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날아올라(4)
“이번에 중간에 넣을 코너 하나를 구상했어요. 초대한 연예인의 팬들한테 미리 질문을 받아서, 그걸 당사자가 직접 맞히는 거예요. 정답 개수만큼 홍보할 시간을 주거나 신곡을 틀어주는 거죠.”
“팬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으면 그만큼 시청자들이 늘겠네요?”
“네, 그런데 그걸 쭌디 혼자 다 진행하기엔 좀 힘들 것 같아서 그 코너를 도와줄 사람을 생각하고 있거든요.”
여기까지 얘기한 김명진 PD가 우진 형을 보며 웃었고, 우진 형도 웃으며 답했다.
“어휴, 저희 애들이 신인이라 열정도 엄청난데 말도 다들 잘해서. 기회 주시면 진짜 열심히 할 수 있는데요.”
“저희도 예산이….”
“얘들아 잠깐만 나가서 하겸 씨랑 대화 좀 나누고 있을래?”
“넵! 잘 부탁드립니다!”
이를테면 기선제압이기도 했다.
최대한 싸게 먹혀야 하니까.
지금부터는 우리가 있으면 불편해질 대화였기에 우진 형은 우리를 내보냈고, 앞에서 기다리던 하겸 형이 손을 흔들었다.
“얘기 대강 들었지? 내가 강력 추천했다.”
“감사합니다!”
“어차피 하는 거 돈 제대로 못 줄 거면 나도 좀 잘 맞는 사람이랑 하고 싶어서.”
사실 우리 중 누구도 출연료를 기대하지 않았다.
고정 프로가 생겨서 인지도가 조금이라도 오른다면, 그건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기회가 될 테니까.
하겸 형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조금 피곤해진 얼굴로 우진 형이 나왔다. 그래도 얼굴에 만족스러움이 엿보여서 안도했다.
“얘들아, 인사드려. 돌아가자. 하겸 씨, 혹시 돌아가시는 거면 태워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저는 좀 더 있다가 가려고요. 사고뭉치들 잘 가라!”
“언래블, 다음에 봐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연신 인사를 나눈 우리는 차로 돌아와서야 크게 숨을 내뱉었다.
“형, 어떻게 됐어요?”
“잘 됐지. 다행이야.”
“우리도 좀 알려줘요!”
“일단 안전 벨트부터 매, 찬아.”
지하 주차장을 나서는 동안 다른 멤버들은 우진 형에게 결과를 묻기 바빴다. 뒤에 매달리다시피 한 힘찬이 안전 벨트도 안 매고 있어서 눌러 앉히는 건 내 몫이 됐다.
“다음 주에 너희 출연 후에 개편하는데, 그때 하준이 고정으로 들어갈 거야.”
“우와! 그럼 하준이 형 이제 계속 라디오 나오겠네요?”
“매일은 아니고 주 3회. 아쉬워. 출연료 안 받더라도 한 명 더 넣고 싶었는데 그러면 너무 번잡스러워진다고 안된다더라.”
아쉽다면서 룸미러로 멤버들의 얼굴을 살짝 살피는 우진 형과 시선이 마주쳐 그저 웃어주었다.
형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나도 멤버들도 알고 있었지만, 우리에게 지금 중요한 건 리더 형에게 고정 프로가 생겼다는 것 하나였다.
“역시 리더!”
“이렇게 차근차근 하준 형이 활약해서 우리 먹여 살리면 되겠다!”
“하준 형도 이제 소년 가장이야?”
“소년이라고 하기엔 형님 춘추가….”
“아니, 얘들아? 이게 춘추까지 나올 일이야?”
신나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춤을 추는 힘찬도, 아무 말이나 하고 있는 멤버들도, 그런 동생들을 보고 있는 영빈 형과 하준 형도 들떠있었다.
앨범이 나와도 음방이나 그 앨범을 통한 활동은 짧으면 2주, 길어야 한 달이었다.
우리는 이미 3주라는 시간을 썼고 이번 주 하연수 선배님의 콘서트 무대에 서는 것으로 앨범 활동을 마무리할 예정이었다.
팬덤 명이 생긴 뒤로 팬카페에 왜 언래블은 팬 사인회가 없냐는 말과 함께 팬미팅을 요구하는 내용의 글이 종종 올라오는 것을 우리도 알고 있었다.
음원 순위 반영을 위한 앨범 판매 독려가 팬 사인회의 주 목적이다 보니 3주면 이미 끝물이었고, 회사는 아직 이렇다 할 얘기를 해주지 않아서 멤버들도 조금 초조해하고 있었다.
자주 보지 못해서 팬들이 우리를 잊으면 어떡하지, 라는 아직 신생 아이돌이기에 할 수 있는 고민들.
그런 멤버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팬들이 그렇게 쉽게 마음 돌리지 않는다고 다독여줬지만 크게 좋아지진 않았었다.
그런 상황에서 하준 형의 고정 프로가 생기고 방송 일정도 잡히니 그제야 멤버들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다음 앨범 준비도 차근차근 진행되는 상황이었고.
회사에서도 다음 앨범을 언급하며 곡을 써볼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만들어 오라는 얘기를 했었다.
첫 앨범의 연장선으로 올해 안에 3부작으로 전반부 스토리를 끝내기로 이야기가 된 상태였기에, 불러주는 방송은 없어도 우리는 늘 바빴다.
틈틈이 GIVE 앱을 통해 팬들에게 인사를 하고 언제 누가 불러줘도 달려가서 무대를 할 수 있도록 매일매일 대다수의 시간을 들여 연습을 하고.
데뷔 전에는 단체로 춤과 노래 연습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지만, 이제는 그 시간을 조금 줄이고 각자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있었다.
* * *
그리고 무사이(Muses)의 첫 단체 미팅 날이 되었다.
“쫄지 마, 얘들아. 예의 바른 것도 중요하지만 너희가 마냥 기죽을 필요는 없어!”
“우진 형, 너무 걱정하지 마요. 우리 잘할게.”
“맞아! 형, 너무 걱정 마요!”
우리가 떨고 매니저가 다독이는 게 보통의 그림일 텐데 우리는 매니저가 가장 떨고 우리가 다독이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정작 우리는 꽤 덤덤한 상태로 미팅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의도하지 않은 의외의 효과랄까?
최종 출연진의 명단을 받아봤을 때 나는 하준 형을 걱정했다.
첫 음방 때 진상을 떨던 망둥이와 개미핥기가 속한 그룹, ‘데미갓’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우려와 달리 하준 형은 덤덤했고, 내 시선을 알아챘을 때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후로 영빈 형과 하준 형이 따로 얘기하는 광경을 목격했지만 모른척했다.
‘포잉, 주변에 카메라 있는지 확인해 줘.’
‘잠깐만.’
언제, 어디서나 타인의 시선을 신경 써야 하는 연예인들, 그리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팔아넘기기 위해 바쁜 방송국.
사람인 이상 완전무결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 애들이 하지 않은 행동으로, 혹은 오해로 욕먹는 건 최대한 방지하고 싶었다.
어떤 프로였는지 내가 봤다면 차라리 대응하기 조금 마음이 편했겠지만, 누나에게 들었던 내용들이 대부분 인지라 기억에 의지하기 어려웠다.
아직 사람들이 다 모이기 전이였고 다들 삼삼오오 모여서 인사하는 상황이라 우리는 신인답게 파이팅 넘치는 목소리로 들어가자마자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언래블 입니다!”
“오, 요새 이름 많이 들리던데. 반가워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먼저 손을 뻗어주는 사람은 최근 다양한 프로에서 입담이 좋기로 유명한 개그맨이었다.
하준 형이 나서서 악수를 받으며 고개를 숙였다. 깍듯한 멤버들 모습에 자리에 앉은 사람들도 긍정적으로 봐주는 것 같았다.
“나민수라고 해요. 이야, 다들 잘생겼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가 많이 부족할 텐데 많은 지도 부탁드려요.”
“어린 친구들이 예의가 바르네. 다른 분들한테도 인사드려야죠?”
“나는 김준현이라고 합니다. 잘해봅시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나민수와의 인사를 좋게 넘겨서인지 그 뒤로 트로트계에서도 손에 꼽히는 김준현이 웃으면서 반겨 주었고,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과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약속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데미갓 멤버들이 들어왔다.
‘카메라 하나가 켜져 있음. 저기 화분 뒤에.’
‘포잉, 고마워.’
“안녕하세요.”
적당히 예의를 차린 인사와 적당히 받아주는 사람들.
우리가 들어왔을 때랑은 또 분위기가 달랐다.
그나마 리더로 보이는 사람이 여기저기 가서 말을 붙이고 자기들 자리를 찾아서 앉는 사이 박세날 PD와 제작진이 들어와서 세팅해둔 장비를 손보고 출연진에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한 분도 안 늦고 잘 와주셨네요. 반갑습니다, 박세날입니다.”
자연스럽게 주목을 받고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능숙한 타입의 리더였고, 배울 게 많은 사람인 것 같아 우리도 진지한 얼굴로 PD의 말을 경청했다.
다시 한번 프로그램의 컨셉과 방향을 설명을 하더니, 불쑥 네모난 통을 하나 들고 왔다.
“자, 여기에는 저희가 사전에 모집해둔 사연들이 들어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걸 뽑아서 어떤 플롯으로 진행할 건지 저희랑 상의해 주시면 됩니다.”
신인은 우리뿐이라 다들 뽑고 난 후 하준 형이 대표로 가서 종이를 뽑아왔다.
“아차, 인사는 잘하셨죠? 하하. 앞으로 자주 볼 테니까 서로 잘 지내봅시다, 여러분.”
“어휴, 우리 박 PD는 걱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라니까.”
“세진 씨, 제 성격 아시면서 그러신다.”
이미 서로 친분이 있었던지 솔로 가수인 세진이 장난스럽게 말을 던지고 박세날 PD가 받아주면서 조금씩 분위기는 부드러워졌다.
“이거 무슨 내용인지는 아직 비밀인 거죠?”
“네. 다음 촬영 때까지만 비밀 지켜주시면 됩니다. 미션 내용을 여러분들끼리 말하면 안 됩니다?”
힐끔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며 망둥이의 얼굴도 봤는데, 시큰둥한 표정을 감춘다고 감췄지만 나보다 눈치 빠른 사람들이 잔뜩 있는 자리였다.
데미갓이 한참 인기몰이를 하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너무 시건방진 태도였다.
옆에서 개미핥기가 그런 태도를 커버하려는 듯 계속 툭툭 치고 말을 걸고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조금 의아할 정도로 의욕이 없어 보였다.
대체 무슨 생각인가 궁금해서 스킬을 사용해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데미갓 멤버들의 본명을 알지 못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스킬을 이리저리 테스트해보다 알게 된 사실이었는데, 예명이 아닌 본명으로 상대를 지목해야 쓸 수 있는 스킬이었다.
도대체가 설명에는 그런 말이 전혀 없었는데… 여러모로 불성실하고 불친절한 시스템이었다.
무언가 그들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던 나는 한쪽에서 그루밍 중인 포잉을 보고 씩 웃었다.
내가 직접 못 들어도 나한텐 CCTV보다 더 좋은 게 있잖아?
‘포잉, 포잉. 부탁이 있어.’
‘뭐임?’
‘저기 쟤네 있잖아. 망둥이 닮은 애.’
‘제일 늦게 온 인간들?’
‘응. 여기 끝나면 쟤네 쫓아가서 무슨 얘기 나누는지 좀 알아봐 줄 수 있어?’
‘계약자 놈아, 너는 요정한테 이제 스토킹까지 시키는 거임…?’
‘아니, 그게 아니지.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이기는 거니까 제일 중요한 임무를 부탁하는 거지.’
‘너는 정말 물에 빠지면 입술만 뜰 인간이다.’
‘응, 칭찬 고마워.’
이러니저러니 해도 여태 부탁했던 것들은 모두 들어주었던 포잉이기에 나도 모르게 환한 미소를 짓고 포잉을 바라봤다.
“음, 지환 군? 무슨 일 있어요?”
“아, 그냥 저희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게 갑자기 너무 기분이 좋아서요.”
갑자기 웃는 내 모습이 이상했던지 박세날 PD가 나를 불러왔고, 나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는 정말 새파란 신인인데, 여기 계신 분들은 전부 저희가 따로 뵙기 힘든 선배님들이시잖아요. 좋은 제의해주신 덕분에 이렇게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문득 너무 행복해져서요.”
“언래블이라고 했던가? 말을 참 예쁘게 하네. 크, 이게 얼마 만에 보는 귀여운 후배님들이야.”
“그러니까 말이에요. 세진 언니 엄청 흐뭇해하네.”
“얘, 이렇게 착하고 잘생긴 남자들 한 번에 보는 게 쉬운 일이니?”
“우리도 잘 부탁해. 여기 계신 분들에 비하면 언래블이랑 우리랑 별 차이 없잖아.”
“한참 선배님들인데 저희가 잘 부탁드려야죠.”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금칠을 해주는 대사였기에 다들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그 와중에 데미갓의 리더로 보이는 사람이 나에게 웃으면서 말을 걸었지만, 이미 망둥이가 하준 형에게 진상을 부릴 때 말리지 않았던 걸로 단단히 찍혔기 때문에 대충 대했다.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반말은.
물론 우리 멤버들은 나를 믿음직스럽다는 눈빛으로 볼… 리가 없구나.
경환 형은 얘가 뭘 잘못 먹었냐는 표정으로 보다 황급히 표정을 수습했고, 힘찬은 입이 근질근질거리는 걸 억지로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나마 영빈 형은 까마득한 선배들 앞이라 긴장해서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고 하준 형만 나에게 믿는다는 눈빛을 보냈다.
나 사고 안 친다니까? 내 이미지가 왜 이렇게 변했지?
숙소 가면 경환 형과 힘찬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영업용 미소를 고수했다.
‘님, 진짜 양심 어디 감?’
‘와,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그런 아부를 한다고?’
‘갑자기 왜 이렇게 뻔뻔해짐? 아, 원래 뻔뻔했나?’
‘포잉, 이게 다 우리 모두를 위한 내 큰 그림이니 제발 좀.’
내 편이어야 할 멤버들도 포잉도 내 편이 아니어서 새삼 내 처지가 서글퍼졌다.
두고 보라지, 이 프로를 언래블이 비상하기 위한 초석으로 삼을 테니까.
“크, 지환 군은 아주 사회생활을 잘하겠어. 딱 예쁨받을 타입이야. 하하,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곧 다시 뵙죠!”
박세날 PD의 마무리 인사와 함께 다사다난할 하루의 절반쯤이 끝났다.
2차전은 숙소에 돌아가 멤버들과 치러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