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2)
“누나가 웬일이야?”
“내가 못 올 곳 왔니?”
“아니, 그게 아니라….”
멤버들은 내가 쩔쩔매는 모습에 흥미롭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자주 연락을 하는 사이가 아니었던 터라, 갑작스러운 누나의 방문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집에서 만났을 때처럼 대충 입은 모습이 아니라 멀끔한 모습에 로퍼를 신은 걸 보니 회사에서 온 것 같았다.
“회사는?”
“반차. 평소에 그만큼 부려 먹으면 이 정도는 쉬게 해줘야지.”
회사 이름이 언급되자마자 흉흉해지는 기운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성격이 좀 난폭하긴 했지만 나와 다르게 성실하고 자기 앞가림 잘하는 사람이라 회사에서도 사랑받는다고 알고 있었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과장을 달았다고,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았다.
아니, 사실 그게 지난 생의 누나인지 이번 생의 누나인지 기억이 섞이기 시작해 조금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찾아온 가족의 방문이 반가움보다 당황스러움으로 다가오는 걸 보아 아직도 적응 중인가 보다.
정말 먹고사는 게 너무 어렵다.
“우연히 너희 나오는 걸 봤는데, 네가 너무 골골대는 것 같길래 약 좀 지어왔어.”
“약? 갑자기?”
“네가 어릴 때부터 조금 부실했잖니. 자라면 나으려나 했더니 여전히 부실하더라.”
부실하지 않다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마땅히 변명할 거리가 생각나지 않아 힘없는 나는 침묵을 택했다.
“안녕하세요, 지환이 누납니다.”
“안녕하세요…! 누님, 말 편히 하세요!”
“넵, 말 편히 해주세요! 지환이 누님이시면 저희한테도 누님인데.”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
슬금슬금 눈치만 보던 멤버들이 이때다 싶었는지 냉큼 내 옆 소파에 엉덩이를 걸치는 모습에 기가 막혔다.
언제부터 너희가 이렇게 서글서글하고 예의 바른 애들이었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외부인들을 만날 때면 언제나 착하고 예의 바르다는 말을 듣는 우리 애들이었다.
“하… 이런 거 안 먹어도 되는데.”
“잔말 말고 빼놓지 말고 먹어.”
퉁명스러운 목소리에는 나에 대한 우려가 섞여 있어 더 거부하지 못했다.
쓴 건 질색인데….
“이번에 받아서 다들 먹고 있는 영양제가 있다고 지환이한테 들었어.”
“아, 네. 맞아요. 덕분에 다들 약빨로 삽니다.”
그나마 대외적인 이미지를 담당하고 있는 준이 형이 누님의 분위기에 눌려 얌전히 대답하고 있었다.
“저 사고뭉치야 어릴 때 몇 번 데려갔던 한의원이 있어서 그냥 지어왔지만, 맥을 짚어보고 지어야 정확해서 동생들 건 못 챙겼어. 대신 몸에 부기 빼는 데 좋다는 걸 따로 준비했어.”
“앗, 저희까지 안 챙겨주셔도 괜찮은데….”
한쪽에 있던 쇼핑백 몇 개를 하준 형 쪽으로 밀어준 누님은 정윤 실장님이 생각날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내 동생이지만 성격이 참 그래. 내가 교육을 제대로 못 시켰어. 고집은 또 어지간히 세야지. 멤버들이 고생하는 거 알아. 이런 모자란 동생이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해.”
가볍게 묵례까지 해가며 멤버들에게 고개를 숙이자 우리 애들은 당황해서 쩔쩔매고 있었다.
이쯤에서 내가 잘라줘야 할 것 같았다.
“우리 애들 부담스럽게 그러지 마. 그리고 약 같은 거 말고 맛있는 것 좀 사 오지. 배고픈데.”
“저 주둥이는 언제쯤 철이 들런지.”
“누나 닮아서 아마 안 될 듯.”
“나 닮았으면 네가 그나마 사람이 됐을 텐데.”
쓸데없는 소리로 툴툴대는 우리 모습에 찬이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우와…. 누님 최고…!”
“고마워. 다들 우리 지환이랑 달라서 정말 다행이야.”
“아, 쫌!”
“저건 성질만 못돼가지고. 지 속마음도 제대로 말할 줄 모르고 괜히 틱틱거리기나 하고.”
지환이가 살아오면서 만든 흑역사도 모두 내 몫이었기에 차마 멤버들 앞에서 어릴 때 이야기가 나오게 둘 수는 없었다.
“안가? 맨날 바쁘다며. 가서 쉬어.”
“못돼처먹은 놈. 오랜만에 보는 누나한테 빨리 꺼지라는 게 할 소리니.”
“내가 가라 그랬지, 언제 꺼지라고 했냐!”
말할수록 휘말려서 결국 누나한테 소리를 빽 지르고 말았다.
그 모습을 가감 없이 모두 지켜보던 멤버들은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나 지환이 저러는 거 처음 본다….”
“뭔가 새로워, 속 시원해!”
“너만 처음 보냐, 우리 다 처음이지.”
“원래 누나는 이런 존재예요?”
“아냐…. 다 그런 건 아니고. 지환이 누님이 좀 강하신 것 같아.”
자기들끼리 소곤거린다고 했지만 바로 옆에 있는 내 귀에는 다 들리는 게 문제였다.
누님 쪽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포잉의 눈도 흥미로 반짝거렸다. 히죽거리는 얼굴을 보아하니 언제가 됐든 이걸로 놀려먹을 생각인 것 같았다.
부끄러움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자 누나가 작게 혀 차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를 부스럭거렸다.
“너는 피부가 약하니까 입술 뜯지 말라고 누나가 몇 번을 말하니. 립밤이랑 핸드크림 빼먹지 말라고 했지. 있어?”
“어…. 저번에 사준 거 아직 남았어.”
“그게 왜 아직도 있어. 꼬박꼬박 발라. 다 쓰면 말하고.”
손에 크림을 짜주고 조금 까끌까끌거리던 입술에 립밤을 발라준 누나는 가방에서 핸드크림과 립밤을 한 무더기 꺼내 휴게실 테이블에 쌓아놨다.
“준이, 영빈이, 경환이, 힘찬이, 세빈이. 맞지? 너희도 하나씩 챙겨가. 취향을 몰라서 무난한 걸로 가져왔는데 취향에 안 맞으면 저 둔해 빠진 내 동생에게 주렴.”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핸드크림 다 썼는데.”
“잘 쓸게요, 감사합니다.”
저 작은 가방에서 이게 다 나온다는 게 가장 신기했고, 언제나 시큰둥한 표정이었던 누나가 이렇게 따뜻하게 웃고 있는 게 그다음으로 신기했다.
역시 이번 생에도 언래블을 응원하는 걸까? 동생이 속해있으니 당연하지 않나 싶다가도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계속 있으면 방해될 테니 이만 갈게. 다음에는 맛있는 것 가져올게.”
“누님 자주 놀러 오세요!”
“그래, 다치지 말고 다들 사이좋게 지내렴.”
미련 없이 몸을 일으킨 누나에게 조금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다가가자 눈가가 찌푸려진다.
“집에 갈 거야?”
“팀장님 뵙고.”
“조심히 가. 밥 굶지 말고.”
괜히 틱틱대듯 말했지만, 고마운 마음을 그대로 말하기엔 지나치게 낯간지러웠고, 이제는 몸 나이에 더 익숙해져 버린 내 정신이 살가운 말을 부끄러워했다.
흔들림 없는 시선이 나를 잠시 바라보다 등 뒤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멤버들에게 닿았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휴게실을 나서는 누나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온몸이 간지러운 것 같았다.
“지환아, 누님 되게 센 캐 같던데!”
“쫌 멋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게 그 걸크?”
“그건 여자가 여자를 동경하는 그런 거고, 이 멍청아.”
“아씨, 왜 멍청이래!”
이제는 멤버와 친구, 형제의 경계가 희미해진 멤버들이지만, 그런 멤버의 혈육을 보는 건 낯선 일이었다. 그 덕에 폭풍처럼 왔다 간 누나의 모습이 마냥 신기한 듯 굴었다.
“준이 형도 누나 있잖아, 찬이도 그렇고.”
“우리 엄마 딸들은 나랑 안 친해.”
“우리 누나는 좀 조용조용한 성격이라.”
찬이와 준이 형의 대답에 멤버들이 서로의 혈육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외동인 세빈이만 우리를 부럽다는 듯 바라봤다.
“얘들아, 이제 이동해야 된다.”
“아, 넵!”
“갈게요~.”
혼자 들고 오기 무거웠을 텐데 용케 다 챙겨 왔다 싶어, 한약과 부기 빼는 약이라는 한 무더기의 쇼핑백을 바라봤다.
딱 멤버들의 수에 맞춰 가지고 왔다.
멤버들도 자기 몫의 립밤과 핸드크림을 다 챙겨 넣었는지 이미 테이블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빠른 건 또 처음 보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아, 떨린다! 어떡하지. 나 연습 많이 했는데 떨면 어떡해?”
“찬아, 네 덕에 나까지 떨릴 것 같으니까 이제 그만 입 좀 다물래?”
“진짜 솜뭉치들이 이 꼴불견을 못 봐서 어찌나 다행인지….”
팬 사인회를 위해 이동하는 차 안에서 힘찬이가 옆에 있는 경환 형을 괴롭히고 있었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지만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그냥 괴롭히는 걸로 보일 것 같았다.
“오늘은 오픈된 장소가 아니니까 괜찮은데 내일은 무역 센터에서 하니까 조심해야 된다.”
“으으윽….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할게요….”
“포스트잇 하나당 질문 하나 적으라고 했으니까 그 이상은 받아주지 말고.”
“얍.”
“저번이랑은 분위기가 또 다르니까 제발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가자. 알았지?”
“그때도 사고 안 쳤잖아요. 저희는 나서서 사고 친 적이 없다니까요?”
석환 형은 우리보다 자기가 더 긴장한 것 같았다.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배정된 스태프들 사이를 오가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언래블 입장할게요!”
우리의 두 번째 팬 사인회가 시작되었다.
작은 단 위에 멤버들이 앉을 테이블과 의자가 나란히 놓여있었고, 뒤에는 2집 여로(旅路)의 메인 포스터 두 버전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스태프의 안내와 함께 입장하기 직전, 문 너머의 술렁이는 공기가 피부 위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 찬이 때문에 나까지 떨리는 것 같아.”
문이 열리고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이, 옆에 있던 세빈이에게 작게 속삭였다. 세빈이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 우와! 얘들아!
- 오오!!
공기마저 웅웅거릴 정도로 울려 퍼지는 팬들의 환호성에 방금 전까지의 긴장은 잊은 듯 모두가 환하게 방긋 웃고 있었다.
앞에 놓인 텀블러의 색으로 각자 자리를 찾은 우리가 마이크를 들자, 솜뭉치들의 환호는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둘, 셋! 안녕하세요, 함께 풀어나갈 미래, 언래블입니다!”
“언래블입니다! 반가워요!”
“2집 첫 팬 사인회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 오랜만에 봐요!”
준이 형의 선창에 멤버들도 이제는 익숙하게 구호를 외쳤고, 순서대로 마이크를 들고 솜뭉치들에게 한마디씩 인사를 건넸다.
자리가 정돈되고, 호명에 따라 앨범을 손에 든 솜뭉치들이 한 줄로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임펜을 손에 쥔 우리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착하게 줄을 선 솜뭉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솜뭉치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이 자리가 우리들에게도 정말 소중했다.
이번에도 세빈이와 영빈 형 사이에 앉은 나는 솜뭉치들을 기다리다 누나가 쥐여준 핸드크림을 꺼내 손에 발랐다.
이왕이면 더 좋은 향으로 기억되고 싶었고, 겨우 한번 손을 잡아줄 수 있을 텐데 좋은 촉감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싶었다.
“화니 형, 뭐해요?”
“핸드크림 발라. 너도 바를래?”
“넹.”
“환아, 형도.”
졸지에 셋이 쪼르륵 앉아서 핸드크림을 바르고 있는데 카메라 셔터음과 함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때, 우리 쪽을 힐끔 보던 찬이가 세빈이 옆구리를 쿡쿡 찌르더니 자기 손등을 내밀었다.
“아, 왜여.”
“나도.”
“형 꺼 있잖아요.”
“아, 빨리.”
둘이 투닥거리더니 결국 세빈이가 진 건지 자기 핸드크림을 꺼내 찬이 손등에 짜줬다.
좌석에 앉아서 우리 쪽으로 손을 흔드는 솜뭉치들에게 같이 손을 흔들어주다 마이크를 들었다.
“왜요? 왜 웃지! 그냥 핸드크림 바른 건데.”
몇 명이 한꺼번에 말하다 보니 말하는 내용이 잘 들리지 않았다.
“아, 핸드크림 없냐고? 아뇨, 다 하나씩 있어요.”
세빈이가 자기 앞에 온 솜뭉치와 이야기하는 모습에 좌석에 있는 솜뭉치들에게 다시 손을 흔들어주고 마이크를 내려놨다.
얼마 후 내 앞에 온 솜뭉치에게 거울을 보며 연습했던 미소를 보이며 손을 내밀어 아직 작고 여린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주었다.
“어서 와요, 오늘 와줘서 고마워요.”
“지환아, 진짜 내가… 너무 고마워.”
안 그래도 울망울망하던 솜뭉치의 눈가가 뿌옇게 흐려지더니, 눈물을 톡 떨구며 내 앞에 열심히 쓴 편지와 앨범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