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냇물이 향하는 곳 (2) >
도르곤이 회군하고 나자, 홀로 지르갈랑을 추격하는 임무를 떠안게 된 아민이었다.
이미 궁지에 몰린 쥐가 되어버린 지르갈랑이 냅다 남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으니 그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뻔했다.
"지르갈랑 놈이 조선으로 도망간다!"
아민은 눈에 불을 켜고 지르갈랑의 뒤를 쫓았다.
같은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형제간이었지만, 이미 남보다 못해져버린 사이다.
아직까지 지르갈랑의 휘하에 남아있는 양람기들을 모조리 빼앗아오기 위해서라도 그는 죽어주어야 했다.
"겨우 살아남기 위해 한다는 짓이 조선에 항복하는 거라니, 실로 비루한 놈이 아닌가!"
조선과 몰래 손잡고 사르후다를 죽여버린 뒤 닝구타를 장악한 아민이 할말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것은 지르갈랑 휘하에 있는 양람기들 또한 느꼈던 감상임이 분명했다.
지르갈랑이 도주하는 동안 대열을 빠져나와 아민에게 합류하는 양람기 병사들은 점점 늘어만 갔다.
퍼알라에서 직선으로 쭉 내려오면 압록강이 있고, 그너머에는 조선의 삭주가 있다.
아민은 그 전에 지르갈랑을 따라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낙오자도 신경쓰지 않고 도주하는 지르갈랑과 계속해서 중간중간 병력을 주워담는 아민의 속도가 같을 수는 없었다.
결국 지르갈랑이 압록강을 건넜다는 말을 듣자 아민은 급히 조선군에게 사람을 보냈다.
"내 아우 지르갈랑이 조정에 죄를 지어 그리로 도망쳐갔으니, 조선은 이웃의 도리를 따라 속히 그를 속환하라!"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임경업은 코웃음을 쳤다.
"흥, 너희 오랑캐들이 무슨 권리로 조선에 이래라 저래라 한단 말이냐?"
큰소리치던 지르갈랑은 아민이 가까이 왔다는 이야기를 듣자 조선군에 찰싹 달라붙었다.
조정에서야 아민과의 밀약을 익히 알고 있던 터였지만, 그러나 이곳 청북에서 제자리만 열심히 지키고 있던 임경업으로선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가 받은 명령은 오로지 심기원의 공작에 협조하라는 것 뿐이었다.
"이 조선놈들이."
아민이 조선 쪽을 노려보며 내뱉었다.
조선을 10할 신뢰하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르갈랑을 돌려달라는 말을 단칼에 거절할줄은 몰랐다.
"총관, 조선과의 개시가 없다면 우리는 모두 굶어죽고 말 것입니다. 지르갈랑은 어차피 군대를 대부분 잃고 도망간 터인데 굳이 더 다툴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차라리 이자원에게 이를 알리고 신의를 저버렸음을 꾸짖음만 못할 것입니다."
아민은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도르곤이 지르갈랑을 놓치면 가만히 놔두지 않겠다며 엄포 놓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지르갈랑이 조선과 무슨 밀약을 맺었는지 추궁해보았자 이자원은 발뺌할 것이고, 그 사이 지르갈랑은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오리무중한 상태가 될 것이 뻔했다.
부하들이 말한 것처럼 조선과의 교역이 아쉬운 아민은 모른 척 넘어가야 할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그리되면 도르곤이 책임 소재를 물었을 때 할말이 없어진다.
"그렇기에 우리가 지르갈랑을 치는 시늉이라도 해야한다. 잡으면 더욱 좋고 말이지."
의외로 조선군을 공격함으로써 생기는 마찰은 별것 아닐지도 모른다.
발뺌은 이자원만 할줄 아는 것이 아니다.
역적이 조선땅으로 들어간 까닭에 조선을 위해서라도 이를 토벌하려 군사를 일으켰는데, 웬일인지 조선군이 역적을 돕기에 어쩔 수 없이 싸움을 벌였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이냐─.
"우리는 역적 지르갈랑을 잡는다! 그래야 나중에 할말이 있지 않겠느냐!"
아민의 명령에 닝구타에서부터 나아온 수천 군사들과 항복한 양람기 군사들이 일제히 압록강을 건넜다.
비록 계절이 겨울은 아니었지만 인근 수풍호에서 흘러나오는 압록강 상류의 물길은 그런대로 건널만 했다.
지르갈랑과 임경업의 연합군은 그런 아민의 행태를 똑똑히 관찰하고 있었다.
"강을 건너는 지금 들이쳐야 하오!"
"당신들도 건너와봐서 알겠지만 강이 제 이점을 다하지 못하는 상황이오. 오히려 삭주는 지형이 험난하니 뒤로 물러나서 시간을 끄는 편이 낫소."
임경업의 판단은 적확했다.
압록강을 건넌 아민의 군대는 제대로 진격하지 못하고 산발적인 교전만을 벌여야 했다.
아민과 지르갈랑, 임경업이 지리한 싸움을 지속하고 있을 때쯤, 서쪽에서 싸움의 종막을 알리는 소식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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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문(柵門)은 본래 조선과 명의 국경 관문을 일컫는 말로, 성종 임금 즈음까지는 압록강에서 180여 리나 떨어진 연산관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 사이는 동팔참(東八站) 지역이라 하여 한때는 누구의 관리도 제대로 받지 않는 무주공산이었으나, 여진이 성장하며 책문이 봉황성으로 옮겨오고, 또한 압록강변에까지 보루를 쌓으면서 방비가 강화되었다.
지금 오삼계가 머무르고 있는 진강성(鎭江城)도, 원대에 관리의 치소가 있던 곳을 만력 연간에 증축한 성이었다.
다르게는 구련성(九連城)으로도 불리는데 명과의 육로가 끊기지 전까진 조선의 사행이 압록강을 넘어 이곳을 주로 거쳐갔다.
"연산관까지는 어렵겠지?"
오삼계가 툭 물음을 던졌다.
온갖 혼란상으로 인해 성보(城堡)는 텅 비어있던지라 싸움 한번 없이 취한 것은 잘된 일이었지만, 이젠 어디를 공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지를 생각해보아야했다.
그렇다면 먼저 얻었을 때 가장 이득이 좋은 곳은 요양의 턱 밑에 위치한 연산관이었다.
"요양의 군병도 싸움에 가담했으니 어쩌면 연산관도 비어있지 않겠습니까?"
부하의 말에도 오삼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압록강에 적병이 있었으면 모르겠지만 쥐새끼 한마리 안보이잖나. 여기 진강성도 제법 요지인데 전부 빠져나갔어. 아마 지킬 곳만 확실히 지키자는 속셈이겠지."
연산관은 요양의 군사가 출동하기 쉽고, 험준한 고원에 위치해있어 방어하기가 좋은 요충지였다.
자신이 도르곤이라면 내전을 벌일 때 벌이더라도 절대 연산관을 비워놓지는 않는다.
"괜히 머리를 들이밀었다가 큰코나 다치겠지."
오삼계는 혀를 쯧쯧 찼다.
가도군은 병력이 많지도 않고, 아버지와 외숙부가 이끌고 있는 금주나 영원위의 병력처럼 정예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오삼계가 믿을 것은 청 병력의 공백 뿐이었으니, 거리부터 멀고 함락이 쉽지 않을 연산관을 떨어트리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수였다.
"허면 진강성을 얻은 것으로 만족하시지요. 이것도 나름 공이라면 공 아니겠습니까?"
부하가 슬쩍 묻자 오삼계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감히 총병의 명을 거역하는 것인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결국 더 큰 공을 세울 기회를 노리겠다는 뜻이었다.
기껏 압록강변에 붙은 진강성 하나를 얻었다고 떠들어봐야 무슨 대단한 칭송을 듣겠는가. 방어하기가 어려우니 다시 비우라는 핀잔이나 돌아올 것이다.
이자원의 명령은 강변의 진강성이 아니라 진강 지역 전부를 얻으라는 것이었다.
"허면 봉황성 밖에 없지 않습니까?"
오삼계의 생각도 그랬다.
봉황성이야말로 진강을 통제하는 핵심 지역이었으니까.
게다가 지키는 병력도 별로 없었으니 저쪽에 지원군만 없다면 건드려볼만 했다.
"그랬지. 그런데 정말 봉황성을 쉽게 얻을 수 있을까?"
오삼계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걸 위해서 그 조선인 부총병이 열심히 배를 끌고 난리를 치고 있지 않습니까?"
부총병 심기원을 말함이다.
하지만 오삼계는 그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청의 이목을 잠시 끌 수는 있겠지만 저쪽에도 자신만큼이나 머리를 굴릴줄 아는 자가 있다면······.
"부총병 대인, 부총병 대인!"
바깥에서 척후가 다급한 목소리로 달려왔다.
"오랑캐가 군사를 돌려 회군했다고 합니다!"
퍼알라에서 되돌아가는 도르곤의 군세를 포착했다는 척후의 말에 오삼계는 황급히 물었다.
"뭣이? 어디로 말이냐? 혹시 이곳 진강성은 아니겠지?"
그렇다면 빨리 성을 비우고 다시 압록강 너머로 물러가야한다.
그러나 곧 척후의 대답에 오삼계는 쾌재를 불렀다.
"이 오랑캐 놈들이 걸려들었구나!"
도르곤은 지금 요동 남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채 심기원을 막기 위해 요동의 해안가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앞을 막을 자는 없다! 전군 진격하라! 봉황성을 떨어트리고 진강 전역을 장악한다!"
오삼계가 외치자 진강성에 머무르고 있던 가도군이 분주히 움직였다.
오삼계와 도르곤이 제 이익을 위해 머리를 굴린 끝에, 봉황성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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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삼계가 봉황성을 함락하자 심양은 난리가 났다.
군기대신 범문정은 굳은 얼굴로 다시 진강 일원을 수복하기 위해 도르곤에게 움직일 것을 명했지만, 도르곤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내각의 일을 맡아보는 대학사가 군기대신까지 자임하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 아니겠는가?"
당장 범문정은 도르곤이 가하는 정치적 공세부터 막아내야 할 판이었다.
강덕제 쇼서는 필사적으로 범문정에게 힘을 실었지만 한계가 있었다.
범문정은 아민, 그리고 정홍기와 양홍기를 장악한 다이샨의 아들들과 연계하여 상황을 타개하려 노력했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다.
"지금 중앙에 들어가 열심히 범문정이나 어린애의 방패가 되어 싸우란 말인가?"
아민은 권력투쟁으로 인해 몰락했던 자신의 과거를 기억했다.
이미 반쪽짜리나마 양람기마저 되찾았으니 더이상 얻을 것도 없을 정치싸움에 끼는 것이 아니라, 근거지인 닝구타로 돌아가 내실을 다지고자 했다.
적당한 명분을 찾은 아민은 곧장 삭주에서 철군했다.
봉황성을 함락하고 진강 일대를 장악한 오삼계는 이곳에서 머무르며 압록강을 통해 조선의 지원을 받아 방비를 굳히는데 주력했다.
이윽고 저 멀리 몽골에서부터 호거가 에제이 칸을 내세워 할거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가 하면, 명나라의 혼란은 끊이지 않았다.
빈발하는 반란도 반란이거니와, 알 수 없는 경로로 전해진 유구에 관한 소식이 가히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일본이 감히 대명의 번국을 점령해 그 왕을 신하로 삼았다는 말은 흔들리고 있는 천조질서에 끼얹어진 또 하나의 모욕이었다.
노한 숭정제가 즉각 일본에 항의하고, 유구에서 오는 모든 조공을 차단했지만 실질적으로 그 이상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없었다.
막부는 이 예상치 못한 사태에 조선과의 교역을 늘리고자 애썼다. 조선의 십자군이 바다를 건너 일본을 침공할 것이라는 낭설은 여기에 묻혀 잠잠해졌다.
키리시탄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북방을 향해 나아가고, VOC의 배가 조선과 교역을 텄음을 암스테르담에 전하기 위해 출발했다.
호수에 던진 돌이 일으킨 파문은 곧 세계를 퍼져나가,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역사를 바꿀 것이다.
그런 거시적인 변화에 비하면, 어쩌면 사소할지 모르는─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할 뒤틀림이 지금 일어나고 있었다.
"이 사람, 왜 이리 늦게 왔는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문 앞에 서있는 장인의 모습에 이자원은 차분히 답했다.
"평소보다 일찍 퇴청한 것이오이다."
"이런 때에도 무심한 사람 같으니."
그러나 진강 함락으로 인해 일더미가 쏟아지는데다 병조참판과 훈련대장을 겸하고 있는 이자원이었으니, 그가 설령 가정적이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해도 별 수 없었을 것이다.
'벌써 산달인가.'
조선에 떨어진지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미래를 위해 준비해야할 것은 너무나 많았고, 과거를 돌아볼 틈 따위는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막상 유주의 출산이 임박하자 이자원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행복했지만, 그렇기에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었다.
그때 강석기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적비가 기척없이 다가왔다.
"대장 영감."
"무슨 일이냐?"
이자원이 묻자 적비가 힐끔 안방을 훔쳐보며 답했다.
"박승길, 그 노인이 기운을 차렸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