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168)화 (168/456)

168.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5)

짧디짧은 광고 시간을 생각해서인지 그림으로 그려진 콘티의 내용도 길지 않았다.

보내온 것은 허니비 사의 주력 상품 세 가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10대 청소년, 청년층, 장년층을 위한 종합 영양제였다.

어린아이들을 위한 것도 있었지만 이번 광고에서는 제외된 것 같았다.

“…뽀빠이가 먹던 시금치도 아니고 이게 뭐예요.”

“뽀빠이를 알아? 신기하네.”

싱글벙글 웃고 있는 팀장님에게 콘티가 정말 재밌어 보이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눈이 초롱초롱한 것이 진심인 것 같아서 확인받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처음 내용은 무슨 괴수 영화인 줄 알았다.

비실비실하던 아이가 영양제를 먹고 쑥쑥 크는데, 말 그대로 몸집이 정말 커진다. 주변에 있던 건물만 한 크기로.

이게 뭐야?!

“광고에 스토리를 넣는 방법이 이제는 흔하잖아. 거기다 공영방송이 아니라 위캠이랑 SNS 홍보를 주축으로 사용한다고 하더라고.”

“확실히 TV 광고는 돈도 많이 들고 황금 시간대는 어림도 없겠죠.”

내용도 이상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난 재밌을 것 같은데? 팀장님, 커지는 거면 CG 처리하겠죠?”

“그렇겠지. 위캠이랑 SNS를 사용하는 연령층이면 너희를 접하기도 쉬울 거고 우리한테도 좋을 거야.”

준이 형은 말없이 콘티 내용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고, 영빈 형은 한번 살핀 후 말을 잃었다.

청소년 용이 괴수 영화라면 청년용은 퇴사 권고 캠페인인지 영웅물 영화인지 알기 힘들었다.

야근과 상사의 쪼임에 시달리던 사회 초년생 주인공이 자신이 꿈꾸던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현실의 타협 등의 스트레스 때문에 새치가 생긴다.

그걸 보고 충격받은 주인공에게 사수가 영양제를 권하고, 영양제를 먹은 주인공이 각성한다.

야근 중이었던 주인공이 자기 몫의 일을 순식간에 끝내더니 가슴에 품고 다니던 사직서를 자리에서 게임 중이던 부장에게 집어 던지고 하늘을 향해 날아서 사라진다.

“그, 아무리 병맛 코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이건 좀 그렇지 않아요?”

용기를 낸 준이 형이 팀장님에게 힘겹게 말을 꺼냈지만, 되레 걱정하지 말라는 듯 형의 어깨를 두드려주셨다.

“이름을 알리고 싶은 거야, 허니비에서는. 약 효과를 알리고 싶은 게 아니라. 그래서 가장 속 시원하게 생각할 만한 그런 상황들을 웃기게 만들어 놓은 거고.”

“네….”

“너희가 청소년용, 청년용 두 가지를 찍게 될 텐데 어떤 모습이 될지 이 팀장님은 심히 기대가 돼요.”

말은 그럴듯하지만 여태까지 내가 보아온 광고들과 너무 달랐다. 유명한 개그맨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아이돌인 우리가 나올 텐데 이런 게 통할까.

왜 지난 생의 나는 내가 먹는 약의 광고도 한번 찾아보지 않았을까.

무의미한 후회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광고한다고 누나한테 말하지 말걸….

혹시라도 누나가 광고를 보면 어떤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자, 본격적인 설명은 나중에 감독님이랑 자리를 마련할 거고 일단은 너희가 알아야 해서 미리 알려준 거야.”

“그, 네…. 알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이게 꽤 잘 될 것 같거든.”

우리를 향해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보이는 팀장님의 모습에서 불현듯 공양미 삼백 석이 또 떠올랐다.

“심청이….”

“지환아, 정신 차려.”

“아냐, 그거 아닐 거야.”

첫 광고가 어떤 것일지 우리끼리 많이 상상해보기도 했었다.

보통 아이돌이 많이 한다는 교복 광고나 스포츠 브랜드의 광고를 떠올리기도 했었고, 공익 광고를 상상하기도 했었다.

멋있어 보이는, 혹은 생명력 넘치는 그런 멋진 컷을 상상했던 나는 사표를 던지며 창문 밖으로 날아갈 내 모습을 떠올리고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DC 코믹스에서 상표권 주장하진 않겠죠?”

“클라크처럼 쫄쫄이 입진 않으니까 괜찮을 거야.”

쓸쓸하게 중얼거리는 나에게 경환 형이 위로를 건네왔다.

형의 눈동자도 마구 흔들리고 있어서 크게 위로가 되진 않았다.

다른 건 둘째치고 많이 보고 많이 팔려야 우리한테도 좋을 텐데 이런 광고를 사람들이 좋아할지를 모르겠다.

내가 좀 망가지는 거야 사실 그렇게 큰 의미는 없었다.

열심히 벌다 보면 나중에 멋있는 것도 하겠지.

하지만, 제일 걱정스러운 건 광고 효과가 있을까였다.

우리가 광고 모델이었는데 망하면 안 되잖아!

“일하자, 일.”

“맞아. 일해야지!”

잠깐 혼란스러웠던 분위기는 팀장님과 찬이의 외침에 평소처럼 돌아왔다.

원래 잘 되는 일은 어떻게 해서든지 잘 되고, 망할 일은 기를 쓰고 덤벼도 망한다고 했으니 우리 광고가 잘 되길 빌 수밖에.

평소처럼 연습 시간을 가졌고, 새롭게 참여할 프로그램의 미팅을 가졌다.

이전 다른 프로그램들과 달리 이번에 출연할 프로그램은 꽤 장기적으로 출연하는 내용이라 다들 여러 방면으로 고민을 했었다.

다시 한번 어린 친구들과 함께해야 하는 부분도 우리가 고민을 하게 만든 요건 중 하나였다.

아이콘택트 때는 워낙 아이들이 착했고 잘 따라줘서 어렵지 않게 촬영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방향이 달랐으니까.

그럼에도 출연하고 싶다고 의사를 밝혔던 이유는 이 프로그램이 생각보다 꽤 인기 있었다는 기억 때문이었다.

내 기억 속 언래블과 너무 다른 행보를 걷고 있는 지금의 언래블에게 그나마 내가 어떻게든 해볼 수 있는 부분은 이런 기억들뿐이었다.

물론 멤버들은 그런 내 속은 몰랐지만, 다행히 프로그램 내용을 확인하더니 모두 하고 싶다고 했었다.

어린아이들을 귀히 여기는 마음이 큰 영향을 주었을 것 같았다.

우리 애들이 백설기처럼 뽀얗고 말랑말랑한 심장을 가졌다는 걸 잘 아는 나는 혼자 양심이 조금 찔렸다.

다시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광고 콘티가 주었던 충격은 흐려졌고, 어느새 다시 팬 사인회 현장에 와 있었다.

“오늘 잡지 나온다고 했지?”

“응. 인터넷으로 예판 신청했는데 언제 오려나.”

“언제 또 혼자 주문했어? 우리한테도 물어보지!”

“살지 안 살지 몰라서 그냥 내 것만 시켰는데.”

인터넷 쇼핑이야말로 나처럼 밖에 나가 돌아다니는 걸 귀찮아하는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쇼핑 아닌가.

이전 생부터 대다수의 물건을 인터넷 쇼핑으로 구매했던 나는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덕질할 물건을 주문하던 때처럼 날짜를 맞춰 구매해놨다.

“우리 돌아가는 길에 서점 들르면 안 돼요?”

“서점은 왜.”

“잡지 직접 사고 싶은데.”

“굳이?”

“직접 가서 사고 싶어요!”

나에게 배신감을 토로하던 찬이와 세빈이는 우진 형을 붙잡고 조르기 시작했다.

직접 우리가 나온 잡지를 구매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아무래도 처음으로 경험하는 일이라 들뜬 것 같아 우진 형도 안된다고 딱 잘라 거절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건 조금 있다가 다시 얘기하고 입장할 준비하자, 얘들아.”

“예엡!”

“솜뭉치들 보러 가자!”

오늘은 처음으로 별도로 준비된 자리가 아닌 공개된 자리에서 진행하는 팬 사인회였다.

어제 있었던 포스트잇 공격에 팀장님과 우리 스태프들도 기합을 단단히 넣은 건지 평소보다 긴장으로 얼굴이 굳어있었다.

외부 공간인 만큼 경호 인력도 따로 불렀다고 해서 조금 놀랐었다.

희주 누님과 가희 누님의 손길 아래 꽃단장이 끝난 우리는 다시 솜뭉치들을 만나러 힘차게 걸었다.

“얘들아! 사랑해!”

“언래블! 응원한다!”

“꺄아! 언래블! 언래블!”

현장에 도착하자 우리가 앉을 테이블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안전줄이 쳐져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정돈된 장소에서 제한된 인원들하고만 마주했던 이전의 팬 사인회랑은 결이 다른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그저 무역 센터에 볼일이 있어 들렸던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고, 시끄러운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지나치기도 했다.

호의와 무관심이 공존하는 혼란스러운 공간이었지만 어느 때 보다 활기가 넘치는 것 같았다.

“둘, 셋! 안녕하세요, 함께 풀어나갈 미래 언래블입니다!”

“안녕하세요! 언래블입니다! 반가워요, 여러분!”

그 후 이어진 행사는 어제 있었던 팬 사인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솜뭉치들은 우리에 대해 많은 것을 궁금해했고, 품에 들고 온 소중한 편지와 직접 찍은 사진들을 우리에게 선물해주었다.

“핸드크림 뭐 써요? 립밤은요?”

“멤버들이 다 같은 거 쓰는 거예요?”

“평소에 룸메이트 하고 싶지 않은 멤버가 있어요?”

등등 온갖 질문들이 솜뭉치들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어제 팬 사인회 시작 전에 멤버들이랑 핸드크림을 나눠 바른 게 솜뭉치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 같았다.

많은 솜뭉치들이 사용하는 핸드크림의 브랜드와 향을 물었고, 립밤의 정체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들이 질문으로 올라왔다.

그저 선물 받은 걸 그대로 사용하던 나는 친누나에게 선물 받았다는 말과 함께 순순히 물건을 꺼내 보여주었다.

다른 멤버들도 누나가 한꺼번에 챙겨준 거라 정확히 모른다고.

하나하나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고 눈을 마주치던 사이 내 앞에 온 솜뭉치 한 명이 편지봉투와 함께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어제 너무 귀여웠어요!”

“네?”

“언젠가 사과 머리하는 것도 보고 싶어요.”

“에이, 그건 우리 막둥이가 잘 어울리죠, 저처럼 귀염성 없게 생긴 사람은 안 어울릴걸요?”

이야기를 나누며 사진을 확인한 나는 잠시 굳었다.

머리에 달랑거리는 별 모양 핀을 달고 환히 웃고 있는 내 사진이었다.

“다음에 더 귀여운 머리핀 구해올게요!”

“하, 하하… 전 귀여운 거 잘 안 어울리는걸요.”

“뭐, 본인만 모르는 것도 나름 괜찮아요!”

씩씩하게 답하는 모습에 순식간에 기가 쪽 빨린 기분이 들었다.

우리 솜뭉치들은 왜 이렇게 빠르지? 어제저녁에 찍은 사진을 오늘 벌써 챙겨오다니….

사진을 건네주고 옆으로 이동하는 솜뭉치의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보아하니 내 반응이 만족스러웠던 모양이었다.

그 순간, 뒤쪽에서 약간의 소란이 느껴져 살짝 쳐다봤더니 우진 형과 경호 팀분들이 어떤 여자분을 라인 밖으로 인도하는 장면이 보였다.

솜뭉치들도 그쪽으로 힐끔거리며 시선을 주고 있었고, 중간중간 무언가 거친 말이 오고 가는 것 같았다.

마이크를 들어 시선을 분산시키려던 나는 다시 손을 얌전히 내려놓았다.

영빈 형과 준이 형 쪽을 바라봤더니, 형들이 소란이 있는 쪽에 시선을 뒀다가 마이크를 집어 드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여러분, 이렇게 사인만 하고 끝나면 아쉽죠? 우리 오랜만에 동생 라인 애교 좀 볼까요?”

“네! 보고 싶어요!”

“이렇게 갑자기요?!”

솜뭉치들을 보며 행복하게 함박웃음 짓던 찬이와 세빈이는 자다 날벼락 맞은 사람처럼 눈이 동그래져서 리더를 돌아보았다.

“찬이가 자기만큼 솜뭉치들한테 예쁜 짓 하려고 고민하는 사람도 없다고 어제 그랬잖아.”

“숙소에서 우리끼리 한 얘기를 여기에서 하는 건 반칙이지!”

쑥스럽기라도 한 건지 반항하는 찬이 모습에 내가 슬며시 마이크를 들었다.

“찬이가 솜뭉치들한테 더 많은 애교를 보여주고 싶다고 그랬으니까 기회를 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솜뭉치들 생각은 어때요?”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솜뭉치들의 환호에 찬이는 졌다는 듯 양팔을 들었다.

“하, 우리 솜뭉치들이 이렇게 바라면 또 어쩔 수 없지! 쪼매니, 지환이 나와!”

“내가 왜 쪼매니야!”

“저 물귀신….”

환호하는 솜뭉치들의 모습에 도망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나는 슬픈 눈으로 준이 형을 바라봤다.

물론 준이 형은 오늘도 인자하게 웃고 있었지만, 눈빛이 보내는 메시지는 단호했다.

‘안돼, 돌아가.’

나도 멋있는 거 좀 하고 싶은데, 앞으로 영 글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허니비의 광고 콘티가 떠오르며 앞이 캄캄해졌다.

앞으로 멋있는 아이돌하고는 백만 년쯤 거리가 더 벌어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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