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만 이 지구를 선택했다-60화 (60/317)

# 60

11층으로

내가 일행을 대표해 선택한 것은 11층 랜덤 구역이었다.

처음부터 고정 안전 구역에 갑자기 나타나는 것보다는 11층 랜덤으로 나타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자연스러울 테니까.

우리가 20층에서 내려왔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어 아래층 상황을 알아볼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다.

일행에게 내 생각을 설명하자 일행은 찬성했다. 재밌을 것 같다는 의견도 있었다.

'뭐 재밌는 게 중요하긴 하지.'

필요한 일을 함과 동시에 휴식도 겸하는 느낌이니, 부담도 덜하다.

나연과 한바다 쪽은 무척 진지할 테지만, 저 둘에게 우리 모두가 맞출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천성이 나쁜 이들이 아니라 말만 저렇지 진지하게 임하긴 할 테지만.

설령 진짜 흥미 본위일지라도 저들에게 도움이 된다. 그러면 된 거다.

그러나 이런 생각과 준비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우리가 11층에 내려가는 순간 즉시 아래층이 어떤 꼴인지 알 수 있었으니까.

챙!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린다.

"씨발! 개새끼들아! 니들이 그러고도 사람이야!"

"푸하하! 여기가 아직도 지구로 보이냐! 니들이 덜 떨어진 거지!"

탑 초기인 만큼 마법사는 눈을 씼고 봐도 찾을 수가 없다.

하나같이 칼을 들고 설치고 있으며, 드물게 갑옷과 방패를 입은 이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간간히 보이는 궁수들.

딱 거기까지가 다였다. 사제나 마법사로 보이는 이들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사제 한둘은 있을 법한데…. 아무래도 전쟁터까지 따라오는 이가 없는 듯했다.

우리가 소환된 장소는 공동 한복판. 이곳은 한참 전쟁 중이었다.

"뭐, 뭐야?"

우리 일행과 주변에 있던 놈들까지. 모든 인원이 한껏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당황한 와중에도 이쪽 일행의 동작은 신속했다. 훈련받은대로 후열을 보호하는 진형을 갖춘다. 거의 반사적인 움직임. 머리가 당황해도 몸이 기억한다.

가운데에 나연과 조연은, 주하연을 둔 채 주변을 둘러싼다. 나서윤은 상황에 맞춰 후열에 들어갈 때도, 전열로 튀어나올 때도 있었지만 현재는 전열로 나온 상태였다.

주변이 어수선한 상황에 후열의 인원이 늘어나는 것은 지켜야 할 것을 늘리는 꼴이니 좋은 선택이다. 계산이 아니라 본능에 가까운 것 같지만, 그래도 충분히 칭찬할 만하다.

"어? 뭐야? 신입인가?"

"야! 야! 신입이다! 이야! 여자가 여섯이야!"

우리 일행에 넷, 한바다 파티에 둘. 여섯이 맞기는 하다. 총인원이 8명인데 여성이 여섯. 불균형한 성비다.

"게다가 어려! 그리고 예쁜데? 형님이 정말 좋아하시겠군.

…아무래도 우리가 떨어진 곳이 영 좋지 않은 곳으로 보였다. 아무래도 쓰레기들과 그나마 양심적인 애들이 서로 참다못해 전쟁이라도 치르는 중인가 보다. …설마 카르텔끼리의 전쟁이 아니기를 빈다. 벌써 그수준이면 골치가 아프다. 대부분을 죽여야 하니까.

어쩐지 최근 올라오는 이들이 늘어가는 추세더라….

'하여간 진짜 쓰레기들만 모였다니까.'

탑의 시스템이 그렇다. 초반에는 쓰레기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잠재성이 높아도 초반에는 거기서 거기니까. 수가 많거나 눈치가 부족하면 살아남기 힘들다.

지금 괴물 같은 속도로 성장하는 나서윤만 해도 나연과 함께 튜토리얼조차도 넘지 못했었으니 말 다 했다.

이쪽은 완벽하게 쓰레기들의 우세인 쪽으로 보였다.

"이봐요! 거기! 다들 이쪽으로 오세요! 그쪽으로 가면 안 돼요!"

한 남성이 우리를 바라보며 외쳤다.

우리가 소환된 것을 보고는 양심 진형이 밀리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이쪽을 향해 전진하는 모습이 보인다.

"야! 얼마 만에 보는 예쁜 여자들이냐! 저 새끼들에게 뺏길 셈이야! 막아!"

우르르.

지휘관 중 하나로 보이는 이의 지시에 쓰레기 진형 놈들이 이쪽으로 오는 인원들을 틀어막는다.

숫자상 쓰레기들의 우위. 서로의 수준 차이도 크게 나지 않는 상황이라 양심 진형은 우리 쪽으로 더는 다가오지 못했다.

"젠장! 젠장! 이 개새끼들아!"

우리를 향해 외쳤던 남자가 거친 욕설과 함께 포기하지 않고 달려들지만, 역부족이다.

양심 진형으로 보이는 이들은 공동의 반도 차지하지 못했고, 지금은 되려 점점 통로 쪽으로 밀리고 있었다.

그리고 쓰레기 진형은 우리 일행을 둘러싼 채 재밌다는 듯이 구경하고 있었다.

"와, 하나같이 괜찮네. 아, 저건 좀 어린데?"

"그게 좋은 거지. 하여간 이런 세상에 뭘 따지는 거야? 지구에서도 저 정도 나이면 성인으로 치던 곳도 많았어."

조선 시대냐 16살을 성인으로 치게. 진성 개새끼들이다.

"남자가 둘이라… 거 재미 좀 봤겠네?"

"이제는 양보해도 될 정도로 말이야!"

"이런, 이제는 우리가 새서방인가? 하하!"

와하하.

주변의 쓰레기들이 즐거운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쳐 웃는다.

"뭐가… 우습죠?"

정의 2인 방중 하나인 한바다다.

"하하. 거 미안하구만 신입. 하지만 알지 않나. 이럴 때가 아니면 웃을 일이 별로 없어. 기회가 있을 때 많이 웃어 둬야 해서 말이야. 그래서 그런데, 우리에게 즐거움 좀 줬으면 해. 이것만 말해주면 진짜 재밌을 거 같은데, 대답 좀 해주겠나? 너말이야, 몇 컵인가?"

푸하하하!

다시급 이어지는 성희롱에 가까운 발언. 아니, 그냥 성희롱이다.

8층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나게 하는 모습이었다.

한바다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주변을 둘러볼 뿐.

양심 진형으로 보이는 곳은 이제 거의 통로 앞까지 몰려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죽거나 밀리는 상황. 그들도 자신들이 패배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끝까지 버티는 모습이었다. 시선이 우리 쪽으로 가는 모습을 보아하니, 우리들 때문인가 보다.

확실히 탑의 마지막 양심들다웠다. 이들은 카르텔이 아니다. 확실히, 멀쩡한, 도덕성 높은 집단이다. 그런 판단이 들었다.

그리고 그건 한바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신후 씨."

"네."

"아무래도 이들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청소를… 좀 하고 싶은데요."

"도와드리죠."

"사양하지 않겠어요."

싱긋.

나와 한바다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하하. 저항할 생각인가? 그러면 나중에 더 거친 대접을…."

남자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야 그럴 만도 했다.

퍽!

머리가 부서져 절명했으니까.

"…이런 씨발!"

한 박자 늦게 상황을 알아챈 쓰레기들이 뒤늦게 남자의 머리를 부숴버린 한바다에게 욕설을 날렸다.

"이런 찢어 죽일 년이!"

"카사! 파이어 볼!"

개전을 알린 이상, 일행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들은 되든 안 되든 후열을 노렸어야 했다. 정령사는 마법사 계통. 마법사만큼, 아니 어떤 면에서는 마법사보다 대량 학살에 특화된 몸이다.

저들이 그걸 알지는 못했겠지만.

콰앙!

불의 폭발.

"히익!"

단숨에 다섯 명이 불에 타 숯덩이가 되었다.

"뭐, 뭐야!"

"마법! 마법이다! 마법사야!"

"뭐야! 마법사는 마법 못 쓴다며!"

주변에 공포의 감정이 번진다.

정확히는 정령사다. 그리고 마법사가 마법을 못 쓰면 그게 마법사냐. …실제로 초반에는 그렇다는 게 슬펐다. 이건 탑도 어쩌기 힘든 부분이다.

후반에 강한 이상 초반 너프… 는 아니고 마법이라는 학문 자체의 수준이 높아서 그렇다. 입문 난이도가 끔찍한 학문이니까.

핑-

덥석.

멀리서 나연을 저격한 화살이 날아왔고, 나는 그 화살의 깃대를 손으로 잡는 미친 짓을 저질렀다.

내 근력이 떨어졌다고는 해도, 민첩과 체력, 마력은 그대로다. 이런 허접한 수준의 화살은 눈 감고도 잡을 수 있다.

"…뭐, 뭐야."

"화살을… 잡았어? 손으로?"

꿀꺽.

화살을 손으로 잡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전투 중에 언제 날아올지도 모르는 화살을, 그것도 유효 사거리 내에서, 상대를 죽일 각오로 쏘아진 것을 맨손으로 잡았다? 그건 그냥 초인이다. 그런데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낸 것. 이들이 상태 창의 보정으로 강해지긴 했지만, 이런 묘기를 부릴 정도로 강하지는 않다. 즉, 이들은 아직 초인이라고 불릴 수준은 되지 못했다. 그래도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아볼 수준은 되었지만.

만약 화살에 마력이라도 실려 있었다면 손이 그대로 찢어졌겠지만, 아직 여기에 마력을 화살에 집어넣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놈은 없었다.

검기 못지않게 어려운 기술이다 보니, 날리는 화살에 마력을 집어넣을 수 있다면 능히 일류 궁사라 불릴 수 있었다.

검기를 쓰는 검사도 100m 이상 날아가는 화살에 마력을 집어넣기는 어렵다. 그런데 일류 궁사들은 수백 m를 날아가는 화살에 마력을 실어 보내고, 능력이 되는 이들은 검기를 화살촉에 만들어 쏴버린다. 훗날 조연은이 도달할, 도달해야 할 영역이다.

나는 맨손에 화살을 쥔 채 어느새 조용해진 주변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새서방님들. 내 부인들을 빼돌리시겠다고?"

최대한 능글맞은 표정을 짓는다.

어디까지나 도발, 동시에 명분 쌓기다. 저쪽 양심 진영에 과거의 나연처럼 앞뒤 꽉 막힌 놈은 없겠다만, 그래도 이런 명분은 쌓아두면 좋다. 저런 이들은 우리 행동이 '정당하다'라고 느끼면 뭔 짓을 해도 환영하니까. 물론 너무 과하면 모르겠지만, 상대가 방금 전까지 죽자사자 싸우던 이들이다. 어지간한 행동은 다 정당화 될 거다.

픽.

내 필사적인 도발에 여성 진 중 한 명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다.

나는 못 들은 척하며 말을 이었다.

"대놓고 NTR 노리겠다는데, 그런 놈들을 봐 주면 남자도 아니지? 그렇지 않나?"

나는 서서히 마력을 끌어올리며 물었다.

뭔가 잘못 돼간다.

쓰레기들은 그 사실을 느낀 듯했다.

"단, 단순한 신입 환영 차 하는 장난…."

말도 안 되는 핑계.

"그걸 믿으라고?"

차갑게 끊어버리는 말.

나는 주변을 돌려보며 말했다.

"다 죽여."

그러자 아까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웃었던 여성, 주하연이 대답했다.

"분부 받들겠어요, 서방님."

나는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했다.

***

우리는 내부에서 날뛰기 시작했다.

여기는 쓰레기들의 영역. 하지만 우리가 들어온 이상 이야기는 다르다.

"카사!"

"매직 애로우!"

"굳건한 방패!"

우리는 약간 밀집해 후열을 지키면서 달려드는 이들을 처리하는 방식으로 쓰레기들의 수를 줄여나갔다.

정령사 하나와 마검사 하나. 거기에 궁수 하나가 상대를 꾸준히 줄여 주었고, 근접 인원들은 후열을 확실하게 지켰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정령 마법과 나서윤의 마법에 의해 우르르 죽어 나가고, 그렇다고 가까이 다가가면 규격 외의 근접 진형에게 찢겨 나간다.

그러다 보니, 쓰레기들은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원거리 공격도 안 통한다. 주하연이 굳건한 방패를 쓰기도 했고, 근거리 인원들이 하나같이 칼같은 움직임으로 방어했으니까.

애초에 수준 차이가 너무나도 심하다.

우리 파티 8명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저런 오합지졸 800명은 더 필요하다.

아니, 솔직히 그 이상도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여기는 평원 같은 곳이 아닌, 제한된 장소인 공동과 통로로 이루어진 미궁이며, 상대의 수준은 뻔하다. 시간만 주어지면 백 단위가 아닌, 천 단위도 우습게 학살할 자신이 있었다.

계속된 학살에 쓰레기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몬스터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물론 몬스터도 압도적인 힘이나 천적이 나타나면 겁에 질린다. 하지만 인간은 그 정도가 훨씬 심하다.

"젠장! 이런 얘기는 못 들었다고!"

드디어 이탈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야! 어딜 도망…!"

나는 나연에게 지시해 이탈자에게 욕설을 내뱉는 놈을 우선 처리하도록 만들었다.

하나둘 공포가 전염되고, 그 영향은 저 멀리, 이제는 쫓겨난 거나 다름없는 상태에 있는 양심 진형에게까지 퍼졌다.

양심 진형은 이제 다 틀렸다는 분위기였으나, 어째서인지 쓰레기 진형이 하나둘 무너지고 흔들리는 모습에 기회라는 듯이 마지막 힘을 다해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통로로 쫓겨나 밀리던 이들이 하나둘 다시 통로를 비집고 나와 공동으로 들어왔으며, 쓰레기 진형을 밀어내 공동의 지분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우리는 자리를 옮기며 도망치는 쓰레기들을 찾아가 하나씩 처리하는, 내부를 뒤흔드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슬슬 저들이 도망치기 시작하자, 나는 키퍼 역할을 버리고 즉시 튀어 나가 도망치는 상대를 하나씩 베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진형의 붕괴가 가속화된다.

"나,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이게 뭐야! 이런 놈들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어!"

"살려, 살려 줘!"

나는 내게 목숨을 구걸하는 이들을 하나도 살려놓지 않았다.

진부하게 '그런 너는 살려 달라는 사람 살려 준 적 있어?'라고 묻지 않았다.

그냥 무시하고 베어버렸다.

어차피 적. 그런 것 따질 생각은 없었다. 내가 나연 같은 성정을 지닌 것도 아니고, 필요에 의해서 하는 일이니까.

어차피 이들은 딱 이 정도 수준의 놈들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탈자는 늘었고, 쓰레기들의 공동 지분은 착실하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와 양심 진형이 서로를 만났고, 그때는 사실상 쓰레기 진형은 이 공동을 포기한 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일방적인 전투가 끝난 후. 양심 진영에서 한 남성이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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