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냇물이 향하는 곳 (3) >
- 으아앙!
적비가 이자원에게 보고하던 바로 그때.
안방에서 새로운 생명이 내지르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나, 나왔구나!”
이리로 돌아오던 강석기가 다급히 안방을 향해 달려갔다.
이자원 또한 마찬가지였다.
"잠시만 기다리도록."
이자원은 적비에게 말했다.
우선은 아내와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자원이 방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서자 땀에 흠뻑 젖은 유주와 산파(産婆) 노릇하기 위해 파견된 의녀(醫女)들이 보였다.
"아들일세, 아들!"
강석기가 갓 태어난 아기를 안아들고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산모와 아기 양쪽 모두 건강했다.
"······오셨군요."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소."
현대였다면 옆에서 같이 손이라도 잡아주는 편이 좋았겠지만, 위생에 취약한 이 시대 출산 현장에선 함부로 드나드는 것을 삼가야만 했다.
"아이 이름은 무어라 할까요?"
유주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묻자 이자원은 짤막하게 답했다.
"초명(初名)이니 유달리 신경써서 지을 필요는 없을 것이오."
"그래도 아무렇게나 부르고 싶지는 않은걸요."
영아 사망률이 높은 조선시대에는 일부러 귀신이 시샘하지 못하도록 초명을 개똥이니 똘복이니 하며 천하게 짓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유주는 그러기는 싫다고 못박은 것이다.
"안세(安世)."
이자원이 말했다.
"안세라고 부르시오."
그 말을 듣던 강석기가 중얼거렸다.
"요즘 같은 난세에 그런 이름이라니. 지독한 농담이구만."
푸념아닌 푸념을 하는 강석기였지만 길게 이야기할 시간은 없었다.
유주는 사람들을 물리고 쉴 시간이 필요했고, 이자원은 해야할 일이 있었다.
이자원이 문을 닫고 나오자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가 말을 건넸다.
"무탈히 해산하셨으니 다행입니다."
임금이 특별히 보냈다는 어의(御醫)의 목소리는 뾰족했다.
유주의 진맥을 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가 자랑으로 여기는 번침(燔鍼)마저도 놓지 못하게 이자원이 막았으니 자존심이 상할만도 했다.
게다가 그간 주로 유주를 진찰한 이들은 남만사의 요승(妖僧)들이 아니었던가.
임금의 면을 보아 돌려보내지지는 않았지만, 저 오랑캐들에게 밀렸다는 생각이 들자 어의는 더더욱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덕분일세."
이자원은 짤막하게 대답했지만 어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침을 놓아 안에 있는 사기(邪氣)를 빼내야 기운도 북돋고 산모도 튼튼한 아이를 낳는 법입니다. 병참 영감께서는 전쟁에 도통하신 분이나, 의술에 있어서는 의원의 말을 들어야 하는 법이니 다음에는 이 사람의 침도 믿어주시지요. 전하께서도 인정하신 기술입니다."
그를 못본체하고 지나치려던 이자원은 그 말을 듣고 문득 물었다.
"자네가 전하의 건강을 살피는가?"
"그렇사오이다. 선대왕에 이어 금상께서도 소인을 중용하시고 계시지요. 그런 전하께서 소인을 보내신 것은 그만큼 병참 영감을 아끼신다는 뜻인데······."
"대장 영감, 가시지요."
이야기가 길어질 기미가 보이자 적비가 이자원에게 말했다.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늘어놓던 어의는 졸지에 입을 다물어야 했지만 이자원은 어의의 존재를 똑똑히 기억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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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달 전 이자원과 대면 후 한때 정신을 잃었던 박승길은, 그 뒤 기력이 없어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적어도 그 자식들이 대는 핑계는 그러했다.
그러나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병조참판 겸 훈련대장의 요청을 계속해서 물리칠 수는 없는 법.
이자원은 이제야 외부인을 들일 정도로 기운을 차렸다는 박승길과 마주 앉을 수 있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파리해진 것 같소."
"본디 몸이 늙고 나면 하루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오."
박승길의 얼굴에는 검버섯이 그때보다 더 피어있었고, 볼은 홀쭉하게 들어갔다.
"그래서, 이 대단찮은 늙은이가 죽어가는 광경을 구경하러 왔소?"
"저번에 하다가 만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끈없는 무관 이중전이 어떻게 금군별장까지 출세했는지.
그 말을 남기고 쓰러졌지 않은가.
이자원이 그리 말하자 박승길은 그제야 아아, 하고 희미한 탄성을 냈다.
그는 그러나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대장의 아비가 어찌 출세했는지, 그리고 어째서 반정 한참 전에 낙향했는지, 모르시오?"
심증상으론 본신 또한 알고 있었으리라 추측되지만, 본신이 아닌 이자원은 모른다.
그는 침묵으로 긍정을 표했다.
그러자 박승길은 희미하게 웃음을 지으며 이자원을 놀리듯이 말했다.
"허면······ 내가 말해주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오?"
이자원은 노인의 물음에 정색하며 답했다.
"노인장은 이미 영창대군의 건으로 나를 공격했소. 아직 이 일가의 목숨이 붙어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시오."
송시열과 송준길은 그 건을 가지고 이자원을 협박하다 역습을 당했다.
이자원은 오히려 병조참판까지 겸하고 승승장구하고 있었으니, 별다른 문벌도 아닌 박승길의 집안 쯤이야 얼마든지 박살낼 수 있었다.
그러지 않은 것은, 단지 박승길이 이자원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허허······ 그런 협박도 할줄 아시오?"
"누구보다는 잘하지."
이자원의 대답에 박승길은 잠시 말을 멈추고 그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마치 누군가의 얼굴을 이자원에게 겹쳐보기라도 하는듯이.
"닮았군. 확실히 닮았어."
박승길이 중얼거렸다.
"누구를 말하는게요?"
"누구라니, 바로 대장의 친어미지."
이자원은 얼굴을 굳혔다.
본신이 남긴 기록에도 그 친모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오로지 아버지와 적모에 관한 이야기 뿐이었으니, 친모는 별로 대단할 것 없는 기생 출신일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박승길이 꺼낸 이야기는 놀라웠다.
"얘기가 조금 길어질 수도 있을 것이오."
박승길이 킬킬 웃으면서 말했다.
"임해군은 천하의 난봉꾼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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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어사가 잡혀왔던 갑인년(1614년)의 일이다.
임해군은 포악하고 탐욕스러운 인간인지라, 그가 벌인 악행을 말하자면 밤낮을 이야기해도 부족할 정도였다.
국경인과 같은 순왜가 그를 잡아서 왜군에게 넘긴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질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고쳐지지 않았으니, 걸핏하면 남을 살상하고 그 재물을 뺏으며 여인을 겁탈하기가 더했다.
이렇듯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살아생전의 임해군에게 이를 갈고 있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으나, 늦게 출사해 그와 만나볼 일도 별로 없었던 박승길로서는 딱히 흥미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형장께서는 그 임해군 댁에 있는 첩만 몇명인지 들어보셨소?"
"글쎄······ 수십 명은 되지 않았겠는가."
어째서 임금-그러니까 당시 광해군-은 임해군의 일개 첩에 불과한 환어사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발겼는가.
이 의문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 중에는 사람을 죽이고 빼앗은 첩도 있었소이다."
"사람을 죽였다······?"
사헌부의 동료는 저자의 소문을 즐기는 부류였기에 관련된 이야기를 캐는 박승길에게 거리낌없이 털어놓았다.
"애생(愛生) 말이오이다."
그제야 박승길은 수년 전 장안을 시끄럽게 했던 살인사건을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애생은 본래 의주에 소속된 관기였는데, 그 미모에 반해 세도가였던 유희서가 함부로 빼앗아 자신의 첩으로 삼은 여자였다.
그런데 유희서가 어느날 살해된 채로 발견되니, 그 범인으로는 임해군의 종인 설수가 지목되었다. 누가 보아도 임해군이 애생을 취하기 위해 저지른 일임이 분명했다.
"이미 선조대왕 때와 금상 시절에 몇번이고 수사했던 일이 아닌가? 둘 다 임해군이 종실이었기에 흐지부지 끝나버렸고······."
"아니, 아니오이다. 선대왕 시절에야 임해군이 종실이었지 지금은 임해군이 아니라 그저 역적 이진이 아닙니까."
"그거야······ 그렇지."
주상은 선조가 어영부영 덮어놓았던 사건을 끄집어냈다. 즉위하자마자 애생을 잡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임해군의 오명을 들추어내 그를 치는데 엮어내는 것도 아니요, 진상을 명명백백히 밝이는 것도 아니라 그 뒤 5년 동안이나 국문을 하는둥 마는둥 하던 끝에 애생은 작년(1613년)에야 석방되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기껏 잡아들여놓고 조사는 할 생각을 않았으니 말이외다. 제대로 된 국문이 이루어진 것은 금상께서 처음 잡아들였던 무신년(1608년)과 막바지인 계축년(1613년) 뿐이고, 나머지는 그저 형관의 옥에 갇혀 있었을 뿐이지요."
박승길은 그때 동료의 말을 가로막았다.
"잠깐."
그는 감찰로 있으면서 영창대군의 죽음을 파헤칠 적에, 이중전을 조사한 내용을 떠올렸다.
'이중전은 분명히 관직 생활을······.'
형조의 옥관(獄官)으로 시작했었다.
고작 그정도에서 시작했던 이가, 지금은 금군의 별장이 되어 주상의 측근이 되었다.
과연 우연일까.
박승길은 여기서 더 파고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가 감히 손댈 수 없는, 지독한 추문(醜聞)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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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지에 국문 탓에 애생을 빼앗긴 임해군은 노발대발했겠지만, 곧 그 또한 광해군이 일으킨 옥사에 말려들어 죽고 말았다.
그 첩이었던 환어사는 도망다니던 끝에 잡혀서 예의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개 두 마리가 고기 하나를 놓고 다투는구나.'
"폐주가 옥에 갇힌 애생을 안아보고자 내 아버님을 매수하기라도 했다는 말이오?”
이자원이 말했다.
아무리 미색에 혹했다 해도 일국의 지존이 그런 짓까지 벌였을까.
"물증은 없지. 그러나 종친이란 자가 기생 하나 때문에 고관을 죽이는 것은 말이 되는 것이오?”
박승길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도 의심은 했으되 확신은 하지 못했소. 대장과 만나기 전까진."
이자원은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짐작했지만, 박승길을 재촉하진 않았다.
"애생은 계축년에 풀려났소. 나오기 전에 압슬형을 받았으니 오래 살진 못했겠지. 다만······ 그 뒤로 딱 한번 그 여인을 본 적이 있소."
박승길은 이자원의 얼굴을 똑똑히 쳐다보며 말했다.
"대장과 애생의 관계는, 아마 단순히 사이에 이중전이 낀 정도가 아닐 것이오. 아마."
박승길의 말을 들은 이자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한번 묻겠지만, 물증은 없겠지."
자, 어떻게 처리할까.
===
"이자원이 무사히 득남했다 하오."
임금은 중전 강씨를 보며 말했다.
유주는 중전의 여동생이었으니, 그녀로서도 조카가 된다.
그 사실에 중전은 뛸듯이 기뻐했다.
"신첩이 여동생을 보지 못한지 오래라, 노심초사 근심했는데 다행입니다. 게다가 아들이라니 실로 잘된 일이 아닙니까."
단순히 조카가 생겼다는 기쁨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금지옥엽처럼 아끼는 아들, 원자 석철(石鐵)을 위해서라도 경사스런 일이었다.
"훈련대장은 누구보다 든든한 충신이니 그 아들도 대를 이어 원자를 보필하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중전의 말에 임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원의 아들은 종친이 아니면서도 원자에게 사촌이 되니,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신하가 되지 않겠는가.
역시 부부는 이심전심이라더니, 아내 하나는 잘 두었다 느끼며 임금은 중전을 끌어안았다.
"어맛!"
"정말 잘된 일이지.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후계가 든든해야하는 것 아니겠소?"
임금이 슬며시 중전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언제까지고 원자 하나만 보고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중전도 싫은 기색이 아니었다.
최근 기력이 허하다하여 방사를 회피하던 임금이 아니었던가.
오랜만에 거사를 치르기 위해 몸을 뉘려던 때, 한참 기운을 집중하던 임금의 낯이 파래졌다.
"허억, 쿨럭!"
임금은 어지러움을 느끼며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
중전은 놀라 소리를 지르며 내관과 궁녀들을 찾았고, 곧 어의가 달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