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냇물이 향하는 곳 (1) >
시간을 조금 돌려 지르갈랑이 패퇴하기 전.
조선의 조정에서는 속속 들어오는 정보에 심도깊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저 호거가 몽골 원정을 위해 나섰다고만 파악하고 있던 임금 또한 이쯤되자 청 내부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것이다.
"지금이라도 청을 공격할 수는 없겠는가?"
그러나 모든 신료들이 앞장서서 반대했다.
"전하, 아직 내실을 다지지 못했거늘 어찌 오랑캐를 칠 수 있겠나이까."
"오랑캐들이 산산히 흩어져 서로 원수가 되어 물어뜯고 있다면 모르되, 지금으로선 힘들 것이옵니다."
"당장 마련할 수 있는 군량도 없사옵니다."
영의정 최명길을 비롯한 고관들부터 호조참판 김육을 필두로 한 실무 관료들까지.
그리고 이자원과 신경진 등의 무관들까지 시기가 좋지 않다고 간언하자 임금은 뜻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병조참판, 아니 훈련대장. 정말 방법이 없겠는가?"
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다.
"어영청 쪽에서는 지금이 청을 격멸할, 두번 다시 없는 기회라고 하였다."
봉림대군이 임금의 역성을 들고 나서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영중군 이완은 능력있고 노련한 장수이니 그에게 하문하여 보시옵소서. 도제조인 대군의 말과는 다를 것이옵니다."
청의 내전은 미친듯이 몰아치고 있다.
막 전력을 비축하고 있는 조선이 무리하게 움직였다가 청의 내전이 불시에 끝나버린다면, 그간 쌓아놓은 노력이 무색해져 버릴 것이다.
이완도 이자원의 생각과 같을 터였다.
"봉림대군이 장재(將材)라 하나 전쟁은 책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옵니다. 모쪼록 전장을 겪어본 신이나 좌상, 어영중군의 간언을 들어주소서."
"심양을 직공하는 것은 나도 어려운 것을 안다. 하지만 정말, 청의 영토 한조각도 얻을 수 없겠는가?"
임금은 이상하리만치 간절해보였다.
그 어조에 문득 이자원은 고개를 들어 용안(龍顔)을 바라보았다.
"······수라를 제대로 들고 계시옵니까."
"밥알이 모래를 씹는 것 같구나."
세간에서는 한번에 신하들을 쓸어버린 철혈(鐵血)의 군주라 수군거리고 있을지는 모르나, 이자원이 보기에는 세자 시절부터 조금 감상적인 기질이 있어보이던 임금이다.
"나는 하루라도 일찍 성과를 보고 싶다."
부왕을 먼저 떠나보낸 것이 그에게 심적인 충격을 준 것인지, 약간의 희망에도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임금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런 것에 조선의 운명을 걸수는 없다.'
그런 도박은 기야하찬을 지원하라는 명 정도로 충분하다.
게다가 자신의 관할에서 벗어난 어영청이라면 불필요한 확전(擴戰)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영청은 오군영의 일원으로, 북벌의 핵심이옵니다. 어찌될지 모르는 싸움에 쉬이 파견할 수는 없사옵니다."
"그러한가."
임금이 한탄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자원은 덧붙여 말했다.
"하오나 전하께서 조금이라도 대업에 가까워지길 원하시는 마음을 어찌 모르겠나이까. 신이 방안을 한번 궁리해보겠나이다."
이자원의 말에 임금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역시 훈련대장이구나. 무슨 방법이 있는 것이겠지?"
"성공할지 못할지는 알 수가 없사옵니다."
그러나 이자원이 입장을 선회했다는 사실만 해도 임금으로서는 희소식이었다.
"내 그대만 믿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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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기원이 이자원에게 받은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내전 중 밀리는 쪽에게 접촉해 포섭을 시도할 것.'
심기원이 보기엔 별로 가능성이 없는 소리였다.
아무리 그래도 저 오랑캐들이 조선을 업신여긴지가 오래인데 쉬이 이쪽에 투항하겠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자원은 간단하게 그 이유를 적어놓았다.
'실패해도 상대측에게 숙청의 명분을 줄 수 있다.'
지는 쪽은 항복하고 나면 반드시 조선과 접촉했다는 사실이 알려질 것이고, 항복을 받아들인 측에서도 좋은 숙청의 명분이 될 것이다.
때문에 오히려 죽기살기로 싸우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심기원은 그 어떤 관대한 조건이든 모두 달아 제시해보라는 이자원의 명령에, 퍼알라로 도망가있던 지르갈랑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의외로 이것은 잘 먹혀 들어갔다.
"지르갈랑이 밤새 포위를 뚫고 조선 방향으로 달아났습니다!"
퍼알라에 고립되어 있던 지르갈랑은 끝내 결단을 내렸다.
양람기가 붕괴되어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조선에서 재기를 도모해보고자 한 것이다.
한편 명목상으로나마 흥경에 있는 두두의 중재를 받아들여 포위만을 유지하고 있던 도르곤과 아민군은 불시의 탈출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서둘러 쫓아라! 이미 군세가 반절 이상 꺾여나갔을 뿐더러, 그나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할 놈들이다! 화근을 뿌리 뽑아야한다!"
이렇게 질서없는 후퇴를 감행하고 있다면 반드시 섬멸이 가능하다.
도르곤은 호거의 오른팔이었던 그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예, 전하!"
양백기의 구사 어전들은 곧장 그 명을 받들어 지르갈랑을 추격하려 할 때였다.
그러나 곧 그에게 전해져온 급보에 도르곤은 침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가, 가도가 움직였습니다!"
"뭣이?"
가도는 이때까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싸움이 벌어졌다 한들 조선이나 가도가 군사 행동을 보일 여지는 없었으니 말이다.
조선 내부의 사정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어디를 공격했다 하더냐?"
"그것이······ 배 수십 척을 동원하여 요동의 돌출된 해안선을 따라 약탈을 벌일 것으로 보이옵니다. 한께서는 지르갈랑의 정리를 아민에게 맡기고 급히 회군하여 이들을 막으라 하셨습니다."
보고를 들은 도르곤은 생각에 잠겼다.
"기껏 군사를 일으켜놓고 하는 짓이 약탈을 벌이는 것이라."
모문룡이나 심세괴 시절의 가도군은 도적떼나 다름이 없었기에 강덕제가, 그리고 그 머리 노릇을 하는 범문정은 충분히 그렇게 판단할만했다.
그러나 도르곤은 지금의 가도 총병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이자원."
그라면 이렇게 티나게 움직일까?
"우리의 눈을 돌리기 위한 속임수다."
도르곤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렇다면 진짜로 노리는 곳은 어디일까.
"진강(鎭江)이겠군."
진강은 곧 오늘날 중국의 국경 도시인 단둥 일대로, 고구려 시절에는 봉황성과 박작성 등이 있던 자리다.
명나라 시절에도 책문(柵門) 등의 관문이 있어 요동도사가 관장했는데, 모문룡이 잠시 이곳에 들어앉아 근거지로 삼았다가 곧 청에게 빼앗기고 가도로 도망갔다.
지금은 중심지인 봉황성(鳳凰城)의 성장(城長)이 맡고 있는 지역이었다.
"그렇다면 서둘러 구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봉황성에 소수 한군(漢軍)이 있다하나 막아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청의 주력은 어디까지나 만주인과 몽골인으로 구성된 팔기다.
그러나 몽골 원정과 대명 전선, 그리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내전에 전부 동원되고 있는 판이니, 봉황성에 남아있는 병력은 어느 쪽에도 서지 않은 일부 한인들에 불과했다.
만약 도르곤의 예측이 맞다면 가도나 조선의 공세를 막아내기란 여간 난망한 일이 아닐 것이 뻔했다.
"아니, 우리는 한의 명령대로 요동을 들쑤시는 벌레들을 잡으러 간다."
도르곤은 딱 잘라 말했다.
"저, 전하."
"이것은 황명이라고는 하나 실질적으로는 군기대신인 범문정의 명이다. 그가 엉뚱한 판단을 내려 지르갈랑까지 놓치고, 진강까지 함몰된다면 내가 손해볼 것이 무어냐?"
"······."
도르곤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심양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며 측근인 수크사하는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우섭정왕께서도 끝내 이 길을 고르셨구나.'
대청의 앞날보다 권력을 선택한 호거를 몰아내고자 벌인 거사였으나, 도르곤마저 결국 소극적으로나마 호거와 다를바없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먼저 뒤통수를 친 쪽은 범문정이긴 했지만 착잡한 심정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르곤은 아민 쪽에 사람을 보내 외쳤다.
"닝구타 총관에게 반드시 지르갈랑을 쫓으라고 해라! 단 한 놈이라도 놓치면 반드시 책임을 묻겠다고!"
도르곤은 양백기를 이끌고 요동반도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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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격서(聲東擊西)의 책략으로 청을 휩쓸어놓을 것이다. 심기원은 배를 끌고 해안가를 공략하며 청의 시선을 잡아끌어라. 반면 오삼계는 조선 도원수 유림의 지원을 받아 압록강을 넘어 진강을 공략하라!"
이자원은 그렇게 명령을 내렸다.
결코 물러서지 말라는 명 따위는 내리지 않았다.
'오삼계는 눈치가 빠르고 교활한 놈이다. 질만한 전투는 절대 하지 않겠지.'
진강에 청군의 방비가 튼튼하다면 반드시 싸우는 척만 하다가 돌아온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제 공적을 위해서라도 진강을 함락시킬 것이다.
"조선에서 요동으로 나아가는 관문이니 이곳을 빼앗아놓으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압록강이라는 천연 방어선 대신 진강을 국경으로 삼는 것은 방어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북벌이 정말로 하고자 한다면, 조선군은 진강을 거치지 않고는 진격할 수 없다.
이자원이 보았을 때 이것이야말로 조선이 이 내란에서 얻을 수 있는 최선이었다.
"병참, 나는 아직까지 가도군이 미덥지가 않소. 그들이 과연 앞장서서 열심히 싸우겠소?"
옆에 앉아있던 봉림대군이 슬며시 딴지를 걸었다.
이참에 대대적으로 북벌을 하자 주장하던 그였기에 진강만을 취하자는 이자원의 제안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부하인 이완 또한 이자원의 입장에 힘을 실어주자 그로서도 거세게 반발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어영청을 보내시지요, 전하. 반드시 진강을 조선의 발판으로 삼을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도성에서 압록강까지 어영청을 보내자면 적지 않은 시일과 군량이 소모될 것이니 적절치 않사오이다, 대군 대감."
"그래, 이미 결정한 사안이 아니냐. 네가 어영청을 맡아 애정을 많이 쏟고 있는 것은 알지만, 이번에는 가도군에 맡길 것이다. 영원 총병의 아들이 제법 명장이라 하니, 잘해내지 않겠느냐."
임금은 부드럽게 봉림대군을 달랬다.
그러나 임금과 달리 이자원은 대군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영청을 보낸다면 그들은 반드시 싸워서 이기는 수밖에 없다.'
어영청을 파병한다면 봉림대군의 정치적 명운이 어영청에 걸려버리게 되고, 따라서 그들은 쉽게 후퇴하지 못한다.
언제든 미련없이 물러날 수 있는 오삼계와는 입장이 다른 것이다.
수많은 부침을 겪고 완숙하여 중흥의 명군이 된 원래 역사의 효종과, 눈 앞의 치기어린 봉림대군은 다른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경험이 다르고, 생각의 깊이가 다르다.
만약, 정말 만약 아직 설익은 봉림대군이 전면에 나서는 일이 생긴다면······.
'결심을 해야하겠지.'
===
"앞에 조선군이 있다고?"
퍼알라에서 탈출한 지르갈랑은 부리나케 남쪽을 향해 달렸다.
중간중간 낙오되는 병사들도 많았지만 그들을 데려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저만치 멀리 앞서가던 호로호이와 양샨이 사람을 보내와 사실을 알리자 지르갈랑은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모두 전투 태세를 갖추어라!"
이것이 조선의 계략이라면 꼼짝없이 다 죽는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곱게 가주지는 않으리라.
그리 결심한 지르갈랑이었으나, 막상 도착하고 보니 분위기가 조금 요상했다.
일촉즉발의 긴장되고 팽팽한 공기라기보다는, 어째 서로 소 닭 보듯 어색하고 미묘한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때 조선으로부터 장수 하나가 나아와와 말했다.
"그대가 청나라 정친왕이라 일컫는 자요?"
"그렇다."
정친왕이라 일컫는 자라니.
지르갈랑은 기분이 나빴지만 자신들도 한조(漢朝, 명나라)의 작위를 일컬을 때는 반드시 가짜라는 뜻으로 僞(거짓 위)자를 덧붙이지 않는가.
"나는 조선국 부원수 겸 청북방어사 임경업이오. 당신들이 섬으로 들어가기까지 민생에 폐를 끼치지 않도록 도우러 왔소."
말이 돕는다는 것이지 실질적으로 감시다.
지르갈랑은 노해서 외쳤다.
"흥, 웃기는 소리로군. 우리에게 털끝 하나 간섭하려 든다면 즉시 조선군과 먼저 싸울 것이다!"
그는 사세가 급해 제안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조선의 신하 노릇을 할 생각은 없었다.
다시 청에 틈이 생길 때까지 기다렸다 돌아갈 마음 뿐.
"아민이 우리군을 추격해 조선 경내로 들어왔습니다! 불과 10리 거리입니다!"
"이런 제기랄."
지르갈랑이 욕설을 뇌까렸다.
그는 잠시 입을 떨더니 임경업을 보며 말했다.
"당연히 조선이 우리를 도와주겠지?"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그리 하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