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158화. 청혼(4)
아벨의 일행 중에서도 당연히 불만을 가진 자가 있었다.
에디린.
그 어떤 드래곤들보다 더 뛰어난 에이션트 드래곤이었지만 이제는 인간이 된 여자.
다른 여자들은 순응하며 잘 있었는데 유독 에디린만 불만 섞인 구겨진 얼굴이었다.
‘……제기랄……!’
하긴.
평생을 자기 맘대로 살아왔었다.
하지만 이젠 자기 맘대로 할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
‘……주신 아그네스도 참! 아무리 그래도 저 녀석보단 강하게 해줬어야지!’
인간들 중에선 최강일 거라고 했었는데, 인간이 되고 보니 저 녀석은 인간으로 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아벨하고 처지가 완전히 뒤바뀌자 조금 걱정이 들기 시작한다.
‘……설마 예전 일로 복수하진 않겠지……?’
이때까지 자기가 아벨에게 했었던 일들이 떠오른다.
그가 하지 말라고 거세게 반항해도 힘으로 결국 진행했었던 그 많은 일들이.
‘에이! 뭐! 나만 좋았나?! 지도 좋았지! 아 몰라! 모른다고!’
여자에 대해, 여체女體에 대해 전혀 몰랐던 아벨이었다.
누가 여자에 대해, 여체에 대해 가르쳐주었겠는가?
다 자신이 알려줬었다.
매우 세세하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다.
아주 아주 아주 자세히 세밀하게.
‘……분명 고마워하고 있을 거야…… 암…… 그렇고말고…….’
뿐만 아니라 아벨은 그렇게 속 좁은 나쁜 놈도 아니었다.
‘……그리고 아벨이 그렇게 나쁜 놈도 아니고…….’
아무튼 아벨이 그렇게 나쁜 놈이 아니란 것을 믿기로 한다.
‘그나저나 진짜로 바로 시작하려나?’
아벨은 결혼을 마친 후 신혼 여행으로 해양 국가 코렌트의 관광도시 달마티아로 가겠다고 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코렌트의 수도 페르번과 바일 수도 카르발라의 중간지점이었다.
다시 말해 첫 번째 타깃이 코렌트의 신이자 물의 신 에르사의 최고 대신관과 바일의 신이자 불의 여신 베스타의 최고 대신관이 되었던 것이었다.
이번 신혼 여행에서 우선적으로 두 최고 대신관을 없애고 오겠다고 했었다.
‘쉽지 않겠지만 좋은 생각이긴 해.’
확실히 순간이동으로 최고 대신관들을 먼저 없애겠다는 계획은 좋은 생각이었다.
‘아무나 최고 대신관이 된다면 신과 마주할 때 모두 죽어버릴 테니.’
엄청난 신심과 능력을 갖추지 않는다면 신과 직접적으로 마주하여 살아남기 힘들었다. 그래서 최고 대신관과 화신체를 매번 새로 구하는 건 결코 쉽지 않았었다.
화신체들이 평소에 일반 사람처럼 살아서 평범하게 보인 것이었지, 그들은 애초에 선택받을만한 이유가 있어서 선택받은 것이었다.
그러니 최고 대신관들을 모두 없앤다면 당분간은 신의 입을 막을 수 있었다.
신들이 현 상황을 눈치채고 떠들어대기 시작하면 일을 꾸미기가 더 힘들었다.
‘아벨 잘할 수 있겠지?’
조금 전만 하더라도 불만에 툴툴댔는데, 이제는 아벨의 걱정으로 가득하다.
‘아벨이 공간 마법만 제대로 쓸 수 있었다면 좋을 텐데.’
그래도 에이션트 드래곤 때의 기억은 남아있었기에 마족 멸살 후 돌아오는 길에 아벨에게 변신 마법과 공간 마법을 가르쳐 보았었다.
하지만 천하의 아벨이라도 변신 마법은 아예 불가능했고 공간 마법은 흉내만 낼 수 있었다.
‘그래. 흉내라도 낼 수 있는 게 어디야.’
에이션트 드래곤들처럼 세상 끝에서 끝까지의 자유로운 이동은, 다른 이들도 함께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혼자서는 도시 하나 정도는 이동이 가능했다.
그래서 암살을 할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아벨을 바라본다.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다.
‘행복해 보이네…….’
자신과 함께할 때도 저런 얼굴을 보였었는지 떠올려본다.
‘아벨…… 우리도…… 우리도 그래도…… 행복했었지……?’
다행히, 정말 다행히 몇 번 정도는 자신에게도 저런 얼굴을 보여준 기억이 난다.
아벨은 그 행복한 얼굴로 사나와 춤을 추고 있었다.
자신과 예전 그리운 통나무집에서 췄었던 그 우아한 춤을.
* * *
무도회가 끝나갈 때쯤이었다.
폐회를 선언하려던 얀 국왕에게 아벨이 다가간다.
“전하. 무도회가 끝나고 저와 사나가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안 되고?”
“네. 따로 뵀으면 합니다.”
눈치가 빠른 얀 국왕이었다. 다른 중요한 말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네. 내 집무실에서 보지.”
“네. 전하.”
그렇게 뒤로 물러나자 얀 국왕은 곧바로 무도회의 폐회를 알린다.
“오늘은 이쯤 하면 된 것 같소. 내일 정오에 아벨 황자와 사나의 결혼식을 바로 치러야 하니. 그럼 돌아가서 준비하시길 바라오.”
결코 쉬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 누구보다 귀한 자신의 딸의 결혼식인데, 절대 허접하게 치를 생각 없었다.
준비를 하라는 말은 그러한 것에 대한 경고의 뜻도 있었다.
물론 무도회에 참석한 모든 이들은 얀 국왕이 말 안 했어도 단단히 준비를 할 생각이었다.
그 누구의 결혼식도 아닌 미스라임의 보물, 설화雪華의 결혼식이었다. 그것도 이 에브니아 대륙을 구한 용사와 말이다.
그 잘난 용사가 누구와 결혼하느냐가 사실 세기의 관심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공주님과 한다니.
그러한 엄청난 역사적인 사건에 자신이 오점을 남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다들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곧바로 미련 없이 무도회장을 빠져나갔다.
아벨도 무도회장을 빠져나와 사나와 성녀 다프네, 에디린과 비트칸만을 데리고 얀 국왕의 집무실로 갔다.
드륵―
들어가니 얀 국왕이 중앙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얀 국왕은 함께 온 이들을 보고 의외라는 얼굴이다.
아벨이 말한다.
“죄송합니다. 이분들도 계셔야 하셔서 말입니다.”
“괜찮네. 어서 앉게. 다른 이들도 앉으시지요.”
“네. 전하.”
모두 소파에 앉는다.
소파에 앉자 얀 국왕이 묻는다.
“그래. 무슨 일인가? 사위?”
궁금해하는 얀 국왕의 눈을 지그시 더없이 진중하게 바라본다.
“……?”
그 심상치 않은 눈빛에 얀 국왕은 괜히 긴장하고 만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하는 긴장한 얼굴로 다음 말을 기다린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전하. 주신 아그네스께서는 이 에브니아에서 모든 신의 흔적을 지우시길 원하십니다.”
“……?!”
심상치 않은 말을 할 거라 생각은 했었지만 정말 놀랐었다.
부릅뜬 두 눈에서 두 눈알이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다.
“아시다시피 제 사명은 마족 멸살이었습니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저도 그래서 끝난 줄 알았는데, 그런데 주신 아그네스께서 제게 다시 한 번 더 명을 내리셨습니다. 이 에브니아 대륙에서 자신 외의 모든 신의 흔적을 지우라고 ”
이어서 성녀 다프네가 아벨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시켜준다.
“아벨 저하의 말이 맞아요. 그리고 주신 아그네스의 그 의지가 대단히 강력하셔요.”
이젠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용사와 성녀 다프네가 주신 아그네스의 일로 거짓을 말할 리가 절대 없었으니.
“……이럴 수가…….”
사나도 옆에서 아벨을 돕는다.
“아바마마. 최대한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는 아바마마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요. 아바마마의 도움이 없다면 엄청난 혼란이 올 거예요.”
얼떨떨한 얼굴로 자신의 딸을 바라본다.
제발 자신의 아비가 옳은 선택을 하길 바라는 간절한 얼굴이다.
그때 아벨이 덤덤하게 툭 하고 던진다.
“10인회.”
벌떡―!
이번엔 입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다.
“어, 어떻게……?”
“제가 용사입니다. 그리고 제 곁엔 성녀 다프네와 에이션트 드래곤이 있고 말입니다. 그것도 두 분이나. 그런데 제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아…….”
털썩―!
허물어지듯 소파에 주저앉는다.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다.
정말이지 숨기고 싶었던 사실이었다.
특히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딸아이에게 말이다.
그런 그의 처참한 심정을 깨닫고는 아벨이 입을 연다.
“전하. 사나도 다 이해하고 있습니다.”
“맞아요…… 아바마마…… 아바마마께서 미스라임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들과 함께했음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 이제라도…….”
딸아이의 말이 맞았다.
그도 항상 죄책감에 시달렸지 않던가?
이제라도 변할 수 있다면 변하는 게 좋았다.
“……내가…… 내가 뭘 하면 되겠나……?”
담담히 입을 연다.
“저는 10인회를 이용하여 최종적으로는 대륙의 모든 이들에게 이때껏 신들이 인간들을 어떻게 갖고 놀았는지 명백하게 밝힐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큰 유혈이 없이 이 세상에서 신들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드래곤들이 있는데…… 그게 쉽게 되겠는가……?”
잠자코 있던 에디린이 나선다.
“요즘 드래곤들과 연락이 안 되지 않아?”
이번에도 깜짝 놀라 에디린을 바라본다.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얼굴이다.
그 놀란 얼굴을 보고는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에디린은 얀 국왕이 아닌 아벨에게 말한다.
“아직 신들은 모르나 봐.”
아벨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가 보군요.”
“뭐 잘됐네. 아무튼. 국왕. 너무 걱정 마. 주신 아그네스가 이 세상의 모든 드래곤들을 없앴으니까.”
입이 쫘악하고 벌어진다.
드래곤이 어떤 생물이던가?
이 세상 최강의 존재들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모든 드래곤들을 없애셨다니…….
“……그, 그게 사실입니까……?”
“그럼? 내가 거짓말하리? 너한테 뭐 얻을 거 있다고.”
더 놀랄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놀람의 연속이다.
고개를 돌려 아벨을 바라본다.
사실이라는 듯이 아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허허…….”
그 말이 사실임을 깨닫자 또 하나의 의문이 떠오른다.
“그런데 두 분께서는 왜……?”
비트칸이 말한다.
“이 대륙에서 주신 아그네스 외의 신들을 지우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그래서 아벨을 도와주라고 우린 살려준 거지. 이제 네놈도 그만큼 주신 아그네스의 뜻이 단호하다는 걸, 이번만큼은 절대 물리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 모든 말들이 사실이라면 더는 볼 것 없이 아벨을 도와야 했다.
그것이 미스라임이 사는 길일 것이니 말이다.
결정을 내리고 아벨에게 묻는다.
“……알겠네…… 그런데 10인회를 어떻게 이용한다는 것인가……?”
이제부터가 진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었다.
“우선은 제가 최고 대신관들을 죽일 생각입니다. 최대한 빠르게.”
“어떻게……?”
“암살할 생각입니다. 순간이동을 써서.”
“……?!”
“당장 이번 결혼식을 끝낸 후 코렌트의 달마티아로 신혼 여행을 갈 생각인데 그때부터 시작할 예정입니다.”
“신혼 여행 때부터?!”
생에 처음인 신혼 여행이었다.
매우 특별한 날이라는 소리였다.
별 상관없다는 듯이 말을 한다.
“네.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 말입니다. 언제 신들이 주신 아그네스의 생각을 눈치채고 대비할지 모릅니다.”
“그렇긴 하지만…….”
“내일 깊은 밤에, 모든 이들이 잠든 그 시간에 이 세상의 모든 최고 대신관들을 없앨 것입니다.”
벌떡―!
“……?!”
“네?!”
“뭐, 뭐?!”
“그게 말이 되는가?!”
깜짝 놀라 일어난 다프네부터 시작해 사나와 에디린 비트칸도 모두 깜짝 놀라 소리친다.
그들이 듣기로는 내일은 코렌트와 바일의 최고 대신관들만 없앤다고 들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모두 죽이겠다니.
얀 국왕도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이 경악과 걱정스런 얼굴로 조심스럽게 묻는다.
“……정녕 가능하겠는가……?”
이들에게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주기로 한다.
“사실 이러한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건, 제가 순간이동을 넘어 공간이동을 흉내 낼 수 있어서였습니다.”
“고, 공간이동을?”
공간이동을 흉내 낼 수 있다는 건 사나와 다프네, 에디린, 비트칸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흉내만이지 않던가?
그것도 바로 옆 도시에만 갈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 정도 이동해서는 겨우 밤사이에 모든 신의 최고 대신관들을 죽인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데 아벨은 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세상 끝에서 끝으로 이동하던 에이션트 드래곤들만큼은 아니겠지만 저도 최대 나라 간 이동이 가능합니다. 물론 최대로 이동한다면 단번에 녹초가 되겠지만요.”
쾅―!
에디린과 비트칸이 발작하듯 소리친다.
“뭐! 나라 간! 너 그렇게 멀리 못 갔잖아?!”
“거짓말하지 말아라!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먼 거리를! 말도 안 된다! 말도 안 된다고!”
당황하는 그들에게 피식― 한쪽 입꼬리를 올린다.
“후후― 내가 이번 마족 멸살 때 생각보다 많이 성장했더라고.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아벨도 몰랐었다.
나라 간 이동이 가능할 거라고는.
바로 어제 새벽에 어떻게 하면 최대한 빨리, 최대한 많이 죽일 수 있을까 고민하다 혹시나 하고 해봤는데 가능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아벨도 계획을 급히 수정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