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46)화 (46/456)

46. Remember(2)

음악방송은 크게 두 번의 리허설을 거친다.

드라이 리허설과 카메라 리허설.

우리는 조무래기 중에서도 가장 하찮은 조무래기였다. 덕분에 길고 긴 리허설 사이 시간이 가장 많이 붕 뜨리라는 것을 눈감고도 알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사전 녹화 때 우리를 응원해 줄 팬들의 입장 인원도 여의치 않았다.

그리고 그놈의 사녹과 본방

내가 팬일 때는 댓림픽에 미친 듯이 도전하고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것들.

언제나 다른 홈마들의 구전을 통해서만 들었던 그것을 이제는 내가 직접 하게 된 현 상황에 조금 웃픈 기분이었다.

솜뭉치일 때는 팬들이 적으면 우리 애들 기죽는다고 언제나 방송국 놈들을 욕하던 내가, 지금은 언래블이 되어 우리 팬들이 들어오지도 못하게 한다고 방송국 놈들을 욕하고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방송국 놈들과는 친해질 수 없는 것인가 하는 한탄을 했다.

애들이 방송에 나가는 주에 컴백하는 팀이 많으면 사전 녹화가 없기도 했는데, 다행히 음방 데뷔 날인 오늘은 사전 녹화가 있었다.

사전 녹화 때는 비록 한 줌이겠지만 팬들도 들어와서 우리를 볼 수 있고, 우리도 팬분들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니 좋았다.

물론 신인이라 우리만 단독으로 사전 녹화를 하진 않을 테니 다른 가수의 팬들과 섞일 터.

부디 우리 팬들이 최대한 많이 입장할 수 있기를 빌었다.

온갖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지고 있었다.

리허설을 앞두고 긴 시간 동안 대기하고 있다 보니 별생각이 다 떠올랐다.

들뜨고 초조한 데다 기대감과 걱정이 동시에 몰아치지만 멤버들 앞에서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다 보니 머릿속만 복잡했다.

비교적 편한 복장에 이름을 크게 써 붙이고 무대의 동선을 맞추며 드라이 리허설을 끝낸 우리가 널찍한 대기실의 파티션 뒤 한구석에 모여앉았다.

“…나 팀장님이 그때 혼내주신 게 참 고맙다?”

“그치? 안 그랬어 봐, 또 까불다가 사고 쳤다.”

쭈구리처럼 앉아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 힘찬과 경환 형을 보자 헛웃음이 나왔다.

우리처럼 이제 막 나온 신인 그룹의 무대를 봐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긴장해서 파랗게 질린 입술이 메이크업을 뚫고도 보였다.

막둥이 세빈이 안쓰러워 입에 막대 사탕을 물려줬다.

동종업계의 선배님들, 꼬장꼬장한 방송국 스탭들 사이에서 실수라도 할까 봐 긴장한 건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우리에게 관심도 없고, 호의적이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깊이 허리를 숙이며 다녔던 멤버들이었다.

나도 뻣뻣하게 굳은 손발을 주무르며 대기실 한쪽에 찌그러진 우리 멤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폭풍 같은 머릿속과는 별개로 우리 애들이 조금 안쓰러웠다.

“나 오른발이랑 왼발 순서 바꿔서 했더라….”

“그래도 다들 큰 실수 없이 잘했어. 계속 이렇게만 하자.”

왜 사람은 꼭 자기 실수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지.

한탄을 하는 영빈 형을 하준 형이 다독이며 멤버들을 살폈다.

매니저 형과 코디분들이 무언가 하러 간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져서, 우리는 우리끼리 남아 주변을 조금씩 구경하고 있었다.

실수하지 말자, 실수하지 말자.

주문처럼 입안으로 실수하지 말자는 말만 중얼거리던 내 뒤통수 뒤에서 기분 나쁜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와, 진짜 니가 데뷔하긴 했구나.”

“….”

이 더운 날씨에 자주색 벨벳으로 의상을 맞춰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 그중 한 명이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빌어먹을.

“하준아, 반갑다?”

전혀 반갑지 않은 얼굴을 한, 망둥이같이 생긴 게 우리 하준이한테 말을 걸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하준 형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표정이 사라졌다.

“최태성.”

“선배님이라고 해야지.”

“누구야? 아는 사람이야?”

“어, 전에 데뷔 준비 같이하다 떨어져 나간 애.”

가장 피하고 싶었던 사람을 만난 건지 하준 형의 얼굴에는 희미한 분노가 서렸다가 빠르게 흩어졌다.

“데뷔 축하해. 잘 살아남았네.”

“어, 고마워. 근데 우리가 첫 무대라 아직 연습이 부족해서.”

그러니 우리한테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갈 길 가라는 하준 형의 말을 망둥이는 사람이 아니라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야, 영빈이도 여기 있냐? 걔 이제 춤은 좀 외워?”

“야, 신인한테 너무 세게 말하지 마. 겁먹잖아.”

앞장서서 떠드는 망둥이나 옆에서 돌려 까면서 웃어대는 개미핥기나 다를 게 없었다.

그 와중에 눈치는 있어서 주변에 자기보다 윗대 선배는 없는지, 자기들보다 인기 있는 아이돌은 없는지 확인하는 눈도 매우 바빴다.

우리에게만 들리게 말소리를 조절하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저 새끼들을 빨리 치워야 지금 울컥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잘 누르고 있는 우리 애들의 정신 건강에 이롭다는 얘기였다.

우리 준이 형이 더 열받기 전에 빠르게 끊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내가 하준 형의 옆에 다가가 싱긋 웃었다.

“준이 형, 아는 분들이야?”

“어, 옛날에 잠깐.”

“아아,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야, 얘는 그래도 하준이 너보다 예의가 바르네.”

서늘한 인상을 가진 내가 서글서글한 표정을 지으며 공손한 목소리로 선배님이라고 불러주자 망둥이가 피식 웃었다.

“리허설 끝나셨나 봐요. 선배님들도 여기에서 쉬시나요?”

먼저 데뷔했다고 선배 운운하더니만, 어떻게 이제 데뷔한 우리만큼 인지도가 없니?

“저희는 다들 무대 때문에 너무 긴장해서 안무 연습하고 있었는데 역시 선배님들은 다르네요. 이게 경험치의 차이인가 봐요.”

우리는 열심히 무대 준비하는데 너희는 빠져가지고 이제 그런 거 안 하나 보다?

웃으면서 건넨 내 말을 망둥이는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개미핥기는 좋은 의도는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신인은 패기 넘치는 게 좋지. 그러다 다치지 않게 조심해. 태성아, 애들한테 가자.”

의아한 눈을 한 망둥이를 개미핥기가 거의 반강제로 끌고 나갔다.

어차피 뒤에서 다른 멤버들도 지루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고, 여기서 큰 소리 내봤자 우리가 잃을 것보다 그들이 잃을 게 더 많았다.

다만, 이로써 확실한 건 저 망둥이네 그룹이 개인 대기실을 받을 만큼 인지도는 있다는 소리였다.

세상에 다양한 취향이 있고, 그 취향들은 존중받아 마땅하다지만….

아니다. 팬이 무슨 죄인가. 그놈들의 연기가 뛰어나서겠지.

하준 형의 손목을 잡아끌어 멤버들 가운데로 데려가며 속으로는 저 망둥이 놈들의 불쌍한 팬들을 위로했다.

이 바닥에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한가득이란 건 익히 알고 있었으니까.

우리가 여태까지 운 좋게 좋은 사람들만 만나온 거였다.

“저 사람들 뭐예요?”

“전 회사 사람들. 데미갓인가 하는 이름으로 나왔을 거야.”

영빈 형이 잡고 있던 탓에 얌전히 듣고만 있었던 힘찬이 그제야 하준 형에게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팀장님이 이미 한차례 세상의 쓴맛을 보여줬기 때문에 한껏 목소리를 줄인 상태였다.

데미갓, 데미갓?

무언가 기억날 듯 말 듯 한 기분에 곰곰이 머리를 굴리던 나는 하준 형이 나를 바라보는 것을 느끼고 잠시 생각을 접어두었다.

“괜찮아요, 형. 저 선 안 넘었어요.”

“…알아. 그래도 나서지 마. 너까지 욕먹어.”

리허설 내내 생기 있는 목소리로 우리를 다독이던 하준 형이 한껏 지쳐 보였다.

“곧 팬분들 볼 수 있으니까, 우리 힘내요.”

“응. 그래야지. 근데 매니저 형은 어딜 간 거야?”

막둥이가 형들의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 하준 형의 어깨를 주물거리자, 그제야 한결 풀린 얼굴로 웃어준 하준 형이 영빈 형에게 물었다.

“어디 간다고 말 안 해주셔서 모르겠어.”

아까 망둥이의 난장질에는 끼지 않았지만, 하준 형과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대미지를 입은 영빈 형의 눈꼬리가 살짝 쳐졌다.

얼굴만 놓고 보면 나보다 더 냉미남계인 영빈 형의 눈꼬리가 처지자 안쓰러움이 5배쯤 증가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요.”

“그래. 연습하자.”

아직 내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이런 것뿐이었다.

그리고 안무 순서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대형을 한번 맞춰본 나는 잠깐 화장실을 간다는 말을 남기고 빠르게 화장실의 한 칸을 차지하고 앉았다.

[포잉! 도움이 필요해!]

핸드폰이 생긴 나는 나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어줄 수 있는 내 요정님을 응원군으로 부르기로 했다.

요정에게 핸드폰이 있고, 심지어 요정이 그 솜방망이 같은 앞발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땐 믿기 어려웠는데… 실제로 답장이 왔다.

요정님 [ㅇㅋ]

[아…. 세종대왕님이 울고 계실 거야….]

요정이라는 놈이 한글을 이따위로 배워 쓰다니.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그 시각. 정우진은 뒤늦게 도착한 소현 팀장이 가져온 박스들을 살펴보며 작게 감탄했다.

“우와, 실장님이 신경 쓰셨네요.”

“첫 공방이라고, 팬들 좀 챙겨야 하지 않겠냐면서 주시더라고.”

사전 녹화 신청에 참여 가능 인원이 넘치도록 많은 사람들이 지원하자, 기쁜 함성을 지른 소현 팀장은 정윤 실장을 졸라서 팬들을 위한 짧은 인사 시간을 만들어냈다.

정윤 실장이 챙겨준 이 박스들은 그때까지 버텨준 고마운 팬들을 위한 작은 선물이 될 것이었다.

아직 인원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방송국 가까이에서 팬들이 모일 장소를 마련할 수는 없었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서라도 애들이 팬들과 짧은 시간 교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현장은 GIVE 앱을 통해 깜짝 중계될 예정이었다.

“우리 애들이 더 커야지. 이번 무대로 기억에 콱콱 언래블을 찍어줘야 돼.”

PD는 물론 조연출들과 FD들까지 싹 돌면서 읍소했던 소현 팀장의 얼굴에는 비장함마저 서려 있었다.

언래블도, ON 엔터도 각자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있었다.

언래블의 첫 음방을 노심초사 기다리던 팬들도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찾아 서로 공유하기 시작했다.

스밍(스트리밍) 목록을 점검하고, 캐시 삭제까지 해가며 위캠에 등록된 뮤직비디오의 조회수를 올리는 등, 다들 언래블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다행히 이미 아이돌 덕질 경험이 있는 몇 명의 홈마들과 팬들이 나서서 서로를 장려하며 방향을 잘 잡고 있었다.

소위 찍덕이라 불리는 이들은 쇼케이스 때 찍었던 직캠과 멤버 개개인의 사진들을 혼을 갈아 넣어 보정하고 화끈하게 풀었다.

일부는 다른 라디오 프로를 돌며 신청곡을 작성하기 위해 열심히 사연을 밀어 넣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홈마들과 합작해서 직캠과 위캠의 공식 채널 영상에 자막을 달아 올리기 시작했다.

소수인 만큼 당장의 효과는 미미할 테지만, 우리 애 영업을 위한 기본은 착실히 다져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언래블이 음악방송 무대를 통해 자신들의 매력을 최대한 뽐내주는 일만 남아있었다.

* * *

“너희는 잘하고 있고, 잘할 테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

“네!”

같은 내용으로 4번째 말하는 우진 형이 더 긴장한 것 같았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깨달을 겨를이 없었다.

방금 전 데미갓이라는 망둥이와 개미핥기네 팀이 사전 녹화를 위해 올라갔고 얼마 후에는 우리 차례였기 때문이었다.

‘포잉, 저번에 우리 평가 때처럼 앞에서 봐줄 수 있지?’

‘가능함.’

일반인이었던 나다. 무대에서 최대한 정신을 차리기 위해선 포잉이 필요했다.

아이돌 창조 때 했던 평가처럼 회사 사람 몇 명만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팬들과 기자 모두가 언래블을 목적으로 왔던 쇼케이스 무대도 아니었다.

다른 가수의 무대에 어느 정도 호응을 해주는 팬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팬덤도 있었다.

극단적인 예로 사이좋지 않은 팬덤끼리는 상대편 가수가 무대에 오르면 침묵으로 시위하기도 했으니까.

물론 방송국에서 진행하는 사전 녹화에서 그 정도로 극단적인 분위기는 펼쳐지지 않을 테지만, 여러 팬덤이 한데 뒤섞여 우리를 지켜볼 테니 더 신경 써야 했다.

사실 우리가 누군지도 잘 모르고 관심도 없을 사람들이 대부분일 터.

다행히 포잉은 나에게만 보이기 때문에 먼저 무대 쪽으로 가서 그쪽의 분위기를 살펴봐 줄 수 있었다.

‘포잉, 잘 부탁해.’

이렇게 내 요정님은 다시 한번 감시 카메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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