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3)
스태프에게 부탁해서 휴지를 건네주고 조금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도록 심호흡을 도왔다.
얼마나 마음 깊이 억눌린 것들이 많았으면 눈물이 날까 싶어 안타깝기도 했다.
“편지, 너무 고마워요. 소중히 간직할게요.”
“늘 응원할게요. 진짜로.”
눈물이 번진 눈가가, 그러면서도 웃는 얼굴이 너무 소중해서 웃으며 인사를 건네줄 수 있었다.
어떤 이유로 고맙다고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소중하게 품고 온 이 편지에 담겨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다양한 솜뭉치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기쁨을 우리에게 보여줬다.
우리 노래가 노동요로 딱이라면서 공부할 때 들으면 절대 잠들지 않아서 좋다는 말과, 너무 노래에만 집중하게 돼서 공부에 집중이 안 된다는 말을 같이 들었을 때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는 잔잔하고 집중할 수 있는 노래를 만들도록 노력해보겠다고 하는 수밖에.
다음 솜뭉치를 기다리며 고개를 까딱거리자 방금 전 솜뭉치가 선물해 준 별 모양 머리핀이 내 머리와 같이 흔들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전 앨범 팬 사인회 때 여러 머리띠를 착용했던 사진이 퍽 재밌었는지, 솜뭉치들이 다양한 머리띠와 핀들을 가져다줬다.
별이 달린 핀에 스프링이 달려 머리를 흔들 때마다 무언가 머리 위에서 대롱거리는 느낌이 나도 조금 재밌기도 하고.
반면, 장난꾸러기 솜뭉치들도 있었다.
“아, 이건 좀… 너무해요….”
“왜! 이 짤 덕분에 환이 알아보는 사람도 늘었는데!”
“그래도 이건 좀….”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았다.
홍삼 짤을 이렇게 크게 뽑아서 들고 오는 건 반칙이잖아….
다른 솜뭉치랑 얘기하던 찬이가 액자를 본 순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웃고 있어서 숙소에 돌아가면 반드시 응징하리라 다짐했다.
고개를 빼 들어 준이 형을 바라보자, 내 시선을 이해했는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준이 형 뒤로, 겸이 형 라디오에서 ‘살려주세요’라고 했던 준이 형 사진이 액자에 걸려있었다.
무서운 사람들….
“휴… 어쩔 수 없네. 그럼 다음엔 퍼즐로 만들어서 가져올게.”
“아니에요! 그냥 이걸로 만족하세요!”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놀리는 솜뭉치에게 절대 퍼즐은 안된다고 다짐을 받은 후 액자를 슬쩍 뒤돌려 놨다.
“풋.”
“아, 혀엉….”
“아, 미안, 미안. 잘 챙겨둘게. 너랑 준이 방에 하나씩 걸면 되겠다.”
우진 형이 팬들이 건네준 편지나 작은 선물들을 챙기다 액자를 보고 결국 참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우진 형, 형이 나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
다행히 우리는 첫 팬 사인회보다 조금 더 자연스러웠고, 편안하게 솜뭉치들을 대해줄 수 있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다양한 감정이 듬뿍 담긴 눈들과 시선을 교환했고, 여러 온도를 지닌 손들과 교감했다.
앨범의 주제에 따라 솜뭉치들이 말하는 내용들도 달라지는 건 조금 신기한 경험이었다.
언래블이라는 아이돌을 좋아하고, 우리 음악을 이만큼이나 사랑해 주고 있다는 게 너무 선명하게 다가와서 심장이 내내 쿵쿵거렸다.
첫 팬 사인회 때는 자신들이 느끼는 두려움을 꺼내 보이며 어떻게 극복했는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우리와 이야기했었다.
그처럼 이번엔 앨범을 들으며 건강하게 화내는 방법을 공부하고 있다는 솜뭉치도 있었다.
참고 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30대의 어떤 솜뭉치는 우연히 본 무사이 무대로 호감이 생겨 이번 노래를 들었다고, 덕분에 자신의 몫을 찾을 용기를 냈다고 해주었다.
비록 짧은 시간을 함께했지만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인연은 없었다.
“어? 저번에도 왔었죠?”
“헐, 어떻게 알았어요?”
“저번에 우리 스티커 줬었잖아요. 동물 스티커.”
“대박! 그걸 기억했어? 고마워!”
찬이는 솜뭉치 한정인지 무시무시한 기억력을 뽐내며 지난번 팬 사인회 때 왔던 솜뭉치를 기억해 냈다.
“나 고양이 아니고, 호랑이 스티커였는데….”
“아냐, 작은 환은 이게 제일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래요…. 솜뭉치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뭐….”
씁쓸한 내 미소를 바라보며 활짝 웃는 솜뭉치의 얼굴은 아주 조금, 정말로 조금 얄미웠다.
“아, 텀블러가 궁금했어요?”
포스트잇에 텀블러를 늘 같은 걸 들고 다니던데 맞춘 거냐는 질문이 있었다.
“음, 원래 영빈 형이 텀블러를 썼었는데 우리가 같은 거 쓰고 싶다고 졸랐어요. 근데 인원이 많다 보니까 다 원하는 색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가위바위보로 골랐어요.”
“찬이랑 세빈이가 진 거예요?”
“네, 맞아요. 코랄 핑크색이었나? 찬이 색이.”
“근데 은근 찬이랑 잘 어울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언래블 스토리의 오프닝 영상에 나왔던 미니미들은 언제 다시 볼 수 있냐는 질문도 있었고, 요리를 따로 배운 건지 물어보는 질문도 있었다.
잠시 텀이 생긴 사이 세빈이와 영빈 형 머리에도 꽃 머리핀을 하나씩 꽂아주자, 지켜보던 솜뭉치들의 손이 빨라졌다.
나만 당할 수 없지, 그럼.
틈틈이 기다리는 팬들을 향해 마이크를 들고 말을 건네기도 하고 나에게 올 솜뭉치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때, 찬이 앞에 있던 솜뭉치가 찬이한테 오빠라고 불러도 되냐고 묻는 광경을 목격했다.
여태까지 그렇게 물었던 사람이 없었던지라 찬이 눈이 동그래졌다.
“오빠라고 해도 돼요?”
“넹…?”
“잘생기면 다 오빠랬는데.”
“아… 그럼 어쩔 수 없네! 오빠, 해보세요.”
“찬이 오빠!”
“응, 앞으로도 계속 우리 소현 씨 오빠 할게요.”
우리랑 있을 때는 세상 모지리 같던 애가 솜뭉치 앞에서는 정상인 척하는 모습을 보려니, 사실 조금 힘들었다.
세빈이는 고개를 휙 돌려 나에게 속삭였다.
“형, 저 속이 안 좋아지려고 해요.”
“응, 나도….”
눈에서 꿀이 떨어질 것 같은 얼굴로 찬이를 바라보는 솜뭉치에게 속고 있다고, 당장 도망치라고 하고 싶었지만 꾹꾹 눌러 참았다.
“지환아, 이번에 네가 쓴 곡 진짜 좋았어.”
“진짜요? 고마워요, 엄청 고민 많이 했는데.”
이번 팬 사인회에서 가장 기분 좋은 일을 꼽으라면, 남팬들이 제법 보였다는 사실이었다.
여태까지 오프 행사에서는 남팬이 보이지 않아 조금 아쉬웠는데, 유독 이번 팬 사인회에는 남팬들이 몇 명 보였다.
손깍지 대신 하이파이브나 악수를 청하기도 했고, 긴 편지 대신 오다 주웠다고 쓴 엽서와 선물 상자를 건네주기도 했다.
그 와중에 한 남팬이 힘찬이에게 굉장히 반가운 듯한 눈으로 바라보며 ‘최찐빵!’ 이라고 외쳐서 찬이를 제외한 모두가 미친 듯이 웃을 수 있었다.
아, 진짜 우리 솜뭉치가 지구 최강이다!
이 모든 모습들이 성별의 구분 없이 모두 반갑고 즐거웠다.
우리 솜뭉치들은 너무 한결같이 귀여워서 자꾸 빙구 같이 웃는 내 얼굴이 걱정됐지만, 잘 보정해 주겠지 하고 믿기로 했다.
누군가가 시험 공부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며 음악을 하고 싶다고 하기에, 언젠가 후배로 만나자는 약속을 하기도 했다.
그때처럼 여러 무대를 보여줄 수는 없었지만, 행복한 시간이라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렇게 준비된 행사가 끝나고 솜뭉치들과 아쉬운 이별을 한 우리는 회사에 모였다.
앞에 있었던 행복했던 시간과는 별개로 애들과 앉아있는 회의실의 분위기는 조금 굳어있었다.
“너한테도 그랬어?”
“응….”
“팀장님한테도 얘기 들어간 거 같으니까 조금 기다려보자.”
포스트잇에는 대부분 솜뭉치들의 다양한 질문이 들어있었지만, 간혹 자신의 악의를 담은 메시지도 있었다.
“얘들아, 많이 기다렸니?”
“아뇨, 괜찮아요.”
“얘기 들었다.”
팀장님의 얼굴은 조금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사전에 질문을 꼼꼼히 확인하고 보냈어야 했는데, 미안해.”
원래는 줄을 세우고 기다리는 동안 질문을 적도록 하고 스태프가 간단하게 체크하려 했었다고 했다.
다만, 생각보다 준비에 시간이 제법 많이 걸렸고, 대관 시간이 여의치 않아 질문을 꼼꼼히 체크하지 못했다고.
“다음에는 아예 우리가 따로 준비한 포스트잇에 질문을 받을게. 그게 아닌 사람들은 전부 제외하자. 너희도 슬슬 블랙리스트를 만들어야 할 것 같아.”
이어진 팀장님의 설명에 세빈이와 힘찬이 얼굴이 그늘졌다.
제논 엔터가 무너진 후, 그쪽 팬덤의 일부 인원이 우리 팬덤에 숨어들어 분위기를 흐리는 것 같다고 했다. 고소 가능한 인원에 대해서는 고소를 준비하고 있다고.
모든 인원을 제한할 수는 없지만 도를 넘는 행동에 대해서는 묵과하지 않겠다고 했다.
오늘 팬 사인회에서 악의적인 질문을 한 사람들은 스태프들이 따로 체크했으니 앞으로 사인회를 비롯한 행사에 본인의 이름으로 참여할 수 없도록 제한할 방침이라는 말도 덧붙이셨다.
각오했던 일이지만, 그것과 별개로 일이 눈앞에 닥치면 사람은 당황하기 마련이었다.
우리끼리 이런 상황을 대비해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다독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눈앞에 들이 밀어진 욕설과 사생활을 캐묻는 질문에 의연히 대처하는 건 조금 힘들었다.
자기들끼리 짜기라도 한 건지 나와 세빈이에게만 이런 질문들을 들이민 것도 당황스러웠다.
“회사에서 여태까지 너희에게 인터넷 사용을 자제하라고 한 이유가 아직 이런 부분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아서였어. 연예인인 이상 악플에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너희는 너무 단기간에 적이 생겨버려서.”
그리고 조그맣게 덧붙였다.
“너희를 지키기 위해서 회사도 최선을 다할 거야. 그러니 조금만 더 답답하더라도 참아줘.”
“괜찮아요. 그래서 저희가 인터넷도 잘 안 하고 댓글도 안 봐요.”
“소설이나 웹툰 보거나 위캠에서 재밌는 영상 볼 때만 쓰고 있어요.”
“저희도 이제는 조금 알아요.”
처음 회사의 방침에 가장 크게 반발하고 두려워했던 세빈이와 힘찬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회사는 그래야만 했는지, 자신들의 삶을 제한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아이들은 조금 더 자라있었다.
“기특한 것들. 너희는 정말 잘하고 있어.”
“그럼요, 우리는 늘 잘하고 있죠!”
“맞아. 우리처럼 말 잘 듣는 사람들이 또 없죠.”
“내가 말을 말아야지, 정말.”
그 모습에 대견한 듯 말하던 팀장님의 얼굴은 이어진 두 막내의 으스댐에 곧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로 변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진 형이 툴툴거리는 소현 팀장님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아, 맞다. 또 깜박할 뻔했네. 좋은 소식 있다, 얘들아.”
“네? 뭔데요?”
“팀장님은 건망증이 너무 심해요.”
“내 나이 먹어봐, 이놈들아!”
민감한 주제였는지 발끈한 팀장님을 놀리던 찬이는 준이 형의 응징에 다시 조용해졌다.
“전에 너희가 골랐던 프로 다 ok 됐어. 그리고 다음 주 음방 잡혔다.”
“어? 진짜요?”
컴백하고 일주일간 세 개의 음악 프로그램에 나갈 수 있었다.
그다음 주에는 방송이 잡히지 않아 다른 프로그램을 촬영하고 무인도도 다녀왔다.
한 앨범에 보통 2주에서 3주 정도 활동을 하고 다음 앨범을 준비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다음 주면 3주 차로 활동 막바지에 해당했다.
컴백하는 그룹이 많았던 건지, 아니면 아직 우리를 꺼리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2주 차 때는 열심히 읍소하며 다녔지만 불러주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 활동도 이걸로 음악 방송은 없는 건가 하고 조금 힘이 빠져있었다.
원래라면 음반이 나오기 직전이나 직후는 홍보 겸 예능 같은 프로그램에 얼굴을 비춰야 했다.
그런데 하필 망둥이와 얽히면서 처음에는 마땅히 나갈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었다.
회사에서도 지금 바로 방송에 나가봤자 우리에게 좋을 게 없다며 조급해하는 우리를 달랬었고.
다행히 그 후 앨범이 공개되며 그간 출연한 프로그램 모두에서 호평을 받은 터라 조금씩 다시 요청이 들어왔고, 그 결과가 이전에 우리에게 주어졌던 프로그램 목록이었다.
물론 매니저 형들과 팀장님이 열심히 홍보하러 방송국을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았던 게 가장 컸겠지만.
“그리고 팬 미팅 날짜도 확정됐다.”
“우와! 드디어!”
역시 가장 좋은 소식은 가장 나중에 나오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