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49)화 (49/456)

49. Remember(5)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내가 잠시 감정에 취해 그 사실을 잊었다.

“우리 지화니 감동받아쪄요?”

“흐즈므르.”

“그래서 울어쪄요?”

“아오, 진짜!”

화장실에서 깜박 잠든 것도 당일 라디오에서 불어버린 인간들인데 내가 미쳤지!

모든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까지는 좋았다.

팀장님이 PD가 우릴 좋게 본 것 같다며 앞으로 이대로만 열심히 하자고 다독여주셨다.

가뜩이나 팬들을 지근거리에서 만났다는 흥분이 가시지 않은 상태라 신난 우리는 숙소로 오는 길 내내 오늘 음방 무대와 미니 팬미팅에 대해 얘기했다.

거기서 끝났다면 얼마나 훈훈했을까.

씻고 나오자마자 먼저 씻고 거실 바닥에 늘어져 있던 힘찬은 나를 보고 히죽거리기 시작했고, 뭔데 하면서 발로 툭툭 건드리자 목줄 풀린 망아지처럼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환이 형 놀리지 마여!”

“우리 막둥이도 그렁그렁하던데~!”

“너도 완전 굳었었으면서. 나잇값 좀 해라”

내 편을 드는 세빈이까지 놀리고 투닥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낄낄거리던 힘찬은 결국 내가 엎어진 자세 그대로 그놈의 허리를 자근자근 밟아준 끝에 조용해졌다.

“으엌! 지환아! 아파! 나 허리 나간다!”

“영영 현생 로그아웃하는 것보다야 낫겠지. 안 그래?”

“살려줘! 경환이 형! 영빈이 형!”

“이런 걸 보고 인과응보라고 하지?”

“그쵸. 쟤는 좀 혼나야 돼.”

힘찬의 SOS를 본 경환 형과 영빈 형은 코끝으로 비웃으며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해.”

마지막으로 씻고 나온 하준 형이 나랑 힘찬의 꼴을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바닥에 앉았다.

“힘찬이가 허리 아프다길래 좀 밟아줬어요.”

“허리 말고 뇌가 아픈 건 아니고?”

“와, 우리 래퍼 형 라임 보소.”

“쟤는 저거 안될 것 같아….”

결국 하준 형에게 불치병 판정을 받은 힘찬이 몸을 뒤집어 거실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다.

“근데 기분 되게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오늘 무대도 글코, 팬분들도 그렇고.”

한숨을 푹 내쉰 세빈이 영빈 형의 다리를 베고 누워서 생각이 다 정리되지 않는지 더듬더듬 말하는 힘찬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숙소 생활은 막내의 정신적 성장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 같아서 나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오늘은 뭔가 좀 그렇긴 해.”

언제 베개까지 챙겨왔는지 거실 바닥에 아예 누운 경환 형도 힘찬의 말에 자신의 말을 보탰다.

“그러니까 그 그런 게 뭔데요.”

“뭐라고 해야 하지? 가슴 안쪽이 너무 간질거려. 꺼내서 긁고 싶어.”

“어우, 뭐야. 표현이 호러야.”

“나 지금 진지함. 궁서체야.”

세빈의 타박에도 입술만 삐죽대다 자기 가슴 위에 손을 얹은 힘찬이 아랑곳하지 않고 중얼거렸다.

“이게 사랑에 빠진 기분인가 봐. 안 되겠어! 공카에 편지 쓸래!”

“쓰는 건 좋은데 꼭 매니저 형한테 허락받고 올려라.”

동기도 의도도 너무 좋았지만 그 글을 쓰는 게 힘찬이라는 게 걱정돼서 한마디 덧붙였다.

“나도 그건 기억하그든….”

“밖에선 장난도 좀 그만 치고.”

“알았다니까.”

아직까지도 화난 팀장님의 모습이 생생한지 힘찬이 기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하준 형이 노트북을 들고 나왔다.

“생각난 김에 팬카페 좀 같이 보자.”

밥 먹던 상 위에 노트북을 올린 하준 형의 주변으로 멤버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았다.

즐겨찾기와 자동 로그인 덕에 팬카페에 바로 들어간 우리는 메인에 걸린 앨범 재킷 사진에 몸서리쳤다.

“아으, 이렇게 다시 보니까 너무 이상해!”

“찍을 땐 완전 멋있게 찍은 줄 알았는데….”

“그 와중에 지환이 왜 잘 나옴?”

“세빈이가 더 잘 나왔는데?”

“그만 좀 해, 이것들아!”

내버려 두면 사진 가지고도 하루 종일 수다 떨 동생들인 걸 아는 하준 형이 우리 대화를 끊었다.

“어디부터 볼까?”

“팬덤 명 공모부터 보자.”

이벤트 게시판에 들어가서 확인한 팬덤 명 공모전에는 수많은 댓글들이 달려있었다.

“이거 직원분들이 댓글을 일일이 모으는 건가?”

“그런가 봐.”

“이걸 일일이 다 센다고…?”

“굳이 그렇게 해야 했을까…?”

다음 주까지 후보를 추천받아 최종 투표를 한다는 내용은 확인했지만, 의견 취합을 이런 노가다로 할 줄은 몰랐지.

“Lullaby. 앨범 틀어놓고 자면 꿀잠 자니까?”

“응? 우리 노래가 졸리다는 걸까?”

“졸릴 만큼 잔잔한 노래는 아닐 텐데….”

“퍼즐. 팬들을 풀어내는 건 언래블이니까.”

“오, 이거 왠지 멋있다.”

“셜록. 우리가 언래블을 풀어내니까 대표적인 탐정 이름을….”

“저 이름은 그래도 저작권 같은데 걸리지 않을까…?”

“위에랑 비슷한 의견으로 detective, 탐정이라는 이름도 있네.”

위아래로 열심히 봤지만 솜뭉치는 보이지 않았다.

원래 팬이 제시한 의견이 아니었던 걸까?

“미스터리로 하자는 의견도 꽤 많아.”

“엄청 의견도 다양하고 뜻도 되게 멋있어요”

팬들의 아이디어와 그 설명들이 그럴듯해서 멤버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팀장님이 우리한테도 하고 싶은 이름 있으면 가져오라고 했잖아. 생각해둔 것들 있어?”

하준 형이 댓글을 읽다가 멤버들을 둘러봤고, 다들 슬며시 그 시선을 피했다.

“생각 안 해봤어?”

“아니, 생각해봤는데….”

“해봤는데?”

“팬분들이 뜻이랑 써둔 거 보면 되게 멋있는데, 내가 생각한 건 너무 유치해서요.”

“나도요….”

팬들의 의욕이 멤버들의 의욕을 이겼다는 얘기였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한데 웃기기도 해서 피식거리고 있자니 우물쭈물하던 세빈이 손을 들었다.

“저기, 저 하나 생각해둔 거 있어요.”

“오, 우리 막내. 뭔데?”

“아, 쫌! 형!”

경환 형이 아직 말랑거리는 세빈이 볼을 쿡쿡 찌르자 그런 경환 형을 발로 밀어버린 세빈이 하준 형에게 말했다.

어, 저 발로 미는 거 내가 힘찬이한테 자주 하는….

이래서 애들 앞에서는 물 마시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고 했던가. 허허.

“어휴, 한시도 가만있지를 않아. 여튼 저는 솜뭉치라는 이름을 생각했어요.”

“음? 솜뭉치?”

영빈 형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세빈이는 자기가 생각한 뜻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우리 팬분들 막 모여서 우리 응원하던 모습 보니까 귀엽기도 하고 예쁘기도 했거든요. 그래서 좀 귀여운 이름을 해주고 싶었어요.”

“팬들이 제일 귀여워할 세빈이가 팬들을 귀여워하는구나.”

“전 멋있게 자랄 거라니까요? 아무튼, 그래서 털실 뭉치 막 뭉쳐져 있는 거랑 옆에서 장난치는 고양이가 생각났어요. 근데 털실 뭉치는 안 귀여우니까 솜뭉치로요.”

“어, 듣고 보니까 괜찮은데?”

이걸 세빈이가 낸 의견이었어?

세빈이 말에 귀를 기울이던 멤버들은 그럴듯하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고 하준 형이 그 내용을 메모했다.

“내일 팀장님한테 말하자. 다른 거 또 생각나는 거 있으면 말해줘. 한 번에 전달드리게.”

“넵.”

팬카페의 게시판들을 하나둘 확인하던 우리는 암묵적인 합의로 우리가 인사글을 남겼던 게시판은 들어가지 않았다.

나야 이미 다른 멤버들 글을 다 확인했지만, 다른 멤버들은 유독 그런 걸 좀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형, 우리 위캠에 우리 이름 검색해보면 안 돼?”

“혹시 팬분들이 영상 올려주셨을 수도 있잖아.”

슬슬 자리를 정리하려던 하준 형에게 힘찬이 불쑥 말을 꺼냈다.

여태까지 회사에서는 기사도 댓글도 읽지 말라고 얘기했었다.

아직 큰 반응을 주진 않았지만 어떤 댓글이 달릴지 알 수 없으니까.

그의 연장선으로 위캠에 팬들이 직접 영상을 올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우리 영상이 얼마나 될지, 반응이 어떨지 알 수 없기에 들어가 보진 않은 상황이었다.

“나도 궁금하긴 한데.”

“딱 오늘 한 번만 검색해보자.”

영빈 형도 궁금했는지 슬쩍 말을 보탰다. 정말 궁금했으면 지급 받은 핸드폰으로 볼 수도 있었을 텐데, 회사 말을 잘 따른 건지 멤버들은 확인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말을 잘 듣는 애들도 흔치 않을 거라는 생각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나도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모니터링 한다 생각하고 한 번만 보자.”

하준 형도 궁금했던지 앞에 굳이 모니터링이라는 말까지 붙여가며 위캠 사이트를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하준 형의 손끝에 모였다. 검색 버튼으로 마우스를 옮기자 이게 뭐라고 긴장됐다.

딸각하는 소리와 함께 검색을 뜻하는 돋보기 버튼을 누르자 주르륵 검색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와…. 생각보다 많아요.”

“하나만 볼까?”

“저거요, 제일 위에 있는 거.”

생각보다 많은 영상 썸네일에 조금 들뜬 우리는 썸네일 목록을 이것저것 살펴보았다.

신인 아이돌 언래블에 대한 분석, 뮤직비디오에 대한 분석 영상, 쇼케이스 직캠 등 다양한 영상이 보여서 왠지 얼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제일 위에 있는 영상을 확인해보자는 막내의 의견에 따라 어떤 사람이 올린 언래블 탄생기라는 영상을 눌렀다.

그리고 영상이 재생되고 2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영빈 형이 급하게 노트북을 덮어버렸다.

“아니, 이 영상은 왜 넣은 거야!”

“악! 내가 미쳐!”

뭔가 방금 못 볼 꼴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 하필이면 이런 영상을 중간에 넣은 거지?

우리 팬이 아니었나…?

아이돌 창조 촬영 초반쯤이었다.

아이돌에게 연기 능력은 필수라면서 말도 안 되는 연기를 시킨 적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영상을 멤버별로 잘라서 넣어둔 치밀한 영상이었다.

“하, 하하…. 이게 대체.”

“그만 알아보죠.”

그 화는 멤버들도 모니터링을 거부했을 만큼 다들 정신적인 충격이 컸었는데, 그때는 내가 아닌 그때의 지환이가 연기했기에 나는 떳떳했다.

하지만 굳이 찾아보지는 않기로 했다.

이전 생에 누나랑 봤던 그 영상이겠지. 난 궁금하지 않았다. 절대로.

어쨌든 지금은 그게 내 얼굴이잖아.

보자마자 크게 충격받을 거라는 미래가 보였다.

“이게 조회수가 이렇게 높다고…?”

“도대체 우리 팬들한테 우리는 어떤 이미진 거야?”

공식 카페에서 그렇게 좋은 얘기만 써주고 예쁘고 멋있는 뜻을 가진 팬덤 명을 적어주던 팬들이 이런 영상을 보고 우리를 좋아해 준다는 사실에, 멤버들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냥 팬들은 우리가 흑역사라고 생각하는 것들도 귀엽게 봐주는 거죠. 아직 무대를 많이 보여주지 못했으니까 아이돌 창조 때 영상이 많은 건 어쩔 수 없어요.”

멤버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 그리고 팬들에 대한 오해를 덜어주기 위해 전현직 팬 겸 멤버인 내가 열심히 실드를 치기 시작했다.

나도 이전엔 애들 웃긴 영상을 보면서 낄낄댔던 전적이 있기에 약간, 아주 약간 찔리기도 했다.

“앞으로 멋있는 무대 더 많이 해서 팬분들도 우리 무대를 더 많이 보실 수 있게 되면, 아이돌 창조 때 영상은 많이 묻힐 거예요.”

“그렇겠지? 우리가 더 열심히 해야겠다….”

“우리가 활동한 지 한 달이 됐어, 두 달이 됐어. 어쩔 수 없지.”

“앞으로 꼭 멋있는 것만 해야겠다.”

위캠 영상 하나로 멤버들의 의욕을 고취하는 의외의 효과가 생겼다.

하지만….

응, 사실 아냐. 그거 아마 평생 갈 거야. 얘들아….

아직은 뽀송뽀송할 멤버들의 멘탈을 위해 굳이 진실을 까발리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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