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170)화 (170/456)

170. 보고 싶다는 그 말도(2)

상담을 끝낸 하준은 자리에서 일어나다 상담사를 바라봤다.

“하준 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저희 멤버들은 괜찮나요?”

조금 곤란한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놓치지 않고 유심히 지켜보던 하준은 상담사의 답을 기다렸다.

“하준 군도 알다시피 상담사는 다른 내담자의 상황을 이야기할 수 없어요. 그건 같은 내담자한테도 마찬가지랍니다.”

“저희 애들이 아프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해주세요. 저도 적극적으로 도울게요.”

그런 하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상담사가 인자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하준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여태까지 상담이 진행되는 동안 신체적인 스킨십이 한 번도 없었던 터라 하준은 조금 놀랐다.

“하준 군이 멤버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다른 멤버들도 서로를 얼마나 아끼는지 조금은 알아요.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서로가 아닌 각자가 먼저 좋아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이제 괜찮….”

“모든 멤버들이 그렇게 말한다면 믿을 수 있겠어요?”

“….”

하준은 멤버들을 떠올리며 할 말을 잃었다.

하나같이 전부 자기는 괜찮은데 다른 애들은 어떠냐고 물어볼 만한 놈들이어서 상담사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함께 이야기를 나눈 지도 두 달쯤 되었을까요? 몇 번 못 만나긴 했지만 신뢰할 수 있는 관계라는 게 그렇게 단시간에 되는 게 아니니까 조금 더 나를 믿어줄래요?”

“네.”

버릇처럼 작은 한숨이 하준의 심란한 마음처럼 흘러나왔다.

그 모습에 조용히 웃던 상담사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준 군은 스스로를 조금 더 아껴줬으면 좋겠네요. 아, 정 답답하면 멤버들끼리 속 깊은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누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거예요.”

한쪽 눈을 찡긋하고 덧붙여준 이야기에 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들이랑 진지하게 이야기를 할 시간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리면서.

* * *

매일 아주 조금의 시간이라도 작업실의 컴퓨터 앞에 앉아있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언래블에게 할 일이 많아서 기뻤지만, 그렇다고 다른 멤버들보다 뒤처지고 싶지는 않은 마음이 늘 이율배반적이어서 할 수 있는 걸 하자고 그렇게 마음을 먹고 있었다.

그전에는 언래블이 잘 되는 것만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했었다.

우리 애들이 겪어야 했을 수많은 고통이 조금이라도 덜어지길 바라곤 했다.

좁고 작은 내 세계에서 더 큰 세상을 알게 해줬던 만큼 그 이상의 보답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첫 단추부터 달라진 언래블은 내가 아는 것들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걸어가고 있었고, 여전히 하나같이 멋있는 사람들이라 내가 작아지는 것도 같았다.

포잉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내가 간섭해서 더 안 좋아지는 건 아닐까.

내가 언래블을 위해 행동한 것들이 사실은 독이 되면 어떡하지 등등.

그 와중에 우리 일상은 평온하지 못했고, 여러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부딪히고 제법 많은 것들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다.

좋아하고 응원하던 입장에서, 응원받고 사랑받는 입장이 되고, 솜뭉치에서 언래블이 되고.

늘 무수한 고민들과 매시간 흔들리는 마음들이 이제는 조금 중심을 잡아가고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는 서포터가 아니라 언래블의 환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어느 정도는 믿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래서 힘찬이가 나를 찾아 작업실에 온 순간, 내가 해야 할 일을 알 수 있었다.

초점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와 간헐적으로 팔을 긁어내리는 손, 피가 배어 나올 것처럼 입술을 잘근거리는 모습.

잠깐 앉아있으라고 하고 작업실 문을 잠그고, 준이 형에게 연락해두었다.

오늘은 더 이상 스케줄이 없었으니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둘이 숙소로 돌아가면 되니까.

“갑자기 왜 이러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되냐, 나….”

“아무도 방해하지 말아 달라고 했어. 걱정하지 마.”

내 앞에서 보인 적 없는 불안함에 다시 팔을 긁으려는 찬이 손을 잡아 눌렀다.

간혹 준이 형이나 영빈 형이 이야기하는 걸 몰래 듣기도 했고, 포잉을 통해 멤버들에 대해 들어왔기에 찬이가 걱정되기도 했었다.

처음 내가 찬이에게 했던 행동에 대한 부채감 때문일 수도 있을 거고, 그도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변수에 대한 책임감 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찬이가 힘든 시점에 나를 찾아와 줬다는 게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벅찼다.

- 인정받았다.

서로가 공유한 시간과 감정들이 만들어낸 관계여서, 이전 생에는 가져보지 못한 것이라 더욱더.

“내가 이러는 게 이상해 보일 수도 있는데….”

“뭐래, 평소가 더 이상해.”

일부러 더 가볍게 이야기하며 솜뭉치들이 선물해 줬던 인형을 찬이 품에 안겨줬다.

“아, 진짜. 내가 뭐.”

들어와서 여태껏 내내 초조해 보이던 찬이가 겨우 웃었다.

“그냥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해. 들을게.”

“하아…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는데….”

문득 마주친 찬이 얼굴이 처음 단둘이 경연 무대를 위해 안무를 살피던 그때보다 많이 단단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데뷔할 수 있을까’ 하면서 자신이 없다고 말하던 풀이 죽었던 그 얼굴이 지금 얼굴과 조금 닮아서 지금은 그냥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겠는데, 이런 말하는 거 좀 창피한데… 내가 한사람 몫을 하고 있는지 자신이 없어.”

“그래서?”

“그냥 모르겠다. 다 불안해. 이러지 않았는데 왜 갑자기 이러는지 모르겠어.”

울 것 같은 얼굴이 손에 쥔 인형을 우그러트리며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이유 모를 불안감과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는 모습.

“상담 선생님이랑 무슨 일 있었어?”

“어?”

“넌 상담 시간에 무슨 얘기 해? 난 선생님이 멤버들 얘기도 하고 내 일상에 대해 물어보시던데.”

“어, 나도. 그래서 상담 시간에 무슨 말 해야 될지 잘 모르겠더라.”

원래도 감정 기복이 좀 들쭉날쭉했던 찬이에게 여태까지의 사건들이 불안감을 더 키우는 역할을 했다면, 상담은 불안감에 실체를 만드는 일을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열심히 공부해둘 걸 하는 후회가 잠깐 머물렀지만, 이내 털어냈다.

상담과 약물을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내고 치유하는 게 현대 의학이라면 나에겐 요정이 준 힘이 있으니까.

멤버들에게는 되도록 사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사용해야 할 타이밍인 것 같았다.

그리고 스킬을 사용한 순간, 방안을 가득 채울 것처럼 퍼지는 무수히 많은 말풍선에 순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이 작은 머리통에 무슨 생각이 이렇게 많은지 찬이는 온갖 부정적인 가정과 생각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아]

[살려줘]

[미친놈 같아 보이면 어떡하지?]

[안돼. 그만해.]

내가 잠시 찬이에게 시선을 떼고 허공을 잠시 바라본 사이 내 눈치라도 본 건지 무수히 많은 ‘어떡하지’와 ‘안돼’라는 말풍선이 훅 늘어났다가 사그라들었다.

“찬아. 그날 기억나?”

“언제?”

“우리 둘이 경연 안무 점검했었잖아, 저기 소회의실에서.”

“아, 세빈이 울었던 날.”

“어. 네가 나한테 자신 없다고 울 것처럼 말했잖아.”

“야, 울 것처럼은 아니거든?”

수없이 떠오르는 부정적인 감정 사이로 겨우 그날을 떠올리는 말풍선들이 떠올랐다.

저도 그만둘까 말까를 고민했던 주제에 그날을 막내 세빈이가 울었던 날로 기억하는 게 조금 안쓰러웠다.

“솔직히 그때 좀 놀랐거든.”

“뭐가?”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해줬다는 게.”

고장 난 전구처럼 깜박거리던 찬이 눈꺼풀이 움찔하더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내가 우리 멤버들한테 속마음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그때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하긴, 그때 넌 좀 싸가지가 없었지.”

“어쭈, 어느 주둥이가 또 까불어?”

다행히 그간 우리가 함께해온 추억들을 하나씩 꺼내 말을 늘어놓는 동안 찬이도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김우빈이 우리 뒤통수를 치려고 했던 날.

“그때 솔직히 네가 김우빈 욕할 때 엄청 속 시원했다.”

“이게 다 형들이고 너고 죄다 물러가지고 그런 거잖아.”

아직도 선명한 데뷔 쇼케이스 무대.

처음 라디오 출연했다가 크게 사고를 치던 날.

“그때 팀장님을 네가 못 봐서 그래, 진짜….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 돋아.”

“그땐 우리가 잘못하긴 했잖아.”

빌어먹을 망둥이랑 개미핥기를 마주했던 그 대기실.

그리고 프로그램 미팅이란 걸 경험하면서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가 함께 살아남고자 밤을 새워가며 고민했던 날들.

팬 사인회 준비를 하며 글씨체를 연습하고 곡을 만들기 위해 서로에게 질문했던 일.

“반년밖에 안 됐는데 무슨 일이 이렇게 많이 있었지?”

“그러니까. 대표님이 굿한다고 하시면 이제 안 말리려고.”

이제야 마음이 편안해진 건지 찬이는 더 이상 입술을 물어뜯지 않았다.

옆에 있던 생수병 중 하나를 던져주자 반 정도를 쉬지 않고 마신 찬이는 그때부터 오늘 이 자리에 찾아온 본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조용한 내 작업실에는 그 후로 한참 동안 찬이가 더듬더듬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목소리만 나직이 흘렀다.

어느새 작업실 한쪽에 자리한 포잉도 평소보다 더 고요한 눈동자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충동적인 자신의 감정들과 그걸 표출하기 위해 시작했던 춤, 잃어야 했던 소중한 것들과 강요된 삶의 지표에 대한 반항들.

겨우 자기가 만들어낸 이 자리에 대한 애착, 혹은 집착.

사람을 믿기 힘들다는 고백은 쥐어 짜낸 것처럼 엉망인 목소리였다.

왜 그동안 찬이가 회사의 대처나 반응에 늘 날카로운 반응을 보냈는지 그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상담 선생님과의 대화 자체가 찬이에게는 고역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이라 강요받는 것 같아서, 강탈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리라.

그건 상담이 아닌 일종의 폭력인 것 같았다.

“최힘찬아.”

“왜.”

“나는 그날 네가 나한테 우리가 데뷔할 수 있을까 하고 물어봐 줘서 고마웠다.”

“어?”

“이 팀에 내 자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어차피 여태까지 어울리지도 못했고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었어.”

“아무튼 혼자 삽질은.”

“근데 니가 그렇게 말해줘서 뭔가 얘는 날 같은 팀으로 생각해 주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덤덤하게 이야기했지만, 찬이 얼굴은 희한하게 일그러졌다.

무언가를 참는 것 같기도 했고, 속이 시원한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굉장히 못생긴 얼굴이었다.

“난 늘 너무 차갑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 표현도 잘 못 하고 그냥 눌러놓고 넘어가는 게 더 편했거든. 그래서 처음에 널 만났을 땐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나 했다.”

“와, 얌전한 척하더니 속으론 욕했다 이거지?”

“욕은 안 했다.”

힘찬이와 나는 성격이 극명하게 다른 타입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닮은 점들이 많아서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 피식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좀 불안하고 걱정하면 어때. 어차피 어떻게든 되더라.”

“계속 이렇게 초조하면 어떡해? 이러다 삐끗 실수하면 다른 멤버들한테도 피해가 갈 텐데.”

애달픈 얼굴이 애꿎은 내 인형을 괴롭혔다.

곧 저 인형의 귀가 떨어져 나가지 않을까 싶을 만큼.

“전에 너랑 세빈이랑 나한테 뭐라 했던 거 기억나?”

“어떤 거?”

“왜 너희한테는 의지하지 않냐고, 말해주면 잘할 수 있다고 했잖아.”

“아.”

“똑같아. 멤버들한테 의지해 줘. 물어보고 알아가고 잘못된 거 있으면 고치려고 노력도 해보고. 나도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거든. 그러라고 우리를 팀으로 만든 거니까.”

결은 달라도 비슷한 삽질을 하는 걸 보니 이런 걸 친구라고 하는 건가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저놈도 생각이 다르지 않았는지 피식거리고 웃었다.

한결 얼굴이 살아나서 다행이다 싶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었고, 화면에 뜬 이름에 전화를 안 받을 수 없었다.

- 우리 준이 형

“와, 하준 형은 우리 준이 형이냐? 너 나는 뭐라고 저장했어?”

“다 비슷하지 뭐. 기다려봐, 나 전화 받잖아.”

핸드폰을 뺏어가려는 찬이를 밀어내고 급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얘기 다 끝났어요. 네? 아… 네, 알겠어요. 내려갈게요.”

“형 아직 숙소 안 갔대?”

“어, 우리 내려오래. 기다리고 있었다고.”

“아씨, 또 잔소리 듣겠네. 야, 너 나 뭐라고 저장했냐고!”

“얼른 나가기나 해.”

작업실 밖으로 찬이를 밀어낸 나는 핸드폰을 재빨리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방금까지 진지하게 이야기했던 애한테 차마 ‘모지리’라고 저장한 걸 보여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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