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불장난(6)
“안녕하세요, 환 씨. 잘 잤어요?”
“네, 안녕하세요. 잘… 잔 것 같아요.”
잠이 아직 덜 깬 건지 느릿하게 눈을 깜박거리는 언래블 지환의 모습에 인터뷰를 하던 최지영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제정신일 때도 그렇게 활달하진 않은 것 같았지만, 확실히 지금은 나사가 한 개쯤 빠진 것 같았다.
그러니 일어나자마자 멤버들 인터뷰를 따라고 PD가 닦달했을 테지만.
“기분이 어떠세요?”
“기분이요? 집에 가고 싶어요….”
졸음이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눈을 쓱쓱 문지르며 집에 가고 싶다고 답하는 모습이 어젯밤, 형들을 닦달하던 모습과 달리 또래처럼 보였다.
“캠핑은 처음인 거죠? 제일 인상 깊었던 걸 꼽아보자면 뭐가 있을까요?”
“사방이 바다인 게 정말… 기분이 이상하면서도 좋았어요. 외롭다는 느낌도 들고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여행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가장 먼저 어떤 걸 하고 싶어요?”
“숙소 가면 목욕부터 하고 싶어요…. 욕조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욕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일 때는 조금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버렸다.
점점 정신이 돌아오는 건지 조금 처져있던 자세를 고치며 어느새 허리를 세워 단정하게 앉았다.
이렇게 본능적으로 자세를 잡으려면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든가 스스로가 끊임없이 노력해야 했다.
어느 쪽이든 최지영은 조금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날카롭고 예민할 것 같은 첫인상, 주변 사람에 대한 희미한 경계심.
‘그 일’을 겪은 터라 처음에는 어린 나이에 고생한다, 정도의 감상을 가졌었다.
하지만 이동하는 동안은 물론 섬에 도착해서 촬영을 이어나가는 동안에도 여러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자기보다 형들인 멤버들을 앉은 자리에서 잔소리하며 지휘하는 게 익숙해 보였고, 멤버들은 그런 지환을 귀여워하며 주변을 맴돌았다.
사람 사귀는데 까탈스럽다고 소문난 키스가 언래블 멤버들에게는 수시로 장난을 걸었고, 세비와 여진우는 자신들 사이에 하준과 지환을 끼고 있었다.
밥을 하는 모습은 너무 능숙해서 문득 지환의 가정사가 떠오르기도 했다.
여러모로 이 10명은 희한하고 재밌는 조합이었다.
몇 가지 질문이 더 오간 후 모든 멤버에게 할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다음에 또 캠핑을 간다면 누구랑 가고 싶어요? 한 명만요.”
“…혼자 가고 싶어요.”
질문을 들은 지환은 그사이 더 피곤해진 얼굴로 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촬영 스태프도, 인터뷰하던 최지영도 왜 그렇게 대답했는지 알 것 같아서 크게 웃어버렸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처럼 나머지 9명 중 7명에게서 다음 캠핑은 지환과 둘이 가고 싶다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하준은 동갑인 영빈과 단둘이 한번 여행을 다녀오고 싶다고 했고, 의외로 가영이 지환처럼 다음 캠핑은 혼자서 다녀와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자리를 정리할 때였다.
“모닝커피 한잔하실 분 계세요?”
평소의 페이스로 돌아온 건지 지환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고, 모두가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어휴, 나이답지 않게 애가 참 싹싹해. 그치?”
“그러니까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사람도 참 잘 챙기고.”
어느새 지환은 스태프들 마음까지 녹여버린 것 같았다.
물론 지영의 마음도 녹아들어서 육지로 돌아가면 앨범이라도 한 장 구매해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 *
2박 3일의 촬영이 끝나고 각자의 보금자리로 돌아가 쉬고 있을 시간에 언래블의 공식 SNS에는 한 장의 사진이 올라왔다.
못생긴 이 사람은 누굴까요!
힌트:얼굴이 찐빵 닮음
(부스스한 머리, 검은색 민소매 티에 반바지를 입은 멤버가 누군가에게 손을 뻗는 모습)
#힐링 #여행 #못생김 #비밀
@Unravel_ltt 님에게 보내는 답글
?? 얘드라 어디 다녀왔어? 찬이가 찐빵이라닠ㅋㅋㅋㅋㅋㅋㅋ
@Unravel_ltt 님에게 보내는 답글
울 막둥이가 올렸니?ㅋㅋㅋㅋㅋㅋㅋㅋㅋ찬이가 보면 난리칠 텐뎈ㅋㅋㅋㅋㅋㅋㅋ
@Unravel_ltt 님에게 보내는 답글
I'm a fluffy in LA. Unravel is cute. I love you.(우는 이모티콘)
@Unravel_ltt 님에게 보내는 답글
Oppa sooooooo cute saranghae :)
@Unravel_ltt 님에게 보내는 답글
우래들 놀러 다녀왔어요?ㅠㅠㅠㅠ 맛있는 거 먹었어?
@Unravel_ltt 님에게 보내는 답글
(하준이 살려주세요 짤) 아 세비나ㅋ.... 찬이가 이걸 못 봐야 할 텐데
@Unravel_ltt 님에게 보내는 답글
レブルルルキターーーーーーΣ((((o△o))) チャニマジ天使♪(*´θ`)ノ
@Unravel_ltt 님에게 보내는 답글
오늘부터 찬이는 찐빵이다 몰라 일단 찐빵이야ㅠㅠㅠㅠ최찐빵 사랑한다ㅠㅠㅠㅠ
@Unravel_ltt 님에게 보내는 답글
すごく可愛いじゃん! 日本でも応援してます。
@Unravel_ltt 님에게 보내는 답글
세빈아.... 좋은 하루 보내... 누나한테는 세빈이가 항상 첫 번째야...☆
사진을 본 커뮤니티에도 온갖 글들이 올라왔다.
-울 애들 너무 기여워서 나 눈물나ㅠㅠㅠㅠ죽을 것 같아ㅜㅜㅜㅜㅜ
ㄴ그냥울고시픔우러 ㅇㅇ
ㄴ원글쓴이 : 나 지금 맘이면 눈물로 태평양 채우기 쌉가능
ㄴ그럼 인도양은 내가 맡을게..... 인도양 내 눈물로 다 채우기 삽가능 ㅇㅇ....ㅠㅠㅠㅠ쉬발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최찐빵아ㅏㅏㅏ 아아아아!!!!
솜뭉치들은 (아마도) 세빈이가 올린 꼬질꼬질한 찬이 뒷모습에 귀엽다고 오열하는 한편, 해시태그로 달아놓은 여행이라는 글자에 주목했다.
팬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언래블 스토리의 촬영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프로그램의 촬영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멤버들끼리 여행을 다녀온 것인지 의견이 분분했다.
더불어 힘찬이에게는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
이 사진이 올라갔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된 힘찬이 세빈이의 멱살을 잡았다가 맏형들에게 혼났지만, 솜뭉치들은 모르는 이야기였다.
* * *
우리는 2박 3일간의 촬영으로 고생했다며 다른 일정 없이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내일부터는 팬 사인회와 본격적인 패션쇼 준비에 들어가야 했기에 오늘 하루는 조금 쉬라는 회사의 배려였다.
배를 타고 차를 타고 이리저리 움직였던 멤버들은 하나같이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숙소에 오자마자 너 나 할 것 없이 화장실로 달려갔다.
이틀 동안 제대로 씻기 어려운 환경에 있었던 탓에 모두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샤워하겠다 벼르고 있었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순서도 이미 정해두었다.
안타깝게도 가위바위보에서 진 나는 네 번째 순서였지만 그래도 마지막이 아닌 게 어딘가 싶었다.
“화니 형, 내 칫솔이 없어졌어!”
“칫솔이 왜 없어져, 잘 찾아봐. 새 칫솔도 없어?”
“없는데?”
“…어휴, 내가 진짜.”
우승자였던 세빈이와 하준 형이 씻는다고 욕실에 들어갔고 찝찝한 몸으로 러그 위에 있기 싫었던 나는 멤버들을 모두 바닥에 앉혀놨다.
씻고 나오면 또 내내 러그에서 뒹굴뒹굴할 게 뻔한데, 씻지 않은 몸으로 그 위에 올라가는 건 허락할 수 없었다.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찬이를 경환 형을 통해 제압하고 나니 조금 평화로워졌다.
좁은 공간에 옹기종기 모여 잡담을 나누던 나는 막내의 외침에 한숨을 내쉬며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용도실에 있는 여분 칫솔 뭉텅이를 들고 화장실 문을 두드리자 세빈이 팔이 빼꼼 밖으로 나왔다.
“하나 까서 쓰고 나머진 안에 넣어놔.”
“넹!”
“그래, 바닥 조심하고.”
기운차게 대답하는 내 새끼에게 손을 휘적여주고 자리에 돌아와 앉자 영빈 형과 경환 형, 찬이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다.
“…왜요, 왜 또 그런 눈으로 쳐다봐요.”
“그냥.”
그냥이라는 말에 속아 넘어갈 정도로 짧게 본 인간들은 아니었지만, 더 털어내는 것도 기력이 딸릴 것 같아서 넘기기로 했다.
이틀간 늦은 시간까지 형들한테 시달리느라 잠들지 못했더니 잠이 너무 부족했다.
낮잠을 잘까도 생각했었지만, 물결치는 파도와 하얗게 우는 바다를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밥 먹을 시간이 돼버리곤 했다.
씻고 나온 준이 형과 세빈이는 한결 후련한 얼굴로 러그 위에 앉았고, 아직 씻지 못한 중생들은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후딱 씻자.”
마지막 순서인 영빈 형과 찬이는 울적한 얼굴이 되었지만, 그래도 허락할 수 없었다.
모든 멤버들이 깨끗해진 몸과 깨끗한 잠옷으로 러그에 퍼질러졌을 때, 어느 정도 잠이 깬 나는 경환 형을 불렀다.
“형, 메모한 거 왜 안 꺼냈어요?”
“그게…. 음. 있었는데 없어졌어.”
“…?”
분명 우리는 캠핑을 걱정하며 여러 영상을 찾아봤었고, 캠핑 도구가 낯설었던 탓에 사용 방법이나 물건 이름 같은 것들을 미리 훑어봤었다.
개인 핸드폰을 소지하지 못 하게 할 것 같아서 경환 형에게 종이에 중요한 것들은 꽤 열심히 메모했었다.
“분명히 주머니에 있었거든. 내가 아침에도 확인했었단 말이야.”
“응. 나한테도 보여줬잖아요.”
“근데 배에서 내리니까 없더라….”
제작진이 허용해 줄지 알 수 없었던 탓에 주머니에 몰래 숨겨놨었는데, 아무래도 배나 길에서 떨어트린 것 같았다.
“고생했어요….”
고생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으니 아마도 경환 형, 당사자가 가장 속상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애써 형을 위로했다.
“그래도 뭐라도 좀 보고 갔다고 우리 괜찮지 않았어?”
따뜻한 물로 씻어 노곤노곤해지고 긴장도 풀리니 하나둘 무인도 캠핑의 추억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 가영 형이 진짜 노래 잘하긴 해. 그치?”
“맞아. 평소에 우리랑 놀 때는 쫌…. 응, 조금 이상해 보였는데, 그 형은 음악 할 때는 진짜 다르더라.”
말 그대로 캠핑 장비만 준비되어 있던 터라 그 흔한 클래식 기타도 없었다.
그저 화음을 넣는 몇 명, 바닥이나 냄비를 툭툭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고 리듬감을 넣어주는 몇 명, 그런 소리를 배경 삼아 모두가 즐겁게 흥얼거렸다.
가영 형부터 배우인 진우 형까지 모두가 한 소절씩 노래를 불렀지만, 역시 그중에서도 가장 귀가 즐거웠던 노래는 가영 형과 영빈 형의 노래였다.
“아, 경환 형 막 뭐 적던데 뭐였어요?”
“그냥. 생각난 거 메모해놨어. 종이랑 펜은 주시더라고.”
“노트북 없는 게 아쉽더라. 생각난 거 적느라 힘들었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바라만 보고 있어도 정말 시간 잘 가더라고요.”
처음 시작은 노래와 각자의 소감이었다.
“난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저녁 시간이 제일 좋았어.”
“진짜 바비큐가 이런 거구나 싶었지.”
“키스 형 고기 굽는 거 진짜 예술임. 고기가 완전 탱글탱글했어!”
“난 세비 형이 소금 촥 뿌리는 거 보고 박수 쳤잖아.”
직화구이 고기에 모두가 열광했고, 불 앞에서 고생한 형들에게 감탄했다.
“고기도 진짜 좋았지만, 된장찌개에 냄비 밥은 진짜 최고의 조합이었지.”
“우리 환이가 고생이 많아. 열 명 먹이느라 고생 많았지?”
“괜찮아요, 나도 간만에 고기 신나게 먹어서 좋았어요.”
된장찌개에는 사실 별로 들어간 게 없었다.
야외였고, 채소류가 다양하게 갖춰진 상황이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뭐든 고기가 들어가면 맛있는 법.
차돌박이를 발견한 게 신의 한 수였다.
신났던 물놀이, 나뭇가지를 줍다가 지렁이 보고 소리 질렀던 영빈 형의 못난 모습, 새벽 형들 사이에서 고생하던 진우 형에 대한 안쓰러움 등.
자유분방한 자세로 이틀간 느꼈던 감정들과 좋았던 것들을 이야기하던 멤버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늘어지더니, 하나둘 하품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한숨 자자….”
“잘 자여.”
“인나서 밥 먹자.”
그렇게 무인도 캠핑에서 누군가는 영감을 가지고 돌아왔고, 또 다른 누군가는 식탐을 채우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