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역제안
곧장 거처로 돌아가려던 나는, 또 한 번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갑작스레 내 앞을 가로막아 섰기 때문이다.
그리곤 실로 뜬금없는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너, 내 제자해라.”
“네?”
“잘해줄게.”
황당했다.
밑도 끝도 없이 이게 무슨 자다가 뭣 두들기는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문득 궁금하기도 했다.
“누구세요?”
“나? 여기서 제일 높은 사람.”
“제일 높은 사람이라면… 혹시 연합주?”
순간 내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비교적 세간에 잘 알려진 자유연합의 2인자 에이스 디 파르마와 달리, 그의 유일한 상관은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
기껏 알려진 것이라고 해봐야 여인이라는 것 정도?
한데, 설마하니 눈앞에 있는 이 아줌마가 연합주라니…
“진짜 연합주세요?”
“그럼 가짜냐?”
“와… 대륙구 유명인을 이렇게 쉽게 만나게 될 줄이야.”
내 입이 절로 벌어졌다.
“내가 좀 대단하기는 하지?”
“네, 뭐… 근데 제자는 또 무슨 말씀이신데요?”
“너, 강해지고 싶어서 여기에 찾아온 거라며.”
“그런데요?”
“하면 고민할 게 뭐 있어? 연합에서 강해지는 가장 빠른 길. 당연히 그곳 대장의 직계 제자가 되는 것 아니겠니?”
짐짓 자애로운 미소를 짓는 상대를 보며, 나는 그저 애꿎은 머리만 긁적여 댔다.
“제자를 이리 아무나 받아도 되는 건가요?”
“아무나 아닌데?”
“그럼 대체 제 무엇을 보고…….”
“스승이 되려 하냐고?”
“네.”
“음… 굳이 대려면 여러 가지가 있지만,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지.”
세 가지씩이나?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나라고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게 뭔데요?”
“첫째는 너라는 존재가 내 흥미를 자극했기 때문이지.”
“흥미요?”
“그래. 근 반백 년을 살아왔지만, 대륙의 그 어떤 핏덩이도 너만큼이나 내 시선을 잡아끌지는 못했거든.”
헐.
기껏해야 삼십 대 정도로 봤는데, 저 얼굴에 오십이라고?
이제 보니 아줌마가 아니라 할머니 소리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잖아?
“그럼 두 번째는요?”
“아무리 싹이 훌륭해도, 그에 걸맞는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면 꽃도 피울 수 없는 법. 그런 의미에서, 너라는 재능을 키우는 데 이곳의 그 누구보다 내가 적임자니까.”
“마법사세요?”
“비슷해.”
상대의 대답에 잠시 고민하다 이내 고개가 끄덕여졌다.
“일단은 축하드려요.”
“응?”
“연합주 님이야말로, 제 흥미를 자극하시는 데 성공하셨거든요.”
“…….”
일순간 멍하니 입을 벌린 상대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큭! 당돌한 놈.”
“마지막 이유만 마저 들어보고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 볼게요.”
이윽고 내가 답을 내놓자, 눈앞의 아줌마는 도리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반문한다.
“궁금하냐?”
“아니죠? 제가 생각하는 그거.”
“네가 생각하는 그게 뭔데?”
“궁금하면 제자가 되어, 라던가 하는 흔해 빠진 레퍼토리요.”
움찔.
미세하게 눈썹까지 꿈틀대는 것을 보니, 정곡이었던 모양이다.
“…전혀 그럴 생각 없었거든?”
“그러시겠죠. 그래서 마지막 이유는요?”
휘오오!
여기까지 대화가 오갔을 때, 갑작스레 불어온 바람과 함께 새로운 인영이 나타났다.
내 눈에도 익숙한, 예의 반라의 사내가.
“잠깐!”
허나, 그런 그를 깔끔하게 무시한 상대는 마저 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여기서 제일 세거든.”
“대장, 거 진짜 구질구질하게 이렇게 나올 거야!?”
“그럼 얘한테 선택하라고 하든가.”
한차례 어깨를 으쓱한 그녀가 내 쪽을 돌아봤다.
“생각 잘해. 지금 네 선택에 따라 향후 수년간의 미래가. 아니, 네 평생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테니까.”
“너 진짜 후회할 거다. 이 마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아마 얼마 지나지도 않아, 차라리 죽여달라는 소리가 나올걸? 네 입에서!”
나는 가만히 고민에 잠겼다.
한쪽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륙 최고의 검사.
다른 한쪽은, 모든 게 베일에 싸여 있으나 실력만큼은 확실한 강자.
제 발로 이곳에 걸어 들어온 이상, 일정 부분 조직에 얽매이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그런 거라면, 이런 상황도 내게는 나쁠 게 없었다.
스승의 중요성은 학장 할아버지를 통해 누구보다 절실히 느꼈으니까.
문제는 둘 중 누구를 선택해야 하냐는 것인데,
“…아!”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묘안이 떠올랐다.
쉬운 길을 두고 구태여 돌아갈 필요는 없겠지.
그리 상념을 마친 나는 눈앞의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곧, 고민의 결과물을 입 밖으로 토해낸다.
“선택 말고, 역으로 제가 두 분께 제안을 드려도 될까요?”
“……?”
***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다음날.
나는 연합 내에 위치한 건물의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족히 수백 평은 될 듯한 커다란 도서관이었다.
연합 내에 이런 시설이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사전에 언질이 있었는지, 나를 발견했음에도 이곳의 사서들은 내게 가벼운 눈인사만 건넬 뿐이었다.
‘내 답변이 썩 마음에 들었나?’
나야 좋지.
눈치 보지 않고 내부를 마음껏 거닐 수 있으니까.
다만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건,
“…언제까지 따라다닐 생각이야?”
“미안하다.”
“뭐가?”
“그냥… 네 입장에서는 내가 이유 없이 시비나 걸어대는 불한당처럼 보일 테니까.”
오늘 아침부터 줄곧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녀석이 있었다.
얼굴은 사뭇 우스운 꼴을 하고서.
입술 아래가 시퍼렇게 부어올라 있는 그 녀석은 부끄러움조차 없었다.
“턱은 괜찮냐?”
“이 정돈 아무것도 아니야.”
“그것 참… 다행이네.”
더불어 눈치도 없었고.
절로 입안이 말랐다.
스네이크 그린 아이작, 그 양아치와 비슷한 부류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던 모양이다.
물론 나야 오히려 스네이크 녀석 쪽이 상대하기 훨씬 편했다.
단순해서 다루기 쉬웠고, 내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으니까.
한데, 눈앞의 이 예쁘장한 녀석은 왠지 모르게 대하기 어려웠고, 재미 또한 쥐뿔도 없었다.
“크흠, 계속 이렇게 따라만 다니면 내가 많이 불편한데…….”
“…자격지심이야.”
“……?”
앞으로 나아가던 내 신형이 순간적으로 멈춰졌다.
“뭐라고?”
“…어쩔 수 없잖아. 꼬박 10년이야. 흠모하고 존경하는 사내의 뒷모습을 봐온 기간이 말이야. 옆은커녕, 머나먼 뒤도 안 내어주던 사내가 손수 다른 이를 데려왔어. 화가 날 수밖에.”
“너… 혹시 그 변태 아저씨 좋아하냐?”
“에이스 님을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
녀석의 인상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아무래도 내 생각이 맞았던 모양이다.
하여, 한 번 더 물었다.
딱히 궁금증은 생기지 않았지만, 여기서 그냥 떠나가면 왠지 이보다 더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았기에.
“왜 존경하는데?”
“그야…….”
순간 말끝을 흐리던 녀석이 묘하게 얼굴을 붉혔다.
“강하고… 잘생기셨으니까.”
“…….”
그 일차원적인 대답은, 다시금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얼빠는 어딜 가나 있다더니…….
‘아니, 그런 것보다 이 녀석. 설마 정말로 그쪽(?) 취향이었나? 얼굴은 곱상하지만, 아무리 봐도 여자로는 보이지 않는데…….’
이내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낸 내가 말했다.
“아, 그러셔? 근데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
“어?”
“정작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있거든.”
“무슨 뜻이야?”
“왜 다들 내가 당연히 그 변태 아저씨에게 검술을 배울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무엇보다 나는 너처럼 검사도 아닌 마법산데.”
“……!”
상대의 눈이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크게 뜨여졌다.
“지, 진짜…?”
“그래. 그러니까 나 좀 귀찮게 하지 말아주라. 제발.”
가볍게 손을 흔든 나는 이내 녀석에게서 멀어져 갔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말 속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낄 테고, 그 일로 새로운 종류의 미움을 살 수도 있었지만.
우선은 이 귀찮은 방해꾼에게서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물론, 내 말이 아예 거짓도 아니었고.
“…그보다 이런 도서관 말고, 기밀 자료만 취급하는 시설은 따로 없나? 대조직에는 다들 하나씩은 있다던데…….”
***
한편, 세타가 그토록 찾아 헤매고 있는, 연합 내에서도 가장 은밀한 장소.
사방은 물 샐 틈 하나 없이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있는 것이라고는, 높다란 책장들만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공간이었다.
“드르렁.”
적막감만이 느껴지는 그곳에 유독 누군가의 코 고는 소리가 가득했다.
그게, 어느 순간부터 조용해졌다.
“…킁. 왔으면 곧장 들어올 것이지.”
“하여튼 촉 하나는 끝내주시네. 또 이런 데서 혼자 꿀 빨고 있지?”
순간 신기한 광경이 벌어졌다.
분명 벽만이 자리한 공간 한편에서, 불쑥 사람이 튀어 나왔으니까.
허나, 정작 그걸 본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을 이어 나갔다.
“부하의 업무를 덜어주려는 거지. 당장 내가 모습을 보여 봐. 다들 없던 일도 만들어서 가져올걸?”
“그 말 그대로 세실리아한테 말해볼래?”
“사양할게. 옆에서 땍땍거리는 건 딱 질색이라.”
“오호라. 그래서 나한테 맡긴 모양이지?”
에이스의 비아냥거림에, 금발 여인이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됐고. 녀석은 뭐 하고 있냐?”
“똑같지 뭐. 여태 정보 찾겠다고 애꿎은 데 다 뒤져 대고, 난리도 아니야. 정작 중요한 정보들은 모두 이곳에 있는데 말이지.”
“큭… 옛날 생각나네.”
“뭐가?”
“고작해야 십 대 코흘리개가 살아보겠다고 아등바등거리는 거.”
“…대장.”
“하긴, 그 녀석은 나나 너보다 더한 애송이였지? 세상 어디에 또 있겠냐? 감히 우리 앞에서, 둘 모두를 스승으로 삼으면 안 되겠냐고 지껄이는 미친놈이.”
“큭큭… 그래도 재미는 있었지?”
“인정해.”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주억인 그녀가 손을 뻗었다.
“퍽 궁금하네.”
그러자, 고작해야 주먹만 한 크기의 황금빛이 손바닥 위로 떠올랐다.
느릿느릿 구석의 모퉁이로 접근한 그것은, 이내 한 책장 안으로 스며든다.
직후의 일은, 실로 놀라웠다.
파스스.
예의 빛이 스며든 책장 하나가 그 자리에서 통째로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 흔한 전조현상조차 없이.
“왜 애꿎은 시설들을 깨부수고 그래?”
“어차피 그쪽은 폐기해야 될 자료들이었어.”
“폐기 한번 참 과격하게도 하네. ‘아락사스’들은 원래 다 그래?”
“모르지. 세상천지에 나 하나밖에 남지 않았으니.”
“…쩝. 그래서, 뭐가 궁금한데?”
작게 입맛을 다시는 에이스를 일별한 그녀가 눈을 빛냈다.
“태초의 마나라는 그릇이, 대륙 천지에서 가장 빠른 속도와 파멸의 힘을 얻게 되면, 과연 어떤 괴물이 탄생할까 하는 그런 궁금증?”
“…결과까지야 신도 알 수 없을 테지만, 한 가지는 분명할걸?”
“……?”
“아마 성공만 한다면, 3년 뒤 마탑 전체가 발칵 뒤집힐 거라는 거. 물론, 그 고고하신 열두 탑주들을 포함해서 말이야.”
이어지는 에이스의 말에, 그녀가 씨익 미소 지었다.
“그것 참 기대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