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162)화 (162/456)

162. 불장난(5)

“저기 봐!”

“우와! 해 진다!”

“올해 제대로 된 일몰은 처음 보네.”

많은 인간을 먹여야 한다는 책임감에 고기며 소시지며 신나게 준비해서 굽던 도중이었다.

해지는 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시간을 보낸 탓일까.

경환 형과 찬이 외침에 그제야 주변을 다시 볼 여유가 생겼다.

텐트 안과 밖에서 다양한 모양의 랜턴이 바람이 부는 것처럼 사람들의 그림자를 흔들었고, 모닥불의 나무가 타들어 가는 소리, 숯이 부대끼며 우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 사이 사이를 메꾸는 건 어느샌가 아끼게 된 익숙하고 편안한 사람들의 목소리와 웃음소리였다.

“형, 고기 잠깐 두고 저거 봐봐.”

“야야, 고기 탄다. 잠깐만.”

버너의 불을 최대한 줄이고 세빈이가 이끄는 대로 마지못해 모래사장 쪽으로 걸어 나가자 키스 형이 어깨동무를 해왔다.

“형, 고기는 다 빼놓고 온 거죠?”

“이런 분위기 없는 자식.”

“분위기가 고기를 먹여주진 않잖아요.”

“그것도 맞지.”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하는 눈으로 나를 보던 키스 형도 결국 웃었다.

파랗고 하얗게 부서지던 바다가 이제는 주황색을 겹쳐 놓은 것처럼 옅은 두 색의 경계선이 보일 듯 말듯 흔들거렸다.

그 위로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수평선의 경계를 보여주는, 보랏빛이 감도는 붉은 하늘이 있었다.

홀로 빛을 내는 태양과 그 아래 함께 빛나는 바다, 그 경계선을 굳게 지키고 있는 작은 섬들.

외롭게 홀로 떠 있던 섬들이 함께 빛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색 진짜 예쁘다….”

“이런 맛에 사람들이 캠핑하고 하나 봐요.”

“카메라 없는 게 아쉽다.”

“이런 건 눈에 담는 게 나아. 어차피 사진 찍어도 잘 안 꺼내 보잖아.”

바다가 해를 잡아먹는 이 장면이 나와 내 사람들의 눈동자에 선명하게 각인되는 순간.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서로를 슬쩍 바라본 멤버들과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한없이 붉어지기만 할 것 같았던 해가 삼켜지고 순식간에 어두워진 눈앞의 바다.

등 뒤로는 우리가 만들어놓은 조잡한 쉘터가 여러 불빛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신나게 먹고 마시면 되는 거 아니냐?”

“맞음. 고기 구워줘라!”

“먹자!”

“세상 본능적인 인간들 같으니라고.”

나와 키스 형 둘이 굽는 양으로도 배고픈 중생들을 달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한쪽에는 장작불, 다른 한쪽에는 숯불을 피워놓고 통삼겹살과 통목살을 동시에 구웠다. 우리 소중한 고기를 가장 안전하게 구울 수 있는 키스 형과 진우 형이 집게를 들었다.

나는 그 가운데서 버너 두 개로 새우 소금구이와 된장찌개를 끓이는 상황을 이뤄냈다.

“아니, 이게 뭐야…. 숙소에서랑 다를 게 없어.”

“예! 된장찌개! 청양고추 넣어줘!”

“알았으니까 일어나지 마. 앞에 접시 넘어지겠다!”

어미 새를 향해 입 벌리고 삐악거리는 아기 새마냥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멤버들을 외면하기란 너무 힘든 일이었다.

그래, 우리 애들 잘 먹으면 됐지.

내가 우리 애들 꽃길 깔자고 그 고생을 했는데 이 정도면 잘하고 있는 거야.

나는 결국 어쩔 수 없다며 자신을 납득시켰다.

굽다 보니 남은 고기양이 먹는 양을 못 따라갈 것 같아서, 고기는 형들한테 맡기고 내일 저녁을 위해 다른 음식을 만드는 쪽을 생각했다.

오늘은 돼지고기만 먹이고 내일 소고기를… 해산물이 조금 있으니까 이거 먹이고, 내일 점심은 뭘 먹이지….

그런 고민을 하며 손을 놀리다 말고 예쁘게 쌈을 싸서 내 입에 넣어주려고 들고 오던 세빈이에게 물었다.

“세빈아, 된장찌개, 김치찌개 중에 골라봐.”

“돼지고기니까 된장찌개요!”

“그래, 그럼 오늘은 된장찌개로 가자.”

“왜 우리한텐 안 물어봐?”

“준이 형은 뭐 먹고 싶어요?”

“나도 된장찌개가 좋아.”

“지환아! 형은 김치찌개가 좋은데!”

“그냥 주는 대로 드세요.”

차애와 최애가 대답했으니 나머지는 무시하기로 했다.

그래도 다들 잘 먹는 걸 보니 기분이 좋기도 하고, 밥한다고 고생하는 다른 사람들 입에 서로 고기를 넣어주는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고.

“사장님! 소금구이 언제 나오나요!”

“그쪽엔 안 나가요!”

“이 집 서비스가 별로네!”

“아, 그럼 딴 집 가세요~.”

거기에 더해 능청스럽게 상황극을 걸어오는 진우 형의 모습은 색달랐고, 생각보다 고기 굽는 세비 형은 터프했다.

되려 대충할 것 같던 키스 형이 장인 정신을 발휘하듯 고기의 열을 맞춰 신중한 얼굴로 손을 놀렸다.

꽤 많았던 고기와 새우구이, 된장찌개와 즉석밥에 냄비 밥까지 모두 해치운 일행은 각자 편한 자세로 의자와 상자에 널브러졌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것 같지?”

“처음에는 경험이 없어서 엄청 우왕좌왕했는데 이게 또 하다 보니까 되네요.”

느긋한 자세로 텐트 입구에 엎드려 있던 가영 형의 말에 배를 문지르던 세빈이가 수줍게 웃으며 답했다.

“처음에는 제작진이 우리 싫어하는 줄 알았지.”

“납치해서 섬에 던져놨잖아.”

“와, 인터뷰 있다고 들었는데 아침부터 매니저가 이상한 데로 데려가는 거야. 졸다가 얼마나 놀랐던지.”

“헐. 진짜요? 그래도 우리는 전날 저녁에 들었는데.”

전날 저녁에 들은 우리도 날벼락 같았는데, 당일 아침에 영문도 모르고 끌려 온 진우 형은 정신이 없을 만도 했다.

어쩐지 오는 배 안에서 내내 시무룩한 얼굴로 있다 했지.

매니저가 진우 형 몰래 옷 가방까지 싸놨다며 세상에 믿을 사람이 없다고 우는 시늉을 했다.

“한 번씩 이렇게 다 같이 여행 가는 것도 좋겠다. 진짜 뭔가 새로운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사람들이 왜 그렇게 여행 다니고 캠핑가고 하는지 알 것 같아.”

은은한 램프의 조명과 얼굴을 빨갛게 비춰주는 모닥불의 불빛, 적당히 서늘한 공기와 훅하고 왔다가는 모닥불의 열기가 괜스레 사람 마음을 간지럽혔다.

“아, 이런 분위기면 노래가 빠지면 안 되는데. 막둥아, 노래 하나 뽑아봐!”

“형은 왜 자꾸 다른 팀 막내를 괴롭히냐? 세빈아, 그냥 무시해.”

“다른 팀이라니! 언래블은 우리 동생 그룹 아니냐? 와, 김윤혁 선 긋네. 인성 무엇?”

“나한테 인성을 논하기 전에 형의 인성을 둘러보는 게 더 좋을 것 같음.”

한쪽에서는 한결같은 가영 형과 키스 형이 우리 막내를 탐하고 있었고.

“진우 형, 최근에 출연하셨던 영화 있잖아요. 사실 저 그거 DVD도 샀어요.”

“아, 진짜? 왜 말 안 했어!”

“좀 쑥스럽잖아요. 처음에 뵀을 때 되게 신기했어요. 진짜 연예인 보는 기분?”

“영빈 형, 형도 연예인이야….”

“그, 그렇긴 한데.”

다른 한쪽에서는 영빈 형과 진우 형, 경환 형이 웃느라 바빴다.

“이번 무대 보니까 세빈이랑 찬이가 되게 칼 갈고 했더라. 우리 회사 사람들 중에도 언래블 팬 생겼다?”

“진짜요? 와! 형, 그분한테 꼭 고맙다고 전해줘요!”

“나중에 사인 한 장 해줘. 맨날 나만 보면 너희 사인받아달라고 난리야.”

”사인 백 장 해드릴 수 있어요!”

세비 형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힘찬이를 칭찬하면서 정말 잘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여주고 있었다.

그 모습과 모닥불이 타들어 가는 장면을 멍하니 보고 있던 내 옆에 준이 형이 다가와 옆구리를 툭툭 건드렸다.

“재밌어?”

“네, 시작은 엉망진창이었지만 지금은 좋아요.”

“고생했다. 밥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닌데.”

“다 같이 고생했죠, 뭐. 정말 대충 한 것 같은데 다 맛있다고 좋아해 주니까 저도 좋아요.”

“늘 네가 고생이 많네. 형이 더 잘해야 하는데.”

“어허, 이 형님이 오늘따라 왜 이러지!”

의자에 몸을 깊이 묻은 준이 형의 목소리는 어둑한 가운데 타오르는 모닥불처럼 적당히 무게 있었고, 그만큼 따뜻했다.

평소에도 준이 형은 칭찬도, 잔소리도 많은 상벌이 확실한 타입이었다.

하지만 낯선 장소에서, 멤버들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듣는 칭찬은 새삼스러워서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뭐야, 왜 둘이서만 친하게 지내!”

“뭘 둘이서만 친하게 지냈다고 또 그러세요.”

“환이는 맨날 세빈이랑 준이 형만 좋아하고 말이야.”

“아니, 내가 언제? 하루에 나랑 제일 말 많이 하는 건 찬이 넌데?”

잔잔한 분위기는 견디지 못하는 두 사람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게 또 너무 평소 모습이라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이 흘러나왔고, 구시렁거리던 찬이 머리를 경환 형이 헝클어놨다.

“자, 분위기 좋으니까 노래 한 곡씩 합시다. 여기 가수가 몇 명인데 캠핑와서 노래 한 곡을 안 불러!”

“그럼 형이 스타트 끊고, 다음 타자 지목해봐요.”

“좋아, 그럼 지목된 사람이 안 빼고 부르기다?”

그렇게 장난스러운 윙크와 함께 시작된 새벽 메인 보컬의 노래는 왜 그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지 가감없이 보여주었다.

한없이 가볍고 유쾌하던 목소리가 가을 색을 입고 소중한 사람과 보내는 소중한 시간을 노래했다.

모두가 홀린 것처럼 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사람이 방금까지 낄낄대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흥에 겨운 건지 영빈 형이 화음을 넣었고, 결국 듣고 있던 나도 참지 못하고 동참했다.

“자, 한 곡 더 하고 다음은 세빈이다?”

“엑? 저요?”

“빼기 없다 했다!”

“아, 너무해요!”

이어진 선곡은 ‘소풍’으로 통통 튀는 듯한 멜로디에 풋풋한 설렘이 가득 담긴 곡이었다.

전 곡과 확연히 다른 분위기의 곡이었지만, 어색함 없이 흘러나오는 가영 형의 목소리와 흥에 겨운 몸짓은 더없이 신나 보였다.

뒤에 이어 조금 주춤하던 세빈이가 체념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다음 곡을 이어갔고, 모든 형이 흐뭇한 얼굴로 막내의 노래를 감상했다.

흔들거리는 고개와 까딱거리는 손짓, 발짓이 저마다의 기분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번이나 노래가 오가고 대화가 흘러가면서 무사히 첫날 밤이 끝났다.

이어진 다음 날은 더 많은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햇볕이 심해지기 전까진 모래사장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구경하기도 했고, 더워진 후엔 다시 물에 들어가 시간을 보냈다.

내키면 낮잠을 자고, 작은 숲길을 걷기도 했고, 커다란 바위에 앉아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한편 나와 세비 형, 영빈 형은 들고 온 이상 모든 식자재를 없애버리겠다는 마음으로 최대한 모든 재료를 활용해 음식을 만들었다.

첫날 우리 식사를 조금 나눠드렸던 스태프분들이 소문을 낸 건지 둘째 날 저녁에는 PD님이 슬그머니 와서 음식을 가져가기도 했다.

우리는 최대한 카메라를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했고, 각자의 시간을 갖기도 하면서 이 섬 너머 육지에서의 일들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중간중간 제작진이 다가와 은근슬쩍 한마디씩 보태기도 하고 한 명씩 인터뷰를 요청하기도 해서 촬영이라는 자각이 사라지진 않았지만 그건 그거 나름대로 괜찮았다.

우리 애들도 나도 이제는 방송에서 해도 되는 말과 하면 안 되는 말은 구분할 수 있었으니까.

중간중간 크고 작은 소란이 있었지만, 다행히 누구 하나 크게 탈 나지 않고 다치지 않아서 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키스 형이 가영 형의 장난에 참지 못하고 멱살을 잡기도 했고, 되지도 않는 담력 시험을 한다고 진우 형, 찬이, 경환 형, 세빈이가 한밤중에 숲에 들어갔다가 소리 지르며 뛰쳐나오기도 했다.

뭘 봤길래 난리냐고 물었지만 저마다 외친 게 다 달라서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결국 미스터리로 남았다.

그 모든 이야기를 끝내고 뭍으로 돌아온 우리에게 10명이 함께하는 그룹채팅방이 생겼다.

언젠가 캠핑카를 끌고 다 같이 여행하자는 공통의 목표로 인한 일이었다.

“어차피 난 또 밥하라고 부르는 거잖아요! 안 해!”

“후후, 거부권이 있다고는 말 안 했는데?”

“맞아요, 환이 형이 우리를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물론 내 의지는 묵살당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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