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이돌의 꽃길을 위해 (19)화 (19/456)

19. Dejavu(5)

무대 위에 서 있는 모든 멤버를 바라보는 대표님의 표정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인자했다.

그 인자한 얼굴 뒤의 모습을 모르는 다른 멤버들은 방심했는지 팀장들의 대답을 부정하는 모습에 움찔했지만,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ON 엔터의 대표, 박정균은 아이돌 창조에서 푸근한 얼굴로 멤버들을 서슴없이 난도질해서 흑화한 안 감독(어떤 농구 만화의 감독님)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그렇게 난도질하고 얻은 언래블 멤버들을 부둥부둥해서 무사히 데뷔까지 잘 이끌었지만, 데뷔 초까지만 해도 멤버들이 대표 앞에만 서면 유난히 더 주눅 들어있었다고.

“질문은 팀 구분 없이 개인으로 하겠습니다. 팀장들만 한발 앞으로 나와주세요.”

[한번 볼까….]

팀원들은 한 발자국 뒤로, 팀장들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긴장했는지 딱딱하게 굳어 보이는 하준과 영빈의 어깨가 안쓰러웠지만 꾹 참고 내 자세를 가다듬었다.

무대에 오르기 전, 멤버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떻게 되든 우리는 열심히 했으니까 기죽지 말자고.

솔직히 말이 쉽지 당장 나도 고개가 자꾸 땅을 향해 갈 것 같았다. 내가 이런데 다른 멤버들은 오죽할까 싶었기에 더 꼿꼿하게 허리를 폈다. 다른 멤버들도 기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일단 인원수로 보면 A팀이 B팀보다 훨씬 선택의 폭이 넓었는데 인원수에 대한 메리트를 인지하고 있었나요, 힘찬 군?”

“…수가 많다는 게 늘 유리한 건 아닙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말해줄 수 있나요? A팀은 이번 경연에서 인원수에 대한 메리트가 없었단 말인가요?”

[춤이 특기고 보컬은 좀처럼 진전이 없다고 했었나.]

힘찬의 보컬을 지나치게 평가절하하는 대표님. 그의 생각을 나타내는 글자들이 귓가에서 웅웅거리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앞으로 나설 뻔했다.

여러 번 연습하고 봐온 스킬 효과였지만, 가까운 사람에게 내려지는 가혹한 평가를 보고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무대의 규모에 따라 안무는 바꿀 수 있지만, 원래 안무에서 절반 가까운 인원이 빠지면 그걸 변형하는 게 힘들어집니다.”

“그러면 안무를 아예 하지 않은 B팀이 더 유리했을 거라는 건가요?”

[무대를 봤을 텐데? 실제 안무를 짜본 사람이 하는 대답치고는….]

글자로 보이는 메시지들의 단점 중 하나가 이거였다.

단순한 글자의 나열에는 감정이 담기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이 아쉬운 건지, 아니면 못마땅한 건지 정확하게 알아채기가 힘들었다.

보편적인 느낌에 따라 판단하고 대응해야 했는데, 사람마다 말하는 화법이 다르다 보니 쉽지 않았다.

“그건 아니지만 하준 형이랑 경환 형이 적절하게 편곡해 준 내용이 아니었다면 안무 짜는 게 더 힘들었을 겁니다.”

“그런가요.”

[멤버들끼리 결속력이 강했던가.]

나는 힘찬의 대답이 아쉬웠다.

힘찬이는 경연을 준비하는 내내 정말 열심히 고민하고 열정적으로 움직였다.

그 모습을 쭉 지켜본 나로서는 방금 전 상황에서 힘찬이 자신의 역량을 어필하는 쪽이 더 점수를 얻기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치게 팀을 생각한 나머지 그걸 다른 사람의 공으로 돌려버린 게 조금 아까웠다.

“우빈 군은 자신의 목소리가 어떤 노래를 할 때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까?”

“개인적으로는 청량한 느낌의 노래나 시즌 송을 제작할 때 조금 더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알고 있기는 한데.]

김우빈 망해라!

시종일관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은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까닥 잘못 말했다가는 지나치게 자기 자신을 포장한다는 느낌을 주거나 내가 너무 한 게 없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그런 질문들.

예를 들면 세빈에게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스스로 오늘 무대에 만족합니까?”

이에 대해 세빈이 부족한 점이 분명 있지만 최선을 다했으니 만족한다고 답변을 했더니 웃으면서 부족한 점이 없도록 조금 더 연습량을 늘리지 그랬냐는 대답을 했다.

[무대에 서야 할 사람이 자신감이 부족한 건 득이 되지 않는데.]

라는 생각 같은 걸 하면서 말이다.

점점 대표님이 얄미워지기 시작했다.

어떤 부하 직원이 ‘밤새 보고서 쓰느라 피곤하지 않냐, 오늘 발표할 수 있겠냐’라는 사장님의 질문에 ‘너 때문에 피곤해 죽을 것 같다’라고 대답할까.

그런 패기는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밖에 못 봤는데.

질문에 대한 멤버들의 답이 대표님의 기준에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지 힐끔거리며 확인한 메시지들은 대부분 어정쩡한 반응이었다.

칭찬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그래도 마음에 든다는 메시지 한두 개 정도는 보이지 않을까 했던 나는 점점 가슴이 답답해졌다.

“지환 군, 데뷔하고 싶나요?”

갑자기 이렇게 직구로 들어온다고?

“네. 저는 꼭 데뷔할 겁니다.”

그래서 나도 똑같이 대답해 줬다.

이런 게 취향이시라면 맞춰드리는 게 인지상정.

“특출난 특기도, 무언가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을 만한 모습도 사실 보이지 않아요.”

[얼마 전에 분란을 만들기도 했고.]

아무래도 이전의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 여전히 회의적인 입장인 듯했다.

팀 하나 데뷔시키고 투자하는 비용을 생각하면 당장 쫓겨나지 않은 게 다행이기도 했지만, 이미 그 부분은 실장님을 통해 말을 했던 내용인데 속으로 꽁해 있다니.

얼마 전에 대리님이 보여준 커뮤니티 반응이 썩 나쁘지 않았던 것을 떠올렸다.

일시적으로 생긴 반응이라 보기에는 생각보다 우호적인 반응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실장 선까지는 커뮤니티 반응이 매일매일 공유될 게 뻔했다.

“저라는 사람이 당장 주목받지는 못해도, 팀의 색을 돋보이게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팀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가도록 꾸준히 노력하고 기다리면 저를 더 드러낼 기회가 올 거라고 믿고요.”

스킬로 강화된 지금의 내 멘탈은 어지간한 독설에 난도질당해도 부러지지 않을 만큼 단단해져 있다. 덕분에 줄곧 머릿속에 정리하고 그려왔던 내 역할과 팀의 방향에 대해 떨지 않고 말할 만큼 진정되어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대표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상태였지만 다른 멤버들과 심사위원들의 시선이 박히고 있다는 게 피부가 따가울 만큼 느껴졌다.

대학교 조별 과제 때 자료조사부터 PPT 발표까지 전부 혼자 해결해야 했던 슬픈 과거가 떠올랐다. 몇십 명 앞에서 낯 팔려가면서도 떨지 않고 잘했던 기특한 나였다.

“대표님도 알고 계신 것처럼 저는 한번 사건이 있었던 멤버입니다. 그렇기에 그때의 잘못을 하준 형의 케어로 깨닫고 지금은 누구보다 팀에 어울리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그래서요?”

“그만큼 하나의 팀이란 무엇인가 크게 깨달았고, 제가 다른 멤버들보다 제가 더 잘할 수 있는 역할, 이 팀에서 맡아야 할 역할을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해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그 해답이 뭐죠?”

짧은 시간이었지만, 병원에서 숙소로 돌아온 날부터 매일같이 멤버들과 최대한 많은 대화를 하려고 노력했다. 고민하고 있는 여러 이야기들 그저 들어주기만 했는데도 멤버들은 한결 안정된 모습들을 보였다.

처음 소현 팀장님이 나를 데려왔을 때 이야기해주었던 포지션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고민하고 생각했다.

내가 이 그룹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내가 가진 강점이 무엇일지를.

“멤버들은 개개인의 색이 뚜렷합니다. 각자 허용되는 음역들로만 멜로디를 그려봤을 때 세빈이 혼자 중간 음역대를 커버한다면 균형감 있는 노래를 소화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제 목소리는 다행히도 멤버들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편이라고, 레슨 때 보컬 트레이너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팀에 존재함으로써 더 다양한 분위기의 곡을 소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생깁니다.

머릿속에서는 몇 번이나 연습하고 생각했던 말. 연습보다 더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다시 다독였다.

“그리고…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내용은 철저하게 비즈니스적인 방향으로 생각했던 내용인데, 말씀드려도 될까요?”

“말해봐요.”

[여차하면 편집하면 되니까.]

다행히 앞으로 할 말에 대해 밑밥을 깐 걸 대표님이 잘 이해한 것 같았다.

“방황하던 멤버가 같은 팀의 도움으로 위로받고 어떻게 팀에 어울리게 되었는가,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서사가 됩니다. 이제 대중은 단순한 겉모습만으로 아이돌에 열광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기준 자체가 높아요.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잘생긴 사람은 너무 많거든요.”

자신을 상품으로 잘 포장해서 팔아야 한다는 건 여전히 어색했고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이제 열흘쯤이나 지났을까? 불과 며칠 전까지 난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하지만 이 포장이 그럴싸했는지 대표님이 조금씩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일단, 이 부분은 편집 요청해야겠네. 지환이가 생각보다 말 잘하네.]

“대중은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에 집중합니다. 어떤 이야기를 갖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보여줄 건지. 그 이야기에 함께 하길 원할 때, 그렇게 대중에서 팬이 되어가겠죠.”

“지환 군은 그 자리보다는 회의실이 어울릴 것 같네요.”

[자기 상황에 대한 파악도 하고 있고, 아이돌 시장에 대한 이해도도 있는 모양이네.]

이 대표 아저씨는 속마음과 겉으로 드러난 말을 다르게 하는 경향이 조금 있는 것 같았다.

혼자 너무 튀어나온 못처럼 행동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심사위원석에 앉아있는 이들은 이미 일주일간의 우리 모습과 오늘의 무대를 본 순간 각자 선택은 이미 끝났을 터였다.

그저 확인해보고 싶은 것들을 확인하기 위해서, 서류에서 본 글자들과 우리가 일치하는지를 보고싶어서 이 자리에 온 게 아닐까.

그 후로 대표님의 질문은 끝이 났고, 다른 세 명의 심사위원은 많은 이야기를 묻지는 않았다.

A&R 팀의 김건욱 실장님 같은 경우에는 작곡과 편곡을 하는 하준과 경환에게 관심이 많았고, 하연수 선배님은 영빈의 목소리가 가진 희소성에 대해 칭찬했지만 이번 무대에서 제대로 살리지 못한 점을 아쉬워했다.

그리고 세빈은 음정이 쉽게 불안정해지는 데 실제 무대에서는 지금보다 몇 배로 흔들릴 테니 연습량을 늘리는 게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의아한 건 하연수 선배님이 김우빈에게는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더니 나를 바라보며 씩 웃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질문이 어느 정도 끝났고, 우리는 여전히 무대 위에 서 있었다.

그런 우리를 두고 정윤 실장님과 다른 심사위원들이 한참동안 무어라 소곤거리더니 우리를 향해 말했다.

“잠시 후에 발표할 테니 지금이라도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은 해주세요.”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어느샌가 세빈이 내 옆에 붙어왔는데 너무 떨고 있어서 손을 잡아주었다. 그걸 또 언제 본 건지 힘찬도 옆에 붙었다.

얘들아 내가 우리 당당하게 있자고 말했잖아….

다행히 키카 큰 영빈과 하준 뒤에 숨어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정윤 실장이 우리 셋을 보았는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지금부터 부르는 멤버들은 최종 멤버가 될 겁니다. 불리지 않은 멤버들은 안타깝지만 다음 기회를 노려주세요.”

갑자기 내가 알고 있던 아이돌 창조의 내용과 달라졌다?

원래는 2차 경연까지 멤버를 고르고 쫓아낸다 만다 투닥거리고 온갖 난리를 치다 겨우 애들이 확정되었었는데 바로 최종 멤버를 부른다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멤버들이 번쩍 고개를 들어 심사위원석을 바라보았지만, 그 자리에 앉아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은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민하준, 김영빈, 백경환이 차례대로 불렸고, 심사위원들이 조금 뜸을 들이더니 강세빈의 이름 역시 호명했다.

분명 스킬을 켜놨는데도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이 아니었는지 내 손을 쥐고 있는 세빈의 손에도 땀이 흥건했다.

“힘찬 군, 춤에 대한 열정을 높이 사서 데뷔 조에 넣었던 것 기억해요?”

“네. 기억합니다.”

“이제 춤만으로는 안됩니다. 알고 있죠?”

“네.”

“앞으로 보컬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문제가 될 수 있어요. 팀장님과 상의하세요.”

“감사합니다!”

경고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힘찬도 통과라는 얘기였다. 그리고 남은 건 우빈과 나.

“…우빈 군은 이 팀에는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라고, 심사위원들의 견해가 일치했습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어째서인지 정윤 실장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싸늘했고, 옆에서는 으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환 군, 연습실이 아닌 사무실로 갈 의향이 있나요?”

“없습니다. 전 무대 위에 있고 싶습니다.”

“전 지금 지환 군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겁니다.”

“괜찮습니다.”

평소 톤으로 돌아온 정윤 실장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지만 그 정도에 흔들릴 내가 아니었다. 아까부터 대표님과 정윤 실장님의 속마음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으니까.

“그럼 어쩔 수 없네. 쫓아낼 수 없으니 같이 가는 수밖에.”

[기특한 녀석]

“네, 감사합니다.”

내내 심사위원들 쪽에서 등 돌린 체 귀만 쫑긋거리던 포잉이 이제 와서야 짐짓 아무렇지 않다는 듯 꼬리를 슬쩍 말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긴장해서 몇 번이나 꼬리를 좌우로 흔들고 귀 끝이 떨리는 걸 봤는데.

아직 눈앞의 사람들이 어려웠던 애들이 마음껏 좋아하지 못하자 하연수 선배님이 나섰다.

“자자, 너희도 이제 각자 정리할 거 정리하고 쉬어야지. 고생했다.”

“그래. 고생했어, 얘들아. 소현 팀장님이 숙소로 데려다주실 거야.”

한쪽에서 내내 우리를 초조하게 바라보던 팀장님이 달려왔고 멤버들을 하나씩 토닥여주었다. 하지만 고개 숙인 우빈을 바라보는 소현 팀장의 눈은 한없이 차가워져 있었다.

“우빈아, 머리를 쓸 거면 더 영리하게 쓰자.”

고개를 치켜든 우빈은 이를 악물더니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팀장님, 우빈이 형한테 왜….”

저런 놈도 형이라고 착한 우리 세빈이가 팀장님에게 주저하며 질문하자, 소현 팀장님은 쓰게 웃으며 나중에 얘기해 준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자자, 오늘은 회식하라고 대표님이 법카 주셨어, 얘들아! 고기 먹자!”

심사위원석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나가고 우리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된 팀장님은 카드 한 장을 꺼내서 흔들어 보였고, 우리는 어느 때보다 더 크게 환호성을 지르며 팀장님을 둘러싸고 방방 뛰었다.

어느 정도 밑그림을 그린 것은 나지만, 난 정말로 김우빈이 그렇게까지 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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