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4)
“근데 지환아, 그거 계속 그렇게 달고 갈 거니?”
“네?”
“너 머리….”
소현 팀장님의 시선을 따라 머리를 손으로 더듬어보자 무언가 차가운 금속성의 느낌이 손끝에 걸렸다.
“어라?”
“아, 까비. 팀장님이 말 안 했으면 쟤 집에 갈 때까지 몰랐을 텐데.”
“풉!”
“어떻게 저걸 모를 수가 있지?”
“으이구.”
손에 걸리는 걸 빼서 확인했더니 별이 달린 머리핀이었다.
이것저것 건네받은 대로 머리에 하고 빼고를 반복하다 이 머리핀을 잊은 듯했다.
“…아니, 어떻게 이걸 아무도 말을 안 해줘요?”
치가 떨리는 배신감에 멤버들과 우진 형을 바라봤지만, 우진 형은 어색한 웃음을 머금고 내 시선을 외면했다.
“솜뭉치가 준 게 소중해서 하고 있는 줄 알았지.”
“소중한 건 소중한 거고 달고 다니는 건 다른 문제지, 이 자식아!”
느물거리는 찬이 발언에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한 나는 찬이 멱살을 잡아 짤짤 흔들었다.
그 와중에 나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좋은 놈이라 마음처럼 들고 패대기칠 수 없는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포잉, 어떻게 포잉까지 말을 안 해줄 수가 있어!’
‘님이 뭘 하고 다니든 내가 터치하는 거 봤음?’
‘그건 또 맞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솜뭉치들도, 멤버들도, 매니저 형도, 심지어 내 요정까지도 아무도 내 편이 아니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자자, 환아, 진정하고. 그래도 밖에 돌아다닌 게 아니니 얼마나 다행이니.”
“예…?”
“하하, 좋게 생각하자는 말이지. 어휴, 그렇게 무섭게 쳐다보지 말고.”
내 눈에 담긴 원망을 읽었는지 우진 형이 아직도 히죽거리는 찬이를 떼어내며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자, 숙소 가서 쉬어야지. 오늘도 고생 많았다, 얘들아.”
“집 가자, 집!”
“하아….”
급히 상황을 정리한 우진 형과 준이 형에게 끌려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사실 이 정도 투닥거림이야 늘 있는 일이라 우리 전체를 놓고 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다만, 평소 이런 상황에 휘말리지 않는 편인 내가 주체가 되자, 멤버들도 더 즐거워했던 것 같았다.
인생 진짜….
그래도 숙소에 돌아온 멤버들의 몰골은 평소보다 멀쩡했다.
평소엔 푹 익은 파김치처럼 흐물흐물해져서 거실에 널브러져 있었다면, 오늘은 겉절이보다 조금 익은 정도랄까.
한 줌이긴 하지만 생기가 남아 있다는 말이었다.
마지막으로 씻은 탓에 나와서 본 모든 멤버들의 모습이 누워서 보던 모습과는 또 다른 흉함이라 작게 한탄했다.
“진짜 김치통에 담긴 무 같다….”
“응? 웬 김치?”
수건으로 머리를 싸매고 팬이 선물해 준 인형과 영빈 형이 선물해 준 쿠션을 뭉개고 있던 경환 형이 물었다.
그 광경을 핸드폰에 담자 멤버들이 절대 외부 유출하지 말라고 내 다리에 매달려왔고, 나는 인자하게 웃었다.
“이게 다 님들 하는 거에 달림.”
“숙소 내 촬영 금지 항목이라도 만들어야 된다… 진짜 악마다….”
“날 이렇게 만든 건 님들이거든요?”
“놉. 넌 그냥 처음부터 악마였어.”
힘찬이 대답을 흘려들으며 꼼지락거리고 옆에 다가온 세빈이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줬다.
“머리 말렸네. 잘했다.”
“안 말리고 누우면 뭐라 할 거잖아요.”
“당연하지. 세빈아, 이거 봐라?”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내 다리를 베고 누운 세빈이를 톡톡 두드렸다. 고개를 돌린 세빈이에게 갤러리 가득한 찬이의 추한 몰골들을 보여주자, 귀여운 우리 막내는 미친 듯이 웃다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아, 진짜 대박! 이 사진들은 언제 찍었어요?”
“너희가 잘 때?”
“내 사진도 있어요?”
“뭐야, 무슨 사진인데 그래?”
그때까지 각자 편한 자세로 휴식을 즐기던 멤버들은 세빈이의 격렬한 반응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냥 우리 멤버들의 적나라한 모습?”
“아, 이해했음. 우리 인간적으로 외부 유출만 하지 말자.”
“할 거면 허락받고 하자.”
“에이, 설마 제가 우리 멤버들 곤란할 짓을 할까요.”
“응. 할 거 같으니까 하는 소리야.”
“어허, 이렇게 서로 신뢰가 없고, 사회가 무너지고….”
그렇게 한참 동안 내가 찍어둔 멤버들의 자유분방한 사지를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우리 사이로 잠시간 정적이 찾아왔다.
신나게 놀다 보면 가끔 지쳐서 생기는 그 정적.
편안한 정적을 잠시 즐긴 우리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하나둘 몸을 일으켜 한쪽에 있는 쇼핑백을 하나씩 자기 앞에 가져왔다.
영빈 형이 자연스럽게 상을 펼쳐주자, 조용히 오늘 팬 사인회에서 솜뭉치들이 건네주었던 수많은 편지를 감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 모습을 예쁘게 그려준 편지라든가, 직접 만든 듯한 다양한 편지지의 모습이 놀랍기도 했다.
“우리 팬들은 어디서 다 같이 공부라도 하는 걸까? 못하는 게 없잖아!”
“그림도 멋있는 건 엄청 멋있고, 귀여운 건 또 엄청 귀여워요.”
“우리가 글씨체 교정 안 했으면 진짜 큰일 날뻔했어.”
“내 말이. 창피할 뻔했어.”
편지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들어있었다.
학교 공부가 힘들다는 학생 팬의 이야기, 직장 내 불합리함 때문에 이직을 고민 중이라는 팬의 이야기, 힘들 때마다 우리 노래를 들으면 대신 화를 내주는 것 같아 고맙다는 메시지 등등.
수많은 사연들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어서 우리는 틈나는 때마다 이렇게 한자리에 앉아 편지를 읽곤 했다.
다시 한번 솜뭉치들을 향한 고마운 마음을 되새기기도 했고, 우리가 앞으로 노래에 담고 싶은 메시지를 정리하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대부분의 편지는 일차적으로 회사에서 거른 후 건네주는 것들이기 때문에 팬 사인회에서처럼 악의가 담겨있는 것들은 없었다.
“그런데 있잖아요.”
“응?”
“팬싸 오려면 우리 앨범도 샀어야 했을 텐데 그렇게까지 해서 우리한테 상처를 주려는 건 왜일까요?”
세빈이는 읽고 있던 편지를 내려놓으며 우리에게 물음을 던졌다.
처음 겪는 일이었기에 아무래도 여러 가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이 들어 읽고 있던 솜뭉치의 이야기를 잠시 내려놓았다.
“그냥 원망의 대상이 필요했던 것 같아.”
짧지만 내가 겪었던 팬들의 생태계, 보고 들었던 이야기들, 그리고 이번 생에서 생겼던 일들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아마 우리랑 엮인 일이 아니더라도 데미갓은 언젠가 문제가 생겨서 찢어졌을 거라고 생각해. 기사들 보니까 장난 아니더라고.”
“그치. 그 정도로 하고 다녔는데도 여태 안 걸린 걸 보면 제논에서 기자들한테 돈도 많이 뿌렸을 거 같더라.”
“걔네 아빠가 회사 말아먹어서 멀쩡히 활동하던 다른 분들도 다 이 난리가 난 거고.”
“그런데 대다수의 팬들에게는 갑자기 그런 일이 생긴 거잖아.”
팬들 중 일부는 여기저기 소문으로 상황을 들으면서도 현실을 부정하거나 애써 자기 자신을 속이기도 한다.
현실을 왜곡하는 게 받아들이는 것보다 당장은 마음이 덜 아프니까.
사람이라면 자기가 애정을 담아 소중히 했던 것들이 부정당했을 때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저 노래가 좋고, 그 그룹이 좋아서 열심히 응원해 주던 보통의 팬들도 많았을 터였다.
자신들이 믿고 응원하면서 소중히 마음에 품었던 아이돌이 술집에서 폭행 사건을 일으키고, 성추행을 하며 자기보다 약자인 사람들한테 갑질하는 사람일 거라고 꿈에서라도 생각했을까.
“망둥이나 개미핥기처럼 자기들이 병크 터트려서 그 모양이 된 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같은 그룹이었던 다른 멤버들의 팬들은 어떨까.”
“….”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날라온 돌에 맞은 기분이지 않을까? 억울하기도 할 거고, 뭐 여러 감정들이 생기겠지.”
“사람은 이해의 영역을 넘어서는 문제가 생기면 문제 자체를 외면해버리기도 한대. 그리고 스스로에게 그럴듯한 다른 문제를 주는 거지.”
세빈이의 질문을 시작으로 나, 영빈형, 준이 형이 그동안 생각했던 여러 상황에 대해 하나둘 이야기를 해나갔다.
“아이돌이라는 단어 자체가 우상이라는 뜻이잖아. 그 팬들은 우상에게 배신당했고. 많이 사랑하고 믿었던 만큼 상처가 클 거야.”
“난 그게 우리가 그 사람들을 이해해 줘야 할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해.”
“찬이 말도 맞지. 우리는 따지면 피해자고 우리가 잘못하지 않은 걸 책임질 생각은 나도 없어.”
왜 그 사람들은 우리에게 돌을 던질까로 시작된 대화는 각자가 지금까지의 상황을 어떻게 견디고 바라봐 왔는지 알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뭐, 다른 거 다 떠나서 나는 내 사람들 챙기기도 바빠서 다른 사람 사정까지는 생각하고 챙겨주기 힘들 것 같아.”
“심한 건 회사에서 고소한다니까 우리는 그냥 그런 방침 따르면 될 것 같아.”
“그건 맞지. 솜뭉치들한테 이쁜 짓 할 거 생각하는 것만 해도 머리 아픈데.”
“니가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한다고? 입술에 침은 발랐냐?”
“뭐래? 나만큼 솜뭉치들한테 애교 많이 부리는 사람이 어딨냐?”
짐짓 심각하게 굳을 뻔했던 분위기는 이렇게 또 풀어졌다.
우리는 늘 이런 패턴의 반복이었다.
개인 혹은 모두의 고민을 나누고 각자의 생각을 두런두런 이야기하다 마지막에는 웃고 떠들며 편안하게 흘러가는.
“솜뭉치들한테 물어볼까? 응? 누가 제일 좋은지!”
“멤버 인기 투표하자는 거야, 지금? 와, 이렇게 멤버들 간의 우애를 깨트리려고 줄 세우기 시전하네.”
“아니, 왜 또 말이 그렇게 되는데!”
“찬이 형, 못났다….”
적당히 불을 지펴주자 세빈이와 경환 형이 열심히 바람을 불어넣고 기름을 부어 찬이를 활활 불태웠다.
그동안 우리가 쌓은 수많은 대화들이 이제는 어떤 주제를 이야기해도 부담스럽지 않게 해주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너희는 언제 철들래?”
그건 그거고 늘 이런 몰골을 지켜보는 우리 리더님은 피곤한 모양이었다.
“아마 평생 안될 것 같은데요.”
“응. 내 생각에도 그럴 것 같은데. 형, 포기하면 편하대.”
“그걸 말이라고 하냐.”
해맑은 얼굴로 포기를 종용하는 세빈이, 찬이 모습에 뒷목을 부여잡는 준이 형.
“형, 애들을 잘못 키운 것 같아요.”
“내가 안 키웠다. 난 모르는 일이야.”
“언제는 형 동생이라며!”
“맞아! 우리가 순순히 버려질 것 같아요?”
최근 가장 형의 속을 시끄럽게 만드는 둘이 준이 형 몸에 매달렸다. 그 상황을 웬일로 조용히 지켜보던 경환 형도 준이 형 무릎에 드러누워 버렸다.
“경환아, 너까지 왜 이러냐.”
“못 버리게 몸으로 막는 거야, 형.”
“이 징그런 놈들아!”
조금 떨어져서 그 광경을 구경하던 영빈 형은 조용히 눈앞에 편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나도 조용히 내 몫의 편지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지금 둘이서만 도망가겠다는 거야?”
“어휴, 피곤해라. 얼른 누워야지.”
“지환아, 잘 자.”
“빈이 형도 잘 자요~”
“얘들아?”
준이 형이 도움을 요청했지만, 오늘 나는 조금 삐뚤어져 있는 관계로 해사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참 평화로운 저녁 시간이었다.
그래, 어제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는 참 평화로웠었다.
학교에서도 적당히 맛없는 급식을 반 친구들과 나눠 먹으며 시시껄렁한 농담 따먹기 같은 걸 하며 적당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평소보다 조금 가뿐한 마음으로 오늘 있을 팬 사인회와 곧 나올 잡지를 떠올리며 해야 할 일을 생각할 때도 괜찮았다.
“이런 내용으로 광고를 찍는다고요?”
팀장님이 드디어 광고 내용이 정해졌다고 연습 중인 우리를 불렀을 때도 기쁜 마음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우리 손에 쥐어진 콘티는 예상했던 것과 조금, 아니 조금 많이 달라서 눈을 의심했다.
“응. 재밌을 것 같지 않니?”
나는 처음으로 매우 불손하게도 팀장님의 취향을 의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