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11층으로
전투는 천천히 데미지를 쌓아 가며 우리가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발의 타겟이 한바다로 바뀌자 정확한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던 전투의 구도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한바다가 흔들린다. 현재 역할이 잠시 교대되어 그녀가 메인 탱커 역을 수행하는 중인데, 잘 버텨야 하는 탱커가 어느샌가 근접 딜러마냥 미노타우로스에게 엉기고 있었다.
도발에 걸려든 거다.
쯧.
나는 가볍게 혀를 찼다.
생판 처음 보는 미노타우로스의 정보를 줄 수도 없었기에 조심하라는 말은 없었다. 어차피 없어도 어렵지 않게 승리한다고 생각했으니까.
한바다면 일행 중 세 번째로 재능이 높은 이다. 마력도 준수하고 정신력도 나쁘지 않아 쉽게 걸려들 거라고는 생각 못 해봤는데, 아무래도 경험 부족이 여기서 드러난 듯했다.
저런 공격에 내성이 전혀 없다.
대처 자체를 하지 않는 듯했다.
자신의 행동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거다.
생각 이상으로 한바다가 미노타우로스와 엉겨버리자 원거리 지원이 끊겼다.
일행은 조금 의아한 기색이었다.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평소 훈련 덕분에 침착함은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일행에게 그대로 기다리라는 사인은 보내고는 한바다와 미노타우로스의 전투를 지켜보며 끼어들 틈을 엿보았다.
기세 좋게 달려드는 한바다. 미노타우로스는 그 많은 상처에도 불구하고 여유롭게 한바다의 공격을 받아내며 조금씩 물러나고 있었다.
정말 영리한 놈이다. 그리고는 도발에 의해 끓는 점이 낮아진 한바다가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큰 일격을 날리는 동작을 취할 때, 기다렸다는 듯이 한바다의 머리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제대로 맞으면 치명타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둘 사이를 파고들어 한바다를 발로 차 구해내고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한바다를 공격하기 위해 손을 휘두른 미노타우로스의 훤히 빈 옆구리가 보인다.
그곳에 검을 쑤셔 박고는 그대로 아래를 향해 체중을 실어 그어버렸다.
"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상상 이상의 고통.
미노타우로스는 나를 떨어뜨리기 위해 몸을 뒤틀며 팔다리를 마구 휘둘러 왔다.
나는 미련 없이 검을 빼며 후퇴, 후열을 향해 다시 공격 지시를 내렸다.
내가 발로 차버린 한바다는 충격이 컸는지 몸을 뒤틀며 힘겹게 일어서고 있었다.
나는 한바다를 향해 물러나라는 제스쳐를 보냈고, 내게 얻어맞으며 도발이 풀렸는지 한바다는 즉시 2선보다 뒤로 물러나 키퍼를 자청했다.
그러나 남은주가 역할을 교대해 2선으로 나와 나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고민하던 나서윤은 그대로 마법 공격을 이어갔고, 보스 레이드는 서서히 끝을 향해 달려갔다.
"무어어어어-."
마지막 단말마를 끝으로 보스가 대지에 몸을 눕혔다. 최상위권 파티인 우리가 20층 보스를 잡는 데 생각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실제로 20층 보스는 거의 5파티 이상이 연합해 잡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한 파티가 보통 5~7명 수준이라고 봤을 때, 30명 이상이 하나의 몬스터를 상대로 레이드를 한다는 뜻이다.
그걸 8명이서 해낸 것.
충분한 성과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업적 같은 것은 나오지 않았다. 보스를 쓰러뜨려도, 다음 층으로 향하는 문은 나오지 않았다.
보스 미노타우로스가 쓰러지고 빛의 입자가 되어 사라졌을 때, 그 자리에는 미노타우로스가 차고 있던 중세 수갑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앗! 오빠! 아이템! 아이템이 나왔어요!"
나는 나서윤의 말을 듣고도 늘 하던 것을 먼저 했다.
전투가 끝나고 나서 늘 먼저 하는, 부상자가 없는지 확인하는 것. 실제로 메인 탱커인 내가 어그로를 놓친 적은 없었고, 내가 멀쩡하니 내가 차버린 한바다를 제외하고는 다친 사람은 없었다.
그마저도 그리 심한 부상은 아니었고.
"죄송합니다. 신후 님. 제가 갑자기 왜 그랬는지…."
"스킬인 것 같더군요. 저도 이상한 충동이 느껴지긴 했습니다."
"…그런, 몬스터가 스킬을… 말입니까?"
"저희도 쓰니까요. 몬스터가 쓰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한바다는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납득했다. 몬스터가 스킬을 쓰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실제로 고블린 주술사는 파이어 볼과 비슷한 공격을 하지 않던가?
한바다는 미노타우로스가 나에게도 도발을 썼다는 사실을 알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내게 사과를 건넸다.
어찌 되었든 나는 걸리지 않았고, 자신이 걸리는 바람에 전투에 차질이 생기도록 만들었으니까. 확실히 잘못이기도 하고. 언제나 정보를 가진 상태로 전투에 임할 수는 없으니까.
전투에는 변수가 많은 법이다. 잘 해결되었기에 나는 뭐라 하지는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어깨를 두드려주며 가벼운 격려를 해준 뒤 보스가 드롭한 수갑을 향해 다가갔다.
수갑을 손에 들자 정보 창이 떠오른다.
[미노타우로스의 수갑(Manacles)]
-등급 : 슈퍼 레어(SR)
-미노타우로스를 제압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수갑. 그 무게가 만만치 않다. 이 수갑을 찬 미노타우로스는 한동안 힘이 약해진 듯했으나, 어느새 과거보다도 더한 힘으로 수갑의 사슬을 끊어낸 뒤 미쳐 날뛰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미노타우로스는 과거보다 더 흉악한 존재로 거듭났다.
-착용 조건 : 근력 21이상
-효과 : 착용 시 근력 -20 이후 근력의 성장이 가속화된다.(상승 보정)
-착용 시 귀속. 착용 해제 시 파괴된다. (단, 착용 해제 시 착용 시점의 근력보다 근력이 낮으면 착용 시점의 근력으로 복귀되고, 착용 시점의 근력보다 현재 근력이 높을 경우 근력이 그대로 유지된다. 이후 보정 효과는 사라진다.)
-정보 추가 : 근력 '60'을 초과하면 더는 효과를 볼 수 없다.
근력 60. 당장은 무려 근력 20을 깎아 먹는 통에 정말 쓰레기 같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 상승 보정은 잠재력과 무관하게 올려주는, 말 그대로 엄청난 성능을 자랑하는 효과다.
괜히 이런, 근력 20을 깎아 먹는 아이템 따위가 슈퍼 레어 등급인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아이템을 일행에게 공개했다. 그러자 다들 의아하다는 반응이 튀어나왔다.
"뭐 이런…."
"이거 좋은 건가? 일단 상승 보정이 붙는다고는 하는데…."
"지금 당장은 나빠도 나중에는 좋아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당장 줄어드는 힘이…."
엄청 좋은 건데, 워낙 디메리트가 세다.
근접 탱커나 딜러에게 근력은 무척 중요한 능력치. 그런데 지금 그 중요한 능력치를 20이나 깎아 먹어야 한다는 뜻이다.
전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문일 정도. 수련만으로 능력치를 올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사냥을 병행해야 하는데, 사냥하다가 딱 죽기 좋은 수준으로 육체를 약화시킨다.
물론, 나나 나서윤처럼 마력이 높으면 마력으로 신체 능력을 증폭시켜 대충 때울 수 있기에 별 상관은 없었다.
상대하는 몬스터의 수준을 조금만 낮추면 된다는 뜻이니까.
게다가 근력 60. 이건 중층 수준이다. 나는 이런 거 없어도 중층에 갈 때쯤 되면 평균 능력치가 60을 넘길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이게 별 필요는 없다. 괜히 중층에는 가야 내 능력치와 레벨의 균형이 맞을 거라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성장이 더딘데, 이걸 끼면 한계가 조금 더 빨리 찾아올 뿐. 하지만 그래도 내게는 꼭 필요한 장비다.
성장 보정은 잠재력과 무관하게 성장시키는 만큼, 잠재력을 아낄 수 있게 해주니까.
그러니 나도, 나서윤도, 기왕이면 남은주까지 착용해야 한다. 나는 일행이 의견을 나누는 동안 조심스레 몸을 빼고는 주변을 둘러보는 척 목표했던 제단으로 나아갔다.
[봉인의 제단]
-미노타우로스를 제압하기 위해 제물을 바치던 제단이다. 무언가를 제물로 바칠 수 있다.
나는 슬쩍 일행을 살펴보았다.
딱히 나를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그래도 혹시 몰라 인벤토리에서 음식이나 잡다한 장비를 제단 위에 올리는 척을 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15층에서 확보한 '이상한 철조각'을 제단에 올렸을 때.
[제물을 바치시겠습니까? 공물이 부족합니다.]
나는 곧바로 인벤토리에서 이상한 철조각을 제단에 쏟아부었다.
이정보 분량이면 세 개는 만들 수 있다.
나는 1회차의 기억을 바탕으로 '공물'을 마구 제단에 쏟아 부었다.
티팅팅팅.
철조각들이 인벤토리에서 쏟아져 나와 서로 부딪치는 소리에 일행의 시선이 내게 집중된다.
"신후 씨? 지금 뭐 하시는…."
"이거 제물로 바칠 수 있다고 합니다. 어차피 쓸데도 없어서 일단 써 보는 중입니다."
담담한 내 대답. 특이한 상황에 일행은 곧바로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인벤토리의 모든 철조각을 들이붓자, 다시금 메시지가 떠오른다.
[제물을 바치시겠습니까? Y/N]
나는 곧바로 Y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화악.
밝은 빛이 빛나더니 제단 위에는 미노타우로스의 수갑(Manacles)이 3개나 생겨 있었다. 효과는 같았다.
"…이게 뭐야."
그러나 일행은 조금 실망한 표정이었다.
바보 같은.
고작 잡템 바쳐서 슈퍼 레어 수준의 아이템 3개다. 이건 진짜 남는 장사다. 일행도 그 사실을 알고는 있을 거다.
하지만 저 보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메시지로만 봐서는 모르기에 저러는 것일 뿐.
나는 일행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선 이건 필요한 인원에게 분배하겠습니다. 우선 제 능력치가 높으니, 시범 착용하고 보정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죠."
나는 즉시 미노타우로스의 수갑을 나, 나서윤, 남은주, 한바다에게 나눠 주었다.
솔직히 한바다에게 줄 생각은 없었는데, 우리 파티 중 두 명은 사제와 정령사라 근력이 별 필요가 없다.
그래서 고생도 했으니 한바다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한바다는 극구 사양했지만, 일단 가지고는 있으란 말에 약간 부담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 강권에 못 이겨 결국 받았다.
한동안 미궁에서 고생할 사람인데, 레벨도 정체될 테고, 이거라도 챙겨 줘야 미궁에서 여포짓 하기 편하다.
나는 곧바로 수갑을 착용했다.
[근력 -20이 적용됩니다.]
[근력 상승 보정이 이루어 집니다.]
근력이 확 줄어드는 것이 느껴진다.
특히 근력 자체가 얼마 전 40을 달성했기에 20이 줄어들자 그 체감이 어마어마했다.
"오빠, 어때요?"
"우선 능력치는 확실히 줄어들었어. 보정은 천천히 확인해 봐야지."
잃어버린 20은 금방 복구한다. 그 뒤로도 제법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이건 슈퍼 레어 중에서도 최상위권 아이템이다. 이런 능력치 보정, 그것도 60까지 올려주는 보정 아이템은 정말 희귀하다.
우리는 곧바로 다음 방으로 향했고, 거기서 고정 안전 구역을 확보했다.
나는 나를 관리자로 등록했고, 기대했던 업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 층은 특별했다.
내가 뭘 설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전부 막힌 상태.
'이래서 1회차 때 카르텔이 20층에서는 제대로 날뛰지 못했군.'
아예 날뛰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아래층에서 했던 것에 비하면 조금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 이유가 있었다.
기본 설정상 고정 안전 구역 주변에서는 수련자들끼리 전투도 힘들고, 내부에서도 서로 간의 적대 행위는 금지되어 있었다. 두 번 어기면 즉시 미궁 밖으로 영구 추방이다. 게다가 입장 권한이 무려 '보스를 쓰러뜨린 자'다.
다음 층으로 향하는 문이 있는 장소인 만큼, 특별히 관리되는 듯했다.
문으로 향하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미궁을 탈출하시겠습니까? Y/N]
아직은 때가 아니다.
나는 곧바로 뒤로 물러났고, 메시지는 사라졌다.
그리고 주변을 확인하자, 다른 문이 보였다.
그곳에 다가가자 곧바로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하층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Y/N]
-19층 고정 안전 구역 or 랜덤 구역
-18층 고정….
…
…
…
11층부터 19층까지. 고정 안전 구역으로 이동할 수 있는 문이었다.
나는 즉시 일행을 불러들였다.
"아래층이요!?"
한바다의 표정이 놀람과 기쁨으로 변해갔다.
이제껏 아래층으로 내려갈 방법은 없었다.
튜토리얼도, 미궁도 마찬가지.
그런데 그런 방법이 생겼다. 한바다 입장에서야 기뻐할 만하다.
1회차 미궁에서는 하층으로 내려가는 것은 엄격하게 통제되었었다. 미궁 밖으로 탈출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
이번 회차에서는 이미 죽어버린 진상수가 하층으로 내려가는 행위를 엄격하게 통제했던 것. 게다가 이 고정 안전 구역도 사실상 그가 통제했었다.
자신들도 만만히 보기 힘든 놈들이면 미궁 밖으로 탈출하는 것은 막지 않았지만, 딱 거기까지다. 그마저도 일정 인원이 넘어가면 일부를 죽여서라도 막았다. 정말 실력으로 빠져나가는 사람은 극소수. 미궁을 나가려면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그만큼 권력이 강했기에 할 수 있는 만행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한바다와 일행에게 아래층으로 내려가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한바다는 당연히 찬성. 쓰레기들을 정리할 기회로 보고 있었다.
나만 아니었어도 그녀가 이렇게까지 빨리 올라올 이유는 없었겠지.
지난 회차에서도 아마 남아서 어떻게든 쓰레기들을 정리하려 했을 거다. 아마 고정 안전 구역이나 각 층의 카르텔 상황을 보면, 더 위층을 노렸던 것은 이번 회차와 마찬가지였겠지만, 이번처럼 빠르지는 않았을 터.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서 진상수에게 뒤통수 맞고 망했지만.
내 파티원들은 내가 이런 행동을 하자 조금 의아하다는 반응이었다.
늘 다음만 생각하고, 더 강해질 궁리만 하던 유신후가 왜? 라는 느낌.
이럴 때는 좋은 핑계가 있다.
나는 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약속했잖아. 여유가 된다면 조금은 남을 돕기로. 지금 조금 늦춘다고 해도, 우리가 선두인 것은 변하지 않고, 우리에게 큰 피해는 없으니까."
지금 우리 실력이면 별로 위험할 것 같지도 않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연은 내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감동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반쯤 울먹이기도 하고, 곧이어 한껏 기쁜 표정으로 바뀐다.
급격한 표정의 변화를 보면서 내심 조금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겉으로 내색하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응, 응. 고마워, 고마워 신후야…."
자신도 가고 싶었겠지. 하지만 내 말을 잘 듣기로 한 이상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을 거다.
그런데 자신을 배려해서 내가 시간을 내 아래층에 내려가겠다고 하자, 무척이나 감동한 듯했다.
"축하해 언니."
뭐가 축하한다는 건지 모르겠다. 나서윤은 울먹이는 나연을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주하연을 비롯한 여성 진들도 포근한 미소를 지어 주었고, 한바다는 조금 부럽다는 얼굴로 나연을 바라보았다.
우리 일행과 한바다 일행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것에 전원 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