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이게 무슨 일이야(5)
“으아아… 오늘도 고생했다, 나야.”
“누가 쟤 좀 치워줘요, 진짜….”
오늘도 힘찬이는 자기애를 과시하며 하루를 무사히 보낸 스스로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고, 그 광경이 못내 힘겨웠던 나는 발로 힘찬이를 쓱 밀어버렸다.
“너 자꾸 발로 그럴래!”
“사람이 한결같아야지, 갑자기 변하고 그럼 못쓴다.”
“아오, 저 주둥이 진짜!”
“오늘도 참 평화롭구나. 하하.”
“형, 점점 사람이 변하고 있는 것 같은 거 알아요?”
평소와 같이 힘찬이와 나는 말도 안 되는 것들로 투닥거리며 서로를 디스하기 바빴고, 그런 풍경을 커다란 잠만보 인형에 기댄 채 바라보던 하준 형은 허허하고 웃었다.
그런 하준의 모습에 세진이가 결국 한마디 했다.
처음 꽤 넓은 거실에 소파를 넣을 거냐고 팀장님이 물어보셨다. 우리가 원한다면 넣어주신다고.
소파가 있어봤자 거기 앉아서 뭐 할 거 같지도 않았던 우리는 소파는 필요 없을 것 같다고 사양했다.
이전 숙소에 비해 크다곤 했지만 그래도 소파를 넣으면 바닥에 거의 공간이 없었다.
게다가 소파를 둬도 그 위로 옷만 쌓이고 멤버들은 바닥에 쪼그려 앉을 것 같았다.
결국 소파 대신 푹신한 느낌의 러그가 거실 바닥에 깔렸다.
아직 덥지 않을까 했지만, 에어컨 틀어진 거실에서 폭신한 러그 위를 굴러 다녀보니 여기가 극락이었다.
동생 라인인 우리는 모두 한 바퀴 데굴데굴 러그 위에서 굴러다녀 보고 촉감에 만족했다. 반면 형들은 은근슬쩍 꾹꾹 눌러보기도 하고 손으로 부벼보기도 하더니 탁탁 두드리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아, 경환 형은 우리랑 같이 굴러다녔다. 저 형을 형 라인에 넣는 건 아무래도 다시 생각을 해봐야….
우리는 이사 전보다 더 긴 시간을 거실에서 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다투면서 보냈다.
침대는 정말 잠만 자는 용도가 되었고, 힘찬이는 하준 형의 자상한 지도 아래 옷으로 탑을 쌓는 것을 그만둘 수 있었다.
때로는 물리력보다 정신 공격이 대미지가 더 잘 들어가는 경우도 있지, 암.
“그래도 여행 상품권 보니까 여행 가고 싶더라.”
“나도! 휴가 가본 게 언제였는지도 모르겠어요….”
“다 같이 여행 가도 재밌겠다. 캠핑 같은 거.”
여행 이야기가 주제로 떠올랐고 문득 뮤직비디오 촬영 당시 다 같이 캠핑처럼 모닥불 앞에 모여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우리 뮤비 찍었던 것처럼 모닥불 같은 거 피워서 이거저거 구워 먹었으면 좋겠다. 별도 보고.”
“크, 우리 언젠가 휴가받을 수 있겠지? 첫 휴가는 무조건 멤버들끼리 여행 가는 거 어때요?”
한껏 들뜬 힘찬이가 멤버들을 둘러보며 제의하자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찬성을 표했다.
“저는 찬성이요!”
손을 번쩍 들면서 외치는 우리 막내 모습은 여전히 귀여워서 형들도 모두 웃어버렸다.
“모처럼 찬이가 기특한 생각을 떠올렸는데?”
“아, 진짜. 형!”
영빈 형까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힘찬이에게 말하며 품 안에 있는 양 인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행하면 역시 바단데.”
“바다에 못 들어갈 계절이면 어떡해?”
“온천 여행?”
“와, 올드하다…. 지환아, 너 진짜 18살 맞냐.”
“온천이 어때서!”
사실 온천은 한 번도 가본 적 없었다.
기본적으로 물에서 노는 걸 좋아하니까 온천도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만 해봤을 뿐.
각종 매체나 만화에서 나온 그런 노천탕에서 느긋하게 몸도 담그고 맛있는 것도 먹고.
“그냥 어디든 바비큐 해 먹고 싶어. 고기 먹고 싶다….”
“와, 바비큐…. 버섯이랑 감자도 구워 먹음 맛있는데.”
“그 분위기면 뭘 구워도 맛있지 않을까?”
“와씨, 배고파진다…. 하준 형, 편의점 다녀오면 안 돼요?”
“글쎄….”
의식의 흐름대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여행에서 자연스럽게 먹는 이야기로 넘어갔다.
슬슬 식단을 다시 조절하고 있는 상황이라 하준 형은 불쌍한 표정을 짓는 힘찬이를 보며 그저 웃었다.
“냉장고에 양배추랑 오이 썰어놓은 거 있으니까 그거나 먹어.”
“아니, 내가 초식동물이냐고!”
“팀장님한테 이른다?”
입이 심심하다고 자꾸 무언가 씹고 싶어 하는 걸 보면 우리 힘찬이는 아직 덜 자란 게 맞는 것 같았다.
자기가 동물이야 뭐야. 왜 이갈이를 하려고 해.
기껏 살찌지 말라고 그나마 단맛이 나고 씹는 맛이 있는 채소들을 찾아서 썰어놨는데 손도 안 대는 걸 보니 울화통이 터졌다.
저러다 또 트레이너 쌤한테 한 소리 들으려고.
“너희는 오 분을 쉬질 않는구나.”
그런 우리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하준 형은 진동으로 울고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우리가 누구냐고 묻자 통화 버튼을 누르며 ‘우진 형’이라고 입 모양으로 전했다.
- 너희 다 숙소에 있는 거 맞지?
“네. 저희야 숙소죠. 우진 형 무슨 일이에요?”
- 혹시 누가 문 두드려도 절대 열지 마! 형 지금 갈게!
“네….”
언제나 느긋하던 우진 형답지 않게 급하게 말을 하더니 전화가 끊겼다.
수화기 너머 우진 형의 목소리가 워낙 다급했기에 그 소리를 들은 멤버들이 각자 뒹굴뒹굴하던 자세에서 몸을 일으켰다.
“준이 형, 무슨 일이에요?”
“나도 모르겠어. 찬아, 일단 밖엔 못 나갈 것 같네.”
“어, 네. 근데 왜….”
영빈 형은 우진 형의 말이 마음에 걸렸는지 현관문의 잠금장치를 다시 한번 확인했고, 우리는 괜히 불안한 기분이 들어서 서로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소현 팀장님 [얘들아, 우진이 갈 거니까 나가지 말고 집에 얌전히 있어!]
팀장님과 우진 형, 우리들이 다 같이 있는 단체 채팅방에 소현 팀장님의 메시지도 와 있었다.
“어, 이거 때문인 것 같아요.”
“뭔데?”
세빈이가 핸드폰을 내밀자 힘찬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고, 나는 방금 전송된 진우 형의 메시지를 눌렀다.
진우 형 [지환아, 너희 괜찮아?]
[형, 무슨 일 있어요? 갑자기 웬….]
진우 형 [결국 그 망둥이가 일쳤드라]
[형, 조금 있다가 연락할게요!]
급히 진우 형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힘찬이 옆으로 가서 찬이가 보고 있는 화면을 내려다봤다.
“…이거 미친놈 아냐?”
“세상에….”
하준 형과 영빈 형, 경환 형도 자신들의 핸드폰으로 우리와 같은 기사를 찾아본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데미갓, 데미갓 이정, 이정이라는 검색어가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라있었다.
무수히 많은 기사들도 쏟아지는 상황이어서, 같은 기사가 아니더라도 뭘 눌러도 보긴 봤을 터.
“얘 진짜 또라이예요?”
“하….”
평소에 험한 말을 안 하던 우리 애들이었지만, 당황하자 험한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아니, 그런데 왜 우리가 나가면 안 되는 거예요?”
“그건 모르겠네.”
하준 형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부여잡았다. 얼떨떨해진 우리는 방금 읽은 기사가 정말인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 와중에도 하준 형의 핸드폰은 여기저기에서 연락이 오는 건지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유명 아이돌, 폭력 혐의?!]
[유명인의 주폭! 무고한 일반 시민에게 전치 4주의 폭력 휘둘러]
[인기에 감춰진 아이돌 그룹의 폭력성, 이대로 괜찮은가]
[같은 소속사 출신 G씨의 증언, C군에게 성추행당한 적 있다!]
어느 그룹이라고 적혀있진 않았지만, 기사 내용만 보면 어디인지 뻔히 알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
망둥이, 최태성이 미치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신종 자살 방법인 건지 머릿속이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그가 오늘 술에 취해 옆 테이블의 여성들에게 껄떡대다 그쪽 일행과 시비가 붙었고, 그 과정에서 폭력을 휘둘러 경찰에 연행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때를 기다리기라도 한 건지 망둥이에 대한 온갖 기사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과거 제논 엔터의 연습생이었던 사람이 제보한 성추행 기사도 있었다.
“이거, 지환이 얘기 같은데요?”
“어디, 뭔데?”
경환 형이 한 기사를 우리에게 내밀었고, 거기에는 정확한 묘사는 없었지만 신인 그룹과 함께 출연하는 프로그램 촬영 중 한 멤버를 다치게 했다는 소문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두리뭉실하게 쓰긴 했지만 최근 다친 건 나였으니까.
왠지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데미갓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일이 터지자 그동안 얼마나 더러운 짓을 많이 한 건지 사방에서 망둥이에 대한 기사를 쏟아냈다.
간혹 망둥이가 아닌, 개미핥기에 대해 쓴 듯한 기사도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같이 앉아서 촬영을 한 그룹 하나가 이렇게 산산조각 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나와 우리 멤버들은 전부 입을 다물었다.
“얘들아, 핸드폰 그만 보고 우진 형 기다리자.”
“네….”
팬들이 선물해 줬던 동물 인형을 각자 끌어안은 우리는 한곳에 모여 앉아 현관문을 힐끔거렸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겁이 났다.
데미갓이 망한 건 알겠는데 왜 우리한테 숙소 밖에 나가지 말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어서 조금 더 답답했다.
그때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고 버릇처럼 문을 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세빈이를 영빈 형이 잡았다.
하준 형이 핸드폰을 쥐고 우리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이더니 조심스럽게 현관문 쪽으로 다가섰다. 그때 하준 형의 핸드폰이 울음을 토했고, 우진 형이었는지 하준 형이 전화를 받았다.
“네. 지금 열게요.”
잠금장치를 풀어내자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와 함께 우진 형이 들어왔다. 우진 형은 들어서자마자 잠금장치를 단단히 확인했다.
“하, 이게 다 무슨 일이냐.”
“형, 무슨 일이에요? 왜 저희….”
“형, 여기 물이요.”
“어, 지환아. 고맙다.”
나는 냉장고에서 작은 생수병을 꺼내 지쳐 보이는 우진 형에게 내밀었고, 우진 형은 속이 타는지 벌컥벌컥 들이켰다.
“너희도 기사 봤지?”
“네.”
“어디서 얘기가 샜는지 모르겠는데 지환이 다쳤던 거 누가 풀었어. 그래서 회사로 기자들이 미친 듯이 연락 오고 난리야.”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에는 아직도 땀이 맺혀 있었다.
”무사이 프로그램 촬영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아. 문제 있어서 최태성 빼고 촬영 진행한 거 아니냐, 문제 있는 그룹이 포함된 걸 알면서도 촬영 진행한 거 아니냐, 아주 난리다.”
한숨 돌린 듯한 우진 형의 손에는 핸드폰이 꼭 쥐어져 있었다. 핸드폰은 지금도 계속해서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거기다 회사 측에서 돈 받고 너희 괴롭힘당하는 거 알면서도 입 닦은 거 아니냐는 기자도 있더라.”
“에? 와, 진짜 왜 기레기라고 하는지 알겠네요….”
돈을 받긴 받았다. 내 치료비와 피해 보상금으로.
회사로 전달되었지만 나와 멤버들에게 상당량을 전해주셨고.
그리고 난 그 돈으로 이것저것 사서 누나에게 보냈고 누나는 쓸데없는 데 돈 쓰지 말라고 뭐라 했지만 물건 택배를 뜯으며 인증샷까지 다 찍어서 보낼 만큼 좋아했었다.
물론 회사끼리의 약속과 돈이 오간 것은 밝혀지지 않을 테지만 괜히 흠칫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우진 형 말로는 기사가 올라오기도 전에 회사로 찾아온 기자들도 있었다고 했다.
아직 우리가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지 않은 데다, 얼마 전 이사하는 바람에 숙소로 찾아오진 않은 것 같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 내일 학교 가야 하는데 어떡해요?”
“회사에서 학교에 연락할게. 괜히 기자 만나느니 내일 하루는 쉬자. 출석 일수 계산해봤는데 앞으로 막 빠지는 거 아니면 괜찮을 거 같더라.”
우진 형은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며 우리에게 문단속 잘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내일 형이 데리러 올 때까지 밖에 나가지 말라는 말을 몇 번이나 전하고는 숙소를 나섰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치고 간 것처럼 멤버들 모두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인지도라는 게 이래서 무서운 거네요.”
“기사 찾아보지 마. 너희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 얘기 하지 말고.”
우리를 단속하는 하준 형의 얼굴도 급격히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다.
“우리한테는 영향 없겠죠?”
“무사이 그거 방송은 되려나 모르겠네….”
원인 모를 불안감에 조그맣게 투덜거리던 멤버들은 괜히 서로를 툭툭 건드리며 러그 위에서 뭉그적거렸다.
왠지 내일이 오는 게 무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