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61)화 (61/456)

61. Happiness(2)

“확실한 건 준이 형은 적으로 돌리면 안 되겠다는 거야.”

“절대로요….”

하준 형의 시선이 종일 힘찬을 떠나지 않는 것을 뒤에서 지켜보던 우리는 아주 얌전하고 착하게 하루를 보냈다.

나와 멤버들 모두 괜히 리더님 심기를 거슬렀다가 힘찬이처럼 잔소리 듣는 건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항상 하던 연습, 팬 사인회 때 보여줄 간단한 토크와 무대 준비, 그리고 다 같이 준비한 첫 팬 송 다듬기.

거기에 더해 틈틈이 준비하고 있는 무사이 진행 방향까지 회사 분들과 상의하다 보니 하루가 짧다 못해 부족했다.

“왜 늘 시간이 부족하지?”

“바쁜 걸 감사히 여기자….”

“할 일이 없어서 멍 때리는 것보다는 이게 낫지.”

하준 형이 뽑아온 시청자의 사연을 바탕으로 어떤 무대를 꾸밀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생각보다 방향이 잘 잡히지 않았다.

겨우 사연만 확인한 우리가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30대 남성이 보내온 사연이었다. 아내가 장인 내외와 오랫동안 연락을 끊고 지냈는데, 그 사이를 중재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결혼 당시 집안의 반대가 극심했던 탓에 절연에 가까운 상태로 결혼을 했고, 그대로 7년의 세월이 흘러버렸다.

최근 임신한 아내가 입덧과 급격한 감정 변화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었고, 우연히 한밤중에 홀로 엄마가 보고 싶다 눈물 흘리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했다.

신청자가 고아인데다 당시에는 번듯한 직장을 갖지 못한 상태여서 고명딸인 아내의 집안에서 반대가 심했었다는 내용이었다.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와요.”

“우리가 전서구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이네.”

“솔직히 부모님 입장에서는 대학생인 딸이 갑자기 결혼하겠다고 나오면 화날 것 같기는 해요.”

“위로 오빠만 3명이고 딸은 아내분 하나라 애지중지하셨다는 것 같은데.”

회사에서는 부모님을 찾아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쪽이 가장 정석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갑자기 웬 어린 남자애들이 우르르 찾아와서 딸의 이야기를 하면 역효과만 날 것 같았다.

좀처럼 괜찮은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아 시무룩해 하던 그때, 묵묵히 우리 얘기를 듣고 있던 영빈 형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신청자분은 아내분을 위해서 둘 사이를 중재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정작 아내분의 마음은 우리가 모르잖아. 이 상황에서 우리가 부모님을 설득하더라도 예민한 상태의 아내분이 편하게 받아들이긴 어렵지 않을까?”

여태까지 신청자 아내의 부모님을 설득할 생각만 했던 우리는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분의 부모님은 전에 살던 동네에서 여태까지 살고 계셨어. 찾아뵈려고 했으면 언제든지 찾아뵐 수도 있었을 텐데 어떤 게 마음에 걸려서 찾지 않은 건지부터 확인해야 할 것 같아.”

사연 해결에만 초점을 맞추느라 정작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었던 우리는 영빈 형의 의견에 모두 찬성했다.

“그러면 첫 번째, 신청자를 통해 아내분을 만나서 가장 바라는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먼저 체크한다. 두 번째, 부모님과의 화해를 원하는 경우 부모님과 접촉해서 설득한다. 세 번째, 만일 신청자분이 알고 있는 이유 외에 다른 요인이 확인되는 경우 다시 의견을 조율한다. 이렇게 가자는 거지?”

여태까지 중구난방으로 쏟아지던 의견들이 영빈 형과 하준 형의 주도하에 하나씩 정리가 되었다. 우진 형을 통해 우리 의견을 회사에 전달했다.

이 내용이 먼저 정리가 되어야 그 후 방송에서 보여줄 무대의 구성을 논의할 수 있다는 게 멤버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모처럼 진지한 얼굴로 각자의 의견들을 가감 없이 얘기하는 멤버들의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고 멋있기도 해서 나는 내심 뿌듯해했다.

더군다나 나에게는 이 상황을 잘 해결해나갈 수 있는 치트키가 있는 셈이라 더욱이 다행이었다.

신청자와 아내가 직접적으로 말을 꺼내지 않는다고 해도, 만난 후에 ‘너의 목소리가 들려’ 스킬을 사용하면 속마음을 알 수 있으니 문제 해결에는 충분히 도움이 될 터.

다만, 텍스트로만 보여 그 안에 담긴 감정을 알 수 없는 게 조금 걱정되었다.

“그러니까 너희는 사연 신청자분과 당사자를 먼저 만나서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는 거지?”

“네. 그게 먼저일 것 같아요.”

“맞아. 상황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무대를 만들 수는 없죠.”

기특하다는 눈으로 우리를 바라본 우진 형은 우리 의견을 박세날 PD에게 전달했고, PD는 흔쾌히 신청자의 연락처를 공유해 주었다.

그리고 약속한 날, 우리는 회의실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사연의 신청자와 아내분을 만날 수 있었다.

외부의 카페에 자리를 마련하려 했지만, 사람들이 많은 장소를 아내분께서 꺼린다는 말에 회사의 회의실을 비우는 쪽으로 이야기를 진행했다.

“안녕하세요, 언래블의 맏형 하준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도명이고 옆에는 제 아내 진수현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이에게 얘기는 들었어요.”

하준 형이 우리를 대표해서 인사하고 서로에 대해 자잘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풀어지자 여태까지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경환 형이 도명과 수현을 향해 물었다.

“저희끼리 사연에 대해 고민하다 당사자의 이야기가 가장 중요하지 않냐는 얘기가 나왔어요. 도명 님의 이야기는 사연을 통해 알게 됐지만 수현 님의 뜻은 알 수 없으니까요.”

예상했던 대로 수현의 얼굴은 안색이 좋지 않았다.

촬영을 염두에 둔 것인지 가벼운 화장을 하고 방문했지만 그럼에도 입술은 색이 옅었다.

“도명 씨랑은 대학 동아리에서 만났어요. 그리고 대화를 나누면서 어느 순간 이 사람을 놓치면 평생 후회할 거라는 걸 알았죠. 남들이 하는 말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어요.”

창백한 안색과 달리 수현의 눈은 확신에 차 또렷한 빛을 내고 있었다.

“제가 많이 모자란 사람입니다. 아시다시피 천애 고아에 그때는 학생이었고, 미래도 불투명했죠. 그러다 제가 조심하지 못한 탓에 아직 학생이었던 수현이가 임신을 했어요.”

주저하며 말하는 신청자의 손을 수현이 꼭 잡는 걸 보며,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물었다.

사연 어디에도 아이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저 수현이 현재 임신한 상황이라고만 했었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누구도 입 밖으로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당연히 장인, 장모님께서 불같이 화를 내셨고 수현이가 많이 힘들었어요. 그러다 둘 다 학교를 휴학하고, 수현이는 집을 나와서 겁도 없이 둘이 살림을 시작했죠.”

자조적인 쓴웃음에 아물지 못한 상처가 그대로 묻어나는 것 같아 지켜보는 내내 누군가 내 심장을 자기 마음대로 이리저리 흔드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수현이가 너무 무리를 해서 첫째 아이를 잃었어요. 병원에서는 스트레스 탓에 산모의 몸이 버티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엄마, 아빠를 많이 원망했어요. 나를 믿고 도명 씨랑 잘 살도록 뒀으면 우리 별이를 잃지 않았을 거라고. 사실 지금도 모르겠어요. 원망하는 마음 반, 그리운 마음 반일까요?”

서로의 손을 굳게 잡은 부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세빈의 눈이 잘게 경련했다. 나는 세빈이의 다리 위에 올려진 손을 가만히 잡아줬다.

그리고 그때, 스킬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엄마 보고 싶어]

[너무 미운데]

[그때 조금만 더 조심했더라면]

[우리 별이, 불쌍한 내 아가]

[아빠 몸은 괜찮을까?]

[행복이는 축복 속에서 태어나게 해주고 싶어]

스킬을 켠 그 짧은 순간에 수현의 마음을 담은 수많은 글자들이 그녀의 주변에 무수히 떠올랐다.

적어도 지금은 목소리가 아닌 텍스트의 형태로 마음이 나타나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글자로만 봐도 자연스럽게 목소리로 들리는 것 같은 절절한 감정들이 버거워 입 안쪽의 살을 살짝 물었다.

“제가 아직 어려서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태어나는 아이는 모두 세상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희가 못미더우실 수도 있지만 최선을 다해 가장 좋은 결과를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최대한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애쓰면서 부부에게 내 각오를 전달했고, 도명은 따뜻하고 선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던지 눈가에 눈물을 글썽이는 수현의 얼굴이 안쓰러웠고, 그런 아내의 눈가에 조심스럽게 손수건을 대어주는 도명의 얼굴엔 미안함이 덕지덕지 묻어났다.

이후 우리는 신청자 부부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분위기를 환기시켰고, 수현을 위해 힘찬과 세빈이가 한참 유행하는 신나는 분위기의 걸그룹 노래와 춤도 짧게 선보였다.

다행히 부부는 마음을 수습했는지 웃으면서 우리에게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회사를 떠났지만,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생각보다 너무 무겁고 어려운 이야기였기에 다들 생각에 빠진 표정이었다. 나는 스킬이 지속되는 30분 내내 떠오르는 수현의 속마음들을 곱씹느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음?’

‘응? 뭐가?’

내내 함께 우리를 지켜보기만 하던 포잉이 입을 연 건 그때였다.

‘그 프로가 신청자 요청을 이룰 수 있도록 님들이 무대를 꾸미고, 그걸 패널들이 점수를 부여해서 그 순위대로 도움을 주는 프로라며.’

‘그런데?’

‘근데 하준이 뽑은 사연이랑 오늘 얘기 들어봤을 때, 신청자가 말한 건 가족이랑 화해 혹은 분위기 전환인 건데… 사실 님들이 중간에 중재만 잘하면 무대고 뭐고 그냥 해결 아님?’

‘그간 앙금이 있는데 그게 그렇게 쉽게 해결되겠어?’

간혹 시청자들의 고민을 여러 출연자들이 듣고 조언하는 프로그램도 있었고, 프러포즈나 꿈을 위해 프로그램에서 자리를 제공하는 경우도 있었기에 그것들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러나 내 대답을 들은 포잉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걸 무대로 꾸며서 보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음? 그리고 그걸 패널들한테 점수를 받는 거라며. 그 점수 차등으로 사연 신청자들한테 도움을 주고. 저 부부 사연만 봤을 때 뭘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데?’

‘어라….’

그저 사연에 대해서만 생각하다 보니 이 프로그램의 방향성과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박세날 PD가 숨겨둔 어떤 중요한 키워드를 우리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덩치를 키워나갔다.

그리고 포잉이 지적한 부분을 은근슬쩍 멤버들에게 흘리자 하준 형과 영빈 형의 얼굴도 조금 심각해졌다.

“지환이 말을 듣고 보면 그렇긴 해. 우리가 가서 부모님을 설득하고 나면 이걸 뭐 무대로 만들기도 애매한데, 더 필요한 게 있을까? 뭔가 하나가 빠진 것 같아.”

“듣고 보니까 그렇긴 해. 도대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게 뭐지?”

이 사연으로 기획서를 만들어 방송국에 공유해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더군다나 오늘 사연 신청자들과의 미팅은 사전에 양해를 구한대로 녹화본 그대로 박세날 PD에게 전달해야 했다.

“애당초 무대 종류조차 제한이 없어. 그게 평소 우리가 하던 무대인지, 그게 뮤지컬 같은 건지, 아니면 연극 같은 건지 정해진 것도 없네.”

“자유도가 너무 높아서 전혀 가늠이 안 된다.”

일의 방향을 잡기 위해 당사자들을 초대해 이야기를 들었건만, 어째서인지 점점 더 일이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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