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꼬우면 니가 대장해
두 사람은 생각보다 일찍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의 대화 중심에 있는 당사자를 말이다.
“쟤네 뭐야? 이런 초저녁부터 모여서 우르르.”
“세디스네 무리인데? 대체 어딜 가는 거지?”
여인과 에이스가 재빨리 몸을 숨겼다.
자유연합 본사는 일개 조직의 사유지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넓었다.
어림잡아도 2층짜리 대저택 십수 채는 거뜬히 들어설 정도?
본사 주변으로는 둘레 수천 미터에 달하는 높다란 외벽까지 설치되어 있었으니.
가히 공국 안에 자리한, 별개의 ‘요새’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 또한 모두 전대 공왕의 배려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데.
문제는, 두 사람이 발을 딛고 선 북문 인근은 아직 개발이 채 진행되지 않아 빈 공터만이 가득하다는 사실이었다.
“…대충 느낌이 오는데?”
“대장, 지금 나랑 같은 생각하고 있는 거 맞지?”
“우려했던 일이기는 한데, 나는 왜 지금의 이 상황이 재미있게만 느껴지는 걸까나?”
“어련하시려고. 결국 우리 소중한 부하 직원께서 한발 늦으셨다는 얘긴데…….”
“아니면 쟤들이 우리 생각보다 빨리 움직인 거겠지.”
곧 에이스의 시선이 예의 아이들 무리를 빠르게 훑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역시 있네. 그 녀석도.”
“어디? 어디에 있는데?”
“제일 뒤쪽에.”
“…아무리 봐도 안 보이는데?”
“자세히 봐봐. 못 보던 애 하나 끼어 있잖아.”
“…아!”
미간까지 찌푸린 채 무리를 살펴보던 여인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저러니 눈에 안 띄지. 생긴 거 진짜 평범하다.”
“실망한 눈친데?”
“나도 여자니까.”
“푸핫! 올해 들은 말 중에 제일 웃겼어, 대장.”
찌릿.
여인의 서슬 퍼런 기세에 에이스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저런 애가 우리 연합 최고의 유망주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으려나?”
“뭐야, 그 당연히 질 것 같다는 말투는. 지금 사람 얼굴 보고 평가하는 거?”
“어쩌라고. 세디스의 재능도 좀 뛰어난 것이어야 말이지. 그보다 아쉽네. 이러면 또 매력이 떨어지는데…….”
“이게 연합주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인지. 데려다 키울 인재가 실력만 좋으면 되지, 뭔 놈의 얼굴을 따져?”
“요즘은 잘생긴 애들이 실력도 좋더라. 그 왜, 대륙 최고의 유망주인 제노스라는 애는 마스크도 장난이 아니라며?”
“참나.”
여인의 반응에 어깨를 으쓱한 에이스가 이내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들었다.
“더 말해봐야 내 입만 아프지. 나중에 딴소리나 하지 마쇼. 쟨 내가 데려온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래 뭐, 지금까지는 인정. 어지간한 재능으로는 이제 관심도 안 갈 것 같으니까.”
“쯧.”
할 말은 많았으나, 에이스는 더 대꾸하지 않기로 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상대의 이런 반응.
그의 입장에서는 나쁠 것이 전혀 없었으니까.
***
정확히 일곱 명.
지금 내 앞에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아이들의 숫자였다.
이제는 확실히 떠올랐다.
지금의 상황.
내게는 완전히 익숙하지 않던가?
우뚝.
이윽고 연무장 하나는 충분히 들어설 수 있을 법한 빈 공터에 이르자 무리가 멈춰 섰다.
어느 순간부터 건물들이 하나둘 보이지 않는가 싶더니, 여긴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나오래서 나오긴 했는데… 이런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올 줄은 몰랐는데? 내부라도 소개해 주는 줄 알았더니.”
“뭘 모르는 척이야. 이미 짐작하고 있었잖아?”
“음… 혹시 집단으로 괴롭힐 생각은 아니지?”
“물론 아니지.”
내 물음에, 선두의 단발머리 아이가 그제야 몸을 돌려세웠다.
“너 같은 건 나 하나로도 충분하거든.”
“…불길한 예상은 왜 항상 이리도 꼭 맞아떨어지는지.”
작게 중얼거린 나는 가만히 상대를 응시했다.
생긴 것만으로 판단했을 때, 예측 가능한 부류는 나와 같은 마법사다.
저런 비리비리한 녀석이 검사일 리는 없을 테니까.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촤르르륵!
“…연검?”
그런 예상과는 달리, 단발머리 아이가 꺼내 든 것은 놀랍게도 연검이었다.
이그란트 대륙에서는 소위 스네이크 소드라 불리는 기물.
탄성이 강하고 유연하여 평상시에는 허리띠처럼 둘러매고 다니나.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늘어나기도, 반대로 줄어들기도 하는 괴상망측한 검.
그 검로가 실로 기기묘묘해, 같은 검사들조차 상대하기를 꺼리는 무기였다.
잠시 내가 그걸 멀뚱히 바라만 보고 있자,
핏!
“……!”
싸늘한 쇠붙이가 볼 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제야 내 정신도 번쩍 들었다.
“다음은 네 목이야.”
“…너, 나를 죽일 생각이야?”
“글쎄? 건방진 전학생이 하는 것 봐서?”
“미친…….”
절로 욕지거리가 튀어 나왔다.
어느새 다른 아이들은 멀찍이도 떨어진 뒤였다.
전투는 그렇게, 예고도 없이 벌어졌다.
“기개가 대단한데? 이런 상황에서 나한테 욕지거리라.”
스팟!
나는 빠르게 녀석과의 거리를 벌렸다.
검사를 상대로 근접전을 펼치는 건, 스스로 자멸하는 길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허나, 녀석의 공격 범위는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휘릭! 휘리리릭!
그 명성대로 마치 뱀과 같은 움직임으로 연검이 몸 이곳저곳을 노려왔다.
팔이며 다리며.
생명에 영향을 미칠 치명적인 부위들은 아니었으나, 단숨에 행동불능으로 만들 수 있는 급소들이었다.
나는 재차 뒤쪽으로 땅을 박차는 한편, 조용히 마나 홀을 휘돌렸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움직임이 제법이잖아?”
콰드드득.
오래간만에 신체 변형 마법을 펼쳤다.
순식간에 팔이 견고하게 변해가는 것이 느껴졌다.
사지를 바위와도 같이 만든 나는, 곧장 눈앞의 연검을 쳐내려 했다.
허나,
“어딜!”
그 순간 연검이 기묘한 각도로 꺾이며 바닥을 때렸다.
‘쾅!’ 하는 폭음이 뒤를 따른다.
“…윽!”
솟구치는 흙더미에 내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자갈들마저 품고 있어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면적을 넓혀 바닥을 할퀴는 세디스의 고유 검술.
여기서 한 단계 더 발전한 것이, 소위 대륙에서도 이름 꽤나 날리고 있는 ‘반전하는 흙의 비’였으나.
지금의 나로서는 그것까지 알 길은 없었다.
“쳇. 붙잡기만 하면 단숨에 끝낼 수 있는 건데.”
“…착각이 심하네. 설마 내가 그게 무서워서 검로를 틀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아니라고?”
“훗, 시덥지 않은 도발을. 한번 해봐.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순간적으로 내 얼굴 위에, ‘됐다!’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허나 그건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했다.
직후, 연검에 희미한 기(氣)가 어렸으니까.
뭇 대륙인들이 실로 경악할 만한 광경이었다.
고작해야 내 또래로 보이는 아이가 검에 기를 두를 수 있는 단계에 접어들다니!
가히 루나에 필적하는 재능이었다.
그게 설령 기의 단계 중 가장 낮은 오러.
‘검운(劍雲)’이라 하더라도.
‘…하지만.’
우우웅!
나는 팔에 더욱더 밀도 높은 마나를 불어 넣었다.
그저 바위와 같이 보이던 팔에, 시꺼먼 묵 빛이 언뜻 내비치기 시작했다.
이후의 일은 놀라웠다.
쩡! 쩡! 쩌어어어엉!
“……!”
‘부릅’ 하고 눈을 크게 뜨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로 들어왔다.
어지간히도 놀랐던 모양이다.
검을 휘두르는 것조차 잊고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으니.
하기야 당연한 것이겠지.
검운을 순수하게 정면에서 맞부딪힐 수 있는 밀도의 마나라면, 최소한으로 잡아도…
“이런 놈이 4써클 마법사라고…?”
“나도 글쎄?”
“말도 안 돼!”
엄밀히 따지면, 아직 그 경지에는 들어서지 못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안의 지식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편법이었으니까.
허나, 그 착각을 바로잡아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저리 죽일 듯이 덤벼드는 녀석과 맞서고 있는, 지금만큼은.
쫘아아아악!
“…윽!”
순간 연검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마침내 단단해진 내 손으로 연검을 붙잡은 결과였다.
당황해하던 녀석의 얼굴 위로 곧 비웃음이 떠올랐다.
“미친놈! 나랑 힘겨루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허약한 마법사 따위가!”
사실 녀석의 여리여리(?)한 체구를 보면, 그냥 힘 싸움으로 가도 해볼 만 할 것 같지만.
나는 구태여 도박을 하지 않기로 했다.
화악!
“아니?”
“……!”
갑작스레 내가 연검을 놓아버리자, 녀석의 신형이 크게 휘청거렸다.
경험의 부족에서 오는 그 실수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콰드드드드드득!
순간적으로, 땅에서 일어난 대지의 파도가 전방을 향해 질주했다.
내 발로 뛰는 것보다.
‘땅을 이용해 쇄도’하는 편이, 상대에게 더 빨리 접근할 수 있었으니까.
“……!”
대번에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로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든 생각인데, 가까이서 자세히 보니 정말 예쁘장하게도 생겼다.
지극히 중성적인 외모지만, 남자라고는 또 전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이런 얼굴에 흠집을 내는 건, 누군가에게는 큰 죄악이 아닐까?
“…웃기고 있네.”
순간적으로 내 입에서 본심이 튀어 나왔다.
얼굴이 이쁘면 뭐?
실비아 같은 미친 계집애도 있는데, 외모가 밥을 먹여주나?
하여, 나는 망설임 없이 발을 뻗었다.
눈앞에 보이는, 가녀린 턱주가리를 향해서.
빠각!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곧장 내 발이 상대의 턱을 가격했다.
콰당!
그 반발력으로, 녀석의 전신이 또 한 번 거칠게 휘청였다.
아마 두개골이 통째 뒤흔들리는 느낌을 받았으리라.
뇌의 안팎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설마하니 마법사가 근접전에 이은 육탄전을 벌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겠지.
“아, 미안. 갑자기 다른 사람 생각이 나서 감정이 실렸네.”
털썩.
하얗게 눈까지 까뒤집은 녀석이,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승부는, 그걸로 끝이었다.
***
이제 주변은 고요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쟤 뭔데? 마법사라며?”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크흠. 움직이는데도 재능이 있었나 보네.”
“너는 저걸 그저 재능이라고 표현할 수 있나 보지?”
십수 년 평생을 방구석에서 수식이나 외워대던 마법사 꼬맹이가, 어지간한 검사들을 방불케 할 정도로 움직인다.
이걸, 단순히 ‘재능’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아, 아티팩트라도 쓴 건 아닐까? 우리 몰래.”
“그런 낌새는 전혀 못 느꼈는데.”
“그럼 숨겨둔 한 수가 있었다든가…….”
“그거야말로 대단한 거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제 실력도 일부 숨길 줄 안다는 거잖아?”
“…대장, 설마 아니지? 지금 내가 생각하는 그거.”
이쯤 되자, 에이스가 불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양아치 짓 좀 해야겠어.”
“아니야. 그거 아니라고. 그래도 설마하니 조직을 이끄는 수장이, 부하의 공로를 가로챈다고?”
“내가 말했지? 조직 차원에서 시야를 넓게 보자고. 거국적으로다가.”
에이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기어이 빼앗아가시겠다?”
“응. 쟤, 내가 키울래.”
“하! 와! 나 참! 진짜 어이가 없네. 이거 태세전환이 완전 빙의 환수 술사 급이잖아?”
대번에 반발하는 에이스의 반응에도 여인은 그저 태연자약하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어쩌라고? 꼬우면 니가 대장 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