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52)화 (52/456)

52. 날아올라(3)

팀장님이 낯설 만큼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반긴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어쩐지 아침부터 빡세게 한 듯 안 한 듯한 메이크업을 시키더니…. 의상을 골라준 전담팀 누님들의 OK 사인이 떨어진 후에야 우리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우리 꼭 인당수에 팔려 가는 심청이 같지 않아?”

“이게 다 우리 잘 되라고 하는…. 후, 심청이가 얼마에 팔렸지?”

“공양미 삼백 석?”

“지금으로 치면 그게 다 얼마야?”

“인당 삼백이야, 아니면 팀으로 삼백이야?

시답잖은 헛소리는 늘 우리의 긴장 해소에 큰 힘이 되어주었다.

아침에 샐러드랑 주스를 먹여서 천만다행이었다.

무언가 언질을 듣고 정리된 다음에 오후에 이동할 줄 알았는데, 아침부터 박 PD님과 촬영 감독님, 작가님들과 함께 미팅이 있다고 했다.

덕분에 정신 차리기도 전에 바로 방송국으로 보내졌다.

회사에서는 정윤 실장님이 함께 움직였다.

어차피 말은 실장님이 다 할 테니 우리는 얌전히 꽃 병풍을 해주다 오면 된다는 뜻이었지만 긴장되는 건 다들 마찬가지였다.

찍신의 선택이라며 회사 직원들은 좋아했지만 아직 방송국이 익숙지 않은 병아리 같은 우리들은 긴장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인사가 오가고 프로그램의 대략적인 줄거리, 캐스팅 관련 이야기들이 오간 후 우리 몸값에 대해서도 몇 번 말이 오고 갔다.

게스트로 첫 화 녹화를 진행하고 반응이 괜찮으면 고정으로 자리를 줄 수도 있다는 미끼를 던진 박 PD는 시종일관 언래블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양측 모두 적당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손에 쥐었고, 우리가 큰 실수만 하지 않으면 고정이 될 수 있다는 말에 무릎 위 말아쥔 멤버들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지난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내내 포잉과 이야기를 나누며, 이전 내 기억을 더듬어서 그게 맞았는지 틀렸는지 포잉을 통해 확인받았다.

포잉이 나서서 모든 걸 알려줄 수는 없지만 내 기억이 맞다 틀리다 정도는 언제든지 말해줄 수 있다고 했다.

포잉과 나는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서로 절대 배신할 리 없는 절대적 우군이었기에 포잉이 옆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어깨가 든든했다.

“언래블은 리얼리티 안 찍어요?”

“얘기 중인 곳이 있긴 한데 영 조율이 쉽지 않네요.”

“친구들 생긴 것도 훤칠하고 성격도 아주 좋은 것 같은데 아쉽네.”

창과 방패의 싸움이야 뭐야.

박 PD와 정윤 실장님은 서로 정보를 더 알아내기 위해 찌르고 막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듣자 하니 새벽 프로젝트 그룹에 피처링으로도 들어간다던데.”

“가영 씨가 저희 애들을 좀 예뻐해서 좋은 기회가 생겼죠. 그런데 PD님은 어디서 들으셨대요? 저희 회사 직원들도 잘 모르는데.”

별 잡담 같은 이야기에 전부 뼈가 있어서 옆에 있는 내가 다 아팠다.

‘포잉, 혹시 주변에 카메라 돌아가는 거 있어?’

제작진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던 나는 웃는 얼굴 그대로 포잉을 불렀다.

‘없음. 근데 건너편 회의실에 너 아는 인간이 있다.’

‘누구?’

‘그 라디오 한다는 놈.’

‘어? 명준 선배님이?’

회의 중 들었던 캐스팅 멤버에는 없는 이름이었다.

다른 프로그램 섭외 때문일까? 아니면 방송국에서 비장의 무기 같은 걸로 숨긴 건가? 몇 가지 생각이 떠올랐지만 금방 접었다.

미소를 유지하기도 바빴다. 원체 차가운 인상인 탓에 조금만 표정을 풀어도 싸가지 없다는 소리를 듣기 쉬운 내 얼굴 탓이었다.

스케줄이 있는 날에는 자려고 누울 때마다 어김없이 뺨이 얼얼할 만큼 아팠다.

장시간 미소를 유지하는 건 꽤 힘든 일이었다.

“자, 그럼 첫 촬영은 2일 뒤니까 자세한 내용은 메일로 보낼게요. 언래블은 따로 준비할 거 없으니까 몸만 오면 됩니다.”

“이렇게 배려해 주시니 제가 너무 감사하네요. 저희 애들 잘 부탁드립니다.”

서로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덕담을 주고받고 악수를 나눈 정윤 실장님과 박세날 PD는 그냥 보기에는 참 사이가 좋아 보였다.

그렇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나는 내가 가진 스킬들을 떠올려보다 관뒀다.

그동안 제대로 스킬을 사용한 적이 거의 없었다. 지난번 라디오 때 PD와 메인 작가에게 내적 친분 스킬을 쓴 후로는 건들지 않았었다.

앞으로 본격적으로 방송국에서 활동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때가 올테니, 그때를 대비해서 스킬 정비를 해두어야 했다.

정리되지 않은 지금은 어설프게 다른 스킬을 쓰는 것보다 그저 좋은 인상을 주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인사 후 회의실을 나온 정윤 실장님은 우진 형에게 우리를 맡기고는 다른 볼일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비웠다.

아무래도 방송국을 한 바퀴 돌면서 영향력 있는 분들한테 얼굴도장이라도 한 번 더 찍을 생각인 것 같았다.

“얘들아, 고생했어.”

“우리 이제 회사로 가면 돼요?”

“아니, 김명진 PD님 기억나지? 그때 우리 한 번 더 불러주신다고 했잖아.”

“앗, 네….”

그날 지은 죄가 있는 둘은 찌그러졌고 하준 형과 영빈 형은 초롱초롱해졌다.

둘 다 크게 스케줄이 없는 지금이 불안했을 터. 그냥 얼굴 보자고 오라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다들 알았다.

“그 일정 얘기할 겸 하준이한테 물어볼 것도 있다고 하셔서.”

“오오….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촉이 온다!”

“어휴, 또 호들갑 떤다. 밖이니까 얌전히 있어.”

“쳇, 누가 들으면 내가 맨날 사고 치는 줄 알겠어요!”

“어, 아니었어?”

소리 죽여 자기들끼리 투닥거리던 멤버들 옆으로 누군가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자, 화들짝 놀란 힘찬의 눈이 쏟아질 것처럼 커졌다.

“어? 하겸 선배님?”

“오냐, 사고뭉치들아. 매니저님, 안녕하세요?”

“그 호칭에 저희는 빼주세요.”

“하겸 씨도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죠?”

예의를 갖춰 인사를 주고받는 우진 형과 명준 선배님 사이에 분명한 선이 느껴져서 새삼스럽게 신기했다.

“지환아, 너도 충분히….”

“아니, 왜죠…? 저만큼 착실한 사람이 어딨어요.”

‘님, 양심 어디 감?’

“말을 말자. 내 입만 아프지….”

“여기서 볼일 끝났어?”

명준 선배님과 포잉, 하준 형의 반응에 내심 억울해진 내가 불퉁한 얼굴이 돼서 툴툴거렸지만 두 명의 인간과 한 명의 요정은 나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이렇게 소외감을 느끼다니, 내가 인생을 헛살았구나….

“매니저님, 애들 다른 볼일 있어요?”

“아뇨, 마침 김명진 PD님이 부르셔서 그쪽으로 가려던 참이에요.”

“아, 얘기 이미 나누셨구나. 같이 가도 될까요?”

“어휴, 같이 가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그렇게 우리 벤에 함께 올라탄 명준 선배님은 마치 봉인이 풀린 사람 같았다.

“저기, 명준 선배님.”

“에이, 선배님은 무슨. 그냥 하겸 형이라고 해. 내 호칭 때문에 또 니들끼리 머리 싸맸지?”

“어? 어떻게 아셨어요?”

“인마, 너네가 했던 고민을 우리라고 안 했겠냐.”

“오오, 역시! 유경험자!”

운전하던 우진 형이 룸미러로 우리를 한 번 확인할 만큼 왁자지껄하게 대화를 나누며 이동했다.

그날 방송이 꽤 많은 인기를 끌었고, 언래블의 출연을 요청하는 글들도 제법 올라왔다고 했다.

우리 솜뭉치들뿐만 아니라 기존 시청자들에게도 꽤 괜찮은 평가를 받아서 작가 누님들이 꽤 기꺼워했다는 후문도 들려주었다.

“근데 너희 아직 고정 프로는 없지?”

“네. 스케줄을 회사에서 골라주시니까 저희는 잘 몰라요.”

“타이밍이 괜찮네. 단우가 너희 성격 좋다고 칭찬하더라.”

“아, 그 MC 님이요?”

“야, MC 면 MC지, MC 님은 뭐야”

낄낄거리며 웃고 있는 저 사람이 라디오 진행할 때는 그렇게 다정다감하고 부드러워진다니. 그들과 같은 세계에 발을 걸치고서야 알 수 있는 또 다른 현실이었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단우도 또라이라 상대가 서글서글하면 자기도 그렇게 맞춰주는데, 좀 지랄맞으면 더 지랄맞게 굴거든. 걔는 멍멍이과야. 그것도 미친개.”

“하, 하하…. 저희한테 엄청 친절하게 대해주셨는데.”

“카메라 돌잖아. 그리고 내가 너희 얘기한 것도 있고.”

서슴없이 멤버를 또라이라고 칭하는 명준, 아니 하겸 형의 모습에 하준 형은 왠지 감탄한 듯한 눈빛이었다.

아냐, 준아…. 안돼. 배우지 마라….

우리 리더의 정신 건강을 위해 대화 주제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

“겸이 형, 저희 그럼 또 출연할 수 있는 거예요?”

“그날 PD님이랑 얘기했었잖아. 너희 다시 불러준다고. 그만큼 너희가 잘한 것도 있고.”

갑자기 푸근한 가요계 선배의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던 하겸 형이 내 이마에 잠깐 시선을 주었지만, 그에 대한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이제는 거즈를 붙일 필요도 없을 정도로 잘 아문 상처다. 딱지가 생기긴 했지만 앞머리로 충분히 가려질 정도였다.

“회사 가서 엄청 깨졌지?”

“넵….”

“혼날만했어. 그 뒤로는 몸조심하고 다니냐?”

“그럼요. 저도 아픈 거 엄청 싫어해요.”

“얘도 물에 빠지면 입부터 뜨겠네. 토크쇼 같은 거 섭외 들어오면 꼭 나가. 지환이 잘하겠다.”

칭찬 아닌 것 같은 칭찬을 하며 내 머리를 헝크는 손길에 기겁했지만, 좁은 차 안이라 피할 수가 없었다.

“아, 형! 이거 손질한 건데.”

“괜찮아, 어차피 너 펌한 머리라 대충 정리만 해도 되니까.”

이렇게 사소한 것들부터 앞으로 겪을 여러 방송국에서의 갑질과 차마 눈 뜨고 못 볼 그룹 간의 신경전 같은 꿀팁들을 풀어준 하겸 형이 창밖을 보더니 옷차림을 정돈했다.

“다 왔다, 얘들아. 준비하자.”

“하겸 씨가 대신 애들 챙겨주니까 제가 너무 미안한데요?”

“에이, 뭘 이런 걸로. 고마우면 커피 한잔 사주세요.”

“법카 들고 왔습니다.”

방송국 안쪽에 우리를 내려준 우진 형은 잠깐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영빈 형을 데리고 커피를 사러 갔다.

혼자 다 들고 오기에는 수가 너무 많았던 탓이었다.

“근데 겸이 형은 매니저님이랑 같이 안 다녀요?”

“아, 평소 출근할 때는 같이 오는데 같이 안 다니는 날들도 있어.”

“이게 바로 짬에서 오는 여유인가.”

“연륜이라는 거지.”

내리자마자 하준 형이 흐트러진 찬이 옷차림을 정리해 주었고, 그사이 차 안에서 졸았는지 머리가 조금 눌린 세빈의 머리카락은 내가 헝클어서 잘 감추었다.

‘보모들이네, 완전.’

‘어쩔 수 없지…. 우리 애들이 손이 좀 많이 가.’

“그래도 언래블에는 챙길 수 있는 사람이 둘이나 있어서 다행이네.”

“네?”

“하준이랑 지환이가 너네 다 챙기잖아. 우리는 다들 지 앞가림도 못하는 놈들이라 초반에 힘들었거든.”

급격하게 아련해지는 하겸 형의 눈빛에는 긴 활동 시간만큼 오래된 리더의 힘겨움이 녹아들어 있었다.

“얘들아, 들어가자.”

“네!”

타이밍 좋게 우진 형과 영빈 형이 커피 트레이를 들고 돌아왔다.

그 후 하겸 형이 앞장서고 우진 형과 멤버들이 뒤를 따랐다.

하겸 형이 인사하는 모든 사람에게 우리도 같이 인사를 했는데, 그게 우리를 위한 배려였기에 마냥 고마웠다.

이미 어느 정도 인지도가 쌓여있고 인맥도 있는 하겸 형이 직접 인사시켜줌으로써, 그들에게 우리 언래블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듣보 아이돌에서 골든아워 리더 하겸이랑 친한 신인 아이돌이 될 수 있었다.

“PD님! 누님들! 저 왔어요!”

“쭌디 왔어? 오, 언래블이랑 같이 왔네. 아래서 만났어?”

“안녕하세요!”

“아뇨, 저 SCTV에 볼일 있어서 갔다가 만나서 차 얻어탔어요.”

“어휴, 넉살도 좋아.”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며 우리는 뒤에 한 줄로 서서 얌전히 있었고 우진 형이 커피를 내밀며 제작진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날은 실례가 많았습니다.”

“실례는요, 우리가 더 잘 챙겼어야지. 그, 지환 씨는 이제 괜찮아요?”

“넵! 괜찮습니다.”

소소한 안부를 묻고 안내된 곳에 우리와 매니저 형이 앉았고, 맞은편에는 PD와 메인 작가가 앉았다.

“다음 주쯤에 언래블 한 번 더 나오면 시기도 적절하고 좋을 것 같아서 불렀어요.”

“불러만 주시면 언제든 시간 빼서 와야죠.”

“다들 얼굴도 잘생기고 입담들도 너무 좋아서 얼굴 보고 얘기하려고 방송국까지 불렀어요.”

그날 내적 친분 스킬을 적용해둔 두 사람이었다.

그 덕인지 나를 보는 시선은 어느 정도 호의가 서려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방송국까지 우리를 부르진 않았을 것 같았다.

“이번에 프로를 좀 개편할 건데.”

여기서부터가 본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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