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개막전(1)
“뭐 잘못 먹었냐?”
살짝 몸을 떨어뜨린 내가 빠르게 속삭였다.
“뭐가. 그럼 친구 아니냐?”
“아니, 의도는 알겠는데 쟤들도 안 믿는다고. 벌써부터 의심스러워하는 저 눈빛 안 보여?”
“지들이 안 믿으면 뭐. 나한테 따지기라도 하게?”
“충분히 그럴 것 같으니까 하는 말이지.”
연신 무어라 속닥대는 우리를 보며, 곧 눈앞의 2남 1녀가 예상 내의 반응을 보여왔다.
“나, 남자 친구?”
“…말도 안 되는…….”
“대박 충격!”
차례로 각양각색의 반응을 내비친 그들 중, 예의 버터 녀석이 대표로 나섰다.
“혹 부담스러워서 이러는 거라면…….”
“그런 거 아닌데요.”
“…그도 아니면,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러시는 겁니까?”
“그건 뭐, 아예 틀린 말은 아니네요.”
“…….”
여과 없는 유리나의 말에, 버터 녀석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다른 흑심이 있어 이러는 게 아닙니다. 그저 동료의 무례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그럼 그냥 좀 가주세요.”
“……!”
“제게 사죄는 그걸로 충분할 것 같거든요.”
자존심이 퍽이나 상했던 탓일까?
그럼에도 버터 녀석은 물러서지 않았다.
“풋!”
“이익…!”
그리고 결국, 뒤쪽에서 지켜보던 쟈벨린의 실소로 버터가 폭발했다.
“제가, 아주 큰! 실례를 범하였군요.”
“네. 실례 맞아요.”
“갈 때 가더라도 사과는 하고 가겠습니다. 그쪽은 어느 집 자제 분 이십니까?”
딱딱하게 굳은 녀석의 목소리는 나를 향하고 있었다.
“딱히 가문 같은 건 없는데요.”
“뭣…? 가문이 없다니…….”
“평민이라고요.”
“평민…?”
버터 녀석이 ‘잘못 들은 건가?’ 하는 표정으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하여, 나는 긍정의 의미로 어깨를 으쓱여 줬다.
“와우. 두 번째 충격.”
이에, 쟈벨린은 이제 박수까지 쳐대며 대소를 터뜨렸다.
“…지금 장난하나?”
“장난 아닌데요.”
“하찮은 평민이 귀족가 영애의 남자 친구라니. 사람 놀리는 것도 정도가 있지!”
“그건 좀 선 넘는 발언 아닌가요? 특히 이곳에서라면 더더욱.”
“뭐라고?”
“마법사는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대륙 어디를 가나 암묵적으로 공통되는 법칙이잖아요?”
“……!”
이어지는 내 말에, 버터 녀석이 으득 이를 갈았다.
“한데, 그 마법사들의 본산에서 방금의 발언은 좀…….”
“놈! 나를 능멸하려는 것이냐? 알량한 재주 하나만 믿고 감히!”
유리나를 대할 때와는 완전히 딴 사람이었다.
어느새 나를 바라보는 버터 녀석의 얼굴은 마귀처럼 변해 있었으니까.
“긴 말 하지 않겠다. 지금 당장 내게 고개를 조아려라!”
“뭔 놈의 고개요?”
“내가 그 벌레 같은 목숨을 연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뜻이다. 정녕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나?”
“하아…….”
익숙한 반응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직후, 나는 곧장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쏘아붙이려 했다.
바로 옆의 유리나가 먼저 나서지만 않았더라면.
“이봐요. 비록 평민일지언정, 타국의 귀족이 우리 국민에게 고개를 조아리라느니 하는 말은 할 수 없는 법이에요.”
“흥. 그야 다른 하등한 나라의 귀족들이라면 그렇겠죠. 우리는 제국의 귀족들이고.”
“뭐라구요?”
“제국 위에 그 어떤 국가도 있을 수 없다. 이 말인즉, 다른 모든 나라는 제국 아래에 있다는 뜻입니다.”
버터 녀석이 콧방귀까지 껴대며 맞응수했다.
제국인들의 오만함이 하늘을 찌른다더니, 그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여기 있었다.
“오만하군요.”
“사실이니까요.”
“본 왕궁에 보고되면, 이 또한 감당하기 힘드실 텐데요.”
“흥. 테라에 그런 궁이 존재하기는 합니까?”
“……!”
핵심을 찌르는 상대의 말에 유리나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무슨 뜻이죠? 듣기에 따라, 충분히 논란이 될 수 있는 발언입니다만.”
“아무래도 몰락한 귀족가의 영애가 자국민을 감싸고 싶으신 듯한데, 여기까지 온 이상 저는 제 명예를 위해서라도 저놈을 벌해야겠습니다. 하니, 레이디께서는 빠지시지요.”
어느새 홀 내부의 다른 사람들마저 모두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눈 가득 흥미진진한 기색까지 내비치며.
이제는 나설 차례라고 생각한 내가 유리나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혹시나 얘기하는 건데, 성질대로 할 생각은 마라.”
“뭐라는 거야. 안 그래도 빡치는데.”
“쟤네 제국인들이야. 너, 다른 목적이 있어서 여기 온 거잖아?”
“……!”
찰나 눈을 크게 뜨는 유리나를 물리며, 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래요 뭐, 제가 사과만 하면 된다는 거죠?”
“평민 따위의 사과나 받고 내가 만족할 성싶으냐?”
뭐 어쩌라고?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 버터 녀석이 능청스레 말을 이었다.
시선은 내가 아닌 유리나에게 고정한 채로.
“아무래도 레이디께서도 물러설 생각이 없으신 듯한데, 이건 어떠십니까?”
“뭐요?”
“민초의 잘못은, 이를 관리하지 못한 귀족의 책임도 있지요. 허나 저는 격 떨어지는 시정잡배가 아닙니다. 레이디께 이 무지렁이를 대신하여 사과하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
나와 유리나가 머리 위로 동시에 물음표를 떠올렸다.
“그래서 어쩌자고요?”
“오해는 밥으로 풀고, 친분은 술로서 다지라는 말이 있지요. 하니, 있다가 술이나 한잔 사주시지요. 그걸로 이번 일은 넘어가겠습니다.”
버터 녀석의 느끼한 시선이 유리나의 위아래를 훑었다.
마치 스스로를 아량 넘치는 귀족인 양 표현하고 있었으나.
달리 말하면, 봐줄 테니 술시중이나 들라는 뜻이었다.
부르르르.
유리나가 모욕감에 전신을 떨었다.
그냥 두려고 했더니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얘 성격상, 지금부터 곧장 성질대로 뒤집어엎으려 들 테니까.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거, 헛소리는 작작 하시고요. 정이 불만이면 정식으로 국제기관에 항의서를 제출하시던가, 우리 왕궁으로…….”
하여, 내가 다급한 목소리로 끼어들려던 그 순간,
우우웅! 우우웅!
“……?”
갑작스레 공명음이 울려 퍼졌다.
하나, 둘도 아니었다.
무려 넷이나 되는 공명음이 동시다발적으로 울려 퍼졌으니까.
“이건…?”
나와 유리나.
그뿐만이 아니라 버터 녀석과 그 옆의 삭막해 보이는 놈의 품에서 곧 자그마한 물건이 꺼내어져 나왔다.
어린아이 주먹보다도 더 작은, 둥그런 물체.
일명 ‘메시지 수정구’라 불리는 기물이었다.
크기는 통신용 수정구의 5분의 1밖에 되지 않고, 간단한 전언 정도만 전할 수 있는 마탑의 발명품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을 과시하려는 양, 올해 마법 대전 참가자 ‘전원’에게 이 아티팩트를 지급했다.
…실로 경악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최하급 마나석 하나면 이것을 만들 수 있지만, 참가자만 족히 수천 명에 이르는 상황이었으니까.
그걸 인원에 맞게 뿌려댔으니.
“……!”
한데, 놀라운 일은 아직 또 남아 있었다.
어느새 손안의 물건에 시선을 고정한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마탑은 영웅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고 하지 않았냐?”
“엉? 그랬지.”
“근데 이건 무슨 상황일까나?”
“……?”
그제야 유리나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정확히는, 내 손안에 있는 수정구로.
그 직후.
“에에에에엥!?”
그녀의 잇새로 기괴한 괴성이 터져 나온 것은, 문자 그대로 순식간이었다.
***
케케묵은 책 내음으로 가득한 누군가의 집무실.
그곳에 무척이나 아름다운 은발의 미녀가 앉아 있었다.
쏟아져 내리는 달빛 아래에 고고히 자리 잡은 그녀의 모습은 이름난 화가가 그린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마치 달의 여신이 지상에 강림한 듯, 그만큼이나 여인의 분위기는 신비로웠으니까.
“아가씨. 마법 대전 접수가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래요?”
“예. 대진표도 지금 막 공개되었구요.”
“흐응~”
재차 이어지는 상대의 말에, 그제야 여인이 서류 더미에서 시선을 때곤 쭈욱 기지개를 켰다.
“근래에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닙니까?”
“지형이 벌어준 시간은 고작해야 3개월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그보다, 그 대진표 좀 볼 수 있을까요?”
“여기 있습니다.”
족히 십수 장은 될법한 빽빽한 양피지가 여인의 앞에 내밀어졌다.
“이젠 종이 뭉치만 봐도 신물이 나오려고 그러네.”
짧게 한숨을 내쉰 그녀의 눈빛이 곧 크게 뜨여졌다.
“와, 올해 마법 대전은 참가자가 역대급이라더니…….”
“단순히 인원수뿐만이 아닙니다.”
“무슨 뜻이에요?”
“올해 참가자들은 개개의 수준도 상당히 뛰어납니다. 하여, 상위 10,000위 이내 혹은 아가씨께서 관심을 보일 만한 참가자들은 제가 따로 표시해 뒀습니다.”
“역시 맥심 경. 언제나 일 처리가 깔끔하시네요.”
“별말씀을…….”
한차례 엄지손가락을 추켜 세워준 여인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유리나는 여기 있고, 이카루스의 직계 제자 헤르메스에 오, 제국 크로커 가문의 차남도 있네요.”
“문제는 그 아래입니다.”
“네?”
“한번 보시지요.”
순간 얼굴 한가득 의아한 표정을 떠올리던 여인이 움찔 몸을 떨었다.
“…제노스 델 카이클? 얘도 참가했어요?”
“예. 놀랍게도…….”
“…….”
여인이 인상을 굳혔다.
“마음에 걸리십니까?”
“…아니요. 아예 예상하지 못한 일도 아니니까요.”
“그 말씀은…?”
“외부에 건재함을 알리고 싶은 거겠죠. 우리나라는 생각보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니 허튼 생각일랑 품지 마라. 그게 아님, 우리처럼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요.”
“전자라면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지만, 후자는 큰 문제가 아닙니까?”
“여기서 더 나빠질 상황도 없는데요, 뭘.”
달리 생각한 것이라도 있는 건지, 의외로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린 여인이 남은 양피지를 훑었다.
몇몇 이름들이 더 거론되고, 다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 외에는 특별히 ‘와!’ 할 만한 참가자는 없네요. 이미 제노스 델 카이클이라는 이름을 봐버려서 그런가? 제 눈이 너무 상향 평준화돼서…….”
꿈틀.
그 순간, 여인이 움직임을 멈췄다.
“…잠깐만. 여기…….”
“아, 파동의 마법사 트라오레 후작의 장남도 올해 마법 대전에 참가했습니다. 제국 출신임에도 5써클 마스터에 접어든 유망주로, 이미 외부적으로도 유명한…….”
“개막전이 3일 뒤라고 했죠?”
여인이 그의 말을 끊었다.
“예? 그렇습니다만…….”
“일이 생각보다 재미있게 흘러가네요. 이 사람의 참가는 저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거든요.”
“……?”
이어지는 여인의 말에 맥심이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파동의 마법사라는 이름도 대단하기야 했지만, 올해 다른 참가자들과 비교하면 그리 특별할 것도 없었으니까.
단지 ‘아가씨께서 그와 일면식이 있으셨던가?’ 하고 속으로만 생각할 뿐.
“훗.”
그와는 별개로, 드물게 여인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까지 맺혀졌다.
두 눈에는 묘한 기대감마저 품고서.
“나왔는데도 연락 한 통 없었단 말이지?”
지금 그녀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에는, 오직 한 줄의 글귀만이 또렷하게 박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