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47)화 (47/456)

47. Remember(3)

“얘네가 이번에 ON 엔터에서 나왔다는 신인이야?”

“네. 이번에 신경 좀 쓴 것 같더라고요.”

“흠….”

케이블이긴 해도, 음악방송의 PD를 맡고 있는 박세날 PD는 꽤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소문나 있었다.

음악을 소스로 사용한 예능을 주로 만들어 왔기에, 음악 방송이 없었던 SCTV에서 전적으로 박세날을 믿고 프로를 만들어 줬다는 소문도 있었다.

“얘네 괜찮네.”

그리고 박세날 PD의 또 다른 별명은 찍신이었다.

박 PD가 찍은 신인은 뜬다는 농담이 섞인 별명이었지만, 그 말이 주는 파급력은 적지 않았다.

리허설을 하기 위해 올라왔던 아이돌은 긴장해서 실수하는 일은 비일비재했고, 그 실수가 늘어날수록 조연출도 카메라 감독도 조명팀도 그리고 현장에서 바쁘게 뛰어다니는 모든 스탭들도 자연스레 표정이 굳어갔다.

그런데 며칠 전에 데뷔 쇼케이스를 했다는 눈앞의 이 아이돌은, 잔뜩 얼어서 무대에 올라오는 것까지는 다른 신인들이랑 똑같았는데 카메라가 돌아가자 휙 바뀌는 게 아닌가.

용케 누가 자신을 찍고 있는지 잘 캐치했고, 안무는 거의 단체 군무 수준이었다.

“박 대표님이 칼을 갈았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언래블이래요. 소현 팀장님이 데려왔던데.”

“아아, 소현 팀장님이 붙었으면 애들 관리는 잘 됐겠네.”

김소현 팀장은 이전에 다른 소속사를 몇 개 거쳤는데, 그전까지는 주로 신인 발굴하고 기본 교육하는 일을 전담하다시피 해왔다.

김소현 팀장이 고른 애들은 대부분 인성이 괜찮았고, 일부는 탑급을 찍기도 했다.

기존 회사를 나올 때 꽤 여러 곳에서 러브콜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었고, 실장급 대우를 얘기한 곳도 있었다.

그걸 다 거절하더니 정윤 실장이 있는 ON 엔터로 간다고 했을 때, 김소현 팀장에 대한 소문을 한 자락씩 들었던 사람들은 모두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역시나 김소현 팀장은 꽤 괜찮은 신인을 만들어서 나타났다.

“노래도 나쁘지 않고 마스크도 안무도 괜찮으니까 얘네는 좀 챙겨놓자.”

최근 새로운 프로를 구상하던 PD의 말에 옆에 있던 조연출이 대꾸했다.

“소현 팀장님한테 명함 받아놨습니다.”

“크, 역시 너밖에 없다.”

“말로만요?”

“에이, 설마. 부장님한테 내가 꼭 네 이름 말해둘게.”

“선배님만 믿습니다!”

박세날은 꽤 오랜 시간 옆에서 굴렀던 조연출을 슬슬 졸업시킬 때가 됐다 생각했다.

말 한마디에 더 기운차져서 사방을 뛰어다니는 조연출을 바라보다 입맛을 다신 박세날은 카메라 감독 옆에서 넌지시 물었다.

“어때요?”

“어휴, 요새 애들은 하나같이 다 훤칠하네요.”

어느새 무대가 끝났는지, 신인 아이돌이 사방에 허리가 접히라 인사하며 내려갔다. 신인이 첫 무대를 큰 실수 없이 해내자, 박세날은 약간의 기특함과 시간 낭비를 줄여서 기쁜 마음, 이 두 가지를 품고 대꾸했다.

“에이, 그거 말고요.”

“견적 다 내놓고 뭘 물어요.”

오래 손발을 맞춰온 카메라 감독이 의뭉을 떨자 뒤통수를 벅벅 긁던 박세날은 씩 웃었다.

“내가 우리 염 감독님 눈은 못 속이지. 하하”

그리고 마음을 정한 박세날은 다시 조연출을 불렀다.

“얘네 인터뷰 좀 넣자!”

* * *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더 좋은 무대를 만들어 줬을 거라고 아쉬워하는 팀장님에게 씩 웃어 보이곤, 우리는 팀장님도, 우진 형도 불러서 다 같이 우리만의 파이팅을 외쳤다.

방송국에서 시청률을 위해 부르는 게 아니면 음악방송의 무대는 대부분 거기서 거기다.

몇 가지 효과를 넣거나 배경으로 영상을 넣어주는 정도.

그 외에 더 화려하거나 멋진 무대를 만들고 싶으면 그때부터는 회사의 돈이 들어간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한 건 쇼케이스 때처럼 조명을 이용하여 미리 회사에서 준비했던 영상을 트는 것이었다.

이미 무대 동선은 다 맞춰봤고, 이제는 실전이나 다름없었다.

생방송은 아니었지만, 이 홀 안에 들어와 있는 우리 팬들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무대를 보여주어야 하니 내 입장에선 생방송과 다를 게 없었다.

마이크를 체크하고 인이어를 확인하자 멤버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잘하자, 우리.”

“응. 잘하자.”

손끝이 떨리는 게 훤히 보이는 데도 동생들 앞에서 담담하게 말하려고 애쓰는 영빈 형이 기특했다.

드디어 무대로 올라가자 환한 조명과 환호성에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그 무대 한가운데 선 나는 호기심과 애정, 그리고 무관심이 뒤섞인 시선 앞에서 애써 표정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어쩌면 나도 이제 이 무대라는 것에 중독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언래블을 바라보던 내 시선과 꼭 닮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저릿할 만큼 큰 흥분을 불러온다는 걸 알아버렸다.

어디서 구한 건지 우리가 컨셉 포토 찍을 때 썼던, 살짝 톤이 다운된 코발트블루 색의 종이에 Unravel을 써서 흔들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나도 아직 모르는 응원법인 건지 중간중간 노래를 따라 부르며 야광봉을 흔드는 사람도 있었다.

안무에, 노래에 온 정신을 쏟으면서도 포잉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놓치지 않고 시선을 두고 웃었다.

사녹때는 무조건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언제나 남몰래 촬영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중에는 빽으로 들어온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

포잉은 그런 카메라가 있는 쪽을 한 번씩 체크해 줬고, 나는 나를 찍는 카메라와 중앙 카메라에 시선을 맞추는 틈틈이 그런 카메라를 향해 한 번씩 눈웃음을 보냈다.

팬일 때는 빽으로 입장하는 사람들에 분통을 터트리고 욕했지만, 지금은 저 사람들이 원래 보려던 가수 보는 김에 우리도 봐줬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으니까.

인트로와 타이틀곡을 합친 무대가 끝난 후 간신히 생긴 짧은 시간에는 모두 무대 끝에 매달려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장난도 쳤다.

나는 그저 미안해서, 많이 못 들어오게 해줘서 미안하고,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그렇게 미안하다고 얘기하며 웃었다.

밥도 못 먹고 줄 서서 맨바닥에 앉아 기한 없는 딜레이를 버텨가며 기다렸을 우리 팬들한테 너무 미안했다.

힘찬이는 세빈이 파트를 흉내 내서 팬들을 웃게 해줬고, 하준 형은 끝나면 맛있는 거 꼭 먹으라고 얘기를 하고 다녔다.

세빈이는 수줍게 웃으며 사랑한다고 말하더니 양손으로 큰 하트를 만들었다.

영빈 형은 상기된 얼굴로 보고 싶었다고 했고, 경환 형은 조금 멍한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봤다.

허락된 시간이 끝나고 무대를 내려오니 우리만큼 상기된 얼굴의 우진 형이 우리 등짝을 때리며 수고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기분이 어때?”

대기실에 다시 옹기종기 모인 우리를 향해 소현 팀장님이 웃으며 물었고, 그제야 꿈에서 깬 듯 정신을 차린 내가 한마디 툭 내뱉었다.

“이상해요. 쇼케 때랑은 또 다르네요.”

“맞아. 뭔가 되게…. 음, 쇼케 때는 몽글몽글했는데 지금은 욱신거려요.”

멍했던 경환 형의 눈에 또렷한 초점이 잡혔다. 하나씩 소감을 말하는 우리를 조금 기특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소현 팀장님이 말을 이었다.

“더 잘해야겠지?”

“네.”

“앞으로 갈 길이 멀다, 병아리들아.”

방금까지 뭔가 다른 차원에 있다가 돌아온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라 괜히 옆에 있던 찬이를 쿡쿡 찌르며 분위기를 바꿔보려던 나는 우진 형의 한마디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희 인터뷰 있다!”

“진짜요?”

데뷔 무대라고 해서 모두가 인터뷰 시간을 넉넉하게 받는 건 아니었지만, 웬일인지 따로 대기실까지 하나 빼서 인터뷰 장소를 마련해 줬다고 했다.

다른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전담팀 누나들이 달려와서 무대의상을 다시 손보고 화장을 고치고 땀에 절어있던 머리를 만졌다.

또 일부는 땀을 식히라고 휴대용 선풍기를 가져다주기도 하고 부채질도 해줬다.

“아주 대접은 벌써 슈스야.”

“그러니까요. 우리가 진짜 더 잘해야겠다.”

싱글벙글한 우진 형의 농담에 바로 맞장구쳐준 나는 다시 한번 입고 있는 무대의상을 내려다봤다.

네이비블루의 재킷은 멤버들마다 길이나 디자인이 달랐다.

키가 큰 편인 영빈 형과 경환 형은 허벅지 정도까지 내려오는 롱 재킷이었고, 하준 형과 힘찬은 바지 라인을 살짝 덮는 정도. 세빈이랑 나는 힙 라인에 걸친 길이였다.

금색 실로 장식된 소매와 넥 카라 부분이 고급스러워 보였고 디테일이 멤버별로 모두 달라서, 의상을 보자마자 우리 똥강아지들이 신나서 환호한 건 안 비밀이었다.

안에 받쳐 입은 민소매의 셔츠 덕에 그나마 살만했지, 셔츠까지 긴팔이었으면 진짜 죽을뻔했다.

무대 내려오자마자 조심스럽게 재킷을 벗고 땀을 식힌 우리는 다시 재킷을 걸치고 인터뷰가 준비된 방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내내 우리는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는데, 그건 인터뷰보다도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팬들을 잠깐 만날 자리를 마련했다는 팀장님의 발언 덕분이었다.

“와, 진짜 어떡하지? 나 괜찮아요?”

“오늘도 최힘찬처럼 생겼으니까 그만 좀 해!”

다만 힘찬이가 팬들을 본다는 말에 너무 긴장해서 얼어있었다.

얘는 쇼케 때도 방송 때도 다른 멤버들보다 훨씬 긴장 안 하고 잘하더니 왜 이래?

다행히 인터뷰는 음악방송 중간에 나갈 분량이라 그런지 자극적인 질문도 없었고, 진행해주는 MC가 골든아워의 멤버라 더 안정적으로 넘길 수 있었다.

인터뷰를 마친 우리가 부지런히 인사할 때 옆에 와서 은근슬쩍 응원도 해주고 갔다.

“겸이가 언래블 엄청 칭찬했어요. 응원할게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후 팀장님과 매니저 형이 이끄는 대로 착착 걸어가다 건물을 나서기 전 왜인지 검은 천으로 눈을 가렸고, 회사 분들의 인도에 따라 조심조심 이동했다.

그리고 안대를 풀었을 때, 눈앞에 가득한 초롱초롱한 눈빛들에 말문이 막혔다.

“언래블 데뷔 축하해!”

“앞으로 꽃길만 걷게 해줄게!”

“언래블 귀엽다!”

무대 위에서 내려다봤을 때도 그토록 반짝이던 시선들이 이렇게나 가까이 있었다.

입이 선 듯 열리지 않았다.

백 명 정도 될까? 생각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하준아, 인사해야지.”

우리가 너무 아무 말도 못 하고 주변만 계속 바라보자 우진 형이 다가와 속삭였다.

“둘, 셋! 안녕하세요! 함께 풀어나갈 미래 언래블 입니다!”

“안녕하세요! 함께 풀어나갈 미래 언래블 입니다!”

하준 형의 둘, 셋이라는 외침에 조건반사처럼 다 같이 인사를 하자 커다란 환호성이 들려왔고, 사방에서 찰칵거리는 촬영음이 들려왔다.

“생각하지도 못한 자리가 생겨서 저희가 너무 얼떨떨해요. 여러분, 미안해요.”

“아냐! 미안하다고 하지 마! 우리 괜찮아!”

하준 형이 더듬더듬 말을 하자, 사방에서 괜찮다는 말들이 터져 나왔다.

“저희 지금 무대 올라갈 때보다 더 긴장한 것 같아요.”

마이크나 다른 장비가 준비되지 않은 관계로, 우리가 말할 때마다 팬분들이 숨죽인 채 최대한 집중했다. 조금 먹먹한 목소리로 경환 형이 말을 하더니 부스스하게 웃었다.

그리고 나는….

“여러분, 미안해요. 너무 고마워요.”

살면서 이토록 맹목적인 애정과 신뢰가 서린 시선을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받아본 적 있었던가?

콘서트 무대 위에서 팬들을 바라보던 언래블이 왜 눈물을 흘렸는지 지금 이 순간 너무 잘 알 것 같아서, 결국 눈물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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