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영웅의 길(4)
나, 그리고 세 명의 마스터.
서로가 서로를 바라본다.
한 폭의 전장은 이미 만들어진 지 오래였다.
뒤쪽에는 굳건한 성벽이 자리해 있었고.
앞으로는 십만의 군사들이 끝을 모르고 줄을 잇고 있다.
내가 염화의 마탑주를 꺾었다는 소문은 금세 대륙 전체로 퍼져 나갈 터였다.
하니, 지금의 이 해프닝도 그 불씨에 기름을 끼얹을 것인즉.
“들어오세요.”
“……!”
나는 짐짓 도발적으로 손가락을 까딱였다.
‘마법사 나부랭이가 감히…’ 혹은 ‘어린 애송이 놈이…’ 따위의 빈정거림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만큼 내 위상이 드높아졌다는 반증이었다.
스팟!
“안 오시면 제가 갑니다.”
“……!”
‘다’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빗살같이 움직였다.
첫 번째 목표는 좌측, 노르망 왕국의 샤네르 공작이었다.
우우우웅!
직후, 한줄기 공명음과 동시에 그의 검 위로 선명한 오러가 솟아올랐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마스터의 상징.
그야말로 완벽한 검기(劍氣)다.
쐐애애애애애액!
그것은 곧, 망설임 없이 이쪽으로 ‘쭈욱’ 하고 뻗어왔다.
거리를 격하고.
마치 원거리에 있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키면서.
대략 10여 미터는 족히 떨어진 거리였건만, 샤네르 공작은 조금도 괘념치 않았다.
“…공간검(空間劍) 샤네르 공작.”
이윽고 상대의 칭호를 떠올린 내가 손을 털었다.
당황했느냐고?
천만에!
이들은 장차 아군이 될 존재들이다.
도리어 이 정도도 해주지 못하면, 내 쪽에서 사양이다.
주르르륵! 스팟!
그 즉시 몸을 멈춰 세웠다.
그리곤 마력 검 두 개를 연이어 쏘아 보냈다.
쩌저정!
급히 검을 회수한 샤네르 공작이 곧장 내 마력 검을 쳐냈다.
허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촤르르르르르르르르!
“……!”
마력 검은 고작 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기묘한 쇳소리가 울린 직후, 샤네르 공작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최초 두 개에 불과했던 마력 검은 순식간에 ‘백’ 단위로 불어났으니까.
“이런 미친…!”
하나하나가 검기로 직접 쳐내야지만 방어가 가능한 일격.
그런 농도 짙은 마력 검이 자그마치 이백에 달했다.
게다가, 그것들은 무한에 가까운 내 마나를 빨아들이며 점차 크기까지 부풀려 갔다.
꿀꺽.
샤네르 공작의 목울대가 크게 꿀렁였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서로에게 검을 겨누면서도, 이쪽을 예의주시하던 다른 두 사내 또한 마찬가지였다.
“몽클레어 후작?”
“…말씀하시지요, 루이비트 공작님.”
“대체 왜 그랬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걸 보고도 비겁자니 마니 하는 말을 왜 했느냔 말이오.”
“…실은 저도 후회하고 있던 참입니다. 우리 리비아의 레베카 공작 영애가 왜 제게 그리 신신당부했는지, 이제야 알 것도 같군요.”
“하면, 고작 그녀의 조언 때문이었단 뜻이오?”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요. 셋이서 한 번에 덤빈다? 그건 제 신념에도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마스터 존심이 있지요.”
“그거야 그렇지만…….”
“당장 어디서 소문이라도 나 보십시오. 역시 왕국의 마스터는 제국 출신들에게 안 된다. 능력도 부족한 것들이 이름만 거창한 반푼이들이다. 이따위 말들이 들려오지 않겠습니까? 혹여나 지더라도 그딴 개소리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마치 바로 옆에서 대화라도 나누는 듯, 두 사내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내 귀로 틀어박혔다.
그만큼 현재 내 감각이 활성화되어 있다는 뜻이리라.
그보다, 만약 자존심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라면…
‘…의외로 쉽게 정리되겠는데?’
생각을 정리하는 즉시, 나는 곧장 입을 열었다.
“…샤네르 공작님이라고 하셨습니까?”
“……!”
이마 위로 연신 식은땀을 흘려대던 상대가 대번에 내게로 시선을 던졌다.
“이대로 더 싸우면, 누구 하나는 반드시 피를 보지 않겠습니까?”
“…어?”
“고작 한 번의 충돌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서로 전력을 다하지 않고서는 승부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듯해서요.”
“…….”
“아님, 저 혼자만의 착각인 겁니까? 만약 봐주고 계신 거라면 무척이나 송구스러운 말씀이었겠습니다만…….”
말끝을 흐리며 다시금 자세를 잡는 나를 발견한 샤네르 공작이 황급히 대답한다.
“아, 물론 그렇지. 과연 7써클 마법사네. 마스터를 상대로 근접전에서 이만한 기세라니. 아무래도 나 또한 진지하게 임해야 승부를 낼 수 있을 듯싶으이.”
“물론 그런 일은 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평시도 아닌 전시니까요. 혹여나 한쪽이 크게 다쳐 부상이라도 당한다면, 그것만큼 멍청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 분명 저 황제도, 제국군들도. 모두 비웃을 게야.”
“이만하실까요?”
“그럴까?”
철커덕!
샤네르 공작이 기다렸다는 듯 잽싸게 제 검을 집어넣었다.
이에, 나 또한 허공 위의 마력 검들을 모조리 디스펠했다.
파창창!
곧 유리창 깨지는 소음과 동시에, 마력 검의 부산물인 마나 가루들이 주변으로 흩날렸다.
“…….”
돌아가는 양을 지켜보던 다른 두 사내도 그제야 머쓱한 표정으로 검을 회수했다.
“크흠. 듣고 보니 그렇군.”
“실력은 이 정도 봤으면 충분하니까요.”
“그렇지. 역시 7써클은 대단하군.”
이윽고 세 사내의 고개가 동시에 내 쪽을 향했다.
“역시 같은 검사들끼리 경쟁하는 것보단, 마법사에게 지휘권을 맡기는 편이 낫겠지요?”
“그 말이 옳소. 우리 중 전쟁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고, 몸 쓰는 사람은 몸만 써야지. 애당초 생각은 마법사들이 훨씬 깊지요. 각자 살아온 환경이 다른 법이니까요.”
“더군다나, 다른 마탑주들도 이그니스 백작을 돕는다지 않습니까?”
순식간에 태세 전환을 이루는 세 사내를 보며 내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이미 출발 전부터 서로 합의를 본 듯했다.
어차피 저들은 골든 버드 상단에서 얻을 수 있는 실익은 이미 모두 취했을 테니까.
더하여, 특정 경쟁국이 지휘권을 쥐는 것보다는, 최근까지 내전의 홍역을 앓은 테라에서 지휘를 맡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겠지.
어디 그뿐인가?
엄밀히 얘기하면 명분도 이쪽에 있었다.
이번 전장은 다른 곳도 아닌 테라의 국토(國土)니까.
물론, 현실이 그렇다곤 해도 나는 이들의 자존심도 챙겨줘야 한다.
앞으로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세 분의 배려에 진심으로 감동했습니다. 똥개도 제 집에선 반은 먹고 들어간다지 않습니까?”
“뭘 또 똥개까지야…….”
“그만큼 세 분의 대해와도 같은 이해심에 감사드린다는 말이지요. 기대에 부응해, 지형지물을 확실하게 이용하여 전략을 짜보도록 하겠습니다.”
“거참, 말도 똑 부러지게 잘하는구먼.”
그제야 세 마스터의 얼굴에도 슬금슬금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런 단순한 칼잡이들 같으니라고.
***
나는 오랜만에 ‘내 사람’이라 부를 만한 이들과 한자리에 모였다.
세논 스승님은 물론이고.
환상의 마탑주 에반젤린 페리시.
거기에 실비아와 루나, 유리나까지.
…가만, 한 사람이 비는데?
“에이스 스승님은요?”
고개를 갸웃한 내가 곧장 마음속의 의문을 토해냈다.
“녀석은 아직 국경에 있어.”
“…아. 스란 공국군 쪽이죠? 그러고 보니 그쪽도 문제네요.”
제국군에 이어 공국군까지.
테라 입장에서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다.
무시 못 할 적군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니까.
‘분명 문제기는 한데… 그쪽은 딱히 걱정은 되지 않는다는 말이지.’
다만, 내 진짜 속내는 이랬다.
이건 에이스 스승님 쪽보다는 오히려…
‘…제노스 델 카이클.’
그 녀석도 국경에 있었으니까.
잠재적 적일 때는 그렇게 골치가 아프더니, 아군이 되자 이 이상 든든할 수가 없었다.
“그보다, 나한테조차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일을 거하게 벌였더구나.”
그때, 상념을 깨는 세논 스승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승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스승이 얘기하고 있는 건 안 보이는 모양이지?”
“중요한 이야기라서요.”
“…뭔데?”
“제가 블레어 던 마그마르를 죽였습니다.”
“……?”
내 말이 퍽이나 의외였는지, 세논 스승님은 한참이나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었다.
“……!”
잠시 후, 점차 그 두 눈이 크게 뜨여졌다.
염화의 마탑주는 한때 스승님이 구성원으로 계셨던 빛의 일족, ‘아락서스’를 몰살시킨 주범이니까.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에, 나는 그간 있었던 일들을 보다 자세하게 설명했다.
궁금했던 건 비단 스승님뿐만은 아니었는지, 대번에 사람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대단해. 진짜 대단해. 세상에, 그 블레어 던 마그마르를 일대일로 꺾을 줄이야…….”
이윽고 내가 모든 설명을 마쳤을 때, 가장 먼저 환상의 마탑주 에반젤린 페리시가 연신 감탄사를 터뜨렸다.
“이거 어쩌면… 상당히 좋은 카드가 될 수 있겠는데?”
“실비아, 그게 무슨 뜻이야?”
“마탑의 마법사들은 모두 그곳에 남겨두고 왔다면서.”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잭 디스페로우의 부상이 무척이나 심각했거든. 일단 스실라 씨가 상처를 살펴보고는 있는데… 아마 힘들 거야. 나는 그 부상을 치료할 방법을 지금부터 찾아볼 생각이고.”
“치유의 마탑주 님도 방법이 없는데, 너는 있다고?”
“아마도?”
“…….”
자신만만한 내 대답에, 실비아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물론 구태여 더 캐묻지도 않았다.
그간 내가 워낙 대단한 일들을 많이 보여줬어야 말이지.
당장 그 염화의 마탑주를 제거했다는 말에도, 스승님과 또래 세 여인만큼은 크게 놀란 기색도 아니었으니.
“…일단 마탑 쪽은 네가 알아서 처리하는 걸로 알게. 나는 이대로 연합 측과 접촉해 봐야겠으니까.”
“마탑은 그렇다 치고, 연합은 또 왜?”
“마법사들이 이미 너에 대한 소문을 쫙 퍼뜨려 놨을 거 아니니? 지금쯤 억류된 인사들이 모두 풀려났다는 얘기도 귀에 들어갔을 테고.”
“그런데?”
“그러니까, 이걸로 본격적인 협상 테이블을 꾸려봐야지.”
직후, 실비아가 근래에 보기 드문 환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이건 이제 개인 대 개인이 아닌, 대 국가 간의 ‘외교’니까.”
***
동료들과의 재회를 마친 직후.
잭 디스페로우의 치료제를 구하기 위해 나는 다시 또 이리나를 찾았다.
방을 나서기 전, 루나가 상당히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내게 다가섰지만 지금은 이쪽이 더 급선무였으니까.
“역시 저기에 있나?”
이리나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기운을 쫓아가자, 예의 성 지붕에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으니까.
한데, 분명 내 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그녀는 나를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보다시피 내가 지금 좀 바빠.”
그러면서, ‘흐음, 흐음’ 하는 드래곤답지 않은 추임새를 연이어 뱉어내는 그녀였다.
새하얀 손으로 내가 맡긴 목걸이를 연신 쪼물딱대면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 또한 괜히 흥미가 동했다.
“뭐 좀 알아내셨어요?”
“조금은?”
“…그래요? 일하시는 데 방해해서 죄송한데요.”
“알면 좀 사라져 있고.”
“제가 꽤나 진귀한 물건을 얻었거든요?”
“……?”
그제야 이리나의 시선이 내 쪽을 향했다.
“원하시면 이거 드릴게요.”
“그게 뭔… 뭐야, 불사조의 정수?”
곧 내 손 위에 놓인 주먹만 한 붉은 구체를 발견한 이리나가 눈을 크게 떴다.
“바로 알아보시네요. 지금 제게는 딱히 필요도 없는 물건이라.”
이건 진심이었다.
이미 레드 드래곤의 하트 조각까지 취한 마당에, 불사조의 정수는 내게 특별한 효용도 없었으니까.
일전의 전투에서도 느꼈지만, 이건 하트 조각의 딱 하위호환이었다.
다만, 상대가 드래곤이라면 얘기가 또 다르다.
일단 불사조는 무척이나 희귀한 생명체였으니까.
전 대륙에 딱 한 마리.
그걸 블레어 마탑주가 죽인 것이다.
알을 남겼다면 또 다른 한 마리가 태어났겠지만, 글쎄.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한 인간의 욕심으로 종 자체가 멸종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탐욕 많기로 유명한 드래곤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 리가 없다.
“…흥미는 있는데, 원하는 게 뭐야? 목걸이로 알게 된 정보를 네게도 공유해 달라, 뭐 이런 걸 요구할 셈인가?”
“그거야 이미 약속했던 거고요.”
“뭐?”
“그때 분명 말씀하셨잖아요. 이리나 님에게 맡기면 제게도 훨씬 이득일 거라고. 나도 목걸이에 대해 잘 모르지 않냐고.”
“하? 다시 말해, 남이 노력한 부산물을 그냥 날로 먹으시겠다?”
“싫음 지금 돌려주시던가요.”
“뭐라고? 시간까지 정해두고 목걸이를 맡긴 건 너야.”
“자꾸 다른 말씀을 하시니까 그렇죠.”
그제야 이리나가 입을 다물었다.
불만이 많은지 그 상태로 연신 꿍시렁댔지만, 단지 그뿐이다.
명분은 분명히 이쪽에 있었으니까.
“아무튼 정보는 기본이고요. 이거 드릴 테니까, 물건 하나만 구해주세요.”
“물건?”
“구한다기보다는, 그냥 적선하신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네요.”
“알아듣기 쉽게 얘기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피 좀 나눠 주세요. 헌혈한다 생각하시고.”
“…뭣!?”
이어지는 내 말에, 이리나의 두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그녀의 피.
즉, 드래곤 블러드다.
그걸 중화시켜 내가 만든 특제 포션에 섞어 넣는다.
달리 마법의 종족이라 불리는 존재인 만큼, 혈류 속에는 상상도 못할 어마무시한 마력이 잠재되어 있을 테니.
물론, 그 외에도 재료는 상당히 많이 필요했다.
하지만 가장 핵심은 이 ‘드래곤 블러드’였다.
이걸 구하지 못하면, 치료제 제조는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할 테니까.
“이리나 님 피면 더 좋을 것 같아서요. 드래곤의 피니 쉽게 응고되지는 않을 테지만, 이왕이면 프레쉬(?)한 게 좋잖아요? 생명체의 치료제로 쓰일 용도니까.”
푸들푸들.
내 말에도 이리나는 가만히 제 전신만 떨어댔다.
…뭐야, 반응이 왜 저래?
“……?”
어느새 그녀의 얼굴이 폭발 직전의 활화산처럼 시뻘겋게 변했다.
물론, 나로서는 자못 얼이 빠지는 상황이었다.
이게 저 정도로 분노할 만한 요구인가?
“…야.”
“네?”
“너… 분명히 아이리스의 지식들을 머릿속에 박아 넣고 있다고 하지 않았었냐?”
“……?”
허나, 그런 와중에도 이리나는 여전히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물음만 던져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