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Dejavu(4)
무대 아래로 내려온 나는 다른 세 명의 멤버들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대에서는 특별한 말 없이 춤과 노래에만 집중 했지만, 무대 아래에서도 심장은 아직도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지켜보는 팬들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우리 4명만으로도 꽉 채울 수 있는 작은 공간이었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첫 무대였다.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서로를 향해 씩 웃는 우리와 그런 우리를 바라보는 B팀.
‘너의 목소리가 들려’ 스킬을 김우빈에게 사용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저 침착한 척하는 얼굴 아래의 진짜 얼굴은 이번 경연이 끝나고 나면 알 수 있을 터.
한 번 사용한 사람에게는 3시간 동안 사용할 수 없다는 제한을 떠올린 나는 최종 결과 발표를 위해 스킬을 아껴두고 있었다.
그리고 B팀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을 그 공간에서, A팀 모두가 곧 시작될 B팀의 무대를 긴장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에 잠긴 무대 위에 각자의 자리를 잡은 영빈과 우빈, 세빈의 얼굴은 비장함과 긴장이 어우러진 무표정을 유지 중이었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B팀도 무수히 많은 연습을 하면서 그들만의 호흡을 맞춰왔을 것이다.
시작이 분란이었지만, 그래도 영빈이 어떻게든 균형을 잡았고,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법을 찾아냈다.
이제 우리가 그 방법을 지켜볼 차례였다.
초반에 확 밝아졌던 A팀의 무대와 달리, B팀은 인트로의 시작과 함께 핀 조명 하나가 우빈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우빈이 깔끔한 목소리로 첫 소절을 시작했다.
“미안해하지 마. 네가 등 돌린 것 정도로 무너지지 않는 나야.”
내가 봤던 아이돌 창조와는 전혀 다르게 팀이 나뉘어서 이 경연의 승패와 앞으로의 진행에 대해 알 수 없었기에, 더 집중하려고 귀를 쫑긋 세웠다.
어떻게 흘러갈지 바짝 긴장하며 듣던 나는 첫 소절이 이어지는 내내 이 멜로디를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편곡 잘했네. 전혀 다른 노래 같아.”
“가사를 알고 있어서 망정이지 앞부분은 전혀 다르네요.”
“확실히 우빈이 형은 목소리가 잘 꽂혀요.”
하준과 경환은 색다른 느낌을 준 앞부분에 감탄했고 힘찬은 우빈이 이끌어가는 1절의 음색과 발음을 주의 깊게 들었다.
그러는 동안 무대에 두 번째 핀 조명이 켜지고 세빈의 파트가 시작됐다.
“네가 버리고 짓밟아도 부서지지 않는 나를 봐. 내가 흘린 눈물의 바다에서 넌 홀로 외로이 떠 있는 섬일 뿐이야. 끝없이 이어진 내 안에서 넌 어디도 갈 수 없어.”
원래는 랩이었던 파트의 멜로디. 발라드풍으로 바꾸는 것보다 새로운 멜로디를 연결하는 쪽을 선택한 것 같았다.
세빈의 목소리는 아직 미성숙한 느낌이 남아있어 중간 음역대의 멜로디가 어울렸는데 그 부분을 편곡한 사람이 잘 캐치한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영빈을 가리키는 핀 조명이 켜진 후, 세빈의 목소리와 우빈, 영빈이 한 음씩 쌓아가는 화음으로 브릿지가 이어졌을 때 내가 느꼈던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경연곡의 앞과 중간중간 추가된 멜로디에 내가 만든 몇 가지 작업물들과 졸업식에 넣었던 패턴이 들어가 있었다. 내가 만들었던 것들과 다르게 여러 마디로 토막 나 곡 중간중간 들어가서 바로 깨닫지 못했지만 브릿지가 끝나갈 때쯤에는 확신이 들었다.
“이게 여기서 나오네.”
“지환아, 왜?”
“아, 아니에요. 중간의 멜로디를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아서요.”
다시 이어질 영빈의 파트에 집중하기 위해 어색한 웃음으로 시선을 무대에 고정하자 하준도 별말 없이 다시 무대를 바라보았다.
고음을 잘 낸다고 훌륭한 가수는 아니지만 훌륭한 가수들은 고음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잘 썼다. 그리고 영빈은 그런 면에서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마다 음역대가 다르다 보니 영빈에게 말도 안 되는 저음 파트의 노래를 시키면 흑역사가 발생하겠지만, 다행히 이 곡은 중간 음역에 주 멜로디를 넣고 고음 파트와 랩 파트로 멋들어지게 장식한 노래였다.
영빈은 세빈이 받쳐주고 우빈이 쌓아준 음 위에 자신의 목소리를 더해 작은 무대를 가득 채울 소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 노래의 원곡을 아는 사람들을 설득할만한 풍부한 이야기를 전달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대부분 표정을 잘 감췄지만 하연수 선배님의 얼굴에 순간 아쉬움이 스치고 지나갔고, 그걸 놓치지 않고 본 나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한때 언래블이 과거 유명했던 곡을 재해석하는 프로그램에 나갔던 적이 있었다. 어느 정도 인지도가 쌓인 상태의 출연이었지만 하필 상대는 더 큰 팬덤을 갖고 있는 아이돌이었다
거기에 더해 곡의 원작자는 아이돌이라 절절한 이별 노래를 소화하지 못할 것이라 여겨, 우리 애들이 곡을 부르는 것에 대해 썩 좋지 못한 발언을 해서 더 난리가 났었다.
물론 우리 애들은 훌륭하게 무대를 마쳤다. 혼자였다면 경험이 부족했을 수 있었겠지만, 4명이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는 파트를 나누고 자기들의 이야기를 녹여 원작자의 사과까지 받아냈던 뿌듯한 일이었다.
그때처럼 저 노래를 적어도 4명 이상이 불렀다면 우리가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위협적이었을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도 차라리 세빈이 중간중간 영빈의 목소리를 받쳐줬다면 노래가 더 잘 살았을 텐데, 영빈과 주로 화음을 맞추는 건 우빈이었다.
우빈의 목소리는 너무 정직했다. 딱 떨어지는 느낌을 주는 목소리가 메인일 때는 듣기 부담 없고 좋았지만 영빈의 목소리와 합이 좋지 못했다.
저건 우빈의 욕심이었던 것 같았다.
그제서야 왜 포잉이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잘하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B팀의 무대가 모두 끝나고 옆에서 주먹을 꽉 쥐고 있던 힘찬의 어깨를 툭 쳤다.
“찬아, 힘 빼.”
“어?”
“그 주먹으로 누굴 치려고.”
그제서야 자기가 주먹을 쥐고 있었던 사실을 깨달은 힘찬은 푸흐, 하고 숨을 깊게 내쉬더니 손을 바지에 쓱쓱 문질러 닦았다.
“저 곡을 저렇게 잔잔하게도 부를 수 있구나.”
“편곡 누가 했을까? 되게 자연스러웠는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도중, B팀도 무대를 내려왔고 우리는 각자의 방식대로 고생하고 온 또 다른 우리 팀을 응원했다.
무대가 아쉬웠던지 침울해하는 세빈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잘했다고 여러 번 용기를 북돋아 줬다. 춤을 특기로 들어왔던 세빈은 연습생 생활을 하는 것도, 제대로 보컬 트레이닝을 받은 것도 ON 엔터가 처음이라고 했다.
제대로 노래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개념조차 없었던 세빈이 지금은 누구보다 무섭게 트레이너 선생님을 쫓아다니며 노력하고 있었고, 모든 멤버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누구도 완벽하게 만족할 무대를 하지 못했기에 그런 세빈의 마음을 짐작한 다른 멤버들도 침울한 막내를 칭찬하며 달래주었다.
B팀을 이끌었던 영빈은 되려 침착한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조금 떨어져 하준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기에 방해하지 않았다.
다만, 우빈이 별로 긴장한 내색 없이 경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은 조금 의외였다. 뭔가 다른 소스라도 알고 있는 걸까?
호기심이 치밀었지만 조금 후에 있을 심사위원들의 평가를 들을 때를 위해 다시 한번 스킬 사용을 억눌렀다.
“A팀, B팀 둘 다 무대로 올라갈게요.”
우리끼리 이미 지나간 무대에 대해 서로 아쉬운 점과 잘한 점을 되새기며 초조한 마음을 감추고 있는 그때, 모두를 무대로 부르는 목소리에 겨우 풀렸던 긴장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A팀, B팀 다 고생 많았어. 일주일 안에 곡 하나 새로 만지고 배우려니 힘들었지?”
사람 좋게 웃으면서 말을 건네는 대표님의 얼굴은 저렇게 인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 얼굴에 속아 눈물을 흘린 사람이 한둘이 아님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양 팀이 이 경연의 본질을 해석했던 방향이 정반대인 것 같아. 무대를 만들어가던 방식도 무대 분위기도 확실히 달랐지. 각 팀장들이 이 부분을 조금 설명 해주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사실상 저 설명은 심사위원들을 위한 게 아닌 방송을 보고 있을 시청자들을 위한 멘트였다. 이미 소현 팀장이랑 우진 매니저가 중간에 우리 영상이랑 회사 내에서 무얼 하는지 다 파악하고 정리해서 올렸을 것이 뻔했다.
“A팀은 원곡이 너무 대중적이기 때문에 그 색을 다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원곡에 A팀의 분위기를 추가하는 게 더 밸런스가 맞을 거라 판단해서 편곡의 방향을 그렇게 잡았습니다.”
“B팀에서는, 경연곡 자체가 이미 너무 대중적이라 누가 들어도 원곡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희들의 모습을 보여주기엔 맞지 않는 옷이라고 생각했고, 포장을 벗겨서 핵심 멜로디만 취하고 그 안에 B팀의 모습을 담는 방향으로 편곡했습니다.”
팀장 두 명이 매일 저녁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는지 궁금했는데 아무래도 질문에 대응하려고 미리 연습했던 모양이었다.
다행히 두 사람 모두 과하게 떨지 않고 침착하게 각자의 팀에 대해 설명했다.
대표님의 질문을 받은 실장님이 입을 열었다. 날카롭게 눈이 빛나는 게 왠지 목덜미가 오싹했다.
“이 경연은 각 팀이 회사와 얼마나 조화롭게 상호 작용을 하느냐, 모든 멤버가 각자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느냐를 중점 요소로 보고 있는데. 각 팀장들이 보기에 자기 팀원들은 모두 자기 역할을 잘 수행했나요?”
“네. 모두 자기가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초반엔 의견 조율이 조금 힘들었지만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각자 자기 몫을 충분히 해나갔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동안 꾹 참았던 타이밍이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사용.’
처음, 얼떨결에 사용해놓고 혼자 헤매던 그때의 나와는 다르다.
나는 이 대회에서 쫓겨나는 내 운명을 바꾸기 위해 이번 주 내내 연습에 매진하는 한편 틈틈이 내가 가진 스킬들을 사용하고 꺼보고 하면서 효과를 비교해왔다.
그 결과 속마음이 떠오르는 이 해괴한 스킬을 동시에 6명에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고, 인원수가 많고 장소가 좁을수록 어떤 사람이 어떤 말을 했는지 혼란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요? 제가 보기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영빈이는 다 안고 가고 싶은 것 같은데 욕심이지.]
정윤 실장으로부터 다시 말할 타이밍을 건네받은 대표님이 공격수로서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내 심장도 덜컹하는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