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45)화 (45/456)

45. Remember(1)

어제가 길었던 만큼 오늘 하루는 너무나 빨리 다가왔다.

긴 밤 동안 포잉과 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간신히 일어나 다음 날 아침 마주한 교복에는 내가 못 잔 그 밤의 시간보다 더 오래 잠들지 못한 맏형들의 애정이 담겨 있었다.

“대충 입어도 되는데.”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나, 경환 형, 힘찬, 세빈의 교복이 모두 풀 먹인 것처럼 빳빳하게 다려져 있었고 교복 재킷 안에 받쳐 입는 셔츠 역시 손목과 목덜미 부분 모두 찌든 때 없이 깨끗했다.

우리가 대충 입고 다녔던 교복을 영빈 형과 하준 형이 깨끗하게 준비해 준 것이었다.

“어머님들이 챙겨주시는 것만큼은 안 될 거야. 그래도 우리 애들이 어디 가서 기죽는 꼴 못 본다.”

“누가 학교에서 괴롭히거든 꼭 먼저 말해.”

연예인 지망생들이 다니는 학교는 보통 정해져 있었다.

내가 있는 소속사의 크기와 내가 속한 그룹, 혹은 내가 가진 인기에 따라 그 안에서의 무리와 계급이 달라질 뿐, 기존 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준이 형, 영빈이 형 고마워요.”

“빨리 갔다 와.”

“너무 잠만 자지 말고.”

담담한 표정으로 우리를 배웅하는 두 맏형의 얼굴에는 내심 뿌듯함이 서려 있었다.

대충 빨아 구겨진 교복을 입고 다녔던 우리는 빳빳한 교복 자락을 어색하게 만지다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오늘은 공부 쪼금 해야겠네.”

“넌 쪼금 많이 해야 하지 않냐?”

“어휴…. 그만 좀 자요!”

담 하나 터울로 중고등학교가 갈린 우리는 나란히 같은 버스를 타고 반쯤은 졸면서 학교를 향했다.

* * *

동생들을 학교로 보낸 두 맏형은 그제야 피곤한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안 그래도 힘찬이는 얼굴 부기도 다 안 빠졌더만, 교복이라도 제대로 입혀 보냈으니 다행이네.”

“졸려 죽겠다….”

어제 그 사달이 나고 잔뜩 기가 죽었을 동생들을 위해 밤잠을 대부분 포기했고, 다행히 선풍기 바람에도 교복은 잘 말라주었다.

새벽같이 학교로 출발해야 하는 동생들이 안쓰러웠지만, 그보다도 지금은 너무 졸렸다.

지금 빨리 눕는다면 두 시간이 조금 못 되는 시간은 잘 수 있으리라.

“조금만 자고 회사로 가자.”

“응. 알람 맞춰야지….”

하준과 영빈은 거실 바닥에 그대로 스르륵 몸을 뉘었다.

* * *

두 맏형의 바람대로 씩씩하게 학교에서의 시간을 마치고 나와 멤버들이 회사로 돌아왔다. 언제 온 건지 우진 형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왔어?”

“어? 형들은 어디 갔어요?”

연습실에서 기다렸다는 듯 반겨주는 매니저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하준이랑 히스는 단우 형이랑 있어.”

“연수 선배님 매니저분이랑요? 그 콘서트 때문에요?”

“맞아. 너희도 빨리 가자.”

어째서인지 싱글벙글한 우진 형의 얼굴을 보자 어제 일로 오늘도 혼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게 모두 날아가 버렸다.

세상 쿨한데…? 그만큼 우리를 믿어준다는 건가?

별별 생각이 다 둥둥 떠다녔지만 얌전히 형이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도착한 곳은 기존에 우리끼리 모여서 회의하던 곳보다 더 큰 회의실이었다.

“어, 애들 다 왔어?”

“네. 다 왔어요.”

친근하게 맞아주던 하연수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는 우리를 보고 피식 웃었다.

“어제 김 팀한테 혼났다며?”

“넵….”

“다 그렇게 크는 거야. 앞으로 잘하면 되지 뭐. 김 팀이 너희한테 그렇게 말했어도 개인적인 악의 아닌 거 다 알지?”

“네. 저희가 잘못했죠….”

“그래. 너희가 잘못했고 혼났으니까 앞으로 같은 실수 안 하면 된다.”

우리가 이곳으로 불려온 목적은 무엇인지 아직 듣지 못했지만, 가요계의 대선배가 일일이 우리 어깨를 두드려주고 다독여주자 나도 다른 멤버들도 굳었던 어깨가 조금은 풀렸다.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하준 형과 영빈 형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이미 우리보다 먼저 이 과정을 거친 것 같았다.

“자, 앉아. 일단 콘서트 일정은 김소현 팀장이랑은 얘기 끝났어. 정윤 실장한테 허락도 받았고. 내가 전국 콘서트 준비 중인 거 알지?”

“네. 들었어요.”

“서울에서는 2일간 진행될 거고, 그중 일요일에 너희랑 무대를 같이 할 거고. 곡은 말한 대로 3곡 줄 수 있어. 그중에 한 곡은 나랑 같이 부를 거고. 이제 3주 정도 남은 것 같은데 가능하겠어?”

하연수는 웃으면서 물었지만, 가능하지 않아도 가능하다고 대답해야 했다.

여기서 힘들다고 내빼면 두 번 다시 우리에게 오지 않을 기회였다.

“네! 가능하게 만들겠습니다!”

“꼭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무대에 목말랐다.

우리는 부지런히 어디라도 얼굴도장을 찍어두지 않으면 금방 잊힐 신인이니까.

“좋아, 신인은 그런 자세지. 하준이랑 영빈이 말처럼 애들이 기운차네.”

씩 웃으며 하준 형과 영빈 형을 바라보는 걸 보니 그들만 있을 때 무언가 얘기가 오고 간 것 같았다.

“자, 한 곡은 너희 타이틀 불러야 하니까 나머지 2곡 정해볼까?”

그렇게 이어진 두 시간짜리 회의는 우리의 기를 쪽쪽 빨아먹었다.

대한민국 탑급 남자 발라더로 꼽히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은 해왔었다.

확실히 음역대의 폭도 넓었고 목소리도 듣기 좋았다.

중음부터 고음까지 자유자재로 오가며 마음을 녹이는 목소리로 애절한 사랑을 노래해온 하연수였다.

노래방 선호곡 리스트를 보면 언제나 그의 노래가 몇 곡씩 올라 있었다.

그리고 오늘, 하연수가 굳건하게 그 인기와 실력을 지킬 수 있었던 다른 이유를 몸소 알게 되었다.

하연수의 또 다른 별명이 무대 장인이었던 것을 미련한 내가 잠시 잊고 있었다.

그의 무대는 보통의 열정으로는 만들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럼, 이렇게 대충 정해진 걸로 하고 듀엣곡 연습은 짬짬이 하자.”

“네….”

회의가 끝나고 시들시들해진 우리와 달리, 하연수는 쌩쌩한 얼굴로 우리 어깨를 두드려주고 회의실을 나섰다.

옆에서 중간중간 의견을 보충하고 정리해 주던 우진 형도 제법 지친 표정이었다.

“자, 이제 연습실 가자.”

지친 건 지친 거고 할 건 해야 하니까.

데뷔 전에도 연습할 시간이 그렇게나 부족했는데, 데뷔하고 나니 그 시간이 더 빠듯해졌다.

언제 어떻게 설지 모르는 무대를 위해 안무의 각을 세우고, 안무를 하면서도 음정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연습해야 했다.

어설프게 립싱크하다 대중의 몰매를 맞고 쪽박 차느니 폐가 터질 때까지 뛰면서 노래 부르는 게 더 나으니까.

그리고 어느새 하루의 끝이 다가오자, 팀장님이 등장했다.

등 뒤에서 꿀꺽하고 힘찬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바로 어제 그렇게 말로 후드려 맞았는데 당사자를 보고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대단한 인간일 터.

“연수 씨랑 콘서트 준비는 우진이가 방향 잡아줄 거니까 그렇게 알고. 너희 음방 무대 잡혔다.”

팀장님은 담담하게 알렸지만, 우리는 담담하게 대꾸할 수 없었다.

“진짜요?”

“저희 음방 나가요?”

“언제요?”

방금까지 시들어 빠진 무말랭이 같던 애들이 물을 잔뜩 머금은 장미꽃처럼 생생해졌다.

우리 애들이 이렇게 알기 쉽구나….

“뮤직밸류. 어딘지는 알지?”

“당연히 알죠! SCTV요.”

“잘할 수 있겠니?”

“그럼요! 지금 당장도 할 수 있어요!”

언제 침울해 있었냐는 듯 힘찬이 양 주먹을 불끈 쥐고 대답하자, 시종일관 무표정하게 말하던 팀장님이 그제야 피식 웃었다.

“지금 당장은 무리고 2일 뒤 스케줄이야. 그래도 시간이 촉박하긴 하네. 일단 팬카페에 공지 올려놨으니까 너희도 한번 봐. 아, 너희 팬카페 다 가입했지?”

“네. 다 가입했어요.”

“그래, 오늘은 저녁에 닭가슴살 말고 제육볶음 먹어라. 허락해 줄게.”

퍽퍽한 닭가슴살 말고 제육볶음이라니.

나뿐만 아니라 모든 멤버들의 얼굴이 환하게 바뀌었다.

“아, 팀장님. 저희 팬카페에 글 올려도 돼요?”

“응. 대신 올리기 전에 우진이한테 컨펌 받고.”

“넵.”

“아, 너희 팬클럽 이름 추천하고 싶은 거 있으면 알려줘. 팬분들이 응모한 거랑 해서 최종 투표 올리게.”

아직 팬카페에 인사 글도 올리지 못한 게 영 마음에 걸렸던 나는 팀장님에게 글을 써도 되냐 물어 허락을 받았다.

팬클럽 이름 공모전도 글이 올라왔을 테니 어떤 의견들이 있을지도 궁금했다.

이전 내가 속해있던 솜뭉치가 지금도 있을지 궁금했고, 그 외에 어떤 의견들이 나왔는지도 궁금했다.

기억을 떠올려보면 솜뭉치와 경쟁했던 팬클럽 이름이 퍼즐이었던 것 같다.

그 이름도 꽤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그보다 역시 솜뭉치 쪽이 나는 더 마음에 들어서 이왕이면 이번에도 솜뭉치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 지환이는 잠깐 나 좀 보자.”

“네.”

연습실 밖으로 나가려던 팀장님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불렀고 얼굴 가득 물음표를 떠올린 멤버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도 짐작되는 바가 없었다.

당장 떠오르는 일이라곤 어제의 일뿐이었지만, 이미 우진 형을 통해 대화를 나눴던 터라 그 일로 다시 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대화가 길지 않을 모양인지 연습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멈춘 팀장님이 나를 바라봤다.

정확히는 이마에 붙은 거즈를.

“…앞으로는 제발 몸조심하자.”

“넵….”

음방 무대가 잡힌 이 시점에 내 이마에 붙은 거즈는 여러모로 걱정거리라는 것을 알기에 얌전히 대답했다.

“가영 씨한테 연락이 왔어.”

“네? 형이요?”

“응. 너희 폰 생긴 거 몰랐는지 회사로 연락했더라.”

“아… 네. 어제 연락드린다는 게 깜박했어요.”

숙소로 돌아가면 연락해야지 했지만, 그때까지의 길이 너무 다사다난했다.

거기다 어제는 포잉과 대화를 생각하느라 그를 떠올릴 겨를도 없었다.

“새벽에서 조만간 유닛 앨범을 낼 예정인데, 거기에 너랑 하준이 피처링을 제안했어.”

“준이 형은 알겠는데 저를요?”

“응. 네 목소리가 이번 앨범이랑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하더라. 해볼래? 참고로 하준이는 한다고 했어.”

“아….”

잠깐 걱정이 스쳐 지나갔다.

새벽의 팬덤은 하연수의 팬덤과 또 달랐다.

새벽 특유의 감성과 목소리를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의 귀와 평가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름을 알리고 조금이라도 언래블의 목소리를 키우려면 이보다 좋은 기회가 없기도 했다.

“네, 해볼래요. 뭐라도 해야죠.”

“그래, 잘 생각했어. 가영이랑 작업하는 거 겁내는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싱긋 웃는 팀장님을 바라본 나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가영과 타이틀곡을 녹음하면서 죽을 만큼 시달린 덕에 팀장님에게 살려달라고 중얼거렸었는데, 그걸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솔직히 지금 저희 처지에 일 가리는 게 말이 안 되죠. 그런데 멤버들한테는 비밀이에요?”

“아, 일단 너희 음방하고 나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리고 이번엔 정식으로 협업 얘기가 나온 거라 회사끼리 얘기할 것도 좀 있고.”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조심히 들어가라는 말을 남긴 후, 팀장님은 다시 사무실을 향해 사라졌다.

왠지 그 뒷모습이 야근에 지쳐 좀비 같았던 누나 같았다.

“팀장님, 식사 꼬박꼬박 챙기고 퇴근도 좀 하세요.”

“네 걱정이나 해, 이 녀석아.”

그래도 걱정이 싫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목소리에는 살짝 웃음기가 어려있었다.

갑자기 지금은 볼 수 없는 욕쟁이 우리 누나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아주 조금 목이 메는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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