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태한 마법 천재-197화 (197/251)

197화. 영웅의 길(5)

‘얘 진짜 미쳤나 봐.’

싸늘하기 그지없는 외형과는 달리, 이리나의 내면은 거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드래곤에게 있어 ‘피’란 어떤 의미인가.

선천적으로 혈족(血族)이라는 의미가 옅은 종족이다.

워낙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생명체였으니까.

허나, 일생에 딱 한 번.

‘알’을 낳을 때만큼은 예외였다.

500살 이하의 해츨링은 혈족이 아니라 일족 차원에서 보호를 해줬으니.

하면, 그 알은 어떻게 낳느냐?

드래곤처럼 고매한 존재들은 짐승마냥 천박하게 허리를 놀리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저 여성체의 성룡이 상대의 피를 받아들이는 걸로 알은 잉태되었으니까.

현실이 이러하니, 드래곤들에게 피는 남다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너, 다 알면서 이러는 거지?”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럼 뭐야. 아이리스의 지식을 모두 얻었다는 건 거짓말이었니?”

“이건 또 무슨… 애당초 제가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잖아요. 만약 드래곤의 지식이 아니라면, 지금 제가 가진 이 힘은 어떻게 설명이 되는데요?”

제법 그럴 듯한 답변에도 불구하고, 이리나는 한참이나 눈앞의 녀석을 찌리릿 노려봤다.

다만, 치솟은 눈꼬리는 금세 가라앉는다.

문득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으니까.

다른 드래곤도 아니고 그 아이리스다.

일족 제일의 괴짜라 불렸던 존재.

이리나는 실제로 그를 직접 만나기까지 했다.

그것도 제법 오랫동안.

아이리스는 애초에 제 관심 밖의 일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을 망룡이었다.

‘참나, 그럼 진짜 치료제 때문이라는 소리잖아?’

마침내 의문이 해소되었다.

한데 도리어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직후, 그 감정은 끝내 외부로 표출되었다.

“너. 이제 그만 가라.”

“……?”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을 향해,

“맞고 갈래, 그냥 갈래?”

이리나는 슬며시 주먹감자를 들이밀었다.

움찔한 녀석이 대번에 몇 걸음 뒤로 물러선다.

“아니, 이게 뭔… 알아듣기 쉽게 설명이라도 해줘야 알지.”

“알지는 반말이고.”

“요.”

“…됐어, 아무리 생각해도 설명해 봐야 나만 손해인 것 같으니까. 피는… 으흠. 하던 일만 마저 끝나면 내어줄 테니, 정수는 그 앞에 놓고 가라.”

말을 마친 이리나가 빠르게 손을 휘저었다.

…마치,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애써 부정하려는 양.

***

“진짜 왜 저래?”

지금 막 이리나와 헤어진 나는 연신 혼자서 구시렁거렸다.

그녀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까.

“피 좀 나눠 주는 게 뭐라고 저리 유세인지…….”

우웅! 우웅!

때마침, 품 안에서 진동음이 들려왔다.

상념을 털어낸 내가 곧장 그쪽으로 손을 가져가자,

화아악!

이내 빛나는 통신용 수정구 위로 실비아의 얼굴이 떠오른다.

- 어디야?

“어딘들.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이리 찾으시는지?”

- …뭐야, 이 반응은 뭐지? 왜 이렇게 뿔이 나 있대?

그제야 슬며시 구겨졌던 미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비단 방금의 일뿐만이 아니라, 요즘 들어 부쩍 혼자서만 개고생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어지간히도 답답하여 내가 직접 움직이는 거기는 하지만,

‘연합이고 테라고. 나는 이리 고생하는데, 아직도 아군끼리 파를 나누고 정치 싸움 따위나 해대고 있으니. 짜증이 안 날 수가 있나.’

내 잇새로 절로 나직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현실이 그렇다곤 해도 애꿎은 사람에게 화풀이할 수는 없는 법이다.

척 봐도 실비아는 상당히 노력하고 있었으니까.

눈 밑에 드리워진 짙은 다크써클이 그 증거였다.

- 이번에는 한숨?

“아니. 그래서, 무슨 일인데?”

- …지금 연합 사람들이랑 함께 있어.

“그런데?”

- 네 예상대로, 다들 난리가 났다고. 마탑에 억류되었던 고위급 인사들이 풀려나고, 무엇보다 그 ‘염화의 마탑주’가 사망했다는 소식 때문에.

“하여튼 정보 하나는 더럽게 빨라요. 하기야, 듣는 귀라도 있어야 이리저리 붙어먹는 것도 수월할 테니.”

- …이제야 대충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네. 아무튼, 그때도 말했다시피 나는 손해만 보고는 못 사는 성격이야. 이제 전(全) 국가적인 은인이 된 네게, 나는 연합군을 상대로 힘을 실어달라고 요구했어.

“구체적으로 어떻게?”

- 각국의 마스터들과 고위 마법사들이 포함된 연합군 모두가 너를 지지해 주는 거야. 그리되면, 연합 내에서 네 위치도 비약적으로 올라가겠지. 문자 그대로, 초국가적인 ‘영웅’이 되는 거야.

“…아마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거 같은데? 이 와중에도 제 이권이 얼마나 될지 머리를 굴리는 인간들이니까.”

자못 회의적인 내 반응에도 실비아는 그저 묘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이제는 생각대로 안 될걸?

“…응?”

- 일단 당사자와 직접 마주한 뒤에 얘기하고 싶다니까, 지금 바로 대회의실로 오도록 해.

***

약 10여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나는 대회의실에 도착했다.

“…….”

고요한 침묵 속, 이미 무수한 사람들이 나 하나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대중으로 봐도 대략 오십?

최소 그 이상은 될 듯싶다.

마스터와 5써클 이상의 마법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작위가 높은 이들도 대부분 참석한 모양이다.

물론 한쪽에는 인버스 공작과 실비아를 포함한 테라 쪽 인사들도 자리해 있었다.

“사실인가?”

그리고, 그들은 도착한 내게 딱 한마디만을 물어왔다.

미리 대표자를 정했는지, 마스터 샤네르 공작이 내 눈을 직시했다.

“다짜고짜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염화의 마탑주를 꺾었다는 얘기 말이네.”

어지간히도 급한 모양이다.

행동에 앞서 계산부터 해대는 인사들이, 이리 직설적으로 물어오고 있었으니.

“그렇다면요?”

“…확실하게 얘기해 주게. 이건 우리에게도 중요한 문제니까.”

“중요하다는 걸 아신다면, 인사가 먼저 아닐까요?”

“뭐라고?”

“딱히 유세 부릴 생각은 없는데요. 그래도 제가 여러분의 소중한 국민들을 구했다는 사실은 이미 들어 알고 계실 거잖아요? 당사자들에게 직접 들으셨을 테니까요.”

“…….”

그제야 샤네르 공작의 굳건한 동공이 흔들렸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분분히 내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설마하니 내가 초장부터 이리 강하게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겠지.

물론 내가 이러는 데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

분위기로 보아, 이들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금세 알아챌 수 있었기에.

예의 ‘그’ 약속 때문이다.

계산과 정치에 밝은 이들이니, 이제야 확실하게 눈치챈 거겠지.

구명의 은혜는, 같은 구명의 은혜로 갚는다.

그 추상적인 약속이 추후 얼마나 거대한 파급력을 가져올지.

“눈치 싸움은 이만하시죠?”

“……!”

나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이대로라면, 연합군은 필연적으로 제국군에게 패할 수밖에 없을 것인즉.

차라리 이곳에서 담판을 짓기로 작정했다.

“제가 사람들에게 가패(家牌)를 받은 것이 불만들이신가요?”

“그, 그건…….”

정곡을 찌르는 내 말에, 몇몇 사람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저라고 그렇게까지 하고 싶었겠습니까? 전쟁통의 약속이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인지, 적어도 여기 계신 분들은 잘들 알고 계실 텐데요?”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인버스 공작이 ‘툭’ 하고 말을 내뱉었다.

“그렇다곤 해도 굳이 가패까지야.”

“……?”

“중간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네만, 그건 신뢰의 문제가 아니겠나? 국가 간의 관계를 생각하면, 하등 불필요한 일이었다는 말이지. 스스로 상대를 믿지 않는다고 공표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니까.”

“…….”

“이그니스 백작이 아직 어려서 정치는 잘 모르는 모양이군.”

끝내 속을 긁어대는 말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뱉어내는 그였다.

일전의 앙심을 이런 식으로 돌려주시겠다?

“흠… 하긴 이그니스 백작은 아직 스물도 채 되지 않았다지요?”

“우리 아들놈이랑 동갑이구먼.”

“그 나이라면 저 정도 패기도 있어야지요. 아직 뭘 모를 나이가 아닙니까?”

이에, 타국의 귀족들까지 기세가 등등해졌다.

당장 같은 편이라 생각했던 인버스 공작이 저런 반응이었으니.

저들의 입장에서는 이때다 싶은 거겠지.

‘결국 이렇게 되는군.’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쉰 내가 구석을 바라봤다.

인버스 공작은 보이지 않게 빙글빙글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이번 일로 확실하게 깨달은 사실은…

잡초는 밟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뿌리까지 뽑아야 한다는 것.

‘…바이커와 크리스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니지. 그들도 저 인간을 원망하고 있으니…….’

솟구치는 살심을 애써 억눌렀다.

한데, 그 직후 내 눈앞에서 의외의 상황이 펼쳐졌다.

“그만. 우리는 이그니스 백작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를 은혜로 갚지는 못해도, 원수로 갚아서는 안 되는 법 아니겠습니까?”

“…….”

“그는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혼자 힘으로 해냈습니다. 그건 나이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지요.”

예의 노르망의 샤네르 공작이었다.

일찍이 환갑을 넘어선 그는, 자못 우묵한 눈으로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이그니스 백작은 이미 대륙의 영웅입니다. 그리고…….”

찰나 머뭇거리던 샤네르 공작이 잠시 후 눈을 빛냈다.

“…만약 자네가 염화의 마탑주를 일대일로 꺾은 게 사실이라면… 어쩌면, 전 대륙의 마법사들을 하나로 모을 수도 있을 거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수장은 죽었지만, 조직은 그대로 남아 있지 않나?”

“……!”

그제야 나는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보다시피, 외형과는 달리 겁이 많은 사람들이네. 확실한 무언가를 보여주지 않는 이상, 연합군은 절대로 제 모든 것을 투자하려 하지 않을 게야. 실패가 곧 죽음이니까.”

“…….”

내 시선이 그 너머를 향했다.

저들의 마음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내 옆에는 그 최대 피해자인 유리나도 있었으니까.

자리도, 가문도, 가족도.

패배하면 모든 것을 잃는 현실.

이건, ‘전쟁’이니까.

“그러니, 우선 그 마법사들의 지지부터 얻어줬으면 좋겠네. 그리하면 우리도 자네에게 힘을 실어주지. 아니, 아예 본국으로 돌아가 주변 귀족들까지 설득하겠네. 자네를, 연합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대우해 달라고 말이야.”

“…….”

“그 정도는 되어야 제국군과 일전을 벌여볼 수 있지 않겠나? 다들 속은 불안하기 짝이 없을 게야. 이리 눈치 싸움만 벌이다가 다 함께 죽을 수도 있는 법이니.”

그제야 나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제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간단하네. 그냥 자네 혼자서 다 해먹게.”

“……!”

언젠가 페르에게도 들은 적이 있는 말에, 내 눈이 조금 크게 뜨여졌다.

“남 좋은 일은 이만하고. 이제부터 자네가 블레어 던 마그마르의 모든 것을 취하게. 대륙 1위의 마법사라는 타이틀도, 그가 가졌던 조직도.”

다만, 이런 생각까지는 나조차 하지 못했다.

그 말인즉, 마탑 전체를 내 휘하에 두라는 뜻이 아닌가?

“절반의 마탑주들이 이미 자네를 지지하고 있다지?”

“…오해십니다. 그분들의 마음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최소한 내가 들은 정보로는 그렇네. 우선 그들과 함께 친 제국 성향의 마탑주들부터 찍어 누르게. 그리하여, 완전히 새로운 마탑으로 거듭나게.”

“…….”

“아예 세력 싸움 따위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열두 마탑을 ‘하나’로 통합해. 그리고…….”

순간, 모든 사람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하나로 통합된 그곳의 초대 마탑주는, 자네가 되도록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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