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Remember(4)
아이돌 창조 때부터 꾸준히 언래블을 좋아했던 김지영은 소속사에서 갑자기 띄운 공지에 카메라를 챙겨 급하게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오늘 언래블의 공식 첫 음악방송 사전 녹화 일정이 잡혔지만, 안타깝게 선착순에 들어가지 못했던 지영은 사녹 후기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며 게시판을 새로 고침 하고 있었다.
그때 공식 SNS에 언래블과 팬들의 교류를 위한 깜짝 미니 팬미팅을 SCTV 방송국 근처에서 진행한다는 공지가 올라온 것이었다.
정해진 시간 안에만 온다면 모두 볼 수 있다는 말에 급히 모자를 눌러쓰고 택시를 불러 도착하니 자기처럼 헐레벌떡 뛰어온 팬들이 제법 많이 눈에 띄었다.
신인 아이돌을 팔 때 좋은 것 중 하나가, 초반에는 내 돌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제법 된다는 것인데… 깜짝 팬미팅이라니!
ON 엔터는 일을 좀 괜찮게 하려나 하는 작은 기대가 생겼다.
틈틈이 핸드폰으로 주변 지인들과 냥톡을 주고받던 중 소속사 스탭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다가와 자리를 정돈하고 주의 사항을 전달하자 현장의 긴장감이 극도로 고조됐다.
곧 애들이 나온다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얼마 후 멤버들이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회사 사람들의 손을 잡고 조심조심 걸어 나오자 지영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미친! 귀여워!’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듯 입술을 살짝 벌린 멤버들의 모습이 산책 줄을 두르고 주인을 따라 나오는 강아지들 같아서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올 것 같았다.
더군다나 제복 형식의 무대의상에 안대라니.
물론 엄밀히 말하면 안대가 아니었지만 돌덕 짬바가 쌓인 지영에게는 이 모습조차도 컨셉처럼 보이는 콩깍지가 씌어있었다.
멤버들은 서로 어깨가 닿을 때마다 움찔하며 두리번거렸다.
‘저 쫄보 같은 모습도 귀여워….’
그리고 안대가 풀리자, 여태까지 회사 사람들의 지시에 따라 숨소리도 죽이고 있던 팬들은 일제히 자신만의 아이돌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언래블 데뷔 축하해!”
“앞으로 꽃길만 걷게 해줄게!”
그리고 지영도 여태 참고 있었던 한마디를 큰소리로 외쳤다.
“언래블 귀엽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바라보던 멤버들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얼어있자 한 스탭이 다가가서 뭐라고 소곤거렸다.
그제야 진실의 주둥이 하준이가 입술을 꾹 깨물고 구호를 외쳤고, 다른 멤버들도 뒤따라 외쳤다.
신인답게 각 잡히고 힘 넘치는 구호에 절로 엄마 미소가 떠올랐고, 잊지 않고 챙겨온 카메라로 연신 멤버들의 모습을 찍기 시작했다.
다들 많이 당황했는지 하준이 겨우 말을 이어가다 사과하자, 우리 애 기죽는 꼴은 못 보는 지영은 다시 외쳤다.
“아냐! 미안하다고 하지 마! 우리 괜찮아!”
“맞아! 미안해하지 마, 얘들아!”
그러자 희미하게나마 하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고, 목소리가 조금 잠긴 경환이 자기들이 많이 긴장한 것 같다 말을 꺼냈다.
급하게 만든 자리 탓인지 아니면 방송국 놈들이 못 하게 한 건지 마이크가 준비되지 않아 애들이 하는 말을 들으려면 한껏 귀를 쫑긋 세우고 있어야 했기에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마이크라도 준비해 주지. 애들 무대하고 와서 힘들 텐데.
그때, 최근 아창 방송에서도 잘 웃고 GIVE 앱이나 라디오에서도 한껏 활약하고 있는 작은 환이 갑자기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울기 시작했다.
“어…?”
아창 초반에야 썩 마음에 들지 않아 안 올라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멤버였다.
하지만 사고 후엔 커뮤에서 농담으로 개조설도 나올 만큼 완전 다른 사람처럼 바뀌더니, 어느샌가 호감 캐릭터가 되어 버린 작은 환이었다.
“지환아, 왜 울어….”
“지환아! 사랑해! 울지 마!”
“우리가 더 잘할게!”
사방에서 지환을 위로하는 말이 터져 나왔다. 마침 지영의 옆에 팬은 최애가 작은 환이었는지 자기도 같이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어서 급히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주었다.
“저기, 이거라도….”
“아, 감사합니다, 흡….”
애써 울음을 삼키는 모습에 지영은 자신까지 마음이 짠해지는 기분이 들어 토닥거려주었다.
행사를 다니다 보면 늘 보이는 사람들이 있어서, 가끔 마음 맞는 덕질 메이트가 생기기도 했다.
같은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동질감은 꽤 충만한 기분이어서 지영은 이전 다른 아이돌의 팬일 때도 팬미팅이나 콘서트를 갈 때 꼭 주변 팬들에게 선물할 간식이나 비공식 포토 카드를 챙기는 편이었다.
“제가 아직 많이 모자라서 여러분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런데도 이렇게 너무 많이 와주셔서….”
가뜩이나 팀 내에서 체구도 작은 애가 눈물을 뚝뚝 흘려가며 팬들한테 고맙고 미안하다고 얘기하자 사방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 지환이가 걱정이 많아서 그래요. 여러분, 뚝!”
“좋은 날에 왜 울고 그래.”
“우리 지환이가 생긴 거랑 달리 눈물이 많아요. 여러분, 괜찮아요!”
하준이 훌쩍이는 팬들을 달래기 시작했고, 지환이 옆에 있던 경환과 힘찬이 지환을 달랬다. 결국 힘찬이 지환이를 안고 뒤돌게 하더니 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 모습에 세빈까지 눈물이 그렁그렁 해졌고 영빈이 세빈을 달래는 사이 경환과 하준이 한발 앞으로 나왔다.
“진짜 전부 저희 보러 와주신 거 맞아요?”
“네!”
“와…. 저 진짜 지금 기분 되게 좋아요!”
“우리도!”
한마디씩 주거니 받거니 하며 팬들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기 시작하자 다행히 팬들도 금방 감정을 수습하고 멤버들에게 손을 흔들고 대답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감정이 수습된 건지 눈이 빨개진 지환과 세빈이도 한 발 더 앞으로 나와서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며 같이 손을 흔들어줬다.
어떻게 보면 그리 많은 숫자도 아닌데.
대형 팬덤을 가진 아이돌의 홈마였던 지영은 그 그룹의 멤버가 한창때에 연애설로 크게 병크를 터트려 팀을 풍비박산 내는 걸 보며 탈덕 했었다.
그러다 우연히 본 방송에서, 좋아했던 래퍼 D.P가 다른 아이돌 덕질하느라 소홀한 사이 ON 엔터에서 하준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돌로 데뷔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그룹에 입덕하게 되었다.
지영이 한참 덕질할 당시에는 사방에 아는 홈마들도 많았고, 지영이 찍은 사진을 좋아해 주던 팬들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오프 모임도 심심치 않게 나갔었고, 애들의 팬 사인회나 팬 미팅, 콘서트뿐만 아니라 공방도 꽤 열심히 달렸던 사람이었다.
그런 경험이 있는 지영이 보기에는 현장에 대기하던 인원과 달려나온 팬들이 신인치고는 제법 되는 숫자였지만, 엄청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멤버들은 하나같이 눈가가 촉촉해서 연신 고맙다고 자기들이 더 잘하겠다고 말했다. 문득 처음 입덕했을 때가 떠오르며 자연스럽게 비교가 됐다.
‘걔네는 처음부터 천 단위 팬들 앞에서 적당히 예쁜 짓만 했는데.’
아무것도 모를 때는 그저 내 아이돌이 하는 말을 모두 액면 그대로 믿었지만, 그 판에 머물수록 듣고 싶지 않아도 사방에서 온갖 이야기들이 흘러들어왔다.
팬들 조공으로 급수 매기고 팬싸 때 행동이 많이 다르다는 얘기를 질리도록 들어왔었다.
열애설을 다른 홈마를 통해 먼저 들었을 때도 설마 했었다.
애들도 사람인데 연애할 수도 있지. 하지만 들키는 건 다른 문제였다.
열애설이 터지고, 연애 중인건 맞지만 팬이라면 자기를 믿고 응원해달라 당당하게 요구하는 모습에 단전부터 배신감이 치밀어 그동안 모았던 굿즈며 앨범을 죄다 쓰레기봉투에 처박았다.
이번엔 그래도 ON 엔터니까 기본 인성은 있겠지 하고 파다 보니 어느새 또 푹 빠져들었고, 겪은 게 있으니 이번엔 선은 그어놓고 좋아하려고 스스로 경계 중이었다.
그러나.
“여러분, 저희 좋아해 주시는 것도 좋지만 밥은 꼭 먹어야 해요. 아프지 않게 몸도 꼭 챙기고요.”
얼마 전에 교통사고 났었던 지환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팬들을 걱정하는 모습에, 더 이상 선이고 뭐고 모든 경계와 걱정이 마음속에서 녹아 사라지는 듯했다.
그래, 선은 원래 넘으라고 있는 거다.
지영은 오늘 그 선을 넘기로 했다.
“맞아요, 예전에 어떤 선배님이 남긴 명언이 있죠! 저희가 여러분의 인생을 책임져주진 않아요! 하지만 사랑은 많이 받고 싶어요!”
“그게 뭐야!”
부쩍 기운을 차린 힘찬이 지환이 옆에서 맞장구치나 했더니, 그래도 사랑해달라는 말을 덧붙여서 모두가 그게 뭐냐며 다들 큰 웃음이 터졌다.
오늘 꼭 영업용 인생 샷을 건지겠다는 각오를 다진 지영의 손과 눈이 어느 때보다 날카로워졌다. 지영은 깨닫지 못했지만, 비슷한 각오를 다진 여러 명의 팬이 그 옆에서 카메라를 붙잡고 있었다.
대화를 주고받던 언래블 멤버들은 타이틀곡과 하준과 경환이 직접 작곡한 ‘어쩌면’, ‘점멸’을 짧게나마 불러주기까지 했다.
장소가 좁은 탓에 안무까지는 볼 수 없었지만, 라이브로 듣는 언래블의 목소리에 이 자리에 오길 잘했다고 모든 팬이 생각했다.
언래블이 언제 더 커서 콘서트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기에 이런 라이브는 하나하나가 귀했다.
그리고 어느새 약속된 시간이 다 되어 가는지 매니저로 보이는 스탭이 다가와 하준에게 무얼 속삭였고, 하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 오늘 이렇게 갑자기 모여주셔서 저희한테 정말 큰 선물이 됐어요. 여러분들에게도 좋은 시간이 됐을까요?”
“가지 마, 얘들아!”
“언래블 사랑해!”
마지막임을 직감한 팬들은 우는소리를 했고 멤버들은 그사이 평소의 컨디션만큼 기운을 회복했는지 다들 화사한 미소를 머금고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여기서 여러분들이랑 계속 있고 싶은데, 그러면 경찰 아저씨한테 잡혀갈지도 몰라요!”
힘찬의 말에 옆에 있던 세빈이 한숨을 푹 내쉬었고 그 모습에 벌써부터 막내 온탑의 기미가 보인다며 팬들은 즐거워했다.
“저는 언래블과 여러분이 오래도록 함께했으면 좋겠고, 언래블은 여러분들을, 여러분들은 언래블을 오래오래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우리 또 봐요, 꼭.”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성격이 많이 부드러워진 건지 초반의 인상과 달리 부드럽게 웃는 지환이 인사를 했고, 영빈이 한마디 덧붙였다.
“지금까지 함께 풀어나갈 미래 언래블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여러분!”
“공카에 팬덤명 투표도 꼭 해주세요! 와줘서 고마워요!”
“조심해서 집에 가요!”
이 깜짝 팬미팅은 GIVE 앱을 통해 실시간으로 방송되고 있었다. 멤버들의 눈물과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들은 모든 팬들은 주변 영업에 더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ON 엔터가 미니 팬미팅에 참여한 모든 팬에게 한 역조공을 현장에 있었던 팬들이 게시판과 SNS에 하나, 둘 올린 것이 시작이었다.
덕분에 ON 엔터가 아이돌을 처음 만들어보는 것에 비해 일 처리가 괜찮다는 얘기도 나오기 시작했다.
원래는 팬 사인회 때 풀 생각으로 준비했던 역조공 물품은 멤버들의 사인이 들어간 엽서와 멤버들의 포토 카드, 간단한 간식거리였다.
어느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팬덤은 우리 애들은 우리가 지켜야 해, 라는 마음으로 더 단단하게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여파로 첫날 새벽 잠깐 48위에 올랐다가 100위 밖으로 사라졌던 언래블의 타이틀곡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랭크를 거슬러 올라가 다시 하위권에 자리를 잡았다.
거기에 팬카페에 가입하는 인원수도 꾸준히 늘어갔고, 덩달아 타이틀곡의 조회수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고 있었다.
일주일도 안 되는 시점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박정균 대표는 지금이 타이밍이라며 홍보팀을 닦달해 기사를 몇 번 더 내보내도록 했다.
거기에는 하연수의 콘서트에 후배 가수가 등장한다는 기사도 포함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