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이게 무슨 일이야(4)
방금 전 화려하고 신났던 무대가 끝이 난 후, 천천히 무대의 조명들이 잦아들었다.
희미한 한 줄기 빛만 남은 무대에는 긴 머리를 예쁘게 빗어넘긴, 활기차 보이는 한 여인과 안경을 쓴 하준이 서 있었다.
등 뒤에 있는 스크린에 그들의 모습이 확대되어 비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었다.
정류장에서 서로를 기다리며 주변을 거닐다, 하나의 책을 함께 보기도 하면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사는 없었지만, 그들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발랄하고 활기찬 피아노 연주가 배경음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 반지를 교환하고 환하게 웃었다. 앞으로 함께할 소중한 미래를 꿈꾸는 듯이.
그러나 배경음악은 곧 천둥소리를 닮은 거칠고 빠른 연주로 바뀌었다.
가족으로 보이는 중년의 부부, 그들 앞에 무릎 꿇은 여인과 하준.
여인이 호소하듯 아버지인듯한 사람에게 손을 뻗지만 남자의 목소리를 대신하듯 천둥 같은 음악만 흐를 뿐이었다.
등을 돌리고 앉은,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과 그들 앞에서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트린 하준.
화를 내는 아버지의 모습에 여인은 하준의 손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간다. 하준은 여인을 달래려는 듯 어깨를 잡고 고개를 내젓지만 여인은 완강하다.
비탄에 빠진 젊은 두 연인의 앞에 영빈과 경환 그리고 힘찬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있었고 가면은 각기 슬픔에 빠진 듯한 얼굴, 무표정한 얼굴, 화가 난듯한 얼굴이었다.
그들에게 호소하듯 여인이 가슴을 두드리며 도움을 구하지만 그들은 고개를 저었고, 하준은 그들 앞에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준은 슬픔에 잠겨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입술을 꾹 깨물고 참는 듯 보였다.
결국 여인이 하준을 잡아당겨 일으켰고, 눈앞에 세 명에게서 등을 돌렸다. 관계가 파국으로 가는 것을 알리듯 불안한 분위기를 고조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작은 원룸이 배경이 되었다. 여인과 하준은 행복한 듯 웃으며 서로를 껴안았고, 여인의 배는 이전과 달리 조금 불러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불안한 분위기의 배경음이 희미하게 흐르고 있었다. 오직 두 연인만 그 분위기를 모르는 듯 서로를 살뜰히 챙기며 손을 잡고 장막 너머로 사라졌다.
인물들이 모두 장막 너머로 사라지자 객석은 눈앞의 무성극에 대한 호기심으로 술렁거렸고, 극이 자신들의 이야기임을 직감한 노부부의 얼굴에는 회한이 어렸다.
그들의 좌우에 앉은 남자들이 침중한 얼굴로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끊어질 듯 흐르던 연주가 끝나고 인물들이 사라진 장막에서 갑자기 커다란 천 같은 게 나타나더니 무대와 객석 사이를 막아선다.
이윽고 둘린 천 너머로 그림자가 일렁이다 응급실이라는 글자가 그림자로 비쳤다.
장막 너머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나고 비탄에 빠진 여인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우리 별이, 내 아가….”
“내가 미안해, 미안해요….”
애틋한 목소리에는 절절한 슬픔이 담겨있었고, 그런 여인의 심정을 알리듯 바이올린이 흐느끼듯 울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장막 뒤로 사라지자 중년의 두 사람이 나타나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애가 어디 가서 밥은 먹고 다니는지….”
“고얀 것,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
“그때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어요. 이야기를 더 했어야 했는데….”
앞서 나타났던 중년의 부부인듯한 목소리가 후회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세 명의 그림자가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시 한번 모든 그림자들이 장막 안으로 사라지고 천이 걷히더니 신청자인 도명과 수현, 마지막 사연의 주인공들이 나타났다.
침대에 누워있는 수현은 어두운 방에서 ‘엄마’하고 울먹임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그걸 바라보던 도명은 처음 그때처럼 힘없이 어깨를 떨구었다.
그런 그들의 앞으로 언래블의 맏형 하준과 영빈이 나타나더니, 그들을 부축해 무대 가운데 놓인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리고 경환과 힘찬, 세빈, 지환이 객석 가운데서 나타나 신청자들의 가족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머님, 수현 씨가 기다리고 있어요.”
“아버님이 많이 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수현의 아버지 재철이 망설이던 사이 수현의 어머니 수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세빈의 손을 잡았다.
“갑시다.”
“여, 여보….”
“얘들이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 줬는데도 망설일 거예요?”
평생 온화하고 여린 모습만 보이던 아내, 수희가 자신을 다그치자 움찔한 재철이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들을 지켜보던 관객들은 박수를 쳐주었다.
멤버들의 안내를 받은 부부가 무대 위에 오르자 도명이 다가가 허리를 깊이 숙였고, 수희는 처음으로 사위의 두 손을 잡았다.
수현에게 다가간 재철은 떨리는 손으로 딸의 손을 꼭 쥐었다.
곱게만 키워왔던 소중한 막내딸이었다. 여전히 따뜻하지만 이전과 달리 조금 거칠어진 막내딸의 손에 기어코 눈물이 고였다.
“손이… 이게 뭐냐.”
“열심히 살았거든요.”
빨개진 눈으로 대답하는 수현의 목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커다란 천이 나타나 무대를 가렸고 신청자와 가족들은 장막 뒤로 걸어갔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멤버들이 객석을 향해 일렬로 나란히 서자 하연수의 ‘편지’ 인트로가 흘러나왔다.
잔잔한 전주와 함께 경환의 낮은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사를 읊었다.
숨을 쉬는 것처럼 함께하는 게 익숙한 사람이라 말로 하기 어려웠다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줄 거라고 믿었다고.
이제 무대의 다른 조명은 모두 꺼진 채, 오로지 언래블을 밝히는 핀 조명만이 남았다.
“늦은 밤 잠들었던 작은 나를 껴안는 손이, 한숨에 섞여 있던 술 냄새가 그리워질 줄은 몰랐어요.”
지환은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떠올리며 노래를 이어갔다.
하연수의 편지는 하연수가 가수로 성공하기 전 세상을 떠난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만든 곡이었다.
언래블은 이 사연의 마지막을 이 곡으로 마무리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이 방송 이후 신청자 가족이 모든 앙금을 한 번에 털고 사이가 좋아질 거라는 기대까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했던 행동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더 늦기 전에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극의 여운을 담아 화려하진 않지만 담백하게 노래를 끝낸 언래블은 객석을 향해 고개를 숙였고, 관객들은 그들을 향해 기꺼이 박수를 쳐주었다.
그렇게 말 많고 탈 많았던 무사이에서의 무대가 끝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 * *
“언래블, 고생하셨습니다!”
“어서 와요!”
잔뜩 긴장했던 무대가 끝나고 출연진 석으로 돌아온 우리는 두 MC와 다른 출연진들의 환대에 고개 숙여 인사로 화답하고 주어진 자리에 앉았다.
“중간에 언래블 곡이 들어간 것 같은데 맞나요?”
“정말인가요? 흐름에 맞게 곡을 잘 골랐다 싶었는데!”
단우 선배님과 화중 씨가 하준 형에게 말을 건넸고, 조금 후련해진 얼굴로 하준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의 사연을 온전하게 이야기해 드리고 싶었어요. 그러면서 저희가 가진 장점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선택지가 많지 않았죠.”
그간의 고생이 떠올랐는지 하준 형이 조금 씁쓸한 얼굴로 웃어 보였고, 단우 선배님이 말을 이었다.
“저는 곡을 미리 들어봤던 사람이라 금방 알아챘는데 곡을 안 들어보신 분들은 잘 모르실 것 같은데.”
“가사가 없는 멜로디만으로도 호감이 든다면 노래로 불렀을 때도 좋아해 주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짧은 인터뷰가 끝나고 나는 주변을 살짝 둘러보았다.
다행히 출연자들의 시선은 여전히 호의적이었고, 두 MC의 반응도 나쁘지 않아서 우리가 한 시도가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생방송이 아니었기에 나중에 방송을 봐야 우리 시도가 어떤 평가를 받는지 알 수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너무 무거웠던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이윽고 방청객들의 투표 점수가 MC들에게 전해졌고,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손안에 든 결과를 팔랑인 박화중 씨가 말을 꺼냈다.
“자, 내가 1등일 것 같다 하는 분?”
“에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다들 무대가 너무 특색 있었는걸.”
나민수 씨가 조금 툴툴거리며 대답하는 걸로 보아 서로 친분이 있는 것 같았다.
“1등을 뽑는 무대는 아니지만 그래도 1등 하면 기분 좋잖아요.”
“자자, 더 끌지 말고 보여주시죠!”
단우 선배님이 화중 씨의 말을 거들었지만, 출연진은 거기에 휘둘리지 않고 되레 MC들을 닦달하고 있었다.
이게 바로 연륜에서 나오는 여유인가.
다른 건 몰라도 이 프로그램 촬영을 하면서 연예인들 사이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어떤 자세를 보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얻어 가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했다.
“에잇, 어쩔 수 없죠. 공개합니다!”
출연진과 MC 간의 짧은 투닥거림 후, MC들의 뒤편에 있는 스크린에 출연진의 이름과 득표수가 나타났다.
“에?”
어디서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옆을 바라보니 힘찬이가 멍한 표정으로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각 득표수대로 신청자분들에게 소정의 지원을 해드립니다. 이번 최대 득표는 나민수 씨의 사연이었습니다!”
“소방대원 분들의 활약이 너무 멋있었죠. 현실감 넘치는 모습이 방청객분들의 마음을 훔친 것 같습니다.”
“제가 한 건 없죠. 다 창원 소방서 대원분들의 덕입니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힘찬이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제작진이 꼽은 특별상은 언래블이 가져가게 되었네요! 제작진의 의도를 잘 파악했고, 신선한 무대를 펼쳐 가산점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진짜 저희예요?”
“우와! 감사합니다!”
열심히 머리 싸매고 고민하고, 회의했던 것들에 보답이라도 받듯, 특별상이라는 이름과 함께 여행 티켓이 주어졌다.
놀란 얼굴로 우리가 맞는지 되묻는 영빈 형의 얼굴이 무척이나 신선했다. 신나 하는 세빈이는 얼굴이 활짝 피었다.
전체 투표에서는 4번째로 득표 양이 많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특별상까지 주어질 줄은 몰랐다.
독이 든 성배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사르르 녹아드는 순간이었다.
서로를 칭찬하고 축하하던 시간이 흐르고 엔딩 멘트와 함께 드디어 촬영이 끝이 났다.
생각보다 좋은 점수에 특별상까지 받아 멤버들 모두 만족한 얼굴이었다.
특별상의 상품은 여행 패키지였다. 우리가 쓰기보다는 사연 신청자에게 더 필요한 물건인 것 같아 도명 씨 부부와 친정 식구들까지 다 함께 좋은 추억 가지시라고 상품을 넘겼다.
고맙다는 인사와 조금 뿌듯한 마음.
제작진들과도 웃으며 인사를 나눴고 우진 형도 고생했다고 우리 어깨를 두드려줘서, 우리는 그걸로 오늘 하루도 무사히 넘긴 줄 알았다.
새로 이사 온 숙소의 거실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장난치던 우리에게 우진 형의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평화,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