다.
* * *
“아악! 쌤! 나 죽어요!”
“이 정도로 안 죽어! 정신 안 차려?”
그 대화들이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찬이는 평소의 컨디션으로 돌아왔고, 평소처럼 멀끔한 얼굴로 못난 짓을 해서 제영 쌤의 애정을 듬뿍 받고 있었다.
“쟤는 자기 무덤 파는 건 세계 제일인 거 같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 세빈이는 점점 똑똑해지는구나?”
“헤헷….”
물을 들이켜며 찬이가 지옥의 스트레칭으로 앓는 걸 구경하던 나는 세빈이와 시시덕거리며 즐거워했고, 경환 형은 짧게 혀를 찼다.
“너희는 어째 점점 애들이 이상해지냐.”
“이상해지다니, 우리 팀에 솔직히 나만큼 정상인이 어딨어요.”
“…경환아, 포기해, 쟤는 진심이야.”
옆에서 숨을 고르던 영빈 형까지 넌지시 한마디를 보태왔다.
“아으… 죽을 거 가타….”
얼마 후 사지가 흐물흐물해진 찬이가 허우적거리며 우리 쪽으로 왔고, 우리는 슬쩍 찬이를 피했다.
“물 마셔. 곧 움직여야 된다.”
“네에….”
언제 왔는지 우진 형이 우리를 채근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오늘, 우리가 패션쇼 무대에 서는 날이었다.
기합을 단단히 넣은 우리보다 함께 의상을 챙기고 준비해 주는 서포트 팀의 두 누님들이 더 긴장한 것 같았다.
“세상에, 우리 애들이 이런 무대에 서다니.”
“다른 사람들한테 기죽을 수 없어. 오늘 진짜 잘해야 된다.”
다른 팀보다 빨리 도착해서 준비해야 한다며 우리를 그렇게 채근하더니, 우리 몫으로 주어진 천막 안에서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누나, 괜찮은 거지?”
“난 괜찮아! 그럼!”
눈에서 불이라도 나올 것 같은 박력에 말을 걸었던 찬이가 슬며시 뒷걸음질 쳤다.
희주 누나와 가희 누나가 저렇게까지 불타오르는 모습은 처음 보는 터라 우리는 약간 질려있었다.
얌전히 메이크업을 받고 머리를 다듬는 동안 우리가 입을 의상이 전달되었고, 사이즈가 맞는지 체크하기 위해 다들 옷을 갈아입을 준비를 했다.
“요, 병아리들 일찍 왔네?”
“가영 형? 키스 형이랑 세비 형은요?”
“세팅 중. 난 인사 먼저 하려고 왔지.”
“형은 긴장 안 돼요?”
“음? 하하, 뭐 다 어떻게든 되더라고.”
저 형은 무인도에서도 어떻게든 된다며 근심 걱정 없는 자태를 뽐내더니 이번에도 마찬가지라 평소처럼 헐렁해 보이는 그 여유로움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얘들아, 안녕? 우리 리더가 또 민폐를 끼치고 있을 것 같아서 왔어.”
“형, 어서 와요!”
이리저리 우리 의상을 구경하던 가영 형은 결국 체포하러 온 세비 형에게 붙잡혀 갔다. 그 사이 우리는 의상을 입어보며 체크한 것들을 화연대 학생분들에게 최대한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여기 품이 좀 남아서….”
“그사이 살 빠진 거예요? 저번에는 얼추 맞을 것 같았는데.”
“저희가 다이어트가 일상이라.”
무인도에서 열심히 먹었지만, 그만큼 고생했던 덕인지 나랑 세빈이 영빈 형은 허리가 조금 줄었다.
반면, 경환 형과 찬이는 예상보다 팔이 짧아서 경아 씨와 민지 씨가 머리를 싸맸다.
“한 달 사이에 키가 더 큰 거예요? 어떡하지!”
“의상 바꿀 수 있을까?”
“내가 체크해 보고 올게!”
속속들이 쇼에 설 출연진들이 도착한 건지 사방에서 여러 목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왔다.
“어떡하지? 갑자기 막 떨린다.”
“아까까진 사람이 별로 없어서 괜찮았는데.”
우리가 무대에 설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막내라 인사를 하러 다녀야 했다. 천막을 나가려던 우리는 무심코 바라본 밖의 모습에 기가 질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었고, 고개를 어느 쪽으로 돌리든 까마득한 선배들만 있었다.
평소라면 가장 윗대의 선배님을 찾아가 먼저 인사를 드리는 게 맞지만 지금처럼 현장이 바쁜 상황에서 무작정 돌아다녔다가는 거치적거리게 된다.
“우진 형, 어떡해요?”
“가장 가까이 계신 분들부터 한 분씩 차례로 인사드리자. 바쁠 것 같으면 슬쩍 보고 다른 분들한테 인사드리고 오면 되니까 겁먹지 말고.”
인사 순서 꼬여서 찍혔다는 풍문도 들었던 터라 바짝 졸아있던 우리는 우진 형의 뒤에 얌전히 섰다.
부디 오늘 하루 무사히 넘어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