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안 할란다. 그깟 국민
왕궁의 대전.
이미 소식을 듣고 달려온 수많은 귀족들이 자리해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가면을 쓴 레이지 공주가 왕좌를 향해 속삭였다.
“사절단이라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요?”
“네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구질구질하게 변명을 늘어놓기보다는 정면승부를 택하겠다는 뜻이겠지.”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그것이 개인과 개인. 더 나아가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니까.”
멈칫.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추는 레이지 공주를 보며, 우르고스 국왕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 세상은 철저히 힘의 논리다.”
“약하면 강자에게 잡아먹힌다… 그런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건가요?”
“그 말대로.”
“인정하기 싫네요. 우리는 분명 짐승이 아닌 인간일진대, 고작 그런 이유로…….”
우르고스 국왕이 고개를 저었다.
“고작 그런 이유가 아니다. 생명체로서의 당연한 본능이지. 더욱이 인간은 짐승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존재다.”
“네?”
“가령… 짐승이 먹잇감을 사냥할 때, 특별한 이유를 가지고 그 목덜미를 물어뜯더냐?”
“아직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배가 고프니까 먹는 거다. 매우 간단한 이치지. 소위 생명체의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인 식욕(食慾).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 아니더냐? 단지 손수 키워서 잡아먹는다는 그 방식만 다를 뿐… 아니지. 사냥으로 삶을 연명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으니 그도 아니겠군.”
“…….”
“알겠느냐? 누구보다 본능에 충실한 것이 인간이라는 짐승이다. 배가 고프면 먹고, 욕망을 위해 훔치고, 빼앗고, 범하고, 약탈하지. 칠죄종이라는 이름이 왜 등장하게 되었는지, 너만큼은 그 이유를 알고 있어야 한다.”
이윽고 우르고스 국왕이 말을 마치자, 레이지 공주가 주먹을 꽈악 말아 쥐었다.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만큼은 분명히 알겠어요.”
“……?”
“목소리를 높이고 싶으면, 힘부터 키워야 한다는 거요.”
“…그래.”
“하면…….”
잠시 뜸을 들이던 레이지 공주가 곧 의외의 말들을 꺼냈다.
“제가 아버님께, 한 가지 조언을 드려도 될까요?”
“조언?”
안쓰러운 마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방을 둘러싼 암벽에서 벗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지 공주는 두 귀로 똑똑히 보고받았다.
마치 마물과도 같은 모습으로 변한 누군가가, 그 무시무시한 칠악과 박빙의 승부를 펼쳤노라고.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고작 그녀 또래의 사내아이가.
루나는 거기에 더해, 한 가지 설명을 덧붙였다.
아마도 그 아이는, 아직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희귀한 분야를 주력으로 삼고 있는 듯하다고.
“왕국의 미래를 위해, 사람을 한 명 추천 드리고 싶어서요.”
“네가 선택한 인재라… 썩 흥미가 동하는구나.”
“일이 끝나면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레이지 공주가 말을 마치자, 때마침 대전 바깥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한데, 그 분위기가 사뭇 심상치 않았다.
채채채채챙!
“일국의 왕이 기거하는 대전이오. 제아무리 제국의 사절단이라도, 무장을 해제하지 않는 한 입장은 불가하오!”
“감히! 우리가 누구인 줄 알고 검을 뽑는 것이냐?”
“그대야말로! 이건 명백한 국가적 결례요. 상호 간에 하등 도움도 되지 않는!”
“네까짓 게 뭐라고 그런 걸 판단해? 썩 저리 비키지 못해!?”
재차 들려오는 고성에 인상을 굳힌 우르고스 국왕이 곧 목청을 높였다.
“되었다. 들라 하라.”
“……!”
잠시 소란이 이는가 싶더니, 이내 일단의 무리가 대전 내부로 들어섰다.
수십의 왕궁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자칭 제국의 사절단이.
“테라의 왕이시여.”
이윽고 선두의 중년 사내를 발견한 우르고스 국왕의 눈에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그대는… 엑시드 백작이 아니던가?”
“오랜만입니다. 재작년 국가 원수 대회의 이후로 처음 뵙는군요.”
“그런 인사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황궁의 군수 물자 담당관인 그대가 이곳까진 어인 일이지? 하물며 예고도 없이.”
“분명 제 직책은 그것이 맞습니다만… 저는 지금 황궁의 물자 담당관이 아니라, 대황제 폐하의 대리인 자격으로 이곳에 온 것입니다.”
“뭐라?”
엑시드 백작이 보란 듯, 둘둘 말린 두루마리를 들어 보였다.
“이제 말씀해 보시지요, 전하. 그런 제가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황제 폐하의 칙서라… 사실인가?”
“직접 보시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요. 자세한 내용은 여기 모두 들어 있으니까요.”
“…그대가 고해보라. 그 입으로 직접.”
촤르륵!
우르고스 국왕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엑시드 백작이 두루마리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전하의 뜻이 그러시다면.”
“고하라.”
“테라의 국왕, 우르고스 칸 테레이라는 들으라. 그대의 일개 신하가 감히 내 것을 탐했다. 때문에, 나는 내 대리인들을 보내 그 죄를 묻고자 한다.”
“……!”
“그 물건은 자칫 세상을 멸망시킬 수도 있는 기물. 자세한 연유야 어찌 되었든, 항시 대륙의 평화를 걱정하는 나로서는 그 의중을 심히 의심치 않을 수 없다.”
놀라 눈을 크게 뜨는 다른 귀족들과 달리, 우르고스 국왕이 침착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 물건이라는 게 뭔가?”
“핵심적인 내용은 모두 읽었습니다. 이곳은 듣는 귀가 많으니, 자세한 내용은 전하께서 직접 읽어보면 알게 되시겠지요. 다만… 한 가지 명만큼은 분명히 하셨습니다.”
“……?”
“이번 일과 관련된 자들은 ‘제국법’에 의거하여 엄벌할 것이니, 모두 압송하여 황궁으로 데리고 오라는 명이십니다.”
“……!”
엄연히 타국에서 벌어진 일임에도, 자국의 법에 따라 벌하겠다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이건 설령 대역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타국을 전혀 배려치 않는 처사였다.
“보자보자 하니까 이 작자가…!”
“그리고 하나 더.”
“……!”
“응당 아래 신하들을 관리해야 할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을 소홀히 한 죄. 전하께서는 이번 일에 적극 협조해주셔야 합니다.”
“이놈!”
성질 급한 호위 기사가 재차 나서려는 것을, 우르고스 국왕이 손을 들어 막았다.
“그것도 황제의 뜻인가?”
“예. 더불어, 한 가지 경고도 덧붙이셨습니다.”
“…또 뭔가?”
“만약 말을 들어먹지 않는 개새끼가 있다면…….”
“……!”
“…그분의 손으로 친히, 몽둥이를 드실 거라고요.”
“…핫!”
“아무래도 황제 폐하께서는 이 나라에, 대륙의 안녕을 위협하는 모종의 불순분자가 있노라 확신하시는 듯하더군요.”
“하하하하하하하!”
기어이 엑시드 백작이 마지막 말을 마쳤다.
“저걸 그냥 두고 보실 건 아니시죠?”
“건방진 새끼.”
레이지 공주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우르고스 국왕이 비죽이 미소 지었다.
“설령 철혈의 군주라 불리는 레오나르도 공작이 직접 오더라도, 내 앞에서 이토록 오만을 떨 수는 없건만.”
“그래서 모시고 왔습니다.”
“뭐라?”
“이리 나오실 것 같아, ‘급’이라는 것을 맞춰주라고 하셨거든요.”
“……!”
이번만큼은 우르고스 국왕도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들어오시지요.”
그 말대로, 곧 두 개의 인영이 대전 내부로 들어섰으니까.
한쪽은, 우르고스 국왕의 눈에도 익숙한 노년의 사내였으며.
“설마…….”
그보다 더 경악스러운 건 그의 곁에 자리한, 금발을 허리까지 기른 무척이나 젊은 사내의 정체였다.
“레오나르도 공작… 그리고… 황자?”
***
왕도로 향하는 길.
수백의 인영들이 내 뒤를 따르고 있었다.
한데, 그 지옥에서 도망에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어떤 소문이라도 퍼진 것일까?
힐끗, 힐끗.
연이어 뒤통수로 꽂혀 드는 수백 쌍의 시선들이 느껴졌다.
허나, 이내 나는 상관치 않기로 했다.
지금은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니까.
“살아 계실 겁니다.”
“……?”
“분노를 가라앉히세요, 세타 쿤 이그니스. 왕궁은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닙니다.”
“무슨 뜻이죠?”
“배후 세력을 밝히고, 더 나아가 복수까지 생각하고 계신 거겠죠?”
“…….”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나를 향해 루나가 계속해서 말했다.
“왜 그 대단하신 대지의 마법사께서 수십 년간 참고만 계셨을까요? 사실관계가 어떻든, 틈이 보이면 누구든 물어뜯길 수 있는 곳이 왕궁입니다. 그것이 정치고요.”
나도 안다.
그래서 더 이상 침울해 하지 않기로 했던 거고.
당장 나부터 정신을 바짝 차려야, 뭐라도 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근데, 내가 그렇게 울상이었나?’
한차례 얼굴을 쓰다듬은 내가 이내 옆을 돌아봤다.
“반말이든 존대든 하나만 해줄래요? 나이도 나보다 많은데, 그냥 아예 말을 놓던가요.”
“이게 편하니까요.”
“자기 화나면 또 반말할 거면서…….”
“크흠.”
불편한 헛기침을 토해내는 루나를 보고 있자니, 절로 피식하고 실소가 새어 나왔다.
가장 빨리 친해지는 길은 몸 정(?)이라더니, 그래도 진흙탕을 몇 번이나 함께 구르고 나니, 없던 정이라도 생긴 것일까?
“언제적 수작질인지, 수준 떨어져서 못 봐주겠네. 정말.”
다만, 이 계집애만큼은 예외였다.
“뭔 수작질?”
“처음에는 반말로 서서히 마음을 열어갈 생각이겠지? 그러다가 선물 따위로 환심을 사고. 우연을 가장하며 근처에서 불쑥불쑥 나타나기도 하고. 하여튼 사내놈들 하는 짓은 다 똑같다니까? 소름 끼쳐서 정말.”
“전혀 아닌데?”
“흥.”
한동안 잠잠하더니, 얜 갑자기 왜 또 지랄병이 도졌을까?
“환장하겠네.”
“…혹시나 해서 해주는 말인데.”
“어?”
쿵, 쿵.
발바닥을 들어, 몇 차롄가 바닥을 찧은 실비아가 말을 잇는다.
“옛 설화에 따르면 이 아래. 지저 깊은 곳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고 하더라?”
“그런데?”
“그런데는 무슨. 시전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7클래스 대마법사잖아. 하물며, 대지의 마법사가 대지 한복판에서 죽는 게 말이 돼?”
“…너, 혹시…….”
내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실비아가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유리나 벤 아리에나, 이 멀대 같은 계집애는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이야아아아아아아!”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는 격언이 무섭게, 전방에서 유리나가 뛰쳐 왔다.
“괜찮냐아아아아!?”
“하? 지금 시간이 몇 시야? 어디 처박혀서 거나하게 수면이라도 취하고 오셨나 봐?”
“후욱, 후욱. 네가 다 큰 사내 업쳐 들고 도시까지 갔다 와 봐라! 나 진짜 허리 부러지는 줄 알았네.”
유리나의 대답에, 루나가 중간으로 끼어들었다.
“그는 괜찮나요?”
“응급조치는 잘 마무리돼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곤 하는데…….”
그러면서, 힐끗 내 쪽을 곁눈질한 유리나가 말을 잇는다.
“이쪽은 그게 아니네?”
다시 말하지만, 내 옷은 반쯤 넝마가 된 상태였다.
갑작스레 체구가 수 배나 커졌다가 돌아온 관계로.
“…….”
그 뜨거운 시선을 애써 흘리곤 옷매무새를 여민 내가, 조금 더 걸음을 빨리했다.
“서두르자. 지금은 일분일초가 급하니까.”
***
그건, 문자 그대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예의 새롭게 나타난 젊은 사내가, 고민조차 하지 않고 왕단(王單) 위로 오른 것은.
파르르.
“표정이 왜 그러시지요? 국왕 전하. 내가 오르지 못할 곳이라도 오른 것처럼.”
이 나라에서 왕좌는 오로지 한 사람의 것이다.
분명한 치욕을 당하고 있음에도, 우르고스 국왕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칼을 쥔 것은 저쪽이었고.
그는 수백만 국민을 책임지는, 일국의 왕이었으니까.
무례에 대한 죄는 차후에 물어도 늦지 않았다.
다만,
“이러고도… 내가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하나?”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전하의 신하들은 그게 아니라는 걸 잘 알겠습니다.”
“뭐라…?”
순간 시선을 돌리던 우르고스 국왕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어느새 단상 아래의 귀족들 중 태반이 이쪽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으니까.
더욱이, 걔 중에는 이 나라의 최고위층이라 불리는 몇 없는 후작들도 모조리 포함되어 있었다.
“아이작 후작, 너마저…?”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건 당연한 도리이옵니다, 전하.”
아이작 후작이 몸을 부복한 채 말했다.
그야말로 왕국의 실세들은 모두 제국 편에 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저 갑작스러운 예가 누구를 향하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으니까.
그나마 이 자리에 세 공작이 없다는 사실이 유일한 위안거리일까?
우르고스 국왕은 권력의 견제를 위해, 세가 강한 공작가의 가주들을 본가에 머무르게 했다.
그들이 수도에 거주하면서 허튼 마음이라도 품는다면, 왕국에 크나큰 위기가 될 수 있었으니까.
한데…
“자식으로서의 도리조차 져버리면서, 어찌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울 수 있겠습니까? 귀족법 위에 왕법이 있듯, 왕법 위에 황법이 있습니다, 폐하.”
결과론적으로, 그 결정은 패착이었다.
저들이 하는 말을 보라.
실로 걸작이 아닌가.
평소였다면 감히 숨조차 제대로 못 쉬던 것들이, 제국을 등에 업고 기세등등 날뛰고 있었다.
정녕 저들이 자신의 신하가 맞던가?
저들이 이 나라의 귀족이란 말인가?
“이놈들…….”
우르고스 국왕의 어깨를 ‘툭’ 하고 두드린 젊은 사내가, 이내 왕단 아래로 내려갔다.
“인사는 이만하면 됐겠지?”
“인사…?”
“아, 오해는 마세요. 설마하니 내가 전쟁이라도 하자고 이곳에 찾아왔겠습니까? 그저 스스로의 위치를 자각시켜 주고 싶었을 뿐이지.”
부르르르.
분노로 몸을 떠는 우르고스 국왕을 보며, 사내가 눈을 빛냈다.
“딱 하나만 묻겠습니다.”
“…….”
“그대의 신하. 대지의 마법사, 아즈문 사트리노는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모른다.”
“흠? 말이 다른데요? 엑시드 백작 말로는, 이 나라에서 빼돌렸다고 하던데…….”
기다렸다는 듯, 엑시드 백작이 중간으로 끼어들었다.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전하. 물건은 칠악과 아즈문 사트리노 중 한쪽이 반드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시다네?”
우르고스 국왕이 재차 고개를 저었다.
“보고받지 못했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
“정 뜻이 그러시다면야… 공주는 이리 오라.”
“……!”
이어지는 사내의 말에, ‘흡’ 하고 눈을 치켜뜬 우르고스 국왕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쾅!
“뭐 하자는 수작이냐!?”
“내 것을 내가 탐하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레이지 공주가 다급히 그의 앞을 막아섰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버님!”
“그래. 그렇게 나오셔야지. 그래도 자식은 부모보다 현명하군.”
눈이 좌우로 길게 찢어져, 마치 뱀을 연상케 하는 실눈의 사내가 그제야 제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러면서 천천히 공주를 향해 다가선다.
그리고 보란 듯, 우르고스 국왕의 코앞에서 두 손을 들어 그녀의 신체에 손을 올린다.
허벅지를 타고, 굴곡진 둔부를 지나.
서서히 위로.
우르고스 국왕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수치심으로 붉게 물든 레이지 공주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당사자가 모르신다잖아.”
“……!”
‘커흠’거리며 시선을 피하기 바쁘던 귀족들이 일제히 한곳을 바라봤다.
대전의 입구.
드물게 성난 표정의 루나 옆으로, 웬 사내아이가 서 있었다.
“엑시드 백작님이라고 하셨나? 보고를 하실 거면 제대로 하실 것이지. 중간에 꽁지가 빠져라 내빼셨으니, 전후 상황을 알 턱이 있나요?”
“뭐, 뭐, 뭐라?”
“그리고 그쪽. 제법 높은 사람 같은데, 소위 배우셨다는 분이 추잡스럽게 그게 뭐 하는 짓입니까?”
“놈! 감히 저분이 누구신 줄 알고!”
“아, 나는 못 배워먹어서 그런 거 잘 모르겠고. 결론은 테라는 자식이고 제국은 부모니까, 이 나라 사람들은 다 저쪽을 섬겨야 한다는 말 아닙니까?”
그제야 엑시드 백작이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잘 아는구나.”
“내가 아는 부모랑은 개념이 많이 다르네?”
“…뭐?”
“나는 그런 부모 필요 없다고. 그러니까 할 말은 해야겠어.”
“이노오옴!”
재차 발작하려는 엑시드 백작을 향해, 이윽고 낭랑하고도 또렷한 마지막 목소리가 틀어박혔다.
“응. 무슨 말 할지 아니까 더 이상 입 열지 말아요. 또 자식이 어떻다느니 할 생각이겠죠? 염려 마요. 난 이제부터 이 나라 국민 안 할 거니까.”