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62)화 (62/456)

62. Happiness(3)

사연 신청자와 이야기가 잘 풀려 모두들 희망에 찼다가, 내가 포잉과 나눈 이야기를 전하자 다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혹시 일종의 함정 같은 게 아닐까? 왜, 퀴즈 프로에서도 난이도 조절한다고 유독 어려운 문제 한두 개씩 넣곤 하잖아.”

다른 사람의 사연을 알 수 없으니 하준 형이 뽑은 사연이 그 함정 역할이 아니냐는 회사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었다.

“솔직히 10대, 20대 애들이 공감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는 아냐. 적어도 30대 이상의 가정이 있는 사람들이 알법한 느낌이지.”

또 어떤 사람은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내젓기도 했다.

“멤버들 중에 아이돌이 2팀이라며. 너희랑 데미갓. 그런데 아이돌한테 이런 무거운 이야기가 간다고? 열에 아홉은 제대로 못 살려.”

어떤 사람은 그저 공중파 예능에 얼굴을 비추는 걸로 만족하라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사연 신청자와 직접 대화를 나눈 나와 멤버들은 간절했다.

무대와 방송도 간절했고, 우리에게 전해진 그 마음이 너무 무거워 진득하게 우리 사이에 남아있었다.

평소라면 숙소로 돌아갔을 시간이었지만 누구도 돌아가자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혹시 피곤한데 눈치 보여서 말을 못 하는 멤버가 있으면 내가 총대를 매줄까 하는 마음으로 스킬을 활성화해보기도 했다.

[부모님 댁에 찾아가서 뭐라고 말을 하지? 우리 얘기를 믿어주실까?]

[어르신들은 우리가 가서 말하는 걸 원치 않으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차라리 수현 씨 오빠들부터 설득해볼까? 아, 애들 컨디션 생각하면 슬슬 돌아가야 하는데….]

영빈 형과 하준 형은 신청자의 가족을 설득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고.

[어떻게 해야 되지? 뭘 도와줄 수 있지?]

[집에 가면 퍼질 테니까 최대한 정리해야 되는데…. 도대체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하지?]

[도명 씨랑 수현 씨가 그리는 가장 행복한 상황이 뭘까?]

경환 형, 힘찬, 세빈이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거기까지 확인한 나는 더 이상 스킬을 켜둘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꺼버렸다.

하준 형과 영빈 형의 도움으로 우리 모두는 숙소를 집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숙소로 돌아가면 항상 긴장이 풀렸는데, 그 때문에 이 일을 내일로 미루게 될까 봐 멤버들도 그 부분을 염려하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포잉까지 진지한 얼굴로 연신 느릿한 동작으로 꼬리로 바닥을 치며 고민하고 있었다.

고양이의 진지한 얼굴이라니, 문득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때, 포잉이 돌연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 PD라는 사람의 성격을 생각해보는 게 중요하지 않음? 꽤 잘나가는 PD라며.”

박세날 PD는 프로그램의 이름을 허투루 짓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면 이 프로그램의 이름에 키워드가 있는 게 아닐까?

포잉의 말에 프로그램의 이름을 천천히 곱씹다 보니 점점 머릿속에 무언가 키워드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제가 방금 생각난 게 있는데 들어볼래요?”

우리만 남아있던 회의실이었다. 멤버들의 시선이 나에게 향하는 걸 느끼고 옆에 있던 A4용지 한 장을 가져와서 펜을 들었다.

그리고 그 종이에 무사이(Muses)라고 적었다.

“무사이 뜻은 뮤즈들 정도로 보면 될 거예요. 예술과 학문의 여신들인데 총 9명이에요. 우리 그날 모였던 사람들이 총 몇 팀이었는지 기억해요?”

그러자 조금 멍해진 얼굴의 하준 형이 중얼거렸다.

“언래블이나 데미갓은 인원수 상관없이 하나의 팀으로 봐야 하니까 총 9팀이지.”

“아홉 여신이 각각 담당하는 게 희극, 비극, 사랑의 시, 영웅시, 서정시, 찬가, 천문, 합창 이래요.”

“넌 이런 걸 어떻게 알아?”

“아, 제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좋아하거든요.”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경환 형에게 대수롭지 않게 대꾸해 주고는 하나씩 적어 내리며 말을 이었다.

“박세날 PD님은 치밀한 연출로도 유명하죠? 그러면 프로그램 이름도 그냥 정한 게 아닐 거란 말이죠.”

대략적인 것만 기억나고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아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무사이라는 말을 검색해서 검색 결과를 멤버들에게 보여줬다.

“이건 그냥 제 추측인데, 9팀이 맡은 사연이 각각 여신들이 담당하는 주제와 맞닿아 있을 것 같아요. 이를테면… 저희가 맡은 사연은 아마도 멜포메네에 해당하지 않을까 해요.”

“하지만 그 여신이 담당하는 건 비극이라는데?”

“그래서 그래요.”

어느새 회의실 안이 열기로 가득해졌다.

방금까지는 답을 알 수 없는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지껄이고 있지만 꽤 그럴싸하지 않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멜포메네는 비극을 부르는 여신이 아니라 슬픔을 겪는 인간들이 노래를 통해서 새로운 힘을 얻도록, 그래서 마침내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여신이에요. 멜포메네는 인생의 격랑 속에서 고뇌하는 인간들을 위한 안내자라고도 불려요.”

검색에서 나온 결과를 짚어주자 영빈 형이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멜포메네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건데, 도명 씨와 수현 씨, 그리고 그 가족이 겪은 일은 커다란 비극이에요. 어쩌면 이 사연은 저희 몫이 아니었을 수도 있어요.”

입이 바싹 마르는 느낌이 들어 옆에 있던 생수병을 따서 급히 한 모금을 마셔 목을 축였다.

“아마 어느 정도 연배가 있고 경험이 풍부한 나만수 님이나 김준현 선생님이 맡았다면 베스트였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렇게 사람을 골라서 사연이 주어지면 조작 의혹이 있겠지.”

“너무 딱딱 떨어지면 짜고 친다고 시청자들이 의심할 거고.”

“첫 회라서 시험적인 연출을 시도했을 수도 있어.”

“솔직히 우리가 중간만 가도 박 PD님은 손해 볼 게 없어. 우리가 망하면 망하는 대로 잘 써먹을 분이니까.”

내가 생각한 방향을 열어주자 멤버들의 입에서도 하나, 둘 머릿속 의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지금 내가 하는 말들이 정말 그냥 뇌내망상일 수도 있는데, 그냥 지금으로써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생각인 것 같아요.”

“어려운 내용일수록 우리가 잘 해결하면 고정이 될 가능성도 크고.”

“와, 오늘 지환이가 되게 똑똑해 보여.”

“크흠, 원래 내가 하나 파면 좀 진득하게 파는 놈이라.”

새삼스럽게 나를 기특하게 보는 하준 형의 시선이 너무 쑥스러워서 괜히 손에 쥔 펜을 만지작거렸다.

그 와중에 기운이 쭉 빠진 것처럼 조용히 있던 찬이도 활력이 도는지 나한테 한마디 했다가 그새 세빈이랑 투닥거리고 있었다.

“일단 환이 의견을 중심으로 놓으면 우리한테 버거운 사연을 맡게 된 건 이해가 가는데, 그래서 우리가 맡은 이 사연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남아.”

자기 앞으로 종이를 끌어간 경환이 내가 적었던 몇 가지 단어들을 되새기듯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고 있던 포잉도 고개를 끄덕였다.

의도를 파악했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결국은 해결까지 가지 못하면 이 모든 게 정말 뇌내망상으로 끝난다.

“수현 씨 위로 오빠가 세 분 계신다고 했잖아. 그분들을 먼저 만나서 포섭하는 게 어때?”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게 한 분씩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부모님도 한 분씩 따로.”

“무대 외부에서 사건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무대에서 해결될 수 있도록 말이죠?”

“외부에선 꼬인 걸 풀고 마지막에 무대에서 빵 터트리는 그림이 될 것 같아.”

“한두 번 만나는 거로는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 것 같고. 도명 씨랑 수현 씨, 두 분한테 가장 필요한 도움이 뭔지도 체크해야 할 것 같아.”

경환 형이 이야기를 들으며 간략하게 메모하기 시작했고, 중간중간 영빈 형이 한마디씩 보탰다.

“이 내용으로 우진 형한테 전달해서 기획서를 만들어 달라고 하면, 나쁘지 않은 내용이 될 것 같은데?”

경환 형의 정리를 한번 훑어본 하준 형이 상황을 정리했고, 그제야 세빈이 기지개를 켰다.

“슬슬 숙소로 돌아가자. 더 늦으면 너희 또 학교 가서 잠만 잔다. 우진 형도 우리 때문에 못 가고 있을 거고.”

뻑뻑해진 눈을 꾹꾹 누르며 하준 형의 말을 듣고 있던 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찬성했고 다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는 피곤하다는 생각을 못 했는데 한고비 넘겼다고 생각해서인지 몸이 축 늘어졌다.

“아, 학교 가기 싫어….”

“나도.”

“형들이 이러면 내가 뭘 보고 배워요.”

“괜찮아. 넌 이미 우리를 잘 보고 배우고 있는 것 같아.”

학교 가야 하는 네 명의 미성년자들은 현실도피를 시도했고 사무실에서 잔업 중이던 우진 형이 차 키를 들고 나타났다.

눈 밑이 시커먼 것이 보통 피곤한 게 아닌 것 같았다.

팬 사인회 준비한다고 바쁘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우진 형, 미안해요. 우리 때문에 집에도 못 가고.”

그동안 열심히 잔소리를 한 덕인지 차에 타자마자 안전 벨트부터 매는 멤버들을 기특해하다가 우진 형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아냐, 괜찮아. 근데 지환아 너 내일 스케줄 있다.”

“네? 저요?”

“응, 하준이랑 같이.”

“아….”

하준 형이랑 둘이서만 가는 스케줄이면 하나밖에 없었다.

“새벽 이번에 음방 나간대요?”

“응. 너희도 나오래.”

“저희야 가면 좋죠.”

“몇 시까지 가야 돼요?”

“6시에 나가야 돼. 학교에는 연락해놨다.”

“네에….”

결국 정말 몇 시간 못 자고 다시 나가야 할 판이었다.

흐느적대며 숙소에 들어온 우리는 우진 형을 배웅해 주고 한 명씩 씻고 나왔다.

“어우, 집에 오니까 확 피곤해지네.”

“긴장 풀려서 그렇지 뭐. 자자….”

아무렇지 않게 숙소를 집이라고 말하며 자기 방을 찾아 들어가는 멤버들의 뒷모습이 괜히 마음이 찡했다.

“너도 얼른 자라. 영빈아, 애들 잘 챙겨서 보내고.”

아무래도 아침에 나가면서 애들을 깨워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내일의 내가 할 일이고, 지금 당장은 침대에 눕는 게 먼저였다.

침대에 쓰러지듯 눕고 나니 포잉이 익숙하게 자기 자리를 찾아 누웠다.

‘포잉, 오늘 고마워.’

‘됐으니까 얼른 자.’

‘응, 포잉도 잘 자….’

포잉이 조금 쑥스러워하는 것 같아 비실비실 웃다가 눈을 감았다.

조금씩이지만 우리가 직접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서 기뻤다.

* * *

“너네 못 잤어?”

“네….”

새벽 멤버들에게 배정된 대기실에 들어서자 세비 형이 우리 얼굴을 보고 혀를 찼다.

“다 죽어가네. 아직 시간 좀 남으니까 눈 좀 붙여.”

“아직 참을만해요.”

“눈이나 뜨고 말하던가.”

눈을 뜨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감겼나 보다.

키스 형이 하준 형과 나를 소파에 밀어 넣더니 그 옆에 간이의자를 당겨서 앉았다.

“뭐 한다고 잠도 안 자고 이 꼴로 왔어.”

“새로 출연하는 프로 때문에 회의하느라….”

“그래, 일단 좀 자. 좀 있다 깨워줄게.”

가뜩이나 늦게 들어온 데다 아침부터 애들을 침대 밖으로 끌고 나오느라 진을 뺀 나와 하준 형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어나자마자 씻고 눈을 못 뜨는 세빈이를 침대 밖으로 끌고 나오는 사이, 하준 형도 경환 형과 찬이를 거의 질질 끌다시피해서 거실에 던져놨다.

그 와중에도 꾸물거리며 거실 바닥에 들러붙는 멤버들 모습에 한숨을 쉬는데, 영빈 형이 방에서 걸어 나왔다. 우리는 영빈 형에게 뒤를 부탁하고 급하게 방송국으로 달려왔다.

새벽 멤버들은 비실거리는 우리를 소파에 밀어 넣고 자기들끼리 이리저리 무언가 바빴다.

그 소리들이 백색소음처럼 귓가에서 웅웅거렸고, 나도 모르게 그대로 아주 깊이 잠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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