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날아올라(2)
“얘들아.”
기운이 쭉 빠진 상태에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나와 이제는 일상처럼 바닥에 제멋대로 누워있는 멤버들의 모습에 우진 형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형이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급히 너희 얘기를 좀 들어봐야 해서.”
보통 스케줄이 끝난 우리를 숙소에 데려다주고 나면 우진 형도 퇴근을 한다.
그런데 어쩐 일로 피처링 녹음을 끝낸 나와 하준을 숙소에 데려다준 지 얼마 안 돼서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근데 너희 늘 이렇게 바닥에 있는 거야?”
“이렇게 서로 엉켜 있으면 왠지 심신에 안정이 와요.”
우리 꼴을 본 형이 왠지 우울해진 목소리로 되물었고, 그 우울한 목소리를 눈치채지 못한 세빈은 해맑은 목소리로 답했다.
“급한 일이 뭐예요?”
“아, 맞다. 너희 박세날 PD님 기억해?”
“네. 뮤직 밸류 PD님이시잖아요.”
빨리 볼일을 끝내고 돌아가야 우진 형도 쉴 수 있는지라 내가 빠르게 용건을 묻자 그제야 생각난 듯 입구 쪽에 자리를 잡은 우진 형이 우리를 둘러보았다.
그 PD님이 갑자기 왜?
“너희 무대 보고 마음에 들었나 봐. 이번에 새로 기획하는 프로에 너희를 넣고 싶어 하셔.”
“헐.”
“진짜요?”
“대박!”
당황한 내가 얼빠진 소리를 내며 멍청하게 우진 형을 바라봤고, 내 옆에서 마찬가지로 퍼져있던 하준 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응. 그때 너희 무대 보는데 꼭 빛이 나는 거 같았다면서, 소현 팀장님한테 너희 칭찬하면서 게스트로 부르고 싶다고 하셨어.”
“아, 고정 말고 게스트….”
“그래도 게스트가 어디야.”
“아쉬워서 그러지.”
잔뜩 들떴던 힘찬이 금세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지만, 그래도 유명한 PD가 직접 불러준다는 것에 의미가 컸다.
연예계 일을 모르는 나조차도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인데.
“어떤 프론데요?”
“우리 나가서 이상한 거 하는 건 아니죠?”
“에이, 설마.”
기대와 불안감의 사이에서 어서 답을 내놓으라는 듯 우진 형에게 시선이 꽂히자 우리 모습을 보며 씩 웃던 형이 내용을 간추려서 말해주기 시작했다.
시청자에게 사연을 받아서 그 시청자의 요청에 맞는 무대를 출연진이 직접 꾸며주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후 패널들이 점수를 매기고 그 점수의 순위대로 사연을 접수한 시청자에게 도움을 주는 방식이었다.
“어?”
“응? 지환이 왜?”
“아, 아니에요.”
설마 이게 그건가?
누나가 즐겨보던 프로그램 중에 ‘무사이(Muses)’라고, 팬들은 ‘무사히’라고 불렀던 프로그램이었다.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로 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켰으며, 좋은 일을 위한 경쟁이었기 때문에 피로도도 적다는 평을 받았다.
거기다 무조건 금전적인 지원을 하는 게 아니라 사연에 따라 다양한 해결 방법을 제시하고 도움을 주는 형태라 프로그램의 팬층이 연령 불문하고 두터웠다.
“할래요! 무조건 할래요!”
“저희가 뭘 준비해야 되죠?”
“내일 가나요?”
가뜩이나 방송 출연이 요원했던 우리이기에 이런 제안은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온 거랑 다름없었다.
거기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건 황금 동아줄.
“허허, 너희가 이렇게 의욕적으로 나오니까 내가 다 뿌듯하다.”
한껏 아빠 미소를 지은 우진 형은 내일 회사에 오면 자세한 일정을 팀장님이 공유해 줄 테니 걱정 말라는 말을 했다.
멤버들이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되도록이면 멤버들의 의견을 들어주고 싶었다고 하더니, 우진 형은 우리 숙소를 한 번 더 둘러보고 문단속 잘하라는 말과 함께 돌아갔다.
문 앞까지 쫓아 나와 손을 흔들어준 우리는 다시 거실 바닥을 굴렀다.
“어떡하지! 나 두근거려!”
“우리가 잘하면 고정으로 시켜주지 않을까?”
“그 PD님이 좋게 본 연예인은 꼭 잘 된다더라.”
“예전에 새벽이랑 골든아워 뜰 거라고 말한 것도 그 PD님이라던데?”
우진 형 앞에서는 그래도 얌전하게 있었던 거라는 걸 그 형이 알까….
멤버들 모두가 들뜬 눈으로 풍문으로 들었던 박세날 PD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었고, 새벽 이야기가 나온 나는 가영 형에게 메시지를 보내볼까 하다 참았다.
PD님에 대해 물어보려고 메시지를 보내면 왠지 그걸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세비 형한테 메시지 보내볼까?”
“어? 세비 선배님이랑 연락해요?”
“응. 지금도 톡 보내고 있는데?”
중얼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고개를 휙 돌리니 영빈 형이 무덤덤하게 핸드폰 화면을 보여줬다.
조그만 핸드폰 화면에 멤버들이 달라붙어 내용을 잠깐 봤는데 영빈 형이 이렇게 사회생활을 잘하는 줄 몰랐다.
세비 선배님이랑 어느새 형, 동생 하면서, 세상 이렇게 순둥순둥하고 서글서글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다정하게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와…. 세비 선배님 친해지기 어려울 것 같았는데, 어떻게 친해졌어요?”
“아, 내 프사 보고 연락 주셔서 그 뒤로 쭉 연락하다 보니까.”
영빈의 프로필 사진이 뭐였는지 궁금해져 냥톡 친구 목록을 눌러보자, 고양이 사진을 프로필로 한 영빈 형의 이름이 보였다.
“형, 집사님이었어요?”
“응. 본가에 있어서 한참 못 보긴 했는데 엄마가 자주 사진 보내줘.”
“세비 선배님도?”
“어쩌다 간택 당해서 지금 열심히 캔 따개하고 계신다더라.”
고양이 털 알레르기가 있는 누나 덕에 이전에는 반려묘를 들이지 못했던 나는 영빈 형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봤다.
“형, 나도 사진 공유 좀….”
“나도! 나도 보여줘요!”
“그냥 우리 단톡방에 공유해 줘.”
하준 형이 넌지시 한마디 보태자 왠지 뿌듯한 얼굴이 된 영빈 형이 멤버들만 있는 단톡방에 여러 사진과 동영상을 보내주었다.
포잉은 톡톡 쏘는 성격이었던 터라 애교 많은 영빈 형의 반려묘 영상에 입가가 절로 허물어지는 걸 느꼈다.
“어으…. 진짜 성격 좋다.”
“얘가 사람이랑 잘 놀아줘. 착해.”
“나도 만지고 싶다, 핑크 젤리….”
“다음에 다 같이 우리 집 가자.”
원래 대화 주제는 박세날 PD님의 성격을 선배님에게 물어볼까? 였지만 어느새 영빈 형의 반려묘에게 푹 빠져버린 우리들은 한참 동안 누워서 영상과 사진을 탐닉했다.
“아, 이게 아니었잖아!”
“응?”
“우리 집중력에 문제가 좀 있는 것 같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내가 소리 질렀지만 다른 멤버들은 하나같이 의아한 시선을 보냈고 그중에 하준 형만 정신을 차린 듯 중얼거렸다.
“우리도 나중에 숙소에 고양이 키우면 안 돼요?”
“우리가 숙소에 없으면 고양이 혼자 외롭잖아.”
“그럼 두 마리….”
못내 아쉽다는 듯 중얼거리는 세빈을 영빈 형이 잘 다독였고 겨우 대화를 다시 내일 인터뷰할 프로그램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일단 영빈아, 세비 선배님한테 물어볼 수 있으면 한번 물어봐. 그리고 부으면 안 되니까 니들 빨리 자라.”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체력 보존을 위해 멤버들을 방으로 돌려보내던 하준 형이 갑자기 생각난 듯 ‘아’하는 소리를 내며 동생들을 둘러봤다.
“경환아, 주영 팀장님이 곡 언제 되냐고 물어보시더라. 낼 찾아뵙고. 힘찬이랑 세빈이는 내일 시영 쌤한테 가고.”
“아….”
하준 형의 전달사항에 경환은 박 터지는 소리를 내며 현실도피를 시작했고, 보컬 쌤에게 지적받은 둘은 티격태격하며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아으…. 시영 쌤이 숙제 내준 거 다 못했는데.”
“그러게 미리 하랬잖아요.”
성격도 다 다르고 추구하는 바도 다른 이 사고뭉치들을 진두지휘하는 하준 형을 측은하게 바라봐 준 나는, 나에게도 미션이 떨어지기 전에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아, 삭신이야….”
이제는 익숙한 섬유 유연제 냄새. 이불에 얼굴을 묻고 앓는 소리를 내던 나는 몸에 힘을 쭉 빼고 늘어졌다.
‘인간아, 인간아. 잘하고 왔음?’
‘포잉….’
방금 전에 봤던 핑크 젤리가 눈앞에 아른거린 나는 어느새 옆에 와서 드러누운 포잉의 앞발을 쥐었다.
‘뭐 함?’
‘나 힐링 좀 할게….’
따뜻하고 보드라운 앞발을 만지작거리자 포잉이 조금 불만스럽다는 듯 귀를 움찔거렸지만, 다행히 내가 핑크 젤리를 꾹꾹 누를 때까지도 얌전히 있어 주었다.
‘포잉, 오늘 웬일로 친절해?’
‘뭐라는 거임. 요정은 원래 친절함.’
‘…그렇다고 해둘까, 우리?’
떨떠름한 중얼거림이었지만 얌전히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던 나는 실컷 젤리를 조물거리다 포잉을 끌어안았다.
‘내일부터는 나도 님 따라다닐 거임.’
‘이제 교육 안 받으러 가도 되는 거야?’
‘응. 징글징글했다….’
교육이라는 말에 그동안의 고생이 떠올랐는지 포잉이 한숨을 폭 내쉬며 몸에 힘을 쭉 뺐고, 나는 천천히 보드라운 등줄기를 쓰다듬어줬다.
얼마 전 포잉이 그랬다. 내가 랜덤을 고르는 바람에 앞으로 생길 변수에 대비하기 위해 다른 요정들보다 훨씬 많은 양을 다시 공부해야 했다고.
시간을 들여 천천히 교육받으면 나랑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지는데, 어째서인지 혼자 두면 사고 칠 것 같아서 교육을 속성과정으로 달렸다고 했다.
신뢰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조금 슬펐지만 그래도 고생한 포잉을 한껏 칭찬해 주었다.
‘이제 어지간한 상황은 커버 가능함.’
‘오, 이제 쫌 요정 같은데?’
‘계약자 놈아, 너는 나 같은 요정을 만난 걸 감사해라.’
‘그럼, 난 늘 포잉에게 감사하고 있지.’
뚱해진 포잉의 궁둥이를 토닥거리며 팔을 뻗어주자 평소처럼 내 팔에 기대는 작은 머리통이 앙증맞았다.
‘근데 아직 다른 소식 없음?’
‘응? 무슨 소식?’
‘아무것도 아님. 잠이나 자라, 계약자 놈아.’
무언가 생각했던 대로 안 풀리는지 고개를 까딱거리던 포잉은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나도 사람의 체온보다 따뜻한 포잉의 온도를 만끽하며 눈을 감았다.
* * *
역시 고양이 테라피가 힐링에는 최고였다.
평소보다 조금 더 가뿐해진 몸으로 눈을 뜬 나는 씻자마자 멤버들을 먹일 주스를 위해 과일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요새 들어 부쩍 피곤해하는 것 같아서 아침에 닭가슴살 샐러드와 함께 과일 주스를 먹이기 시작했다.
‘닭가슴살도 큐브 타입 같은 걸로 잘 나오던데. 아직은 그런 게 없나? 찾아볼까?’
해독주스를 만들어서 먹이고 싶은데 채소를 손질하고 삶는 시간이 제법 걸리는 터라 시도를 못하고 있었다.
느릿느릿 일어나 씻고 움직이는 좀비 같은 멤버들에게 주스 한 잔씩 쥐여주고 마시는 것까지 확인하자, 우진 형이 도착했다.
“지환이 아침부터 고생하네.”
“이 인간들이 뭘 챙겨 먹어야 말이죠.”
“치킨을 주면 아침이라도 신나게 뜯을 수 있어….”
턱도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스냅백을 눌러쓴 힘찬의 모습에 혀를 찼다.
멤버들을 한 명씩 확인하다 하준 형이 아직도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세빈과 경환 형을 끌고 다니며 챙기는 걸 안쓰럽게 바라봤다.
“어떻게 하면 저 둘이 좀 잘 일어날 수 있을까요.”
“지환아, 세상에는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게 있더라.”
애잔한 리더의 모습에 우진 형을 바라봤지만, 이미 세빈의 잠에 진 전적이 있는 매니저의 대답은 처량 맞기 그지없었다.
경환 형이 평소보다 흐느적거리는 걸 보면 어제 작업하느라 늦게까지 잠을 못 잔 것 같았다.
나도 다시 곡 만들어보고 싶은데 아침 일찍 회사를 가자니 멤버들 아침을 챙길 시간이 없고, 숙소에서 하자니 장비가 없었다.
포잉이 저번에 보여준 도구를 쓰면 할 수 있긴 한데 그러려면 일찍부터 침대에 누워야 했다. 남들 앞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여러모로 고민만 가득한 상태로 회사에 도착하니 어느새 포잉이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늦었다, 계약자야.’
‘인간은 외출하려면 준비할 게 많단 말이야.’
포잉에게 투덜대며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화사하게 웃는 팀장님이 우리를 반겼다.
“우리 언래블 왔니?”
우리 팀장님이 이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