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이게 무슨 일이야(2)
사실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무사이’라는 프로그램이 잘 되었던 건 확실했다.
언래블이 나오는 방송을 제외하면 TV를 거의 보지 않던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누나가 틈날 때마다 얘기하던 프로그램인 만큼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었다는 것도 알겠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고정보다는 객원이 많은 프로그램 같은데 우리가 이 프로에 목맬 필요가 있을까?
더군다나 이미 미래가 틀어졌다.
기존에 데미갓이 어떤 루트를 따라 이 프로에 출연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과거와 달리 영향력도 줄었고 이들 중 망둥이는 나랑 엮이면서 나가리되어버렸는걸?
게다가 포잉이 이전에 해준 이야기가 있었다.
전생에 언래블이 출연했던 프로그램에 이번에도 출연할 수 있을까를 묻는다면, ‘큰 변수가 없다면 언래블이 출연할 확률이 높다’ 정도의 이야기는 해줄 수 있다고.
다만, ‘언래블이 어떤 프로그램에 출연하면 대박 칠 거야’라는 답은 못 준다고 했다.
평행세계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동일한 것도 아니며 모든 내용이 같지도 않았다.
그 확실한 예로 당장 이 세계의 공지환과 나도 굉장히 많은 부분에서 달랐으니까.
전생의 우리 부모님은 정정하게 잘 살아계셨지만, 이곳 지환이네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다.
처음에는 로또 1등 번호인 줄 알고 움켜쥐었건만… 이제 와서는 이게 독이 든 성배는 아닌가 하는 번뇌에 사로잡혔다.
이게 다 눈앞의 개미핥기 때문이리라.
출연진들 사이에서 밝은 얼굴로 인사하고 다니고 예쁘게 구는 우리 애들을 두 눈으로 찢어놓을 것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레이저라도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눈빛에 도대체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묻고 싶을 정도였다.
우리가 너희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그래놓고 다른 사람들이 그쪽을 쳐다보면 또 금방이라도 녹을 것 같은 얼굴로 웃었다.
저런 게 연예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본 능력이라고 한다면 정말 할 말은 없는데, 조금 무서웠다. 한편으로는 거부감이 들기도 했고.
“휴….”
이미 나에겐 선택권 같은 게 없었다.
이미 출연하기로 되어 있었고, 안타깝게도 프로그램은 무산되지 않았다.
차라리 없어졌으면 속이라도 편할 텐데.
“지환아, 이제 좀 괜찮아?”
“진우 형, 잘 지냈어요? 전 이제 괜찮아요.”
“어휴, 조심해야 된다. 우리는 몸이 재산이야.”
연예계 새내기인 만큼 최대한 일찍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우리보다 나민수 씨가 더 빨리 도착한 모양이다. 나민수 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친분을 다지고 있자 데미갓과 다른 분들이 우르르 도착했다.
진우 형은 우리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는 얼굴로 다가오더니 내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키스 형이 너 괜찮아졌다고 얘기는 했는데, 그 형이 좀 설명이 짧잖아. 그래서 걱정했지.”
“제가 연락 먼저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아냐, 한창 바쁠 때잖아.”
“다음에 꼭 같이 밥 먹어요, 형. 저희 멤버들도 그날 형 못 봤다고 엄청 아쉬워했어요.”
“진짜?”
“네! 진짜로요!”
홍보도 해주고 좋은 얘기만 해주는 우리 미래 천만 배우님께 내가 너무 무심했다….
순한 눈꼬리가 시무룩하게 쳐지는 모습에 왜인지 모르겠지만 세빈이랑 겹쳐 보이면서 내가 상대방에게 잘못한 듯한 느낌을 준다.
“이거, 이거 또 젊은 친구들끼리만 뭉치는 거야?”
“에이, 선배님 괜히 그러신다.”
“맞아, 우리 가수 후배님 괴롭히지 마요.”
“와, 진우랑 세진 씨 다 나만 나쁜 사람 만드네.”
“제가 언제요~?”
진우 형과 조금 친해진 나는 곧잘 이야기를 이어나가며 멤버들을 한 명씩 대화에 끼워 넣었고, 주변의 다른 출연진들도 하나둘 서로 대화를 나누며 모이다 보니 어느새 우리가 그들의 중간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되어버렸다.
고민영 배우님은 진우 형이 SNS에 우리 싸인 앨범을 올린 것을 보고, 벌써 팬이 된 거냐고 우리도 앨범 사 오면 사인해 주냐는 말을 농담처럼 던졌다.
그 모습에 힘찬이와 내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고, 그와 동시에 우리 시선은 세빈이에게로 옮겨갔다.
“저희가 정말 앨범을 드려도 될지 몰라서 일단 준비는 해왔는데…. 저희 앨범을 선배님들께 선물해드려도 괜찮을까요?”
아직 자그마한 체구의 세빈이가 양손을 모으고 주변의 출연진을 살피며 말하자 가요계 대 선배님인 김준현 선생님이 흐뭇하게 웃으며 세빈이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럼, 자고로 신인 때는 그렇게 최대한 사람들한테 알리는 게 최고지. 언래블이 앨범 선물해 주면 다들 들어보고 주변에 추천해 주는 게 어떤가?”
“에이, 선생님. 당연한 말씀을!”
넉살 좋은 나민수가 김준현 선생님의 발언을 받자 힘찬이는 누구보다 빠르게 우진 형에게 달려가서 인원수대로 앨범을 들고 왔다.
사실 진우 형이 SNS에 사진을 올려준 모습을 보고, 우진 형과 소현 팀장님이 다른 출연자분들에게도 넌지시 말을 흘려보는 게 어떻냐고 하셨다.
너무 한 사람하고만 친하게 지내면 관심 없던 사람들까지 은근히 시기한다면서 챙길 거면 확실하게 모두를 챙기는 게 좋다고.
모든 출연진의 이름 앞으로 사인과 코멘트를 적은 앨범을 하나씩 건네던 힘찬이에게서 데미갓 멤버들에게 줄 앨범을 받아냈다.
받아줄지 안 받아줄지는 모르지만… 혹시라도 찬이가 욱해서 사고 치면 안 되니까.
멀리 떨어져서 조마조마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우진 형을 위해서라도.
“선배님들, 잘 부탁드립니다.”
“어, 고맙다.”
데미갓에게는 대표로 리더인 나우, 그러니까 김범욱에게만 앨범을 건넸다.
나를 바라보던 리더의 눈빛에는 적개심보다는 무언가 복잡한 감정이 더 많이 담겨있어서 의아했지만 굳이 관심 두지 않았다.
그들의 사정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우리에게 피해만 안 주면 되니까.
“여러분 대화는 잘 나누셨나요? 오늘부터 MC를 맡아서 진행해 줄 두 분을 모셨습니다. 골든아워의 재주꾼 단우 씨, 개그맨 박화중 씨입니다.”
박수와 함께 소개된 사람은 이전에 뮤직밸류에서 만났던 골든아워의 단우와 처음 보는 개그맨이었다.
단우 같은 경우는 하겸 형에게 몇 번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이고 실제로 얼굴을 한 번 보기도 했어서 괜히 나 혼자 내적 친밀감이 들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MC들의 소개가 끝나자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프로그램의 첫 방송을 시청할 시청자들을 위한 간략한 출연진의 소개가 진행되었다.
드디어 본격적인 프로그램의 시작이었다.
대기하고 있던 좌석은 본 무대 뒤편에 따로 준비되어 있던 곳이었고, 본 무대 앞쪽에는 방청객들이 앉을 좌석이 준비되어 있었다.
조금 긴장한 듯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쥔 힘찬이를 남몰래 토닥이며 다시 한번 스킬의 위력을 절감했다.
쉽사리 흔들리지 않는 정신을 만들어 주는 이 기초 특성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힘찬이보다 더 긴장해서 말 한마디 못 하고 쫓겨났을지도 모르겠다.
‘포잉, 나 실수하지 않게 잘 보고 있어 줘.’
‘이 정도는 눈 감고도 해내야 내 계약자지. 걱정 마셈.’
오늘도 함께 방송국에 들어온 포잉은 여전히 데미갓을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귀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무조건적인 내 편이구나 싶어서 마음이 조금 놓였다.
MC로 호칭된 두 사람은 자잘한 신변잡기부터 ‘무사이’라는 프로그램의 촬영 진행 중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 등 다양한 질문을 건네며, 출연진 중 빠지는 사람이 없도록 능숙하게 분량을 챙겨주고 있었다.
‘나중에 우리 힘찬이도 MC 하면 잘할 거 같은데….’
‘얼씨구. 걔는 침착하질 못해서 까딱하면 사고 칠 것 같은데.’
‘우리 찬이도 할 땐 잘하거든?’
포잉과 짧게 투닥거리는 사이 출연진 석 뒤편에 준비된 화면에서 사연 신청자들의 이야기가 짧게 편집되어 흘러나왔다.
“사전에 직접 뽑은 신청자분들과 충분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분들을 위한 무대를 준비해 주셨는데요.”
“아직 순서는 정해지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준비한 게 있죠!”
주거니 받거니 하며 출연진들에게 농을 건네는 모습에 촬영하는 내내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스태프 한 분이 재빨리 작은 상자를 중앙 테이블 위에 놓고 사라졌다.
“이 안에는 순서가 적힌 공이 9개 들어 있습니다. 한 명씩 나와서 뽑아주세요. 공에 적힌 순서대로 무대에 올라주시면 됩니다!”
“자, 한 분씩 뽑아주세요!”
조금 긴장된 얼굴로 하나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을 뽑기 시작했다.
멤버들 모두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하준 형을 바라봤고, 결국 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등 떠밀어서 나간 것 같은 모양새였지만, 당사자도 예상을 했던 건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우릴 향해 조용히 미소 지을 뿐.
저거 숙소 가서 보자는 거 같은데. 하하….
“다들 각자 원하는 순서가 있었을 텐데요! 몇 번을 원했는지, 그리고 몇 번을 뽑았는지 말해주세요.”
“아이참, 첫 번째는 부담스러워서 첫 번째만 아니어라 했더니 딱 1번 나왔네요.”
발라드 가수인 세진 선배님이 1번이 적힌 공을 카메라를 향해 내밀면서 장난기가 듬뿍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다들 원하는 순서와 뽑은 순서를 차례차례 말하기 시작했고 데미갓의 순서가 되자 그쪽 리더인 김범욱이 서글서글한 표정으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무 대단한 선배님들이 많아서 제발 1번 뽑아서 빨리 끝내길 바랐는데… 안타깝게 8번을 뽑았어요.”
“저희 리더가 정말 뽑기에 약해요.”
“저희 꼴찌 하면 이게 다 리더 탓입니다!”
자기들끼리 친근하게 대화하며 뽑아온 공을 카메라를 향해 들어 보였고, 그 순간 나는 하준 형의 얼굴을 확인했다.
데미갓이 굉장히 화려하고 에너지 넘치는 무대를 꾸미고 있다는 걸 포잉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내용들을 멤버들에게도 미리 말해둔 터라, 우리는 제발 데미갓 뒤만 아니기를 바랐다.
“자, 그럼 언래블은 몇 번을 뽑았는지 공개해 주세요!”
형, 아니지…?
우리 모두의 간절한 시선을 받고도 시종일관 부드러운 미소로 일관하던 하준 형은 자신이 뽑은 공을 카메라를 향해 공개했다.
선명하게 9라고 적혀있는 공.
멤버들 입에서 저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휴, 마지막 순서를 뽑았는데 멤버들 표정이 안 좋네요.”
“워낙 쟁쟁한 분들이 많이 나오셔서… 저희도 데미갓 선배님들처럼 차라리 빨리 무대를 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얘기했었거든요.”
흐트러짐 없는 하준 형의 대답과 바른 자세에 단우 선배님이 감탄하는 사이, 시무룩해진 세빈이의 얼굴을 힘찬이가 콕콕 찔렀다.
“막내 세빈 씨가 부담이 많이 되는 모양이에요. 아주 시무룩해졌네.”
“아무래도 이번 무대에 정성을 가장 많이 쏟은 게 세빈이랑 찬이라서 더 긴장한 것 같아요.”
영빈 형이 조용히 거들자 다들 세빈이를 귀엽다는 듯이 바라봤고, 금세 볼이 빨개진 세빈이는 살짝 시선을 내리깔았다.
“크, 저런 풋풋함! 신인이고 막내니 가질 수 있는 것들이죠.”
“단우 씨, 골든아워도 저런 시절이 있었죠?”
“어휴, 저희 팀은… 네, 그냥 다 망나니들이었어요.”
“아니, 숙소 가서 어떡하려고 막 그렇게?”
단우 선배님이 세빈이 분량을 챙겨주는 사이 다른 출연진분들도 우리 세빈이가 귀엽다며 다들 한마디씩 거들어 주었다.
데미갓이 멘트할 때는 기본적인 리액션이었다면, 지금 반응은 순수하게 흘러나오는 호의였던 터라 내 어깨가 다 으쓱거릴 지경이었다.
우리 애들이 이렇게 착하고 인성이 됐습니다, 여러분!
뿌듯한 마음에 연신 흘러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못하자 그런 나를 바라본 나민수 씨가 한마디를 보탰다.
“어, 환 씨가 웃는 저 표정, 그거 같지 않아요?”
“표정? 어떤 거요?”
“왜, 그 있잖아요. 할머니가 손주들 먹을 거 챙겨주실 때!”
네? 할머니요…? 할아버지도 아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