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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한 마법 천재-56화 (56/251)

56화. 남자친구가 질투해서요

나는 또, 언젠가 경험했던 백색의 공간으로 옮겨와 있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는데?”

그곳에는 예상대로 나를 퍽 닮은 사내가 홀로 서 있었다.

“이 정도면 빠른 편 아닌가요?”

“아니. 그릇이 달라져서 그런가? 생각보다 마법에 재능이 없는 듯한데…….”

“제 나이에, 그것도 3년 만에 6써클 마스터면 느리진 않은 것 같은데요.”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을 기준으로고. 내가 드래곤이었을 때는 해츨링 시절에 이미 8써클까지 다 뗐지, 아마?”

“그러니까요.”

“…엉?”

“500살 이하의 드래곤들을 전부 해츨링이라고 부른다면서요? 그에 비해 저는 아직 열아홉밖에 되지 않았고요.”

“…….”

“제가 이겼네요, 인정?”

말을 하면서도 연신 피식피식 실소가 새어 나왔다.

목걸이 안에 잠들어 있는 것은 ‘자아’를 가진 내 전생, 아이리스의 기억.

다시 말해, 나는 지금 내 자신에게 대화를 걸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누군가 이 모습을 본다면, 딱 자폐아 정도로 생각하지 않을까?

“…갑자기 진지하게 드는 생각인데, 다른 생명체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이랬을까?”

“무슨 말씀이세요?”

“너 지금 졸라 재수 없다고.”

“…제 얼굴에 침 뱉는데도 취미가 있으신 모양이네요.”

벙 찐 표정의 나를 향해 한차례 어깨를 으쓱한 상대가 계속 말했다.

“진심이니까.”

“…….”

“각설하고, 2번째 조각 안에 각인 되어 있는 것은 인간의 몸으로 ‘어둠’을 제외한 모든 주력의 마나를 다룰 수 있는 방법이다.”

“……!”

“거기에, 해츨링 시절의 내 기억들이 조금?”

뒷얘기는 더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둠이라 함은… 흑마법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역시 그것부터 물어볼 줄 알았지. 이래서 너와 나는 완벽히 다른 존재라는 거다.”

“……!”

“나라면 당장에 그 방법이라는 것부터 물었을 거거든. 다른 생명체의, 그것도 고작 인간의 안위 따위를 걱정하는 드래곤이라니. 웃기지도 않은 일이지.”

“…….”

“아무튼, 결론부터 답하자면 달라. 신성력과 빛의 마나가 다르듯, 마기와 어둠의 마나 또한 별개니까. 하니, 이걸 추적하여 그를 찾겠다느니 하는 생각은 버려라.”

기대한 만큼 실망도 컸기 때문일까?

나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그런 표정 지으면 괜히 내가 미안해지는데.”

곧 제 머리를 긁적인 상대가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혹시 해츨링 시절의 내 기억은 궁금하지 않냐?”

“딱히…….”

“하기야 뭐, 특별할 것도 없지만. 내게도 어미와 아비가 있었다는 사실 정도가 단가?”

“…네?”

이건 처음 알았다.

드래곤이라는 지고한 생명체에게도 부모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하여, 그 기억부터 보여주고 부탁이라는 걸 좀 하고 싶었다.”

“……?”

“참고로 조각은 정확히 6조각이고, 영혼 이탈 마법을 시전할 당시 내 나이가 3,000을 조금 넘긴 상태였으니. 대략 3,000년의 기억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차적으로 배분해 뒀다. 각 조각마다 말이다.”

“…썩 궁금하네요. 드래곤의 기억이라니. 어찌 보면 마법사들이 그토록 추구하는 진리의 끝자락이, 이 조각들 안에 담겨 있을지도 모르는 거잖아요?”

마법사들은 끝없이 진리를 추구하는 존재들이다.

세상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신이라는 존재는 정말 존재하는지.

최초의 인간은, 진정 그 신이 탄생시켰는지.

만약 그렇다면 ‘인간’도 신이 될 수 있는지.

그래서 마법사들은 생각한다.

소위 세상의 모든 지식들을 섭렵하고 진리의 끝을 보게 되면, 신이 될 방법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희노애락이라는 인간의 틀을 벗어난, 완전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더하여, 지상에서 신에 가장 가까운 생명체라 불리는 드래곤이라면, 조금은 진리의 끝자락이나마 맛보지 않았을까?

“글쎄… 적어도 드래곤인 나로서는 그 진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만, 인간 세타 쿤 이그니스의 관점에서 그 지식들을 얻는다면 또 모르는 일이지.”

어느새 내 생각을 꿰뚫어 본 상대가 말했다.

“하니, 네가 걷고 있는 길을 끝까지 가보라고. 혹시 알아? 나도 몰랐던 그 끝자락을, 너라면 붙잡을 수 있을지.”

“…신 따위에 관심이 있어 물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그러시겠지. 그래도 세상 그 누구보다 너를 잘 알고 있는 나인데. 그걸 모를까?”

“…….”

“뭐 그럼, 준비는 됐냐?”

“네?”

순간 멍하니 반문하는 나를 보며 사내가 씨익 미소 지었다.

그리곤, 내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곧장 제 손을 뻗어냈다.

“기억 들어간다고. 조금 고통스러울 수도 있으니, 어금니 꽉 깨물어라.”

“……!”

***

다음날 아침.

속은 울렁거렸고, 머리는 아직도 어지러웠다.

밤새 몇 번이나 속에 있는 내용물들을 게워냈는지 모르겠다.

기억이 강제로 주입되는 일은 그만큼이나 고통스러웠으니까.

그래서인지 이제는 상당히 허기가 졌다.

“…밥부터 먹자.”

“야!”

허나, 이런 내 소소한 계획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지금 막 1층으로 내려온 나를 발견한 유리나가 곧장 이쪽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대진표 정해졌다는 소식 들었냐?”

“아니.”

“들리는 소문에, 마탑에서 머리를 상당히 잘 썼다고 하더라. 대전 접수 당시의 발현된 색깔에 따라, 참가자들을 적절하게 뒤섞었다는데…….”

순간 말을 잇던 유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너 어디 아프냐?”

“그냥, 배가 좀 고파서.”

“네 몰골만 보면 고작 배가 고픈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유리나의 표정 위로 얼핏 걱정스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괜찮아. 그보다, 색깔에 따라 참가자들을 적절하게 섞었다니? 초반부터 비슷한 실력자들끼리 맞붙게 했다는 뜻이야?”

“아니. 물론 그리하면 초반 흥행몰이는 가능하겠지만, 오히려 가장 중요한 후반부에는 흥미가 떨어지겠지.”

“그럼?”

“마탑도 영웅 좋아해. 압도적인 실력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고 단번에 우승까지. 그렇게 탄생한 영웅들이 마탑에 소속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지. 자연히 조직의 위상도 드높아질 테니까.”

“하지만 배보다는 배꼽에 관심이 많다고, 구태여 마탑에 소속되려 하지 않는 이들도 있을 텐데.”

“일단은 회유하려 들겠지. 그래도 안 되면, 그때 가서 철저하게 부수어 놓으려 할 거고. 남 좋은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조직이니까.”

“너무 나간 것 아니야?”

“억측이라고? 글쎄…….”

찰나 말끝을 흐리던 유리나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 사람을 이미 한 명 알고 있어서.”

“뭐라고?”

“아무튼, 마탑은 16강 안에 드는 이들만큼은 반드시 품에 안으려고 들 거라고. 그게 마법 대전의 주목적이기도 하니까.”

“…그런 거라면 한 자리는 텄네.”

“어?”

“대진표만 괜찮다면, 그 정도는 무리 없이 해낼 거라 예상되는 애가 한 명 있어서.”

이어지는 내 말에 유리나가 알만하다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제노스 델 카이클?”

“아, 걔도 있었네.”

“뭐야, 그럼 다른 애가 또 있다는 뜻이야? 설마 자기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닐 테고.”

“말고. 연합에서 사귄 내 친구.”

“자유 연합에 그만한 인재가 있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유리나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다 치고, 걔는 나랑 생각이 다른 모양이네. 자유 연합이라는 소속이 있으니, 제 발로 마탑으로 들어갈 기회를 걷어찬다는 뜻이잖아?”

“넌 아니라고?”

“어. 국가와는 별개로, 나는 소속된 집단이 없으니까. 미래를 위해서라도, 마탑이라는 선택은 매력적인 게 사실이지.”

“…….”

애써 밝게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왜인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몸이 연합에 있다고, 테라에 대한 소식까지 완전히 끊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내전 초창기.

반역자들을 몰아내자며 가장 먼저 들고 일어난 귀족들이 있었다.

특히 왕궁과 가까운 수도권 인근의 영주들을 중심으로.

그중에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유리나의 아버지, 아리에나 자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실례가 아니라면 합석을 해도 괜찮을지요?”

“……?”

내가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새로운 목소리가 귓가로 틀어박혔다.

어느새 텅 비었던 홀 내부는 반쯤 들어차 있었고, 상당히 눈에 띄는 2남 1녀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아직 비어 있는 자리도 많은데요.”

“보시다시피, 비어 있는 자리는 많지만 이만한 미인이 함께하는 자리는 이곳뿐이라.”

버터 수십 통은 통째 들이부은 듯, 느끼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린 선두의 사내가 말했다.

쌍꺼풀이 진한 모양새가, 생긴 것도 퍽이나 속을 니글거리게 만드는 그런 사내였다.

“혹, 아름다운 레이디께서는 출신지가 어디신지요? 아, 오해는 마십시오. 제가 아는 누군가랑 너무나 닮으셔서 이리 결례를 무릅쓰고 여쭙습니다.”

“…테라 출신이에요.”

뻔한 수작질이었지만 예상외로 유리나는 선선히 대답해 줬다.

“과연, 테라에는 마법만큼이나 뛰어난 미인들이 많다더니.”

“그쪽 분들은 제국에서 온 사람들이죠?”

“……!”

순간 두 사내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힐끗, 그 모습을 바라본 내가 속삭였다.

“제국에서 온 사람들이라니?”

“파동의 마법사, 트라오레 가문의 장남이야. 옆에 조용히 있는 사람은 모래의 마법사 에이젠 가문의 차남이고.”

“아, 제국의 양대산맥이라 불리는 그…?”

나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일행들을 둘러봤다.

기사의 제국이라고까지 불리는 스왈로우였지만, 그렇다고 마법사들이 아주 약하냐면, 그도 아니었다.

전쟁을 가장 오랜 세월 치러 온 국가답게.

전쟁에서 마법사가 가지는 힘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그들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뒤쪽에 한 걸음 물러나 계신 여성분은, 그 유명하신 쟈벨린 경이겠네요.”

“……!”

유리나와 비슷한 적발에 짧게 친 숏 컷.

분명 누가 봐도 미인이었으나, 볼을 가로지르는 깊은 검상이 유일한 흠인 여인이 미소 지었다.

“재밌는 아가씨네? 드락서스의 짝짓기 놀음에 딱히 끼어들 생각은 없었는데, 정체가 더 궁금해지는걸? 내 정체까지 알고 있다니.”

“쟈벨린, 입 조심해. 짝짓기 놀음이라니?”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두 사람의 대화로 확신을 가진 유리나가 마주 미소 지었다.

“이런 미녀가 세상에 여럿 존재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맞는 말이기는 한데,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거든?”

“트라오레 가문과 에이젠 가문, 에일러 가문은 오랫동안 두터운 친분을 이어왔다. 호위를 많이 붙이면 오히려 눈에 띌 테고, 초행길인 두 자제분을 가문에서 믿고 맡길 만한 이가 누구일지, 인상착의를 토대로 한번 생각해 봤을 뿐이에요.”

“흐응~”

묘한 콧소리를 내는 숏 컷 여인을 일별한 내가 재차 속삭였다.

“잠깐. 에일러? 에일러 가문의 쟈벨린이라면 어디선가…….”

“맞아. 현존하는 기사 최상위 유망주 중 하나야.”

“역시…….”

“그리고, 수년 전 루나 경을 이겼던 상대이기도 하지. 기사 대전에서 말이야.”

“……!”

찰나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둘이서 뭘 자꾸 속닥거리는 걸까나? 거슬리게. 테라 출신에 그만한 미모라면, 너는 유리나 벤 아리에나지?”

“절 아시는 모양이네요.”

“뭐, 자세히는 모르고. 몰락한 귀족 가문의 영애라는 것 정도는 알아.”

“……!”

이번에는 유리나가 눈에 띄게 인상을 굳혔다.

아까의 생각을 이어서 하자면…

반란군의 기습적인 왕궁 점거로, 초창기 내전은 그야말로 그들의 연전연승이었다.

하여, 수도와 가까웠던 아리에나 영지 또한 가장 빠르게 무너졌다.

치열할 거라 예상되었던 전투는 고작 반나절 만에 끝이 났고.

그 전쟁에서, 유리나의 아버지도 죽었다.

가문의 수많은 가신들과 함께.

“너 진짜 입조심 안 할래?”

“미안, 미안. 내가 좀 직설적이라. 악의는 전혀 없었다고.”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쟈벨린이라는 그녀를 뒤로 물리며, 예의 버터 녀석이 고개를 숙였다.

한데, 이후 주변인들의 행동이 나로서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사과의 의미라고 하긴 뭣하지만, 이대로 식사라도 함께하시지요. 저희가 사겠습니다. 그리고…….”

“……?”

“가능하면 옆에 시종은 잠시 빠져 주고.”

“…….”

겉으로 보기에 내가 생각보다 훨씬 더 볼품없는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선 보통, 안 불편하면 함께하자는 얘기가 나오는 게 정상일 텐데.

시종으로 생각했다면 또 이해는 간다.

이런 오해, 나야 귀찮은 일을 피할 수 있으니 고맙긴 하다만…….

“그러죠, 뭐.”

허나, 내 대답은 금세 유리나에게 묻혀졌다.

“미안해요. 말씀은 고맙지만, 안 되겠네요.”

“예?”

“다른 남자랑 밥 먹는 거, 제 남자친구가 질투해서요.”

“……!”

전혀 알아들을 수조차 없는 발언을 이어가며, 살포시 내게 팔짱을 껴오는 그녀였다.

“이해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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