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제국의 야망
대죄, 칠악의 수좌, 전혈의 반마…….
모두가 복면인을 지칭하는 또 다른 이름이었다.
아래라고 해봐야, 다른 여섯의 죄종들이 전부.
그마저도 외부적으로는 대등한 관계였기에, 수하보다는 동료의 성격이 더 강했다.
다시 말해, 그에게는 권력자의 가장 큰 힘인 ‘세력’이 없었다.
“…….”
그러나 수많은 대륙인들 중, 복면인을 우습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자체가 세력이고 군단이었으니까.
일국의 왕마저, 그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럼프, 쓸데없는 짓을……,”
허나, 그런 복면인도 지금만큼은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평소 다른 칠악들에게 권능의 사용을 엄격히 금해왔다.
그것이 발산하는 특유의 향이 너무나 짙었으니까.
방금 럼프가 시전한 폭혈의 술(術)은, 죄악의 여러 권능들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능력이었다.
이제는 평소 경계하는 ‘그들’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다.
인간들 사이에서도, 소위 초인이라 불리는 이들 또한 지금의 힘을 느꼈을 테니까.
“…단숨에 끝낸다.”
드드드드드드!
때맞춰 사방을 둘러싼 암벽이 내려앉는다.
그와 동시에, 이제는 외팔의 사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전신으로 무시 못할 마나를 뿜어내면서.
무언의 시위라도 하듯, 그렇게 제 존재감을 과시했다.
“음…….”
그걸 누구보다 몸소 느끼고 있는 복면인이 가볍게 침음을 삼켰다.
치명상을 입은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니, 오히려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한 기운이 그에게서 느껴졌다.
이건 아마도…
“…진원의 마나를 끌어다 썼는가?”
상황이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한편으로는 내심 잘되었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근래에 얻은 정보는, 상대가 가진 기물을 강제로 빼앗아서라도 취해야 한다고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래서야 곤란했다.
이대로라면, 득보다는 실이 훨씬 많았다.
번-쩍!
상념을 털어낸 복면인이 곧장 움직였다.
사내, 아즈문 사트리노가 무어라 웅얼거리기 시작한 직후였다.
분명 이쪽을 봤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캐스팅을 멈추지 않았다.
남은 한 손으로 빠르게 수인까지 맺어가면서.
쐐애애애애액!
복면인의 애병인 쌍검이 섬전처럼 움직였다.
이전과 달리, 그 검 위로는 짙은 마기까지 서려 있었다.
서걱! 서걱! 서걱!
이에, 강철보다 단단한 암석들이 단숨에 잘려 나갔다.
촤아아아악!
그뿐만이 아니라, 순식간에 접근한 복면인은 아즈문 사트리노의 나머지 팔마저 망설임 없이 베어냈다.
“만물의 근원, 모든 생명의 어머니인 대지여…….”
그럼에도, 아즈문 사트리노는 멈추지 않았다.
손이 없으면 두 발로 진을 그리고.
입은, 쉼 없이 주문을 외어나갔다.
콰득! 콰드드드드득!
그러자 주변의 지형들이 움직이며 다시 둘을 떼어 냈다.
마치 자아라도 가진 양.
더 나아가, 스스로 살기마저 내뿜는 발아래의 대지.
“지로시!”
순식간에 암석들에 가려진 상대를 보며, 조급해진 복면인이 목청을 높였다.
자존심 따위를 내세울 때가 아니었으니까.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던 그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의 안을 택했다.
“…젠장. 이런 스토리를 원했던 건 아니었는데 말이지.”
말은 탐탁지 않은 목소리를 토해내면서도, 지로시의 몸은 이미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누군가를 보호하면서, 그 대단한 대공까지 막아내고 있는 상대였다.
하물며 두 팔이 없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적이지만, 이제는 순수하게 감탄마저 나올 정도였다.
허나, 그것도 여기까지였다.
“이만 가라고. 영감!”
곧 새까만 무언가가 허공을 갈랐다.
지로시의 제1 비기.
공간을 격하고 쏘아지는 무수한 대 낫의 참격.
통칭, 초승의 달무리.
서거거거거거걱!
대부분의 참격이, 빠르게 둘러쳐지는 암석을 뚫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휘리릭!
복면인의 손을 떠난 두 검 중 하나가, 암벽의 중심을 때리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쩌어어어억!
비록 아주 찰나였으나, 중심부 주변으로 커다란 틈이 생겼으니까.
지로시가 쏘아 보낸 참격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곧바로 암석들이 갈라진 틈을 메우기 직전.
푸-확!
그곳에서, 검붉은 핏물이 뿜어져 나왔다.
바로 그 순간.
휘청!
“……!”
‘됐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지로시의 신형이 크게 흔들렸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쿠구구구구구!
대기가 터져 나가고, 마나가 출렁인다.
새들이 놀라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나무는 당장이라도 뿌리 뽑힐 듯 요동쳤다.
이런 느낌의 전조현상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지진…!”
쩌저저저저저저적!
지면 아래, 지저 깊은 곳.
지상과는 전혀 다른 지하의 세계.
인간들조차도 알지 못하는, 이면의 영역.
“미친…!”
단말마의 욕지거리와 함께, 이윽고 대자연이 주변을 통째 집어삼켰다.
***
번쩍!
부지불식간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가장 먼저 시야로 들어오는 것은, 서서히 동이 터 가는 하늘이었다.
마지막 기억이 자정 무렵이었으니,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는 뜻이리라.
“정신이 드나?”
순간, 익숙한 얼굴이 내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학장 할아버지는!?”
어딘가 음울해 보이는 루나를 향해, 내가 빠르게 물었다.
“…….”
그런 그녀가, 말없이 손가락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곧 시선을 따라가던 내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부릅떠졌다.
그녀의 어깨 너머, 그리 멀지 않은 장소.
원래 공터였던 그곳은, 이제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땅이 말 그대로 ‘두 쪽’이 나 있었으니까.
그 아래는, 너무나도 새까매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극도로 기운에 민감해진 나는 안다.
“없어…….”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것.
저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나는커녕, 단 한 줌의 생기조차도.
철커덕.
“……!”
순간 아래에서 느껴지는 묘한 이물감이 내 상념을 일깨웠다.
언젠가부터 내 목에 걸려 있는 육각형의 무언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게 바로, 꿈속에서 언급된 아이리스의 조각이라는 사실을.
“단장님! 관계자들은 찾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 흔한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샅샅이 훑어라! 이번 일과 관련된 자들. 특히 주모자들은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반드시!”
“알겠습니다!”
어느새 일대에 도착한 왕실 기사들이 주변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비틀.
그 모습에 나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또 다른 인영이 내게로 다가섰다.
“어쩌려고?”
“…….”
“설마, 저 밑으로 몸이라도 던질 생각은 아니겠지?”
그 말대로, 저 아래는 그 끝이 어디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미지의 영역이다.
허나, 그렇다고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분은 이런 나 따위를 위해, 당신을 희생했으니까.
그 숭고한 생을 스스로 내던졌으니까.
주르륵.
터져 나온 핏물이 입술을 적셨다.
“하아…….”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실비아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타 쿤 이그니스.”
“…….”
“얘기는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이 일련의 사건들이 칠악. 더 나아가 제국과도 관련이 있다고 해.”
“…….”
“혼전 중에 제국의 고위층 중 하나가 목격되었다는 얘기가 있거든. 칠악이야 절반이 궤멸했다지만, 다른 쪽은 아니잖아?”
고구마 수백 개를 한 번에 삼킨 듯, 가슴이 답답했다.
칠악과 제국.
평소 관심조차 두지 않던 그들이 무슨 일을 꾸미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다.”
“응?”
의아한 표정을 짓는 실비아를 향해, 이내 내 잇새로 살기 가득한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이번 일과 관련된 존재들… 제국이든 뭐든, 모조리 내 손으로 죽여 버릴 거다. 반드시.”
***
그 시각, 왕궁은 왕궁대로 난리가 났다.
왕의 침실.
채 수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테라의 국왕이, 멍청한 표정으로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 넝마가 된 자신의 딸이.
일국의 공주가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서 있었던 탓이다.
“꼴이 그게 무엇이냐? 대체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지?”
“이 나라 한복판에서 아르바스의 경매가 벌어졌습니다.”
“그 얘기는…….”
이미 들은 내용인지, 왕의 얼굴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이미 알고 계셨군요.”
“네가 아는 사실을 나라고 모르겠느냐? 철딱서니 없이, 좋다고 그곳에 갈 때는 언제고…….”
“하면, 스왈로우 제국의 고위층이 이번 경매에 참가했다는 사실도 알고 계십니까?”
“그 얘긴… 꽤나 흥미가 동하는구나. 이번 경매에, 그들조차 관심을 가질 만한 보물이 있었던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들이 다름 아닌 칠악과 손을 잡았습니다.”
“…믿지 못할 말이로구나. 대륙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제국이, 만악의 근원이라 불리는 칠악과 손을 잡았다?”
평소의 흰 고양이 가면이 아닌, 맨 얼굴을 그대로 드러낸 레이지 공주가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딛었다.
“사실입니다. 하물며 그들의 목적은, 아즈문 사트리노 학장이 가진 어떤 물건이라고 했습니다. 이번 경매에 나올 예정이었던 건, 그 물건의 일부였구요.”
“하면 네 말은… 제국의 누군가가, 칠악과 손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의 물건을 강제로 취하려 했다…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게냐?”
“네. 드러난 사실이 그렇고, 그들에게 또 어떤 꿍꿍이가 있을지는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이 나라에서, 저희도 알지 못하는 큰일이 벌어지고 있음은 분명하겠죠.”
“음…….”
테라의 국왕, 우르고스 칸 테레이라가 깊은 침음을 삼켰다.
“지금의 나로서는, 도무지 네 말이 믿기지가 않는구나.”
“아버지! 저를 믿지 못하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또 어디서 사고를 치고 와서 이러는지 누가 알겠느냐?”
“이미 왕국의 일개 기사단이 몰살을 당했습니다.”
“…뭐라?”
이어지는 공주의 말에, 우르고스 국왕의 눈빛이 급변했다.
“사실이냐?”
“제가 어찌 아버지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아즈문 사트리노를 불러와라. 지금 당장!”
레이지 공주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아마도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건 또 무슨 뜻이냐?”
“칠악과의 전투로… 아즈문 사트리노 학장 또한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이니까요.”
“……!”
이번에야말로 우르고스 국왕의 얼굴 위로 경악이 어렸다.
“폐하!”
때마침, 문 앞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가?”
“지금 막 왕궁에 사절단이 도착했습니다.”
“사절단이라니? 대체 이 이른 아침부터 예고도 없이 어느 누가 왔다는 말이냐?”
“스왈로우 제국에서 온 사절단입니다, 폐하!”
“……!”
그 말과 동시에, 두 부녀의 시선이 서로를 향했다.
“그들입니다!”
공주의 말에, 우르고스 왕이 기어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만약 네 말이 사실이라면… 감히 내 것을 해한 그들이야말로, 가만히 둬서는 안 될 ‘적’들이겠구나.”
“아, 아버지…?”
대국을 상대로, 서슴지 않고 적이라 칭하는 그의 모습에, 공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곧이어…
“대전으로 들라 하라!”
이윽고 우르고스 국왕의 목소리가, 주변으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