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22)화 (22/456)

22. EVERYDAY(3)

“아, 치킨까진 좀 오바였나 봐. 나 좀 부은 것 같지?”

“눈이 팅팅 부었는데?”

전날 자기들끼리 일탈을 마음껏 즐긴 멤버들은 아침 일찍 회사로 모였다.

그전까지는 준비되는 멤버들이 시간만 맞춰서 회사를 오갔다면, 오늘부터는 매니저 형이 아침부터 데리러 왔다는 게 조금 달라졌다.

오자마자 연습실이 아닌 대회의실에 모두 모여앉았다는 점도 평소랑 달랐다.

괜히 긴장되는지 힘찬은 바지에 슥슥 손을 닦기도 했고, 세빈은 괜히 회의실 안을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오랜만에 너무 많이 잤더니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회의실 문이 열리고 안 감ㄷ… 아니 대표님과 실장님이 들어왔다.

“다들 어제는 잘 쉬었니?”

“네!”

“좀 쉬었다고 기운차고 좋네.”

공적인 자리에서는 자기 소속 배우나 가수에게도 존칭도 써주고 말도 높여주는 우리 좋은 대표님. 그 말인즉슨 지금은 그래도 아주 공적인 자리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어제 정 실장한테 대략 얘기는 들었을 거야.”

이제는 쫓겨난 김우빈에 대한 얘기를 하려는 듯 잠시 뜸을 들이던 박정균 대표는 잠깐 굳었던 표정을 풀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김우빈 군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들에 대해서는 회사가 알아서 처리할 거니까 너희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냥 앞으로 너희가 하려던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

정윤 실장님이 어제 들려줬던 얘기를 함축해서 언급하며, 우리에게 회사를 다 믿으라고는 안 할 테니 적어도 도리는 지키자는 말을 하셨다.

ON 엔터는 재계약률이 꽤 높았던 회사로 기억했다.

중소 기획사라고는 하나 자금력도 탄탄하고 소속 연예인에 대한 대우, 스태프들에 대한 대우가 대형 기획사보다 못하지 않았다고.

다만 소속된 연예인들이 많지 않아 굳이 분류하자면 이 시기쯤에는 중소 기획사로 불렸다. 이후에 언래블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서 더 다양한 배우와 가수 등 아티스트들을 영입하면서 중견 정도로 몸집을 불리지만 이건 아직 미래의 일이었다.

“너희가 지금 촬영하고 있는 아이돌 창조 측이랑도 촬영 방향을 바꾸는 것으로 논의 끝났으니까 걱정 말고. 팬 친화적으로 가려던 그룹의 정체성도 바뀌지 않을 거야.”

여기까지는 대부분 어제 들었던 이야기라 표정으로는 잘 듣고 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정신은 간당간당한 상태였다.

다른 멤버들을 슬쩍 봤더니 전부 바짝 쫄아 있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구나 싶기도 했다. 아무래도 대표님인걸.

“오늘 내가 이렇게 자리에 모이자고 한 건 그룹명을 정하려고 해서야.”

이 한마디에 내 정신이 훅하고 돌아왔다.

이름! 그놈의 이름!

“여기 회사에서 생각한 이름 후보 목록이니까 너희들도 보고 마음에 드는 거 있거나 더 좋은 의견 있으면 얘기해봐. 편하게 해도 된다.”

원래 예정대로면 언래블로 무사히 만들어지겠지만, 여기에도 여러 고비가 있었던 것을 난 잊지 않고 있었다. 더군다나 인원이 변경되고 여러 변수가 생긴 상태이니 이름이 무사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대표님이 내민 종이를 하준이 받아들자마자 난 하준 옆에 바짝 붙어서 이름 목록을 훑었다. 제발, 제발 언래블 있어라…!

1. 초월수

2. LAST

3. 파이

4. Unravel

5. OVER SOUND

9. 비상

아니 무슨 죄다 수학자 출신들이세요? 아니면 스파이야?

그룹명 짓는 팀에 쫓아가서 멱살 잡고 싶어진다, 진짜.

이 목록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멤버들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할 만큼 당황스러운 네이밍 센스에 도저히 참을 수 없어진 나는 여론을 조성하기로 마음먹었다.

“전 언래블이 좋은 거 같아요. 엉킨 걸 풀다, 미스터리를 풀다 이런 뜻이니까 팬들한테 흥미 유발도 되고 막 평소에 쓰는 흔한 단어도 아니고.”

“난 오버 사운드도 나쁘지 않은 거 같아.”

그거 아니야, 힘찬아!

“저도 언래블 좋은 거 같아요. 앞으로 그룹 컨셉 잡을 때 어떻게 넣어도 개연성 생길 거 같은데요?”

역시 최애는 최애인 이유가 있었다.

하준이 언래블이라는 이름에 긍정적인 뜻을 표했고 정윤 실장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비상이라는 이름도 느낌 있지 않아?”

“형, 그건 좀 올드한 느낌이지 않을까요…?”

경환이 중얼거리는 걸 들은 세빈이 거부 반응을 보이자 이번엔 대표님이 왜인지 모르겠지만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나는 전혀 이유를 모르겠고 짐작도 안된다고 스스로를 세뇌하며 대표님 쪽은 눈길도 주지 않으려 애썼다.

다행히 아무도 수학자 느낌 나는 아이돌 그룹은 원치 않았던 것 같았다.

각자가 이름을 소리 내어 하나씩 읽어보면서 가장 입에 붙고 느낌이 좋은 것을 찾으려 애썼다.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우리를 지켜보던 실장님이 한마디 보탰다.

“그중에 마음에 드는 게 없으면 직접 의견 줘도 돼. 어디까지나 참고하라고 뽑아온 거니까.”

“네엡….”

다행히도 대표님이랑 실장님 눈치가 보였는지 엉뚱한 드립 치는 멤버도 없었고, 다들 그중에 가장 정상적이고 괜찮아 보이는 이름을 하나씩 골라냈다.

하준이 대표님과 실장님을 잠시 바라보다 우리에게 손짓을 해서 불러 모았고 그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모인 우리는 서로의 눈치를 보다 종이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이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행히도 우리는 팀워크가 꽤 좋은 편인 것 같았다.

“이걸로 말씀드린다?”

“네. 저희는 이게 제일 나을 거 같아요.”

등을 돌린 상태로 우리끼리 수군거렸던 탓이 대표님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정윤 실장님은 우리 마음을 짐작했다는 듯 씩 웃었다.

“정했니? 더 천천히 보고 말해줘도 되는데.”

“저희는 언래블(Unravel)이 제일 좋을 거 같아요.”

승리자의 미소를 짓고 우리 의견을 메모한 정윤 실장님은 팀명 공모전을 열어 팬들에게 의견을 받아볼까 했었지만, 너무 장난스러운 이름이 많을 것 같아 접어두었다고 했다.

나는 예전에 어떤 그룹 이름 공모에서 온갖 드립과 비속어가 난무했던 것을 기억했기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란 거리를 만들 바에야 스스로 만드는 게 가장 무난했다.

“확정되는 이름은 나중에 다시 알려줄게. 너희는 일단 개인 연습하고 있어. 조금 있다가 팀장님이 오늘 일정 알려주실 거야.”

“네!”

언제나 대답은 파이팅 넘치는 우리 멤버들.

여태까지의 하루처럼 연습실에 모여 몸을 풀던 우리는 슬슬 풀어졌던 마음을 다시 한 번 꽉 조였다.

원래 예정되어 있던 프로그램의 내용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뀐 만큼 게시판에는 방송과 기획사에 대한 비난이 판칠 테고, 그 영향이 이제 데뷔를 준비하는 우리들에게도 미칠 게 뻔했다.

그걸 엎고 인지도를 만들려면 그만큼 더 빡세게 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던 나는 데뷔 앨범의 타이틀과 수록곡을 떠올렸다.

방송의 내용이 아예 변경되는 만큼 더 많은 정보를 토대로 티 내지 않으면서 방향을 잘 틀어야 했다.

원래 언래블의 데뷔는 5월이었다.

1차 경연 한 달 후 2차 경연을 준비하고 몇 가지 에피소드를 넘긴 뒤 다음 해 5월에 데뷔했지만, 처음부터 잘 될 수는 없었다.

한여름이 아닌데도 지나치게 청량미 넘치는 미소년들로 포장하려는 무리수를 두었고, 데뷔 얼마 후 휴식기가 끝난 대형 그룹들이 속속들이 복귀하면서 차트 인은커녕 신규 팬의 유입도 없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당시 멤버들의 비주얼과 개인 활동이 있었던 멤버들의 활약으로 겨우 산소호흡기를 달아놓은 수준이었다. 그러다 미니 앨범을 내면서 그룹의 방향을 새로 잡고 그때부터 진정한 데뷔의 시작이라 불리는 시기가 왔었다.

내 목표는 멤버들이 초기 컨셉부터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때 멤버들은 회사가 마냥 무서웠는지 회사가 얘기하면 무조건 알았다고 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주 말도 안 되는 거야 걸렀겠지만.

그걸 위해서는 앨범 제작에 큰 영향권을 가진 A&R 팀을 잡아야 했다.

그 방법을 궁리하던 중 팀장님과 매니저 형이 들어왔고 우리는 우르르 팀장님 근처로 몰려들었다.

“이야, 밥 사줄 때가 아닌데 너희가 나를 반길 때가 있다?”

“에이, 저희는 언제나 팀장님을 반겼죠!”

“입에 침이나 발라라 이것들아.”

다른 멤버들은 모르겠지만 어쩌다 보니 지금의 나는 매니저 형보다 팀장님이 더 친근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더 스스럼없이 말을 걸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생각보다 괜찮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아랫사람이 잘 따른다는 느낌은 생각보다 상급자들이 꽤 좋아하는 분위기여서 내가 군대 생활할 때 잘 써먹던 방법이었다.

군… 대. 후.

잠시간의 현타가 찾아왔지만 두 번째여서 큰 감정동요 없이 잘 눌러둘 수 있었다.

“일단 좀 앉아봐. 너희 올려다보면서 말하기 힘들어.”

어쩌다 보니 나이별로 줄 맞춰서 앉기는 했는데 하준이 세빈을 끌어당겨 앞쪽에 앉혔다. 하준과 영빈, 경환이 키가 제일 크다 보니 뒤에 앉으면 세빈이 가려졌기 때문이었다.

의도치 않게 우리끼리 옹기종기 모여있는 상황이 종종 벌어지다 보니 그게 조금 웃겼는지 팀장님은 매니저 형과 웃으며 말을 꺼냈다.

“오늘 너희 프로필 사진을 찍을 거고 간단하게 홍보용 영상도 찍을 거야.”

“얼굴 부었는데!”

우리 중에 가장 붓기가 잘 안 빠지는 힘찬이 외쳤다.

어제 오랜만에 고기 먹고 저녁에 치킨도 시켜 먹은 데다 잠을 실컷 자서 피부는 뽀송뽀송했지만, 얼굴이 다들 조금씩 부어있었다.

“영상엔 좀 더 부하게 나오는 거 알지? 다행히 스튜디오는 오후에 갈 거니까 오전에 열심히 땀 빼서 부기 빼자, 얘들아.”

팀장님은 웃으면서 폭탄을 떨어트렸고 효과는 굉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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