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이게 무슨 일이야(3)
“맞아! 민수 님도 보셨구나?”
“평소에도 멤버들 보면서 저렇게 웃어요?”
“네. 근데 저를 볼 때는 꼭 손주 줄 씨암탉 보는 할머니처럼 웃더라고요.”
“아니, 여러분… 제가 올해 18살….”
회춘해서 이전 나이의 반 토막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그때도 저런 말을 들을 나이는 아니었는데!
자기들끼리 신난 출연진들 사이에서 나 홀로 버려진 외딴섬 같아져서 몹시 슬퍼졌다.
“차라리 할아버지 미소라고 해주세요, 여러분….”
방금까지 쭈굴쭈굴 했던 애들이 언제 기운을 회복한 건지, 세빈이와 힘찬이는 놀림당하는 나를 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그래, 너희가 웃었으면 됐지 뭐….
그 후로 이어진 진행 내내, 데미갓은 적당한 분량 확보와 프로그램 진행을 위한 대화 말고는 다른 말을 붙이지 못하며, 영 방송에 끼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모든 패널이 우리에게 편하게 말을 걸어주는 등 좋게 대해줘서 크게 느끼지 못했다.
쭉 긴장하고 있기도 했었고.
그러다 멘트를 하준 형이나 영빈 형이 주로 받으면서 심적으로 여유가 생겼고, 분위기를 살필 수 있게 되었다.
단우가 활달하게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이라면, 박화중은 핵심을 골라내는 질문을 잘 던지는 사람이었다. 그가 제대로 된 질문을 주지 않으면 분량을 충분히 챙기기가 힘들었다.
만약 지금 상황이 의도된 일이라면 조금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데미갓이 그동안 자기들이 한 짓들을 돌려받는 거란 생각도 들었지만…
정말 아무렇지 않게 한 팀쯤이야 쉽게 병풍 만들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그냥 무서웠다.
언젠가 우리 애들이 이렇게 당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상황을 모르는 쪽이든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쪽이든, 그게 평범한 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제야 내가 복마전의 한복판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게 새삼 실감 났다.
모른 척하고 둔하게 살아야지.
가끔 스킬로 속마음을 조금 확인해서 위험한 건 피하고.
정신 건강을 위해 그렇게 다짐하고는 MC의 진행에 귀를 기울였다.
열심히 리액션도 하고 호응도 하면서.
그사이 첫 번째 순서인 세진 선배님이 무대 준비를 위해 자리를 비웠고, MC들의 뒤편 스크린에는 사연 신청자와 세진 선배님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장면, 인터뷰 장면 등이 편집되어 흘러나오고 있었다.
촬영이 잠시 연기되는 동안 제작진은 편집에 신경 쓴 것 같았다.
첫 번째 신청자는 연인에게 프러포즈를 준비하는 여성분이었다.
당차고 강한 인상을 주었던 신청자분은 모아놓은 돈이 부족해 결혼을 미루고 있는 남자친구를 대신해 직접 프러포즈를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우연히 이 기회를 얻어 방송을 신청하게 되었다고.
신청자는 남자친구가 세진의 팬이라며 진심으로 행복해 보이는 미소는 지었고, 그 얼굴에는 무대에 대한 긴장감은 있었지만 불안해 보이지는 않았다.
영상이 끝나자 화면이 불이 꺼진 무대를 비췄다.
그리고 세진 선배님의 읊조림으로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하얗고 파란 것들이 우짖는 길을 그대와 떠나고 싶어요. 살며시 스친 손끝이 온기로 따스히 스며들어 고요히 내 맘을 두드려요.”
나직하고 힘 있는 하나의 목소리가 물결처럼 세진 선배님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세진 선배님은 가곡의 느낌으로 곡을 편곡하고 가사를 수정했다.
객석과 출연진 모두가 집중해서 이어지는 노래를 듣고 있었다. 세진 선배님의 노래를 듣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고, 바람이 살랑이는 들판을 누군가와 거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 노래는 상대방과 함께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그리는 신청자의 소망을 그려내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이면서 서로 어깨를 기대기도 하고, 비가 내리면 쉬어가기도 하면서 걸어가는, 혼자가 아닌 동행의 길.
어느새 무대 위에 신청자가 나와서 세진 선배님과 함께 노래하고 있었다.
카메라는 객석에서 당황한 기색으로 무대를 바라보던 신청자의 연인에게 돌아갔다.
자신과 눈을 마주치며 당당하게 손을 내밀고 있는 모습에 심장이 일렁였는지, 그는 빠르게 눈을 껌벅거렸다.
평온한 노래는 한 사람의 심장에 큰 파도를 남기고 끝났다.
신청자는 객석의 제 연인에게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같이 가줄래?”
“미안해.”
노래가 끝나는 타이밍에 스태프가 객석에 있는 상대방에게 재빠르게 마이크를 건넸다.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사과의 말에 객석이 술렁였지만, 신청자는 희미한 미소를 띤 얼굴로 이어질 대답을 기다렸다.
“내가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그리고 고마워. 같이 가자고 해줘서.”
커다란 환호성과 함께 박수가 쏟아졌고, 여태까지 굳건해 보이던 신청자의 두 눈가에도 살짝 물기가 어리는 것 같았다.
첫 번째 무대가 끝나고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두 번째인 나민수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잘 다녀오겠다며 손을 흔들고 자리를 비웠다.
나민수 씨의 신청자는 창원의 소방서 대원들이었다.
그들은 소방서에서 동료들과 지원하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사연을 신청했다고 했다.
자신들이 출동했던 화재나 사고들 때문에 생계가 힘들어진 가정을 하나둘 지원하다 보니 몇 해를 지나며 하나의 단체처럼 되었다고.
더 많은 지원을 해주고 싶었지만 워낙 박봉인 대원들의 급여로는 한계가 있었다.
좋은 방법이 없을지 고민하던 중, 다른 소방서 대원들이 달력 모델로 나서 그 비용으로 화상 환우들을 돕는다는 일화를 떠올렸다고.
나민수가 그 사연을 전해 듣고 많은 고민에 빠졌었다는 내용이 화면을 통해 전해졌다.
기부를 목적으로 한 공연.
나민수는 자신의 근본을 개그맨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을 무대에 올린다면, 코미디라는 장르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객석의 관객들과 시청자들까지 고려해야 했기에 수많은 회의 끝에 하나의 공연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하나의 뮤지컬이었다.
나민수가 나서서 연극을 진행했고, 극의 내용 역시 나민수가 직접 썼다고 했다.
하루하루 바쁘게 지내는 대원들에게 두 통의 신고가 들어온다.
하나는 개인병원에서 벌어진 화재사고, 다른 하나는 연립빌라에서 벌어진 화재사고.
각각 바쁘게 달려간 소방관들을 기다리는 건 비켜주지 않는 차량으로 꽉 막힌 도로와 장난 전화라 아무런 일도 없었던 빌라의 모습.
장난 전화로 깊은 한숨을 쉬는 소방관들의 얼굴에는 그동안 겪어왔던, 그러나 말할 수 없었던 많은 현실이 묻어난다.
겨우 병원에 도착한 대원들이 급히 환자들의 이송과 화재 진압에 힘쓰지만, 화재 현장에 다시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다.
지원 요청에 급히 차를 돌려 병원으로 향하던 또 다른 대원들도 꽉 막힌 도로에 고생하다 일부 차량들의 도움으로 겨우 현장에 도착한다.
“…저 표정, 연기가 아닌 것 같아요.”
“저런 내용 기사에도 많이 뜨잖아. 다들 겪었던 일인가 봐.”
그동안 기사로만 보았던 일들을 소방관들이 직접 연기해 보여주니 심장이 조여드는 것만 같았다. 객석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연기하던 소방관 중 일부는 당시의 마음이 떠올랐는지 이를 악문 얼굴에 한줄기 눈물이 툭 하고 흘러내렸다.
다행히 더 큰 피해가 발생하기 전에 불길을 잡을 수 있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다수의 소방관이 부실한 장비로 몸에 부상을 입는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힘들었던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화재 진압 중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비난.
소방관들의 연기를 지켜보던 객석에서 안타까움이 뒤섞인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바닥에 주저앉아 휴식을 취하던 소방관들이 극 내내 조금 굳어있는 얼굴이었다.
거친 불길과 싸우는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조여야 하고, 그보다 더 매서운 사람들의 원망에 무너지지 않아야 하기에.
그러다 그런 그들에게 한 소년이 주춤거리며 다가온다. 손에는 초코파이를 든 채로.
쭈뼛거리며 건네진 초코파이와 감사 인사에 굳었던 얼굴들 위로 어느새 환한 웃음이 떠오른다.
그리고 화면이 전환되었다.
무대 위 소방관들의 뒤로 스크린이 환하게 빛나면서 그동안 창원 소방서에서 도움을 받았던 주민들이 전하는 감사 인사가 흘러나왔다.
이 내용까지는 신청자들도 몰랐던 내용인지 다들 깜짝 놀란 얼굴로 스크린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모든 극 내내 일인다역의 엑스트라 연기를 펼친 나민수가 씩 웃는 얼굴로 무대 중앙에 섰다.
그저 실제 사연을 바탕으로 추렸을 뿐이라고.
그 한마디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소방관들과 함께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무대를 내려갔다.
‘역시 나민수.’
스크린으로 무대를 끝까지 지켜보고 나니, 나도 모르게 눈가가 시큰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열기가 오르는 눈두덩을 가만히 눌렀다가 박수를 쳤다.
자칫 지나치게 무거워질 수 있는 내용이었으나, 나민수가 극 중간중간 익살스러운 연기와 오버 액션으로 등장해 잠깐씩 흐름을 들어 올렸다.
나민수의 무대가 성공적으로 막을 내리고, 뜨거운 박수가 객석을 메웠다.
그 후에 이어진 순서는 김준현 선생님으로, 자신과 평생을 함께해준 배우자에게 멋진 무대를 보여주고 싶다는 한 중년 남자의 꿈을 이루어 주었다.
가수가 되고 싶었지만 생계를 위해 꿈을 포기해야 했다던 신청자.
젊은 날 배우자와 배 속의 아이를 생각해 노래의 꿈을 접고 택배 상하차 일로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며 웃었다.
본인은 본인의 삶에 한 점 후회도 없었지만, 배우자는 가족 때문에 포기한 남편의 꿈이 안타까워 종종 속상해한다고 했다.
자신의 두 손으로 가족을 지켜낸 삶은 그 자체로도 자랑스러웠지만, 청운의 꿈을 가슴 깊이 묻어둔 탓에 가끔 그때를 떠올리며 조금 씁쓸히 웃는다고.
사랑하는 이가 더 이상 죄책감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자신 또한 이제는 웃으며 꿈을 흘려보낼 수 있도록 마지막으로 멋진 무대에서 노래하고 싶다고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김준현 선생님과 신청자는 멋들어진 무대의상을 차려입고 김준현 선생님의 히트곡을 함께 열창했다.
나비가 팔랑이는 것처럼 가볍게 살다 바스러지고 말 것을 아등바등 악을 써야 할 이유가 있냐는 내용의 유쾌한 트로트는 듣는 내내 속이 뻥 뚫린 것 같은 시원함이 있었다.
그 후로 쭉 이어진 무대들은 하나같이 신청자의 한을 풀어주거나 신청자의 목적을 뚜렷하게 알 수 있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진우 형의 신청자는 선생님이었다.
올해 졸업식을 끝으로 폐교하는 학교의 학생들이 후배들과 동기들 간 마지막 추억을 만들고 싶어 해서 대신 신청해 주셨다고.
진우 형은 선생님과 아이들을 모두 모아 간단한 마술쇼를 하는 것으로 무대를 꾸몄다.
작은 아이들이 꼬물거리며 마술을 선보이자, 그들이 큰 무대에서 기죽지 않도록 객석 전체에서는 큰 박수와 온화한 웃음으로 아이들을 응원했다.
가장 의외였던 것은 진우 형의 마술 실력이 꽤 제법인 것 같다는 점이었다.
아이들을 동원해서 단체로 커다란 공 같은 기구에 들어가 이리저리 속임수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다, 한창 마법사로 유명했던 어떤 소년을 흉내 내며 주문을 읊었다.
그가 몇 번 주문을 틀렸는지 공 주변에는 퐁 하는 효과음과 함께 연기만 흘러나오자 기구 안에서 지켜보던 꼬마 아이가 뛰어나왔다.
“아이참, 마술사님 자꾸 주문을 틀리면 어떡해요!”
“미안해. 주문이 이게 아니었나?”
시무룩한 얼굴로 지팡이를 이리저리 휘두르던 진우 형 대신에 꼬마 아이가 지팡이를 들고 멋들어지게 휘두르며 또박또박 주문을 외쳤다.
그러자 쿵 하는 소리가 나면서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어라, 다들 어디 갔어요?”
연기가 사라진 무대에는 꼬마 아이가 지팡이를 든 채로 홀로 남아있었다. 아이는 마구 주변을 살피다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큰일 났어요. 돌아오게 하는 주문은 아직 배우지 않았거든요!”
긴장한 내색을 애써 감추며 열심히 연기하는 꼬마 아이의 모습에 다들 웃으며 넘어가 주었다.
아이의 대사가 끝나자, 어른들에게도 익숙한 동요가 흘러나오면서 허공에서 배가 둥실둥실 내려왔다.
그 안에서 사라졌던 아이들과 진우 형이 짠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으로 등장한 출연자는 데미갓이었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온 친구들이 이제는 아이의 엄마가 되고, 어느새 각자의 생활이 생겨 서로를 이전처럼 자주 만나지 못한다며, 중년의 신청자들이 아쉬움을 토했다.
바쁘게만 살다 보니 생에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친구들과는 정작 여행 한 번, 제대로 된 추억 한 번 만들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워 신청하게 되었다고 했다.
데미갓과 신청자들은 밴드를 꾸려 화려한 퍼포먼스를 가미한 신나는 곡을 연주했고, 노래를 불렀다.
그들의 노래가 흘러가는 동안에 무대 위쪽 스크린에는 학창 시절의 사진과 그들의 삶의 조각을 조금씩 보여주는 영상이 나왔다.
다만, 그들의 다음이 우리 무대였기에 그걸 즐길 겨를도 없이 모두 백스테이지에 모여 진행 사항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잘할 수 있으니까 연습한 대로만 하자.”
여느 날처럼 우리를 다독이는 하준 형의 목소리가 들리자 왠지 모르게 속이 한결 가라앉아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형들만 믿고 가는 거지, 뭐!”
“벌써부터 밑장 빼기 하지 말고.”
“에헤이, 내 순수한 마음을 또 그렇게 왜곡한다.”
찬이랑 내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에 결국 피식거리며 웃던 멤버들이 그제야 손을 모았다.
“We're Unravel!”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